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은 소위 ‘슬로베니아 학파’라고 불리는 일군의 정신분석연구자 그룹의 대표격인 학자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라캉 연구자이기도 하며, 논란의 중심에 휩싸이곤 하는 텍스트를 쏟아내는 대중문화비평가이며, 막국수주의적 지평 위에 선 ㅈ파 철학자군에 속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에 대해서 "그는 무슨무슨 주의자야", "그는 확실히 어떤 사람이야"라며 ‘어떤 것’으로써 규정짓는 것은 거의 무의미합니다. 그는 정신분석학 뿐만 아니라, 철학, 역사, 대중문화, 인지심리학, 자연과학, 수학 등등 경계 짓지 않습니다. 그의 비평 대상은 딕 체니나 럼스펠트의 짧은 성명서나 기자회견에서의 잡담 녹취록에서부터 채플린의 영화, 어느 테러분자의 편지, 그리고 헤겔, 칸트, 니체, 데카르트 같은 근대 철학의 거성들, 그리고 랑시에르, 고진, 발리바르, 바디우, 네그리, 데리다 같은 현대 철학자들까지 광범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겪은 작은 에피소드나 자기 친구의 '다마고찌'(10년 전쯤 유행했던 가상의 pet을 키우는 삐삐처럼 생긴 작은 기계) 이야기까지,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사유의 재료로 삼습니다. 그가 아주 사소한 농담으로부터 시작해 사유의 지평을 저멀리 확대시켜놓는 것을 따라가다보면, 그 광범위한 일상 영역의 무한한 면적에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이죠. 지젝은 소위 말하는 ‘라캉적 범주들’(그것은 가장 먼저 언어의 차원에서 펼쳐져 있죠.)을 철학적, 정치적 반성 속에서 이용합니다. 우선 편의상 우리는, 그의 연구작업의 도구들은 대체로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장에 지속적으로 준거하면서 라캉 이론과 개념들을 다듬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젝이 “라캉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으로 제 나름의 정치적 목적의식을 갖고 작업을 전개하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라캉만큼 널리 읽히는 텍스트도 없지만, 그러나 거의 절망적일만큼 라캉은 오독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이죠. 이를 위해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근본 메커니즘을 이론화하는 것을 시도합니다. 또한 전체주의와 그것의 변이체들의 구조를 규정해나가는 시도를 벌이죠.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등을 말입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그의 여러 저작들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그리고 최근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등. 그리고 그는 동유럽 사회에서 급진민주주의 투쟁의 윤곽을 그려내는 것을 시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그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평생에 걸쳐 시도해온 정치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알다시피 그는 한때 슬로베니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으며, 과학장관을 역임하기도 한 ‘현실 정치인’입니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지젝 저서의 얄팍한 독자에 불과한 저도 아는 바가 전혀 없네요. 아무튼, 이처럼 그는 현실 안에 몸 섞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분석연구자’입니다. 여기에 어떤 목적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선 그런 실천의 행위들이 가져온 독특한 아우라를 그가 양껏 이용하고 있다는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이 진행하는 연구의 정박점은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작동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때 ‘동일시’는 이데올로기적 장이 구성되는 과정이 되고, 희열 또는 쾌락은 담론 속에서 작동하는 배제의 논리(예를들어, 인종주의 따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적이자 이론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판타지’는 뭘까요. 저는 이 ‘판타지’에 대한 연구들에 눈길이 가장 많이 갑니다. 지젝에게 판타지는 사회적 장이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둘러싸고 구조화되는 근본적 분열 또는 ‘적대’를 은폐하려는 상상적 시나리오입니다. ‘환상(fantasy)’라는 것을 통해 상징적 현실이 구성되고 유지되며, 주체가 그 속에 속박되어 존재하는 메커니즘! 그것에 문제의식을 갖는 거죠. 상징적 현실이란 것은 허구일뿐만 아니라, 일관적이지도 않아서 균열들로 점철되어있습니다. 항상 결핍 그 자체로서의 실재계의 구멍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존재하지 않는’ 대타자를 가리키는 것이 대타자의 욕망에 대한 응답들을 상연하는 ‘환상’의 역할이 됩니다. 

두번째 영역은 지젝이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등을 다루는 자신의 분석 작업에 라캉의 범주를 활용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라캉주의자인 동시에 특히 헤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감이 드러내는데, 라캉과 헤겔의 접합이 지젝에게 따라붙는 하나의 슬로건입니다. 사실 데카르트 뿐만 아니라 칸트, 하이데거 철학에 대해 완전 무지한 저로서는 지젝의 이런 작업들을 그저 반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따라가는 수준인데, 이것이 목적하는 바에 대해서는 <시차적 관점>을 통해 지겹도록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도 얼핏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슬라보예 지젝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3학년때 일입니다. 그때 고대 대학원신문 특집으로 실린 지젝에 대한 기사를 통해 접한 것이었는데, 기사만 읽었을때는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습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그의 과감한 주장들 때문이었는데, 어쨌든간에 그 역시 네그리나 몇몇 유행하는 철학자들과 다름없이 ‘신ㅈ파’의 덮개를 쓴 패셔니스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때 저에겐 (제가 심지어 알튀세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부류들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이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저는 실천적으로는 확실히 엄밀한 구ㅈ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학문 배우기를 즐기는 자는 될 수 없음이 분명함을 느낍니다. 학문 탐구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는, 현실 그 자체의 실재적 측면들만이 관심이 가는 행동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튼 그런 의구심들에도 불구하고 제가 '깊은 사유를 전개하는'(겉핥기 공부를 즐기는 저의 얄팍함에 비견되는,) 지젝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얻은 몇가지 무기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근 3년간 절망적인 상태에 가깝도록 빠져버린 저의 실의 상태를 다시 원상복귀에 가까운 상태로 돌려주는 데 있어서 많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요컨대 ‘아버지’의 문제, 그리고 실천에서의 ‘간극’의 문제, 결코 극복되지 않는 ‘난관’의 문제들에 대한 좌절들 말입니다. 지젝 읽기를 통해, 삶에서의 외상적 경험들을 경과하고 그것에 대해 의미성을 두고 살아가면서 저는, 운동과 삶 사이의 간극들이 가져온 좌절들을 즐겁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이것은 점점 제 삶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중이지요. 아직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지젝을 소개하고 설명할 만큼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지젝을 ‘잘’ 읽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고 즐거운 일인지 이야기하는 것에는 자신 있습니다. 지젝은 일단 재미있습니다! 특히 영화라는 매체를 텍스트보다 더 좋아하고 아끼며 앞으로 영화 일을 하고자하는 저에게 ‘영화비평가’이기도 한 지젝은 엄청 훌륭한 이론적 스승님이죠. 영화 창작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영화비평은 때때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다음달에 트뤼포에 대한 나름의 연재를 통해 이야기해보고싶네요.

지젝의 히치콕 비평(ex.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 대해 묻지 못했던 것들>?)과 할리우드 고전 탐정영화 비평들, 타르코프스키, 키에슬롭스키 영화 비평 등은 정말 탁월한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정말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지젝이 벌이는 ‘라캉적 범주의 작업’안에서 함께 놀고있죠.(지젝의 텍스트는 정말 놀 줄 압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명성을 떨치는 여느 비평가들치고 지젝을 읽지 않는 이 없을 겁니다. 특히 허문영이나 남다은 등을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강합니다. 정성일이나 정한석, 김소영 등도 그렇구요. 특히 최근의 허문영 글들을 점점 더 그런 느낌이 강하더군요. 언젠가 지젝이 영화 <300>에 대해 쓴 비평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저항자집단의 윤리에 대해 언급하며 <300>을 호의적으로 비평한 글은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3년 전 그 글을 읽었던 저에게 그글은 분명 터무니 없게 느껴졌지만 오늘날 지젝의 애독자가 된 지금의 저에게 그 글은 정말 탁월한 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사바넷에서 한번 그 글을 퍼오겠습니다. 그렇다면 슬라보예 지젝 저서들에 대한 짧은 결산을 해보겠습니다. 아래 다섯 권의 책은 지난 여름에 읽은 것들이고, 이에 붙여 다음에는 세 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 대한 독서후기를 올리구요. 


<하우투리드How to read 라캉>
- 6월 17일~19일

처음에 저는 아주 얄팍하게도 지젝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헐리우드의 정신분석>을 읽는 선에서 회사에서의 지젝 읽기를 간 보는 수준에서 멈추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저의 독서계획은 이렇게 지젝 읽기에 몇 달씩 할애하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영화비평이론들을 광범위한 수준에서 읽는 계획 안에서의 지젝을 생각했을 뿐이었던거죠. 그런데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확실히 라캉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는 지젝을 읽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여느 분들의 말씀처럼 라캉을 이해하고 지젝을 읽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의 슬로건이 “라캉으로 돌아가자”, 즉 자신이 마구 쏟아내는 텍스트들을 통해 ‘라캉 읽기’를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젝을 읽으며 라캉을 이해할 수도 있는거니까요. 그래서 일단 라캉을 기초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갖추고 싶어서 세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하나는 슬라보예 지젝이 직접 쓴 , 그리고 새물결에서 낸 <자크 라캉 세미나11 : 정신분석의 네가지 근본 개념>,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시리즈로 나와있는 총서 중 <자크 라캉> 입니다. 그 외에 ‘책마을’에서 접한 몇가지 글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국내에 소개된 수많은 라캉 안내서들 중 단연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니고 (제가 읽은 라캉 입문서는 불과 세 권에 불과해요. 흐흐) 라캉에 대해 알지도 못하지만 감히 예상하자면 그럴 것 같다는 거죠. 궁극적으로 라캉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책입니다. 가장 쉬운 책이 아닐까 싶고, 책을 보면 다 알게 되므로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네요. 라캉 읽기, 지젝 읽기의 초석을 다지는 데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 책이었습니다. 무엇부터 읽을까 고민이 되신다면 이 책을 추천해드립니다.


<자크 라캉 세미나11 : 정신분석의 네가지 근본개념>
- 6월 20일~25일

이 책에 대해서는 우선, 책마을에는 원익씨의 두 글이 있습니다. 

[독서후기]책마을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 : <세미나11>
http://26.1.1.40:2007/bbs/zboard.php?id=02191&page=1&sn1=&divpage=2&category=9&sn=off&ss=on&sc=off&keyword=라캉&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92

[내글내생각]라캉 읽기의 어려움-세미나11
http://26.1.1.40:2007/bbs/zboard.php?id=02191&page=1&sn1=&divpage=2&category=9&sn=off&ss=on&sc=off&keyword=라캉&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294

저는 이 책의 독서후기 쓰는 걸 여러 차례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요약하여 쓰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우선 저부터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궁에 와서 유일하게 두번이나 읽었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어렵지요. 나중에 언제 한번 다시 시도할 날이 올까요. 

라캉의 세미나 11의 관심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는 테제입니다. 우리는 가까이세 레비스트로스가 탐구한 ‘야생의 사고’를 살필 수 있죠. 거기에는 ‘토테미즘’ 기능의 진리가 숨겨져있습니다. 우리는 야생인들이 토템미즘적 신앙을 갖추면서 토템에게로 구조화시킨 무의식의 흔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간극’을 보여주며, 신경증은 이 간극을 통해 결정될 수 없는 실재에 연결해주는 무의식의 흉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걸 원인처럼 사고할 수 있겠죠. 세미나11은 이 ‘간극’을 여는 시도입니다. 라캉은(프로이트는) 간극이 발생하는 어떤 지점에 시니피앙의 법칙을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 꿈이나 실수들, 농담 따위가 헛디딤, 실패, 균열들을 보이면서 무의식의 구조를 밝힌다고 보았는데 라캉은 그것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수준에서 자신의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럴수가. 저는 지젝을 읽으려다가 라캉에게로 왔는데, 라캉을 (잘) 읽으려면 프로이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으악. 한 달 후, 저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게 됩니다. 단호하게. 이것만 읽고 말겠다는 결의로. 책읽기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면서.


<삐딱하게 보기>
- 6월 26일~30일

실재계의 ‘구멍’, ‘귀환’이라는 것들이 상징적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양태들을 검토합니다. 헐리우드대중영화, 채플린 영화들이야말로 이 검토의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겠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재미있게’ 라캉 읽기를 간접적으로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인기 라캉연구자 지젝의 면모가 여기서 여감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된 이야기들은 <항상 라캉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묻지 못했던 것>이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등 여타 저서들에서 거의 모두가 재인용됩니다. 지젝은 이렇게 자신의 텍스트를 다시 맥락화시키는 걸 즐기는 것 같더군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7월 4일~11일

“상징적 현실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실재계의 진공’은 상징적 현실의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어쩌면 이 역설적 명제는 논리적이지 않은 명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판타지가 상징적 현실의 불가능성, 대타자의 비존재를 가리는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의 언급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실재 존재 조건의 상상적 / 왜곡된 표상이라는 개념 규정을 넘어서고, 현실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불가능성이나 균열 등은 다양한 적대들을 낳고, 현실은 판타지에 의해 적대들을 배제하고 억압합니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지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는 실재계의 구멍, 조각 따위가 상징적 회로 속을 순환하면서 현실이 그것을 중심으로 구조화될 수 있게 하는 방식과 그 과정에서 판타지들을 뚫고 현실의 비일관성과 균열을 드러내는 메커니즘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헐리우드 대중영화’들을 통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조각은 편지, 여자, 반복, 남근,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유롭게 논하라!”, “네가 의지하는 만큼, 그리고 네가 의지하는 것에 관하여. 그러나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지젝은 이것이 공적으로는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생각하라, 독서하는 공중 앞에 선 학자로서 너의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라, 는 말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권위에 복종하라.” 지젝은 이것이 칸트의 ‘학부 논쟁’의 밑에 깔린 일종의 분열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이야말로 이데올로기 앞에선 대중의 가장 중요한 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우리는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지배계급과 이데올로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철저히 권위에 복종하고 있지요. 

우리는 이 ‘분열’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권위를 의문시하지말고 복종하는 것에서 비롯된 분열을 말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냉소주의’라는 태도로 명명될 수 있을겁니다. 서유럽에서 냉소주의는 이중화되었죠. 사람들은 공적으로는 대단히 자유로운 척하면서 사적으로는 복종합니다. 그런데 지젝은 동유럽에서는 이것이 공적인 복종의 의례와 사적인 냉소적 거리 사이의 분열로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분열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균열의 양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젝은 말합니다. “오늘날의 적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냉소주의자이다.”

이 책의 목표는 그 냉소적 거리의 무효성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실로 대단한 목표가 아닌가요? 한 권의 책이 이처럼 원대한,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목표를 상정한다는 과감한 시도 자체가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지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지젝의 이런 과감성, ‘잃어버린 대의’를 찾고자 하는 용기가 다른 철학자들이나 분석가들과는 다른 면모라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ㅎㅁ이라는 과업에 대해서는 대단히 시니컬하게 말하면서도 실은 그 누구보다 ㅎ명가답게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는 헐리우드 안의 라캉 읽기(해석학)와 헐리우드 바깥에서 즉자적인 개념적 내용과 대자적인 개념적 내용의 접합을 시도(논리학) 합니다. 그를 위해 지젝은 여섯가지 질문을 던지죠. 이는 헐리우드 영화의 서사를 둘러싼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왜 여자는 남자의 징후인가?”
“왜 모든 행위는 반복하는가?”
“왜 남근은 나타나는가?”
“왜 항상 두 명의 아버지들이 존재하는가?”

나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러나 118일은 너무 짧네요. 흑) 이 다섯가지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시차적 관점>
- 7월 12일~21일

우선 이 책은 엄청 두껍습니다. 제 기억에, 900여페이지에 달하는데, 이런 책을 보면 우선 이걸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고민부터 생기죠.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둘째치고 뭐하러 이렇게 두꺼운가 하는 의심부터 드는게 사실입니다. 저는 지젝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의심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제 인생의 책 목록에 드는 책이 되었습니다. 잠시 건강상의 문제로 입실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압축적으로 읽어서 그나마 빨리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아니면 불가능했겠죠.
극복할 수 없는 시차적 간극이 발생했습니다. 아니, 그래왔습니다. 아주 간명하게 말해서, 우리는 ㅎ명적 유토피아의 간명한 정의(正義)가 있다면, 그것은 레밍이 실제로 앙드레 부르통이나 아라공 같은 다다이스트를 만나서 논쟁할 수 있는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걱정하는 ‘간극’이 모두 해소된 순간이 아닌가요? 지젝은 이 극복 불가능한 ‘간극’이 헤겔에 대한 일종의 칸트의 복수일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도하는 시차적 간극을 이론화하는 것이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혀 고물 취급받고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한 필수적인 첫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포부가 아닙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그냥 막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터무니없음이라니.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허무맹랑한 포부는 아니었다는게 확실해지더군요. 우리는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모든 것들 앞에서 어떤 간극 같은 것을 감지합니다. 우선 ‘공동생활전선’부터만 해도 저는 예측되는 간극들이 바위덩어리처럼 무겁게 느껴져 감히 논의에 용기있게 뛰어들지 못하는 비겁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쁜 탓도 있지만, 그건 핑계가 되지 못하겠죠.) 

개인과 개인에 무관한 사회적 차원 사이의 간극은 다시 개인 안에서 각인되어야만 합니다. 사회적 실체의 객관적인 질서는 개인들이 그것을 그렇게 간주하고 그것에 그러한 방식으로 관계할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탁월한 사례는 그리스도가 되겠죠. 지젝은 양극단의 투쟁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법칙이 음과 양이라는 대극의 양극성이라는 뉴에이지식 개념에 의해 식민화되고 혼란스러워졌다고 말합니다. 시차가 발생한 것이죠. 시차에는 양자물리학과 신경생물학의 시차, 존재론적 차이, 존재적인 것과 초월론적/존재론적인 것의부조화로부터 발생하는 시차, 실재계의 시차, 욕망과 충돌 사이에 있는 간극의 시차적 특성, 무의식의 시차, ‘질’의 시차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그 모든 시차들에 대해 맨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감행합니다. 사람들은 지젝이 결국 비판 불가능한 지점까지 갔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가늠할 수 있는 깜냥은 되지 못하고 그저 읽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cogito의 비현실성에서 그 시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Cogito는 실증적으로는 말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그 기능이 사라지니까요. 코기토는 실체적인 존재자도 아니고, 전적으로 구조적인 기능을 갖는 ‘빈’ 자리입니다. 이처럼 간극이란 환원될 수 없으며 극복될 수도 없습니다. 존재론적 차이,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객관적인 존재적 현실 사이의 간극! 그것은 그저 영원한 것이며, 우리는 이 간극이 가져오는 이원론적인 것 자체의 이면에서 그것을 생성하는 지점 끝의 ‘극소차이’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물론이 “내가 보는 현실은 결코 전체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치환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다른 대부분이 ‘나’를 속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그 속에 포함되어있음을 나타내는 얼룩과 맹점을 내포하기 때문일겁니다. 그런 점에서 미지의 X로서의 대상a는 현상 너머 대상 안의 본체적 중심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풍경’만이 특정 관점에서 조명될 때 그것은 존재하며 그 현존은 식별된다는 것이죠. 대상a는 상징적 관점들의 다양성을 초래하고 여기서 오는 순수한 ‘차이’는 그 자체가 대상이 됩니다. 주체와 대상의 필연적 매개가 여기서 드러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차이, 간극은 아주 종종 사회적인 사실이 됩니다. 지젝은 여기서 드러나는 외상적 중핵에 대해 “‘간질이는 대상’은 모든 서사적 해답을 폄훼하는 부재하는 원인이며 미지의 X”라고 말합니다.

지젝은 이 간극의 끝을 보겠다는 포부로 사유를 펼쳐나갑니다. 그 사유의 지평 위에는 라캉이나 헤겔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칸트, 사드, 하이데거, 니체, 키에르케고르, 브레히트의 서사극 비평, 루카치, 알튀세, 발리바르, 네그리, 데리다, 고진, 막국수, 정치경제학 비판, 민주주의, 채플린, 키에슬롭스키, 타르코프스키, 레밍, 트로츠키, 헐리우드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그리스도, 사도 바울, 성경, 아도르노, 바디우, 랑시에르, 버틀러, 카프카, 서부 영화들, 쇼스타코비치와 베토벤, 모짜르트, 네오콘와 히틀러, 나치, 수타면주의 까지 거의 모든 것이 사유의 재료로 활용됩니다. 


저는 얼마전 나갔던 출타에서 1년여 만에 만난 옛 동지에게 10장짜리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그건 일종의 공식적 만남이었는데, 그는 P*학생스포츠의 끝자락에서, 알튀세주의자의 레프트윙적 실천태를 고민하고 있죠. 그는 지금 그 그룹의 '리더'입니다. 제가 어릴때 선배들은 그 임무를 맡은 이를 ‘대장’이라고 불렀는데, 어느새 그가 그 고달프고 외로운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3개월 남짓 후면 그는 학교를 벗어나 사회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런 마당에 그는 저에게 다시 활동할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했습니다. 너의 무수한 잘못들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래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더군요. 그건 너의 선택이라고. 

저는 제가 쓴 편지에서 내 삶의 간극에 대해 말했습니다. 거국적이고 원대한 꿈이 스물네살의 나이에 실패해버린 이야기로 시작한 편지는 어느새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간극들 앞에서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스물일곱의 이야기로 바뀌어있었습니다. 나중에 돌아가는 길에 그 편지를 읽었을 그가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간극이 저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간극이었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니면 그저 의지주의로 돌파할 수 있을 것처럼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었죠. 그 편지에는 지난 3년간 겪은 가족사적 비극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얼마전 나갔던 설탕에서 저는 끔찍히도 괴로운 일을 겪을 수 밖에 없었는데, 저는 그 사건을 일종의 상징적인 아버지 살해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두번째 반복된 것이었죠. 3년 전 이맘때에도 전 표면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혼자 알아채고 끙끙 앓았던 '그 정사'를 밝히면서 그를 상징적으로 살해(가부장의 위치에서 끌어내리기)했고, 얼마전에는 그보다 더 격한 행위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참지 못해 경찰에 신고하는 시늉을 하며 집에서 내쫓았죠. 저는 이제, 집에서 완전히 나가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그저 두번째 가부장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남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까지 솔직히 이곳에 저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계속 솔직하고 순수하게 사적이며 동시에 공적인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서 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저녁한 후에 서로를 잊고, 이름도 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서야 저의 간극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지젝을 읽지 않았다면, 편지를 그렇게까지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괴로운 사건에 대해서도 저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을 여유를 갖게 되었구요. 그리고 한 사람의 권위적 인간조차 이해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절에서 나물만 먹으며 묵언수행하는 도가의 수도승 같군요. 그러나 저는 욕망하고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동시에 제 앞의 간극들을 두려워하지 않고-놓치지도 않고 주시할 용기를 갖게 된 인간이죠. 그런데 실은, 이제야 겨우 저는, 인생을 요량껏 살 약간의 힘과 계기를 갖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많은 청춘들은 저처럼 겨우 이마저도 쟁취하지 못해 방황하고 자책하며 살지요. 

"88만원세대"라는 이름으로 호명받는 집단의 궐기도 결국 그런 간극의 문제 앞에서 더 이상 이도저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에 대한 문제에 직면해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모두 말할 수 있고, 또 무수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는 사람이든,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갈팡질팡하는 걸까요? 그 누구도 실은 간극적인 것, 간극 그 자체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않나요? 요컨대 민주주의라는 함수 앞에서 어느새 우리는 끊임없이 ‘전체’와 비전체 사이를 동요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아주 종종 민주주의를 ‘다수의 합리적 의견’에 의해 구성된다고 착각하지요. 이런 착각이 일종의 동일시를 낳지는 않나요? 그리고 그 동일시는 결국 대타자로서의 대상a에 대한 끝없는 응시를 낳지요.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포용하기를 감행하는 것에서 근거해 공동의 결단으로 이행해나가야 합니다. 그 점에서 얼마 전 원익씨가 쓴 <세대담론의 중간결산 ? 우린 좀 더 가난해져도 좋다!>라는 글은 참 시의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체제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우리가 겪는 상대적인 가난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하고 거기에 대해 분노에 찬 언설을 기성세대에게 쏟아내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단결'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단결의 토양을 다음 세대에게도 물려주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바로 그러한 기대들을 철저하게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사회적 연대의 토양을 확립하기 위해 지금 당장의 가난과, 자격증과, 높은 자리를 포기할 수 있는 우리 세대만의 고유한 '유토피아적' 욕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박원익, <세대담론의 중간결산 ? 우린 좀 더 가난해져도 좋다!> 중

바로 이점이 지젝이 말하는 간극에서의 ‘시차적 전환’으로서의 바틀비의 태도입니다. 바틀비의 태도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라는 명제로서 드러나지요. 초자아 시차에서 바틀비 시차로 이동하자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의 이동 말입니다. 저도 이 개념에 대해 굉장히 헷갈렸었는데, 얼마전에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두 개의 어떤 것들 사이의 간극에서, 그 ‘어떤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공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으로의 이동을 감행하는 태도이죠. 이것은 기성세대가(혹은 우석훈이라는 텍스트의 우익적 독자들이) 쏟아내길 기대하는, 체제 내적인 것으로의 ‘참여’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일종의 물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자본주의 게임에 스스로를 전적으로 동참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과는 내적 거리를 갖고 새로운 게임에 임하는 것을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젝이 언급하는 바틀비 공식은 ‘내용의 거절’이 아니라, ‘거절’이라는 형식적 행동 그 자체입니다. 상징계를 붕괴시키고 억압들을 내적인 얼룩으로 환원시키는 시도이죠. 요컨대 바틀비는 “파리 한마리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그의 존재를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어떤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에는 아주 치밀하고 꼼꼼한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겉핥기로 읽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읽기라서 어떤 한계가 명백히 느껴지기도 합니다. <1Q84>를 읽다가도 지젝의 다른 저서들을 읽고있는 요즘도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스토리텔링을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지나치게 조급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확실히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학문 전공자가 아니라도 이렇게 계속 공부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고 제안하고 싶네요. 저를 이렇게 들끓게 만든 여러 스승님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요즘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어서 지젝읽기, 벤야민읽기를 마치고 시나리오를 쓰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시나리오쓰기를 시작하지도 못해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흐으. 

20.19.3.17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04
09:53:06 



일병 오학준 
54.12.16.183   잘 읽었습니다. 

"어떤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에는 아주 치밀하고 꼼꼼한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겉핥기로 읽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읽기라서 어떤 한계가 명백히 느껴지기도 합니다. <1Q84>를 읽다가도 지젝의 다른 저서들을 읽고있는 요즘도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스토리텔링을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지나치게 조급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확실히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학문 전공자가 아니라도 이렇게 계속 공부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고 제안하고 싶네요. 저를 이렇게 들끓게 만든 여러 스승님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요즘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어서 지젝읽기, 벤야민읽기를 마치고 시나리오를 쓰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시나리오쓰기를 시작하지도 못해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흐으." 

아직 지젝에 대해서는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정도 밖에 읽지 않아서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을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마지막에 명교씨가 쓰신 말이 요즘 저를 궤뚫는 말인듯 하여 옮겨두었습니다. 

대학교 3년 다닌다고 다니면서, 이것 저것 공부한다고 하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모든 것이 '겉C기'로 그친 것은, 스스로가 공부의 태도를 '겉C기'에 맞추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그 생각 때문에, 이런 태도를 잠깐은 멈추자고,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이 직무를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왜 그때까지 '겉C기'에 맞추고 있었는가를, 시간이 머무르는 듯한 이 곳에서 찬찬히 생각해보니, 어떤 강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그 강박이란, '창출'에 대한 강박이에요. 지금까지 나왔던 수많은 학자들, 수많은 ㅎㅁ가들 모두가 사실 조금씩 문제가 있고,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완전함'을 동경하겠다는 강박. 그러다 보니, 그 어떤 매력적인 필자를 만나도 항상 그 필자를 숙독하기 보다는, 그 필자에 대한 요약과 평가 그리고 그 요약과 평가에 대한 독해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넘어가버리는 그런 태도를 낳은 듯 한 겁니다. 너무 조급했던 건 아닐까, 사실 모든 것에 대안을 제시하는 학문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논의와 토론을 요청하고 싶었던 욕망이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었는데, 너무 완벽함을 바랐던 건 아닐까... 

도시당초 이 태도를 고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네요. 명교씨가 어서 지젝을 읽고 벤야민을 읽고 시나리오를 쓰기를 바랍니다. 저도 어서 읽기를 끝마치고, 다큐멘터리를 쓰기를 바라니까요... 2009-10-24
20:37:13




상병 홍명교 
20.19.3.55   저는 조급함은 버리고, 주체적인 겉핥기는 계속 할까싶어요. 왜냐하면, 공부하려는 욕망보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가장 강하기 때문인거 같아요. 가끔 공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긴하는데, 아마 했어도 체질상 제대로 하진 못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금 이렇게 궁에서 2년 빡시게 공부한것에 만족하고, 또 저녁하면 계속 일상속에서 공부해야겠죠. 지금보다는 덜, 천천히, 그리고 겉만 핥으며. 그러나 꼼꼼히. 2009-10-24
22:28:53




일병 오학준 
54.12.16.183   저는 아직도 공부에 대한 욕망과 영상에 대한 욕망이 교차하고 있어서, 더 제대로 되고 있진 않은 것 같아요. 이거 참 난감한 ... 허허. 2009-10-25
08:40:49




병장 박원익 
54.1.24.102   지젝에 대한 '입문'으로 손색이 없는 글을 올려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실은 그래요. 지젝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 지젝의 제스처를 반복하는 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가령 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제가 취하는 제스처가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예컨대, 누군가는 "가난해져도 좋다"라는 것을 단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해지자"라는, 또는 "세상을 송두리 째 전복해버리자"라는 도착적인 태도로 오해하기 마련이니까요. 이것을 피해가기 위해서, 지젝의 사유와 그의 권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불가피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벤야민 읽기엔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발터 벤야민이야말로, '고유명'의 문제를 고민했던 진정한 비평가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2009-10-25
21:18:14




상병 양제열 
22.18.40.183   지젝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2009-10-25
22:47:03




병장 윤정기 
22.33.1.117   이게 바로, 지젝주의자로서의 '면모'로군요. 하아.. 
시차적관점은 800페이지가 좀 넘는 분량이지요(으윽), 독해가 참 어렵습니다.. 2009-10-26
11:24:57




상병 홍명교 
20.19.3.55   학준/ 
영상에 대한 욕망요? 다큐하고싶다고 그러셨죠? 독립영화인으로서의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갑자기 딴 얘기가 하고싶네요. 
얼마전에 한 영화잡지를 보니까, 독립영화의 광범위한 배급망을 통합해서 만든다고 하네요. 거의 모든 인기 독립영화 배급권을 다 갖고있더군요. 인디플러그인가? 인터넷상의 온라인상영이나 다운로드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면서 배급망을 구축하는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저나 학준씨 같은 독립영화인들이 영화를 만들고 그 배급망에 등록하면, 일정한 수입이 생길 수도 있는거죠. 잘해야 뒷풀이값 겨우 나오겠지만 그게 어디에요. 아니면 6mm테잎이라도 하나 사던가. 

원익/ 
지난번 슈가때 서점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여러 판본을 살폈는데, 합본은 뒷부분만 번역된 버젼이고, 분권 버젼은 굉장히 비싸더군요. 이거 다사면 족히 8만원은 되겠더라구요. 요즘 돈도 없는데 걱정... 

제열/ 
고고~ 

정기/ 
저야말로 얄팍하죠. 지젝에 대해선 감히 지젝주의자라고 말 못하겠고, 지젝이 써갈기는 책들을 참 즐겁고 괴롭게 읽는 독자라고 말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