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종교
병장 이승일 01-27 01:56 | HIT : 132
선악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마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창세기 3장 1-5절
밝은 눈. 선악을 아는 지혜. - 이것이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고 영원히 방황토록 만들었다. 앎, 그것이 기독교의 원죄이다. 세상을 알려고 하는 욕망. 세상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욕망. 구약성서의 핵심은 이러한 욕망에 대한 경계심에 있다. 모르는 것은 약일 뿐만 아니라 구원이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악마의 총수라고 하는 루시퍼 Lucifer 의 어원을 보라. Luci- : 빛 + fer : 나르다. = 빛을 나르는 자. 아니, 악마의 왕이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되는가. 빛. 빛을 나르는자. enlightening. 계몽. 계몽주의자. 그렇다. 루시퍼는 어떤 의미에서 계몽주의자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계몽주의의 확산이란 악마에 의한 세계지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과연 이 세계를 알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몹쓸 짓이란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상반된 대답은 서구 종교의 역사를 이리 저리 분열시켜 놓았다. 흔히 유럽의 종교사에서 ‘이교도’ 들이란 다름이 아니라 위 질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하는 종교인들인 경우가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이교로 ‘헤르메시즘’을 들 수 있다.
헤르메시즘 Hermesism
헤르메시즘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헤르메티카> 는 고대 이집트의 신격화된 현인 토트 Torth 의 지혜를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있는데, 오랫동안 구전되다가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전해져 문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헤르메티카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고 암암리에 알려져있다. 중세 말 무렵 신플라톤주의가 등장한 것 역시 헤르메티카의 영향이었고, 무엇보다도 르네상스를 고무시킨 것 역시 헤르메티카였다. 이집트에서 아랍 문화권으로 전해졌던 헤르메티카가 15세기에 피렌체로 옮겨지면서 새로운 문화적/ 지적 자극을 선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헤르메티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 토머스 무어, 코페르니쿠스, 셰익스피어, 뉴턴, 윌리엄 블레이크, 빅토르 위고, 등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서구의 인물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헤르메티카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막대한 사상적 생산력을 발생시킬 수 있었을까?
헤르메티카는 이 세계를 알려고 하는 것이 몹쓸짓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구원의 첩경이라고 여겼다. 지식에 대한 열망에 불타올랐지만, 그에 대한 기독교적 죄책감에 시달리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헤르메티카는 강력한 빛을 던져주었으며, 분명 더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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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물이 눈에 보이므로
우리는 창조자를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그가 창조하는 목적이다.
그는 언제나 창조하고 있으므로 언제나 보여질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창조자의 지식을 누리고 있음을 생각해야하고
놀라워해야하며
깨달아야 한다.
<헤르메티카>, 창조에 대한 묵상
창조물을 통해서 창조자를 알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세계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신을 알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헤르메티카의 기본적인 입장 중 하나이다. 세계를 지적으로 탐구하면서 동시에 신적인 것을 찬양했던 서구의 위인들 - 그들은 결코 기독교인일 수 없었다. 그들은 대개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거나, 당할 위협을 받았지만, 서구의 문명은 그들 손에 의해 일구어져왔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은 지상이 아닌, 천상의 국가를 건설하느라 바빴을테니깐.)
앎에 대한 심리학
비단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분명 앎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선악과와 Lucifer는 단지 이러한 심리적 원형의 신학적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 그것은 하나의 권력적 행위이며 지배행위이다.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세상은 우리에게 얽매이지만, 동시에 우리들 자신 또한 세상에 얽매이게 된다. 태희가 이 세상의 모든 물리학적 지식을 안 순간, 그녀는 이 세상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권력을 얻게 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제 바로 그 법칙들에 구속된다. 그녀의 권력이란, 지식에 대한 복종의 댓가일 뿐이다.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신뢰해야하고, 그것에 복종해야하며, 다른 가능성들은 무참히 배제시켜야한다. 풍부한 가능성의 왕국은 오직 무지에서만 탄생할 수 있으며, 앎으로 가득 채워진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안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동시에 해야 할 일도 많아진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은 결코 무지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권력의 구속과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무지’ 가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한편, 세계를 알고자 하는 욕망역시 뚜렷한 심리적 원형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앎에 대한 욕망은 권력에 대한 욕망의 한 종류이다.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자신을 확장시켜 더 많은 것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욕망에 지식은 필수적이다. 호랑이의 습성을 알고 있었던 원시인들은 그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고, 자기를 알고 남을 알았던 손자는 백전백승까지는 몰라도 그 비슷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앎에 의한 권력의 실현. 실제로 세상은 무언가를 아는 자들에 의해 움직여왔으며, 세상을 움직이고 싶어하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와 헤르메시즘과 같은 종교들이 단지 인간의 심리적 원형의 투사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러한 종교들의 존재는 앎에 대한 인간의 모순 된 욕망이 얼마나 근원적인 것인지를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혹은 반대로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종교간의 대립과 분열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의 심층을 이루고 있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지식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정말로 아는 것은 악이고, 모르는 것은 약인가? 또는 반대로 세상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하는가? 아니면 한 가지 확실한 믿음이나 신념만을 소유한 채 ‘빛을 나르는 자’들을 경계해야하는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어느 쪽이건 선택해야하고, 그 선택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리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세상을 과연 이해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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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湯>
IP Address : 54.2.9.70
병장 임현종
54.12.1.98 루시퍼가 새벽별을 의미하는 존재라는 것은 알았지만 저런 어원을 가졌다는 것은모르고 있었군요. 재미있습니다.
또한. 창조물을 통해서 창조자를 알 수 있다는 것. 말씀하셨다시피 신 플라톤 주의와 직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연관성을 지니는 군요. 이런 부분에 대한 승일님의 놀랄정도로 해박한 지식, 정말 놀랍습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뭐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말하신 것처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지는 않죠. 지식에 대한 욕구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쓰신 앎을 두려워 하는 마음. 저는 이것이 세계을 이해할 수록 깨닫
게 되는 자신의 비루함과 초라함. 이 아닐까 싶네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나약한 인간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비루함과 초라함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 역시 앎에 대한 욕구가 아닐까요? 아니. 오히려 이런 비루함과 초라함이. 두려움이 더욱 맹렬히 지식에 대한 욕구를 불태우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지식욕 -> 두려움 -> 다시 지식욕 이라는 순환을 가지게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학문 추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저 자신은 비루하고 초라한 인간인지라 그런 형태의 욕망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물음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봤습니다.
인간이란. 자신이 무위의 도를 닦는 자가 아닌 이상에야.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배움의 길을 걷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이라는 공간이. 경험이라는 것을 통해서라도. 무언가를 가르치곤 하지요. 아니. 이런 경험을 통한 앎이란 것은 무위의 도를 닦는 자라도 마찬가지일 듯 싶습니다. 무위의 도라는 것 자체 역시 경험에서 나온 세상에 대한 이해 방식일 태니까요. 이같은 경험에 의한 앎이라는 것이 말씀하시는 세상에 대한 이해. 와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어차피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 법칙에 얽메이게 된다면. 역시 인간은 세상을 이해해야 하는 쪽이 더 옳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비록 그 길이 쭉쩡이를 지고 지옥불로 뛰어드는 것처럼 고된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죠.(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성서적인 인용을 약간 해봤습니다(웃음) 일단은 기독교인인지라 말이지요)
*사소한 츳코미
언급하신 종교는 기독교와 헤르메시즘이신데 헤르메시즘으로부터 신 플라톤주의가 파생될 수 있었다면 둘 사이에 꼭 대립이라는 관계가성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리고 종교간의 대립과 분열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질적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는 종파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일텐데 둘이 믿는 대상은 실질적으로 같은 야훼이니 말이지요. (물론 교리에 있어 차이가 있겠지만 그에 대한 차이점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의 부족으로 제가 잘못된 이해를 한 것이라면 승일님께서 그에 대한 지적을 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01-27 *
병장 정준엽
56.53.1.32 몇 가지 뻔한 태클.
1. 지혜와 지식을 혼용한 것.
"선악을 아는 것"을 지혜이나. "다 빈치, 보티첼리, 토머스 무어, 코페르니쿠스, 셰익스피어, 뉴턴, 윌리엄 블레이크, 빅토르 위고, 등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서구의 인물들이" 추구했던 것은 써 두셨듯 지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적당히, 지혜와 지식을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들 사이에서는, 아담이라고 하는 자의 지적 수준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상당한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근거로 아담이 온갖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 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고도의 지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이 견해를 인정하면 지식 그 자체는 인간에게 이미 허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헤르메시즘에서 주장한 것들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는데...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어 인간이 얻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되겠죠."실제로 세상은 무언가를 아는 자들"이 아닌 '판단하는 자들'에 의해 움직여왔고 권력은 그들에게 있었죠.
이상. 지식과 지혜에 대한 사소한 태클이었습니다.
그리고.
2. 루시퍼의 기원에 대해서.
루시퍼의 어원을 보면.
Luci- : 빛 +fer : 나르다..
루찌를 퍼 나르다.
루시퍼는 현대 인터넷 시대 카트라이더 펌족의 기원으로써...... (그냥 도망~) 01-27 *
병장 임현종
54.12.1.98 일단 승일씨께, 준엽씨에게 보내는 다음 리플은 승일씨의 글에대한 제 나름대로 독해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점 양해 드리고. 혹시 의도하신 바와 다른 이야기를 제가 주저리주지러 늘어놔서 불쾌하시다면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준엽//승일님은 헤르메시즘에서 주장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하신 적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뉘앙스에서는 지식의 독점, 내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막으려는 태도 가 더 문제다. 라는 뉘앙스의 내용 전개였던 것 같군요.
또한 조금 나아가서 해석하신게 아닌가 싶은데 '아는자들이 세상을 움직였다' 라는 대목은 존재하지 않는 듯 싶습니다. 말그대로 일궜다는 거죠. 그들의 앎에 대한 욕구가 서구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라는 뉘앙스가 더 강한 듯 싶군요. 지배를 의미하는 '움직였다' 보다는 말입니다.
또한 글의 논지가 선악과를 통해 인간이 얻은 것이 무엇이냐. 가 아닌 마당에. 인용구에 대한 태클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글의 다른 내용에 영향을 미치려 하시는 행동은 약간 잘못된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준엽님께 드리고자 하는 문제제기는 일단 여기까지고요.
그 밖에 약간 더 드릴 말씀이 있다면.
그리고 지식과 지혜의 단어 선택이 문제가 있다. 라는 말은 일리가 있으시지만,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이 깨닫게 된 것이 단지 지혜뿐. 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바로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인간이 '부끄러움' 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에 알지 못했던 '성'에 대한 것을 '알게' 되어 가지게 된 감정이 아닐까요. 뭐. 선악과 이야기에 대해 이 이상 깊게 파고들면 글의 논지에서 많이 벗어난 신학적 논쟁이고 교리가 될 테니 일단 사이비 기독교도인 저는 일단 이정도로 접도록 하겠습니다.(...아니. 뭐라고 하셔도 별로 대답할 능력이 안됩니다. 끼룩) 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