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신을 살해하다 (병장 김동환051104)
시간을 두고 고쳐도 별반 달라질 게 없는 글재주임을 잘 알기에
그냥 올립니다. 뜻만 통했다면 저는 만족하렵니다. 허허(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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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로 자수했다. 대체로 별 것 아니라는 반응이다. 덕분에 형사와 마주치지도 않았고
조서를 꾸미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정도 일엔 눈깜빡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밥은 방금 먹었다. 어차피 형사는 오지 않겠지만 이제 자술서를 작성해야 할
시간이다. 어디선가 커피향기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키보드가 옆에서 얌전히 내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얼마전 세대간의 어휘격차를 줄여보자는 오락프로그램에 어른들의 99%가 모른다는 10대들의 어휘로
'지름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지름신. 강력한 의지로 주로 뭔가를 구입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다.
내가 지금 쓰고있는 노트북이 바로 2년쯤 전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갓 등장했던
지름신의 강림을 받아 구입한 것이니, '지름신'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공중파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제시되기까지 3년이 채 못걸린 셈이다. 이같은 속도는 마치 1990년대 중반 이후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사회의 위화감을 꼬집은 공감각적 표현으로 당당히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코드로 자리잡았던 '썰렁'의 습격을 떠오르게 한다.
'지름신'의 이런 하품같은 전염력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선 알아듣기가 쉽다. 누가봐도 결단력 넘치는 낮짝의 '지르다'라는 동사와 인간의 지경을
넘어섬을 의미하는 '신'이라는 무난한 명사의 합성어임을 알아챌 수 있을만큼 과학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지름신'과 동시대에 등장했고 지금도 젊은세대를 기반으로 사용자를 꽤 확보하고 있는 '즐' 또한
공중파 방송의 유명 시트콤에 당당히 등장한 바 있으나, 세대를 뛰어넘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곧 다시 특정 세대만의 언어로 격리됐던 이유는 바로 도무지 뜻을 유추해 낼 수 없는
모양새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에 비하면 '지름신'은 조어과정에 대한 약간의 설명으로도
다수의 사용자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문어체에서 보기드문 뛰어난 압축률로 사용자의 구차함을 덜어주고 단어를 통해
표현하려는 내용이 명료하게 드러난다는 점, 게다가 일종의 언어유희로 작용해
사용자의 즐거움을 더해준다는 점등을 고려하면 '지름신'의 효용성이란 더 말할나위가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지름신의 가장 큰 장점은 소비행위 자체를 정당화 시킨다는 것이다.
친구가 묻는다.
"너 책 살돈도 없다더니 PSP는 어떻게 샀어?"
"아. 그거. 지름신이 오셨거든."
신이라는 단어의 위대한 효력. 단어 하나가 마치 전갈의 독처럼 소비신경을 마비시킨다.
사정이 이러니 소비가 곧 미덕이고 신용이 구체적인 금전적 가치로 환원되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지름신'이 환영받을 수 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은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다.
문제는 '지름신'의 정착에 따라 예상되는 사회의 변화양상이다.
언어는 심심치 않게 사회를 일깨우는 기능을 한다. 18세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다절양'이라는 시에는
과도한 조세부담 때문에 남편이 스스로 잘라버린 생식기를 가지고 관아에 들고가 울부짖는 아내가 등장하는데
굳이 부연할필요도 없이 이 시 한편은 당시 탐관오리들의 실상과 백성들의 고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다산의 시를 접하며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으나
표현해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명징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비단 문학작품에서만이 아니다. 얼마전 영화화 추진사실이 밝혀지며 이슈가 됐던
1980년대 한국의 어느 인질극에서 인질범이 체포되며 남겼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바로 유행어가 되면서 당시의 부패한 경찰과 사법기관의 작태를 유감없이 풍자했다.
이같은 경우라면 언어는 사회에 순기능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지름신'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성을 쉬이 마비시키고 소비를 부추기는 작용을 담당한다.
개개인이 언어를 만드는 것보다 언어가 개개인을 길들이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지름신'을 사용하기전에 그 배경과 단어에 담긴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IMF 이후 우선 사고 값은 나중에 치르는 신용카드가 정책적으로 장려되자
내수경제가 살짝 살아나긴 했으나 그 바람에 우리사회는 수백만명 단위의 신용불량자를 떠맡지 않았던가.
물론 소비는 개인의 자유고 그에대한 책임또한 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비록 식상할지라도 전세계적인
소비과잉으로 인한 환경오염등의 폐해나,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음에도 오히려 감소한 사람들의
행복지수를 고려했을때 사회적으로 어디에 어떤 색깔의 안전선을 설정해 권장하는 것이 옳으냐는 고민에는
비교적 자명한 정답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추장이 새로운 물건을 얻게되면 우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모인 사람들은 물건을 놓고 빙 둘러앉아 물건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이 물건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냥을 해야하는 사람, 불을 지펴야 하는 사람, 가죽을 손질해야 하는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떠오르게 된다. 이제는 자기 일을 미뤄두고까지 그 물건을 원하는지,
왜 가져야 하는지또 생각한다.
그렇게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가장 오랫동안 물건의 필요를 느낀 사람이 마침내 그것을 갖게 된다.
이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물건을 갖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어느 월간지에서 우연히 읽었고
이걸 흉기삼아 나는 몇시간 전에 지름신을 살해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석을 처치한 후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석이 먼저 가난한 군인을 몰아세웠고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건 정당방위다. 나는 결백하다.
병장 김동환 (2005-11-04 14:12:22)
빨간 부분은 기억나는대로 적은건데 원문은 페이퍼 10월호에 있어요.
일병 박진욱 (2005-11-04 14:30:59)
지름신...
지인의 이글루에서 특정한 물건을 샀다면서 [지상 최강의 남자 류] 라는 만화의 신 (... 예수기독...)이 "나는 반드시 류를 죽이겠다!" 라고 말하는 장면에 "질러라!" 라고 외치는 컷신에서 유래된, 제법 난해하고 매니악한 시작으로 된 물건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3년씩이나 되지는 않았던듯...?
일병 안대섭 (2005-11-04 15:15:37)
박진욱 일병님 칼라쨩을 아시나요.
병장 김형진 (2005-11-04 16:51:11)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소유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을테구요,
다만 현재는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그 소유의 사이클이 너무 짧아졌다는 것, 그리고 소유의 사이클이 짧아지면 사람들은 점점 더 존재의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생각나게끔 하는 문제네요. 좀 더 이야기 해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코멘트로는 역시 정리가 잘 안되네요. 제가 이래서 평소에 코멘트를 잘 안 달기도 합니다만, 어쨌건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병장 김동환 (2005-11-04 17:29:53)
/진욱님.
아. 그래요? 근데 제가 2년쯤 전에 노트북인사이드에서 중고 노트북 살때도
지름신이라는 말을 썼었어요. 어느 경로로 퍼지게 됐는지 알길을 없지만요. 하하(웃음)
병장 육이은 (2005-11-04 18:16:48)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만 동환님이 지름신을 살해해도, 지름신은 계속 부활할 것 같은데요. '신'이잖아요.
월간지 말아서 두들겨도, 아마 '지름신'은 계속 우릴 따라다니지 않을까요(웃음). 언어가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도 있겠지만, 또 언어는 특정 사회의 반영이기도 한 것 같아서요.
또, 읽다보니 여러 종류의 지름신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IMF 이후 우선 사고 값은 나중에 치르는 신용카드"로 질러서라도, 자살하지말고 어찌됐든 먹고 살게 도와주는 지름신도 있고. 또 엉뚱한 지름신들도 있을테고. 전 무신론자인지라, 굳이 신을 긍정하자면 일신교보다는 다신교가 더 마음에 들어요.
병장 박윤철 (2005-11-04 18:34:30)
저도 지름신이라는 말은 꽤나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군대에서, 그것도 신문 경제면 특집에서 처음 이 말을 접했습니다. (웹서핑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듣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근데 정말 과도한 물건을 사는 일을 이 말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이 강림했다... 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인데 말이죠. '소비욕구' 가 '신' 으로 올라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합니다. 내수 경제에 도움이 될지언정, 신제품 판매에 도움이 될지언정 '지름신' 의 강림으로 사는 구매는 언제나 과도한 씀씀이가 아닐까요. 저도 답글로는 제대로 뜻을 전할 수 있을지 저어됩니다만, 이 신조어의 등장이 과소비의 정당화를 젊은 세대에게 주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병 박진욱 (2005-11-04 19:43:56)
안대섭 일병님. 혹시 말씀하신 분이... color.얼음집. 의 그분을 이야기 한다면. ... 그분도 곧 여기 오실것 같던데요. (...)
제가 기억하기로 그 지상최강의 남자 류 자체가 그 집에서 언급이 된게 2004년의 일이라... 지름신. 이란 단어만으로 존립했던 시절이 있었으려나. 흥미있는 테마네요.
제 경우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업체. 에서 내놓는 흥미있는 상품들을 일컬어 "그분은 언제나 계신다..." 라는 느낌으로 말하곤 합니다. ... (사실 다른 위험한 단어도 쓰지만.)
일병 허익준 (2005-11-04 20:03:29)
... 아앗!! 色男님을 아시는 분이 계셨다니!! 뭔가모를 동질감이 느껴집니다(쿨럭)
병장 서명수 (2005-11-05 10:47:27)
빨간 부분은 페이퍼에도 나왔겠지만,
원문은 인디언 추장이 백인 사회를 보고 쓴 글
'빠빠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독서후기를 올렸었지요..(웃음)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지요...
특히..직업을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줬다는
병장 김동환 (2005-11-05 12:37:35)
/형진님.
처음 착안한것이 '지름신'이란 단어라 간단하게 생각했었는데 쓰다보니까 여러가지 생각해 볼
문제들이 얽혀있더라구요. 그걸 풀어서 다 쓰면 지루하고 읽기싫은 글이 될까봐 대충 버무려서
썼어요. 소유냐 존재냐는 문제의식도 그 중 하나이구요.
저는 보통 현상을 짚어내는 선에서 더이상 들어가지않는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쓰다보니
제 주관적인 생각도 많이 들어갔어요. 아무래도 제 속마음은 소유인지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둘의 상관관계를 타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쯤이겠죠.
아무튼 고맙습니다. 산만한 글 성의있게 읽어주셔서요.(웃음)
병장 김동환 (2005-11-05 12:39:59)
/이은님.
그럼요. 독을 약으로 쓰는 경우도 있지요. 공감해요.
그치만 독을 약으로 써야할 그 경우를 제외한 다수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지름신이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이에요.
댓글 고맙습니다.(웃음)
병장 김동환 (2005-11-05 12:43:25)
/윤철님.
저도 글을 올리고 나서 알게된건데 인터넷을 많이 쓰거나
게시판 활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사람도 꽤 되더군요.
'지름신'이 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퍼지지는 못한 모양이에요.
공감하신다니 기분이 좋네요.(웃음)
병장 김동환 (2005-11-05 12:48:53)
/진욱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업체. 에서 내놓는 흥미있는 상품들을 일컬어 "그분은 언제나 계신다..." 라는 느낌으로
말하곤 한다는 말 이해가 갑니다. 말이란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지도 무척 중요하지요.
제가 꼭 '지름신'쓰는 분은 나쁜 분! 이란 의도로 글을 쓴건 아니고 위험성이 많으니 좀 지양했으면
하는 생각이었어요.
병장 김동환 (2005-11-05 12:49:40)
/명수님.
아하. 그랬군요. 빠빠라기에 대한 간략한 소개좀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웃음)
상병 김강록 (2005-11-05 13:59:27)
드디어 이 시대 최고의 종교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이윤을 계율로 삼고 이기심을 원죄로 간직한 20세기 발(發) 신흥 기독교 변종 교단. 우리는 사실 신학이었노라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대적 필요와는 별개의 소비를 창출해내는 어떤 충동─다분히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복합 작용의 산물인 그것이 마침내 '지름신'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 그 성격도 가변적인 것에서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새롭게 규정되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했던가요. 신을 죽인 건 인간이었으되, 다시 신을 살려낸 것 또한 인간이었다고.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인간.
일병 안대섭 (2005-11-06 14:05:11)
진욱님 / 한때 나름대로 적자생존 월드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전우였지요. 하핫;
상병 김상희 (2005-11-07 10:21:02)
차와 거대한 티비와 오디오가 있다면 행복할까요? 없는 것 보단 행복할꺼예요..하지만 그 차이는 정말 얼마안되는 것 같아요.. 지름신보다 위대한 건 욕구억제가 아닐까요
상병 유기봉 (2005-11-08 08:59:29)
저도 약 2003년 가량에 현실적이 되어서야 지름신을 죽였습니다.
근데 워낙에 막힌 생활을 하다보니 다시 부활하더군요.거참....
어째꺼나 좋은 글입니다.어떻게하면 그런 표현력을 가지는겁니까아~~~
병장 김동환 (2005-11-23 10:08:34)
이런이런. 본문중 18세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시 제목
'다절양'이 아니라 '애절양'입니다.(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