진보, 비인간적인 '우상'인 측면에서 
 병장 이건룡 03-15 13:35 | HIT : 202 



 어제부터 한번 푸슈킨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에 대한 공유/소개 겸 '진보'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의 <까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대목을 옮겨보려고 벼르다가 글 날려 버리고, 이참에 한번 다시 베낀다/쓴다. '독서사랑'에서 "양철목장의 한숨"이라는 진지한 글에 빠져 잠시 헛짓하다가 때려치우고 다시 쓴다.  
 그 외,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에 대한 정보는 사이버지식방경유해서 알라딘에서 그 책을 볼 수 없었는데 좀 더 찾아 봐야겠다. 예전에 한권으로 된 푸슈킨 전집을 본적 있는데 그 정도 불륨감 있는 책에서는 혹시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푸슈킨으로 표기는 통설적?사용하는 표기를 몰라서이다. 푸쉬킨? 뿌쉬킨인지?)

 진보, 비인간적인 '우상'인 측면에서 

"······즉 '모차르트가 계속 살아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다면/무엇이 좋은가? /음악이 더 좋아질 것인가?' 모차르트(그외 누구든)의 살 권리는 예술의 진보에 의해 그러한 것처럼 '선'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음악의 성직자요 복사'는 이 소송의 재판관으로 불려진다. 그들이 모차르트의 삶이 예술사상을 위해 아무런 선도 아니라고 결정한다면 그들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권리를 가질 것이다. 
 그래서 추상적인 도그마는 그 제 1전제가 고귀한 것조차도, 살아있는 공동치는 인간의 삶 이상으로 평가되고 그 삶을 단순히 그 자체의 더 높은 목표를 위한 도구로 간주한다면 냉정하고 무자비해지며 일종의 비인간적 '우상'과 살인 도구로 변한다." <문화기호학>(150쪽)  

 본문 중 유리로트만이 차용한 구코프스키의 지적에 따르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이안은 책 명이다) 갈등이 위대한 재능에 대한 재능 없는 사람의 질투에 있지 않는다. 보다 넓게 '인간의 사회-역사적 결정론의 초상'으로서 '과거로 퇴보하는 형태에 대하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예술형식들의 승리 속에서 푸슈킨의 연극의 의미'에서 살리에리를 18세기 음악가로(약간의 오역이 있는 것 같은데 고전주의 음악가로서 새롭게 표기하는 걸로 보아 보수적인입장과 근접함을 생략한 것 같다, 아니면 흔히 고전주의란 전세기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을 함축하고 있나?), 모차르트를 낭만주의 음악가로 기술한다. 

 유리로트만은 어느 정도는 존중하고 나머지 지적들을 전복하며 나아간다. 푸슈킨에서의 살리에르는 살인을 한다(이 책의 판본에서는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살인한다는 결말을 찾아볼 수 있다)."푸슈킨은 질투의 심리학을 그리고, 비상한 전문지식으로 살인의 탄생의 역학을 보여준다. 고전주의가 역사적 정점에서 살인을 지향하는 심리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고 믿는 것은 그러한 생각들을 푸슈킨에게 돌리는 것만큼 기상천외하다."   

 유리로트만은 위에 언급한 '사회-역사적 결정론의 초상'을 고전주의적 음악가가 아닌 '인간의 내용으로부터 분리된 사고의 궤변의 사슬', 숙명적인 범죄의 길을 걷는 '살리에르'에서 찾아 볼 수 있다(주 인용되는 부분은 "플롯-유전자로서의 상징" 장이다. 상징에 대해 전유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을지도...) 

"·····소리를 죽이고 음악을 해부하면서 
 마치 그것이 시체였던 것처럼, 나는 체크했다. 
 대수에 의해 나의 화성을.

 ······드디어 
 이론의 정복을 성취하고,
 나는 감히 창조의 광적인 환희에 몸을 내맡겼다." 

 유리로트만이 기술한 성격을 축약하자면 살리에르는 타고난 음악가이다('나는 예술의 사랑으로 태어 났다'). "살리에리는 수습기간과 의무, 자기 부정 뿐 아니라 훌륭한 인물을 계승하는 그 특별한 종류의 은총을 포함한 예술에 중세적, 성직자적 태도에 집착했다. 그리고 은총이 높은 곳에서부터 성직자에게 내려오듯이 예술은 위로부터 예술가에게 온다. ···'예술에는 영광이 있고 예술가에는 없다. 즉 예술가는 예술의 약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의 기만적인 궤변( "인간성 보다 인간의 예술을 더 높게 평가함으로써 한때 인간과 그의 삶은 이러한 맹목적 숭배대상에 희생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했던 살리에르·····")은 '차가워지고 거짓 진리의 갑옷을 입고 돌'처럼 딱딱해져 실제로 죽는다. 반면 '돌'로써의 그는 인간에 맞서 일어서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인생을 위협한다.   

 이하 '돌'은 "축제의 상징과 인간존재와 돌 사이의 투쟁의 모티브는 운명적인 살인의 순간으로 이끈다." 요약하자면 진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살리에르의 예술의 진보에 대한 고귀한 사명감은 '돌'처럼 고착화된다. 위의 인용된 내용을 재 강조하자면 "그 삶을 단순히 그 자체의 더 높은 목표를 위한 도구로 간주한다면 냉정하고 무자비해지며 일종의 비인간적 '우상'과 살인 도구로 변한다." 

 푸슈킨에게 비인간적인 '진보'에 대한 성찰 중 사회-역사 결정론적 성찰의 초상으로 '살리에르'가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대심문관'이 있다. 그전에 우선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중 진보의 비합리적인 역동성에 글이 있어 더불어 옮긴다. 이 글 이후에 타르코프스키의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을 덫 붙이다. 
( 그러니깐 푸슈킨-도스토예프스키-타르코프스키를 경유해서 진보의 비인간적인 성질을 되돌아 본다. 물론 이질적인 하이데거가 개입하는 것......단지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    

"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되어가는 기술문명의 근저에는 일종의 광기, 즉 지배에 대한 의지라는 마력이 지배한다고 보았다. 과거의 인간들이 절대자인 신의 지배하에 있었다면 인간은 이제 광기어린 맹목적 의지의 지배 아래 있다. 이 시대는 가장 합리적인 시대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가장 비합리적인 시대인 것이다." 


"우리 시대는 한 전체적인 역사적 순환의 마지막 정점인 듯이 보인다. 사회를 좀더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대심문관', 지도자, '뛰어난 인물' 들이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들은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새로운 이념적 사회적 사상을 주입하고, 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삶의 구조를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대심문관'은 국역본에서 '대종교 재판관'이라고 옮겨져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가리킨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 '대심문관들'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이미 경고를 한 바 있다.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복지를 들먹이며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결과가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무참하게 침해하는지, 그리고 '역사적 필연'에 뿌리를 둔 그 '객관적' '과학적' 힘으로써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민중의 삶의 기본현실을 왜곡하는지, 우리 자신이 보아왔던 것이다." 

"문명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구원과 인간의 개선을 위하여 이데올로그와 정치가들의 마음속에서 구상되어, 민중에게 제시된 '올바른' 길 ― 매번 좀더 나은 ― 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재편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그때마다 '소수'는 자기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취소하고, 제안된 행동지침에 자신들의 행동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래와 인류를 구원할 '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활동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개인은 자신의 본질과 개성과 독특성을 망각해버렸다. 일반적인 것 속에 갇혀버린 채 그는 자기자신의 정신적 본질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갈수록 화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이후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에선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참 뜻을 되새기며 '다수의 이익에 골몰하는'무리에 대한 정화의 시도가 진면목이다.하지만 본문에서 중요한건 제목에 맞추어 "진보의 상징 중 -비인간적인 '우상'/살인도구"로써, 텍스트를 되집어 본다는 실험적인 시도에 불과하다(짤방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후 가장 중요한 대목들은 생략하기로 한다. 

 강유원씨가 <책의 세계>에서 주지하듯 책을 단지 고착화된 텍스트들의 집결체로, 단순한 매개로, 강압적으로, 텍스트의 죽어있는 듯한, 마치 기호들의 시체를 마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유리로트만의 견해를 빌리면 책, 텍스트는 읽었다 해서 끝나지 않는 미결정성을 가지고 있고 그 미결정성은 새로운 문맥들과 접촉에 의해 영향 받을 대 활력의 저장소를 제공한다. 그는 책의 페허 앞에서 책에 대해 회고하듯이 말한다. 

"오늘날 <햄릿>은 꼭 세익스피어의 연극만이 아니라 그것에 재한 모든 해석들의 기억이며 또한 텍스트 밖에서 발생하지만 세익스피어의 텍스트가 그것과 더불어 연상을 불러 일으킹 수 있는 역사적 사건 모두의 기억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익스피어와 그의 관객들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망각했을지도 있지만 우리가 그들의 시대 이래 배워온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텍스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문화기호학>(41쪽)  


 상병 진규언 
 읽고나서도..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읽어보았습니다.(머쓱..) 건룡님의 치열함과 열정이 담뿍 묻어납니다. 03-15   

 병장 임정우 
 아까부터 위와 같은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는 부분이었으면 더욱 좋았을뻔 했어요. 03-15   

 병장 이건룡 
 읽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저도 글을 쓰고 나서 제목 고치길을 몇차례 반복했습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제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패치워크 식 마냥 알록달록한 글 덕분에 근심만 늘어 집중해서 짬나는 시간에 읽을 수가 없더군요. 이 귀중한 시간에.. 아직도 글쓰기가 혼자 쓰고 읽는 수준입니다.,, 03-15   

 병장 이건룡 
 키워드로 생각하는 단어는 '사회-역사 결정론적 초상'입니다. 사회/예술의 진보에 대한 열정을 대변하는 '대심문관'이나 '살리에르'는 인류 다수/ 예술을 위해 헌신하지만 그들은 무신론자나 살인자로써의 숙명의 길을 걷는 문학의 상징들이죠. 03-15   

 병장 이승일 
 아주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아랫부분에 써 주신 톨스토이의 이야기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살리에르의 경우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 삶을 단순히 그 자체의 더 높은 목표를 위한 도구로 간주한다면 냉정하고 무자비해지며 일종의 비인간적 '우상'과 살인 도구로 변한다] 

 특히 이 말에 대해서요. 살리에르가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은 결코 그가 '더 높은 목표 를 위해 삶을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에 가까울 것입니다. 만약 살리에르가 음악적 천재성과 예술성을 가장 숭고한 가치로서 생각했다면, 모짜르트를 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최고의 예술가가 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삶이 최고의 삶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술성이란, 어떤 의미에서 단지 자신의 삶을 최고로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짜르트의 생존이 최고의 예술에의 달성을 보장해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해했던 것입니다.(물론 소설에서요.) 
 때문에 살리에르의 범죄가 '삶을 그보다 더 높은 것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 태도에서 기인했다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싶군요. 저는 얼마 전 심승보씨가 빌려주신 <이휘소 평전> 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휘소의 천재적 재능을 귀중하게 여긴 미국의 교수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교수를 찾아서 떠나도록 이휘소를 적극 지지해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당장의 이익과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천재성에 대한 존중과 물리학의 발전을 위해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버트런트 러셀 역시 비슷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제자 비트겐슈타인의 오만한 태도로 인해 그와 심하게 다툰 후, 먼저 그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며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 오직 논리학의 발전을 위해 그와 화해하려한다." 

 이상의 예들이 보여주는 바는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삶 그 자체보다 더 높은 목표에 대한 추구" 는 무자비함과 비인간적인 결말을 초래하기 보다는 오히려 종종 가장 자비롭고 인간적인 조화를 빚어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삶' 이란 자기 자신의 삶을 의미합니다. 만약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삶이라면, 그 자체로서 '더 높은 목표'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살리에르의 경우는 오히려 정 반대로 자기 자신의 '삶'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03-15 * 

 병장 이희웅 
 참 어려운 내용이네요.... 
 아이고 머리야~~(땀_) 03-16   

 병장 이건룡 
 희웅/ 평소 텍스트나 책을 읽다 덮고 싶을때가 많았습니다... 03-16   

 병장 이건룡 
 승일/ 마지막 문단의 그문제 때문에 이리저리 제목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좀더 다른 입장에서 보자면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이후 글은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예술과 학문등등은 그리고 삶은 숭고한 사명에 일부 '소수'에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소홀히 하는 점은 그점입니다. 어제 잠깐 TV에서 본 ART채널 러시아 바이올린의 대가 레오니드 쿤트(?)의 인터뷰에서 감명깊은 내용들을 보자면 러시아는 어느나라보다 클래식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클래식을 (예술을) 일부 편향된 계급에 대한 고상한 취향이 아닌 대중적인 문화 코드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에 대한 부분에서 그 의의는 자명합니다(예술과 대중/인류와의 관계를 되집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 진정한 예술에 대한 추구는 대중/인류와 함께하지 소수 고상한(선택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삶은 자신의 '삶'으로서 한정되게 자리매김을 할 수 없는 단어라 생각합니다. 타르타코프스키가 성서의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의 참뜻을 생각하라는 의미는 단지 조화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삶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인식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슈킨의 살리에르는 삶과 예술을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각 누락한 대목중에 있을 지도 모르지요. 살리에르의 금욕주의적인 태도는 '모차르트를 침입자'로 자신을 '방어적 희생자'로의 궤변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바흐친이 24살때 발표한 <예술과 책임> 중을 참고하면 이 글의 불확실한 목표에 어느정도 다가갈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예술과 삶에 대해 논하기에는 제 자신이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무 이상하게 적었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하 한대목으로 끝 마치겠습니다. 

" 인간 문화의 세 영역인 학문과 예술과 삶은 그것들을 자신의 통일성으로 결합하는 개성 속에서만 통일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기계적이고 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은 실제로 대단히 자주 일어난다. 예술가와 인간은 순진하게 또 대개는 기계적으로 하나의 개성 속에서 결합된다... 예술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너무나 감상적이고, 당연히 그런 예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삶에 대해 눈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 우리에게 예술이 무슨 소용이야?' 하고 삶은 말한다. '그건 예술이란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건 일상사의 산문이라구.'" 03-16   

 병장 이승일 
 아마도 건룡씨와 제가 생각하고 있던 포인트가 서로 달랐던 것 같군요. 
 건룡씨는 삶 vs 예술의 문제를 '일상적이고 대중적으로 공유된 예술' vs '엘리트주의적인 예술' 의 대립구도로 보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관점은 최소한 살리에르와 모짜르트의 경우에는 그렇게 적절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건룡씨가 이런 구도 속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계시다면 저 역시 그러한 구도를 받아드리겠습니다. 

 허나 설사 그러한 구도에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예술의 대중성과 귀족성에 대해서 건룡씨가 제시하신 의견은 단지 일면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 역시 예술의 결과물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발전이 정말로 대중들만에 의해 최상의 수준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건룡씨가 예로 든 '클래식을 즐기는 러시아 민중' 에게 그 음악을 만들어준 것은 러시아민중 자신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문화적 귀족주의가 없었다면 그 음악들은 애초에 탄생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소비해가면서까지'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다면, 러시아 민중들은 오늘날과 같은 문화적 수혜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음악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이나 과학의 분야를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수많은 대중들은 훌륭한 문학작품을 손쉽게 읽고, 자연과학의 혜택을 일상 곳곳에서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작품과 자연과학의 발전은 결코 대중에 의해 이끌어져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소수의 걸출한 사람들에 의해 이끌어져왔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경이를 표하고 찬양해 마지 않는 수많은 문학작품들과 자연과학의 성과들 중 과연 얼만큼이 '일상사의 산문' 에 속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모든 개인이 단지 일상 속에 파뭍혀 삶을 즐기기만 했다면, 과연 인류의 문화가 현재와 같을 수 있었을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03-16 * 

 병장 이건룡 
 나름 몇가지 생각을 길게 적었는데 제자신이 납득할만한 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과감히 적어 봅니다. 여기에서의 '소수'는 저나 승일님과 같이 '혼자'로써 마주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존재입니다. 그들의 은하수의 별처럼 세아릴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세아릴 수 없는 별앞에 우리는 혼자로써 그들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은 하나의 가능성을 알려줍니다. 삶, 이웃 혹은 곁에 있는 타인과 함께 그 삶의 전유물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대심문관'처럼 삶을 몰각하는 자들에 대한 미시적인 과학의 한사례에 대한 이해입니다. 저 혼자(추상적인 개념으로) 인류전반/미래를 논한다는 것 사실 무리이자 잘못입니다. 제글처럼 대부분 추상성에 의지해서 삐그덕거리는 얄팍한 글만 남길 뿐이라고, 그리고 부끄러움에 자학하고 싶습니다. 

 흥분해서 적었는데 '너 자신을 알라'라는 정언 명력은 너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발판아래 서 있는,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서 전유(傳諭)함에 대한 경고라 생각합니다.뭐 당연한 말입니다. 03-16   

 병장 이승일 
 비록 표현상의 문제 때문에 서로 매끄럽게 의사소통하진 못한 것 같지만, 건룡씨안에 깊고 의미있는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치게 광번위한 주제들을 하나로 축소해서 이야기한 것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강조의 포인트가 다를 뿐, 건룡씨의 의견에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03-17 * 

 병장 이건룡 
 지금 보니 억측에 기대어 글을 쓴 흔적이 역력하네요. 너무 자기-기술? 적이구요. 더구나 모델링하기에 제가 너무 독선적이기 까지! 깊은 관심이 감사드립니다. 전유 한자가 틀렸습니다. 全有입니다. 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