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페미니즘 2부-페미니즘을 위한 지루한 반론
메롱.
혹시 1부 안 봤으면, 1부부터 읽자. 삼국지 2권부터 보면 재미없잖아.
다시 메롱.
안 어렵습니다. 길기만 하지. 정말. 진짜로. 안 읽으면 밤에 키 작아진다니까.
페미니즘은, 적어도 내게는, 지루하지 않은 분과다. 페미니즘 이론의 주류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으로 넘어오면서 이름도 괴이쩍은 학자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뤼스 이리가레이라든가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 따위의-도대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도 한 두 개가 아니다-적어도 도나 해러웨이의 '자연은 은유을 통해 과학적으로 읽혀지는 것이고 어쩌고 해서 저쩌고 하다'식의 이야기는 내게 제법 상당히 어렵다. 지나치게 거칠고 정치적인 이론이기는 하지만, 린지 저먼이나 우에노 치즈코 류의 '철 지난' 근대 자본주의와 관련된 페미니즘 분석도 여전히 강력한 분석틀로 고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문단에서 언급된 학자는, 내가 전혀 모르는 학자임을 맹세합니다. 린지 저먼이랑 우에노 치즈코는 빼고)
이것은 비단 이론의 문제 뿐이 아니다. 제3세계 여성이 가지는 문제. 선진국 내의 여성 문제. 장애 여성의 정체성. 전체 진보 운동 내에서 여성 운동의 위상. 인종과 여성의 문제. 근대 국가와 여성. 이런 것들이 얽혀버리는 '실제적인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은 머리를 터뜨리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그러한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도출되는 현실적인 문제 역시 더 복잡해진다.
일테면 얼마 전, 베트남 정부는 한국 정부와 여성관계 부서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다. 어떤 한국의 언론에서 베트남 처녀의 국제 결혼을 마치 '돈에 팔리는 노예'처럼 묘사한 것과 관련하여 말이다. 양성 평등을 쉽사리 주장할 정도로 평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 만한 그런 뻔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실상에 대해서도. 실제로 제3세계 여성과의 국제 결혼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그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그것을 공론화하는 방식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의 난감함에 대해서도(혹시나 여성주의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을 위해 부연하자면 이러한 이야기다. '실제로' 제3세계 여성과 한국 남성과의 국제 결혼은 노예 시스템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제3세계 여성은 돈이 필요하고, 한국의 미혼 남성은-대체로 배우자를 구하는 데 여러 핸디캡을 가진-여성이 필요하다. 그러한 이해 관계-물론 이런 것을 이해 관계라는 가증스러운 용어로 표현하는데는 얼마간의 뻔뻔함이 필요하지만 편의상 그렇게 해 두자-에서 국제 결혼이 등장하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하게 노예 시스템과 다르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사건을 다루게 되면, 그러한 결혼을 한 여성들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가?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결정권을 지니지 못한 객체로 전락시키게 된다. 그러한 언어 사용은 폭력적이다. 더구나 일반화는 언제나 위험하다. 이를테면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대체로 배우자를 구하는 데 여러 핸디캡을 가진 남성'이라는 표현 대신에 '돈 없는 농촌 노총각'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양자에게 모두 폭력적인 것이 되는 것처럼). 성매매 특별법의 입법과 관련한 성노동권 인정을 둘러싼 논쟁(성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문제는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방대하게 논의 된 문제이므로 할 이야기도 많고 해서 쉽게 몇 마디로 잘라 부연 설명을 못 해주겠다)에서도 이러한 입장의 애매함이 있었다. 조금 옛날 이야기로 가면 '박공주 지지론'을 둘러싼 여성주의 논쟁이라든가. 사회는 그런 식으로 복잡하다. 고민하는 한, 지루할 것은 없다. 타이레놀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지루한 옛 이야기로 여기고, 내가 보기에는 지루하고 피상적인 공세들을 퍼부어댄다. 사실 그러한 공세들에 각개 격파하는 식으로 반론을 제시하는 건 못할 짓이다. 피상적인 공세의 기반은 피상적이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논쟁에서 나는 짧은 글을 신뢰하지 않는다. 짧은 글에는 자신의 기반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헛 공세만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런 데 대고 같이 칼을 휘두르는 것은 제일가는 삽질이다. 그야말로 꼬투리 잡혀서 내 기력이나 축내고 얻는 것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도 그러한 공세-오해에서 비롯된 지르기를 공세라고 하는 건 우습지만-가 누차 계속된다는 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구질구질하게 변명 좀 해 보자. 이를테면 지루한 페미니즘을 위한 반론이다. 아니, 페미니즘을 위한 '지루한' 반론이라는 것이 보다 명확한 문장이 될 것이다. 02년부터 06년까지 짧지 않은 기간동안 관련한 많은 말싸움-논쟁, 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는-을 보아 왔다. 4년간 변하지 않는 오해는 지루하다. 하여 지루한 글을 쓴다.
나는 그 몇 가지 오해들을 '1페미니즘과 여권의 문제' '2여성우월주의' 페미니즘의 '3비일관성/4과민반응성/5부르주아성' 그리고 페미니즘의 '6남성에 대한 적대성'로 범주화해서 다루어보려는 생각이다. 1학년 때로 돌아간 기분으로 그렇게 즐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1. 여권신장
일단. '여권'과 관련된 문제를 먼저 다루어보자. 지난 글에서 나는 '꼭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여권/여권신장>이라는 용어를 운운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꺼냈으니까 그에 대한 책임 부터 지는 것이 예의일 테니까. 자, 그러면 여권이 무엇인가. 이는 여성의 권리, 권익 정도를 뜻하는 그런 단어다. 권리와 권익은 정치적인 용어이며, 실제로 '여권'이라는 용어가 엄밀하게 사용되는 경우에 이는 '제도적/법적/정치적인 여성의 권리'를 의미한다. 혹시 당신이 '여성의 전반적인 세력/권력'을 여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생각을 조금 바꾸어야 한다. '전반적인 세력/권력'이란 애매하고 불가해한 가히 종교적이기까지 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용어는 사회와 관련된 논의에서 설 자리가 없다. 감정 싸움을 하고 싶다면 쓸모 있는 용어일 지 모르겠지만.
이미 '여권/여권신장'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정의된 그러한 용어이다. 당신이 특별히 다른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이 용어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만큼 논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것 없이 '여권'을 자기 식대로 알 수 없는 정의로 정의해버리고 여권을 운운하는 것은 우습다. 그것은 페미니즘의 초기 조류인 '자유주의 페미니즘(여성의 제도적/법적/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남성과 '동등한' 평등을 위한 운동)'의 역사적인 용어인 것이다. 그리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는 일정 정도 달성되기는 하였다. '일정 정도는.' 적어도 한국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가지고 있고, 제도적으로 경제적 주체가 되는 데 아무런 거슬림이 없으며, 법적인 차별도 그다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호주제와 같은 법적/제도적인 성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미혼 여성은 대출 서비스 등에서 구체적으로 차별받는다. 비록 이제 많은 부분에서 '여권'이라는 것이 신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러한 불평등이 존재하기에 나는 여전히 '여권의 신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여권의 신장'이라는 용어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 획득을 목표로 삼는 운동이기에, 이것은 여성 우월주의와 아무런 연관을 가지지 않는다.
2. 여성우월주의
자연스럽게 이와 연동하여 페미니즘의 소위 '여성 우월주의' 경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어쩌면 페미니즘에 대해 가장 지독하게 쏟아지는 오해는 여성우월주의와 관련된 무엇일 테니까. 보통 페미니즘과 여권을(그 맥락을 모르는 채로) 함께 들먹이는 사람들은 보통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여권은 이미 평등해졌는데 왜 더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지배를 위한 그런 움직임이 아닌가?'
일단 여성의 제도적/정치적/법적인 위상이 남성과 평등해졌다는 헛소리에 나는 '여권'부분에서 밝힌 것과 같이 나는 동의할 수 없다(혹시나 군가산점 제도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하시길. 그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면 이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정치적 여권 신장 차원을 넘어선 페미니즘 제 조류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기에 일단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당신이 잘 모르는 여러 부분에서 여전히 제도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빼앗은 자에게는 빼앗긴 자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항상 가당찮게 보인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여성의 우월성을 지지하지도, 그러한 여성에 의한 남성의 지배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아, 혹시 당신이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에 속하는 활동가와 꽤 친하게 지낸다거나 한다면 당신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우월성을 지지하는 것 처럼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페미니즘 내의 특정한 이론적/실천적 조류-래디컬 페미니즘, 으로 분류되는데 이것도 참 애매한게 래디컬 페미니즘이 가부장제 이론<나보다 훨씬 쉽고 잘 설명한 책이 수도 없으니 생략>을 전제로 하는 페미니즘 전반을 칭할 때도 사용된다. 아무튼-에서는 여성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여자가 남자를 통치해야 한다'는 초딩이나 생각할 법한 성적 우월성 판타지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초딩에게는 참정권이 없는 거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여성우월주의는 보통 젠더<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성성>로서의 여성성-그러니까 소위 우리가 '여성적 특징'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러한 성향들-을 젠더 남성성보다 우위에 놓는다거나, 포스트모던과 결합하여 '여성성 전반'-이를테면 닫힌 계보다는 열린 계를 선호하고, 획일보다는 다양을, 경쟁보다는 자매애를 선호나는 식의-을 긍정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런 식으로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론은 분명하게 말해서, 있다. 주위의 사람들 중에 혹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해야 된다. 그는 당신이 그렇게 공격해 마지 않았던 여성우월주의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내가 방금 언급한 그런 사람을 보고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태는 보다 단순할 경우가 많다. 일테면 '저들은 섹스적<생물적, 이라는 뜻으로 여성학 일반에서 사용된다> 여성이 섹스적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 여성이 남성을 다스리는 세상을 바라는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거나 음. 써 놓고 보니 이거 1학년, 3.8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했을 때 종묘공원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님들께서 내게 한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소개를 바란다. 페미니스트와의 논쟁에서 '승리'라는 것을 좀 거둬볼 절호의 찬스일테니. 아무도 모르는 내 옆집 아주머니가 그런다면 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사는 수 밖에.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에 대한 쌍둥이꼴의 대립항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성이 우월하다고 우기는 가부장제 구조와 전혀 다른, 양 성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페미니즘의 어떤 부분이 여성 우월주의로 해석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다만 그것이 국회 수위아저씨를 붙들고 우리 나라 정치판 왜 이따위야. 너 때문이야 이 자식아. 라는 식의 플레이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
3. 비일관성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는 페미니즘에 대한 희화화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페미니즘의 비일관성과 과민반응성, 그리고 부르주아성에 대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 하나씩 논의해보자. 먼저 비일관성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으로서의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에서는 여성임을 내새우면서 뒤로 빠진다는. 그와 관련한 무수한 희화적인 텍스트가 인터넷에 나돈다. 동화 형식을 차용한 것도 있고. 만화도 있고. 플래시도 있고. 아이구 신난다. 그렇게 딱 봐도 바닥이 보이는 운동과 이론이 퍽이나 몇십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겠다. 참도. 이 험한 세상에서. 설마 페미니즘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기를 부디 바란다. 그렇게 순진하게 세상 살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집에 차압딱지 붙는거 시간 문제다.
이미지화는 적에 대한 굉장히 효율적인 방법이다. 옛날, 반공 세대들은 북한 사람은 머리에 뿔이 돋은 도깨비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단다. 그렇게 선전했었으니까. 그것은 굉장한 효과를 지닌 선전이었다. 실제의 것이 아닌 다른 부정적인 이미지를 적에게 덧씌우는 방법은 고전적이며, 고전적인 모든 것이 대체로 그렇듯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효과적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초기 마초들의 공세도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여성으로 얻을 것만 챙기고, 힘든 일이 생기면 빠진다. 그러면 그 말을 장애인들에게도 해 보자. 장애인은 복지수당 받으면서 팽팽이 집에서 놀면서 군대도 빠지고 장애고용할당인지 하는 법 덕에 이 청년실업 시대에 취업도 잘 되고 하니 이것 참 나쁜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실제로 장애인의 삶이 그러한가?
질문을 바꾸겠다. 실제로 당신이 만난 페미니스트가 그러한가? 대학을 다니면서 소위 언론 활동이라는 것을 하며 나는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도 만났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행사를 치르다가 연행된 사람도 만났고, 여성의 이름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도 만났다. 그러나 나는 비일관적이고 분열된 페미니즘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어떤, 조작된 이미지가 아닌가? 인간은 환상의 빵을 씹으며 배를 채우고 환상의 섹스를 통하여 종족을 보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살아간다. 환상에 존재하는 이미지가 아닌, 실존하는 페미니스트로부터 당신은 그러한 비일관성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것은, 분명하게 말해서, 가부장제가 그들의 반역적인 적들에게 덧씌운 이미지이다(예전에 쓴 '쉬운 사회학 2부'의 표현을 빌려서). 그에 말려들어가면, 당신은 조종당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이퍼리얼리스트가 되지 말고.
4. 과민반응성
YWCA의 활동이 언젠가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 왜 있지 않느냐. 조리퐁이 여성의 성기와 닮았다는 이유로 태클걸고, 테트리스가 성적인 게임이라고 태클걸고 하는 '기독교' 여성 단체. 이것을 가지고 페미니즘의 민감성에 대한 희화화가 이루어진 것을 몇 번 보았다. 뭐 그런 거 가지고 오버야. 하는 식의. 일단 이거, 웃긴 일이다. 이 단체가 하는 짓을 가지고 '성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 븅딱'이라고 하는 경우는 자주 없는 것 같으니. 섹스 어필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은 YWCA의 내부에 존재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기독교의 성적 엄숙주의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을 페미니즘과 연결시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데 써먹는다. 열심히 조종당하시길. 나는 그런 그들의 죽은 정신에 조종弔鐘을 울리리라. 그것은 페미니즘과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것 이외에도 페미니즘의 과잉 민감성은 때로 공격의 도마에 오른다. 부모성 같이쓰기라던가, '여남이 함께하는' '그남/그녀'식의 용어 사용라던가, 사소한 말실수를 가지고 '언어 성폭력'이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거나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자. 나는 1,2,3번과 달리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것을 변론할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민감한 정치이니, 민감성은 당연하다. 나는 그것을 지지한다. 비록 나 역시도 '언어 성폭력 가해자'로서 학교 총여학생회실에서 반성문을 썼던 자랑할 만하지 못한 경력을 가진 마초이지만.
근대 자유주의 정치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시기에 초기 페미니즘이 전개되었다. 그 이전까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던 여성이-참정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투표권마저도 보장되지 않았다-남성과 동등한 정치적/제도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시도가 바로 최초의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영국을 필두로 한 근대 유럽 국가들로부터 페미니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만큼 강대한 파급력와 이론적 기반을 갖춘 시기는 68혁명의 전후라 할 수 있다. 인종, 노동, 환경, 여성, 하위 문화 등의 주변부가 폭발해나오던 그 시기에 페미니즘은 일대 혁신을 이뤄내었다. 기존의 거대 정치 담론이 포섭할 수 없었던 미시적 영역에 대한, 정치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아닌 그저 일상적인 것이라고 여기어지던 개인과 개인 간의 상호작용, 사랑, 가족 등에 대한 분석과 실천을 통하여 페미니즘은 그 외연을 확장한다. 물론 이는 다만 이 시기의 지적 유행-미시성과 일상성의 중시-의 결과로만 치부할 수 없는, 페미니즘 본연의 문제 의식과 관련한 결과다(초기 페미니즘 이론가 중 하나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일상이 곧 정치'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여성주의 뿐 아니라 많은 미시사회이론의 근간이 되는 이 선언은 여성주의에서 특히 유효하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제도적/법적/정치적/경제적 억압 이상으로 일상적/문화적/상징적 위상에서 이루어진다). 페미니즘은 그러한 일상성과 미시성을 중요시한다. 당신이 정치적 입장을 밝히며 '나는 페미니즘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 만큼, 당신이 일상에서 특정 성을 비하하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나처럼 '에이. 누나 거울이나 보세요'라는 농담을 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행동이 된다(덕분에 나는 반성문을 썼다. 아무튼). 페미니즘은 실제로 민감하고, 미시사회학이나 사회변동론에 대한 고민이 없는 상황에서 이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과민반응'하는 그런 것 처럼 보일 지 모른다. 그러나. 잊지 말자.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는 무심코 죽지 않는다. 압제자만큼 압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5. 부르주아성.
페미니즘을 부르주아성을 띈 것이라고 비난하는 건, 어처구니없는 코메디다. 무슨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지 모르겠는데, 일단 완전하게 부르주아적이지 않은 것은 프롤레타리아적인 것 밖에 없다. 그것은 환경운동이든 인종차별철폐운동이든 동일하다. 페미니즘이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하는 당신은 프롤레타리아 공산당인가? 나는 공산당이 싫다. 성과 관련된 전선과 경제와 관련된 전선은 당연히 일치하지 않는다. 페미니즘 운동 분파의 몇 몇 실천은 부르주아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미국의 골프장이 있는데, 그 곳은 여성에게 회원권을 주지 않는다. 그러한 입장에 대해 페미니즘 세력의 공격이 있었다. 문을 열라고. 젠장. 그래. 골프장 회원권이 어떻게 되든 다수 여성과 나를 포함한 다수 남성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장애인용 휠체어가 비싸다는 이유로, 당신은 장애인 휠체어 생산시설의 정비를 위한 운동을 '그건 부르주아적이니까 때려 치워라'고 공격할텐가. 흑인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게 해 달라던 초기의 인종차별철폐 운동에 '그거 해봐야 돈 많은 흑인이나 좋자고 하는거잖아'라고 비난할텐가. 애초에 페미니즘은 경제적 운동과 다른 전선을 가진 운동이다(물론 연대할 지점은, 아주 많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 이전에, 페미니즘의 부르주아성에 관한 보다 본격적인 오해는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그것은 소수의 힘 있는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다. 라는 오해.
그래. 여성에게 고위 간부의 문을 열어준다고 해도 그 곳에 갈 수 있는 여성은 그야말로 힘 있는 소수다 물론. 그런 식이면 대학의 지역 할당제도 할 필요 없다. 지역에 할당해준다 해도 어차피 대학에 가는 건 지방의 공부 잘하는 놈들일테니까. 장애인 복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소수의 장애인들만 수혜를 받을 텐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필요한 것은 없다. 지금 눈 앞의 세상이 천국이다.
그리고 실제로 페미니즘 운동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힘 있는 여성을 위한 그런 운동이 아니다. 물론 가부장제 사회의 매스컴은 주로 거대한 그런 영역의 정치운동들-여성 정치 지도자나, 정책에 관련된-을 다루어주기에 그런 것 외의 것은 보기 힘들 테지만. 페미니즘에 관한 사이트 하나만 접속해서 거기 있는 글 몇개만 읽어보아도 풀릴 수 있는 오해이다 이것은. 성매매 피해 여성의 재활을 위환 운동, 빈민 여성을 위한 운동, 장애 여성의 인권을 위한 운동.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활동. 페미니즘 내에는 실제로 무수한 운동들이 존재한다. 얼치기 좌파 김규항이야 '그 페미니즘'이 어쩌네 저쩌네 헛소리를 날려대지만, 그것은 페미니즘 전반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없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최소한의 고민'과 관련하여 '최소한의 노력'만 해 주면, 당신은 '최소한의 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6.적대성
많은 사회 운동은 전투적이다. 그것은 불합리한 사회의 굳건한 '구조'를 타격하는 움직임이다. 그러한 움직임은 구조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보인다. 가부장제 구조에 대한 타격을 가하려는 페미니즘 운동은 그러한 시스템으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남성 마초의 눈에 적대적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의 남성은 가부장제 덕에 많은 부분에서 분명하게 수혜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구조의 수혜를 받는 압제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가부장제 구조에서 남성 역시, 수혜를 받는 것 만큼 많은 억압을 받는다. 사회는 당신에게 많은 부분에서 남성다울 것을 요구한다. 남성의 역할은 분명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역할이나, 잃는 것도 많은 역할이다. 그리고 어떠한 역할이든지 그것이 태생적 생물학적 성에 의해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것은, 폭력이다. 착각하지 말자. 당신은 어떤 측면에서 가부장제의 수혜를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가부장제 사회의 위대한 수령인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그런 당신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신의 뒤에 서 있는 그 거대한 구조를 부수려고 하는 것이다. 당신은 가부장제의 수호자일 필요가 없다. 사나이를 연기하는 일은, 지치지 않는가. 당신은 소중한, 로레알을 쓰는지 비달사순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중한 당신이다. 한낮 폭력적인 구조가 인격화된, 누가 되도 상관 없는 철수 영준 우식이같은 익명의 구조의 산물이 아니란 말이다.
몇 차례 강조했지만 페미니즘은 현재 가부장제 구조에서 남성의 위치를 여성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재의 성적 권력관계의 구조 자체를 허무는 작업이다. 국왕 한마리가 죽고 그 자리에 그 국왕의 아들래미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이행하려는 그러한 작업인 것이다. 페미니즘은 국왕의 충직한 백성인 당신을 성문 밖에 효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주인이 되는 민주정을 이룩하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폭력 혁명의 원칙을 고수하지도, 테러를 선동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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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정해버린 페미니즘에 대한 지루한 여섯 가지 오해에 대한 글을 끄적거린다. 손가락이 몹시 아프다. 머리가 아픈 글을 쓰고 싶은데 실제로 머리가 아픈 일들이 여럿 있기에 그런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이렇게 소프트한 글을 쓴다. 아니, 사실 머리가 아플 만한 글을 쓰게끔 하는 글이 있으면 아마 두통약을 씹어가면서 논쟁에 임할 것이다. 그런데 이 페미니즘이라는 게 참 논쟁을 하기가 힘이 드는 소재다. 왠갖 오해들로 뒤덮혀 있는데, 그러한 오해들이 내가 처음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주워듯게 된 이후로 전혀 발전이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제 5년 더 기다리면 무언가 '획기적'인 것이 나올까. 쳇. 사회가 획기적으로 변해야 사회 속의 이야기가 획기적이 되지. 엽기적인 사회에선 엽기적인 이야기밖에는. 오해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사회 속에서 살기만 했다면 나도 뭐 다를 건 없었을테니. 서울대 법대, 여성 열풍! 이라는 제호로 여성 교수가 무려 14%나 된다는 헛소리나 싸대는 신문을 보며 뭘 배울 수 있을까.
오해로 둘러쌓인 것을 중심으로 논쟁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와 당신이 자유주의에 대해 논쟁하려면, 우리는 조선 시대를 논쟁의 중심 소재로 두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는 서로 다른 자유주의의 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나의 자유주의는 이렇고 당신의 자유주의는 저럴 수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하여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규정성과 관련한 논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사실과 다른 자료를 기반으로-이를테면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자가 전세 비행기를 통하여 자유롭게 해외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거나 하는 환상적인 그런 자료들-조선시대의 정치이념이 자유주의라고 우긴다면 우리는 논쟁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논쟁을 즐기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책마을을 좋아한다. 닫힌 공간이기에 오히려 논쟁에서 치열하고, 성의없는 한줄 욕설도 무책임한 선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책마을에서 나는 페미니즘을 가지고 언젠가 즐거운 논쟁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장문의 글을 남긴다.
이런 오해들을 이렇게 거두어내고, 이제 당신은 물을 수 있다. 그러면 페미니즘이 무엇이냐고. 그래. 어쩌면 당신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논쟁에서 나는 주로 나의 입장으로 상대를 공격했지, 상대의 공세를 먼저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기기 위해 비겁해지는 논쟁주의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나는 페미니즘 논쟁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허깨비같은 오해들을 숙청하기 위하여 글을 쓴 것이다. 이제야 나는 당신의 그런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된 것이다. 오해들 뒤에 존재하는 페미니즘이라는 게 무엇일까.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여기서 여성에 대해 가해지는 구체적인 억압 상황에 대한 세밀한 분석도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것을 전제로 글을 썼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오해에 뒤덮힌 사상으로 전장에 나서는 건 공포탄을 들고 전장에 나서는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그저 웃기는 꼴이 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야말로 논쟁의 대상이 될 만한 이야기라는 것이 두 번째 이야기다. 앞으로 차차 이야기하면 될 거, 같이 만들어가야 될 꺼 나 혼자 헛짓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우리는 논쟁을 할 수 있으니까, 내일은 내일 모래는 조금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억압에 대해서도,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그저 페미니즘 일반론에 대해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 정도만 더 이야기하고 이만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인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워서, 나는 TNT 탄약고 부지를 정화하는 데 있어 식물 정화법을 쓰면 입상 활성탄 공법의 30%비용으로도 정화가 가능하다는 논지의 알 수 없는 글을 번역해야 하니까. 아무튼. 덧붙이자. 오해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적대적인 것도 아니고, 현 권력 구조 상에서 남성을 여성으로 치환하여 여성 제국을 건설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뭐 그런 분파도 있기는 하지만, 80년대 한국 학생운동에는 폭력 혁명을 조장하는 세력도 있었다니 그냥 웃어두고 넘어가자. 그 만큼 의미 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당신을 가부장제 체제의 남성으로, 당신이 이성애자라면 당신이 사랑하게 될 여성을 가부장제 체제의 여성으로 종속시켜버리는 그러한 구조에 대한 싸움인 것이다. 페미니즘은 복수가 아니다. 증오를 동인으로 움직이는 정치공학도 아니다(어쩌면 그래서 내가 페미니스트가 못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성격이 워낙 찌질해서). 그것은 '여성인 내가 이렇게 당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 고통받는 구조에 대한 타격을 선동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물론 함께 고통받는 구조는 남성에게 보다 착취자의 역할을 부과하고 여성에게 보다 피착취자의 역할을 부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잊으면 안 된다.
물론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앞으로의 움직임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면 페미니즘 내에서도 무수한 논쟁이 존재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베이스는 그렇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만 끝이다. 아, 혹여 오해하는 경우가 생길 것 같아서 덧붙이는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내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가부장제가 내 삶에 존재하는 중심 모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여성에게 숱한 성적인 폭력-광의의 의미에서-을 끼치며 살아 왔고 실제로 언어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런 내가 무슨 페미니즘이냐. 다만 나는 페미니즘의 기본 기조에 많은 부분에 동의하는 정도랄까. 어떤 전선을 나누고 있건 간에, 억압적인 권력은 좋지 않은 거니까. 나는 착한 척 하고 싶다. 양성평등에 동의한다는 말을 쪽팔림 없이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도 여자는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거나 하는 헛소리 없이.
그러니까 모두
메롱.
마음의 키가 자랐기를 바래요.
상병 송희석 (2006/05/03 16:21:50)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드는 글인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영준님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위 '페미니스트'들이 갖고있는 지식수준들에 대해 쉽게 비판하신것을 보고, 세삼 밖에서 영준님을 만나서 이야기할수 있는날이 빨리 오길 바라네요. 또한 영준님에 지적수준에 대해 다시한번 경의를 표하며, 포스트패미니즘은 뒤로 넘어가고, 이글에 대해 반론할 거리는 전혀 없고,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서 논해볼 여지가 많이 있네요. 하긴 페미니즘도 제대로 이야기 안하고 포스트페미니즘을 이야기하니 저도 참 문제가 많은 녀석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글에 대한 보론 혹은 다른생각이라 칭하며 글을 화답해볼까 합니다.
상병 권오규 (2006/05/03 16:33:27)
제 키는.. ?
병장 박준응 (2006/05/03 19:17:42)
빙고! 라고 외치고 나서 바로 한 가지만 질문.
부르주아성에 대한 오해 부분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답변이 듣고 싶어졌어요.
어떤 부분이냐면, '골프장 회원권을 여성에게도 개방하라!'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부르주아적이라는 비난의 주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든데 여자라고 차별 받는 여공이라면. 그래서 그 여공이 그런 등 따숩고 배 부른 이야기 말고, 당장 노동판에서 명백하게 차별대우를 받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활동부터 먼저 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면(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들리지도 않겠지만) 그를 잘못된 오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까요? 스펙트럼이 넓은 페미니즘의 특성 때문에 충분히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런 여공의 편에 서서 '부르주아적'이야. 라고 그들의 페미니즘을 비판한다면, 그 것도 무지와 오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 않을까요?
일테면 이런 거죠. 전술적인 측면에서(미안해요, 빌려 써서) '골프장 개방을 위한 운동'은 힘 있고, 명망 높은 그래서 부유한 여성들을 위한 운동이므로 이슈화 되어 버리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그만큼 양성 평등에 대해서 토론(혹은 논쟁)할 꺼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매력적이지만, 그 전술적 가치 때문에 그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을 그 여공의 상황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놓기 위한 노력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는 면도 있을 거예요. 분명 '오해'를 기반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 자체를 흐트려 놓으려는 힘 또한 존재할 테니까요. 그런 그들의 '전술'에 말려드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그 골프장 사건 같은 경우에는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비난이 아닌)할 수 있는 부분 또한 존재하는 것 같은데요. 물론 그것은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서로 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그 설전의 대표적이라고까지 할 순 없어도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이 글의 정체성 - 오해와 편견의 척살 - 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질문...이어요.)
병장 김동환 (2006/05/04 09:21:44)
철학을 논하려면 입을 떼기전에 철학 공부를 해야하고
동생을 혼내려면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하고
노숙자에 대한 기사를 쓰려면 며칠은 직접 노숙자처럼 살아봐야 하고
아버지가 리모델링한 집에 불만을 털어놓으려면
공사장가서 벽돌이나 몇천장쯤 나르고 와라.
아버지가 언젠가 직접 해주셨던 말씀이에요. 그게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하시면서.
그런점에서 이번 글은 아주 고맙게 잘읽었습니다. 근데 교육학 시리즈는 언제쯤?(응?)
저는 페미니즘의 성패가 학문이나 이론적 완성보다는 실천적 연대 여부로 판명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애시당초 참거짓을 가려보자는 것이 아닌만큼 실천여부가 가장 중요하겠지요. 본문 상단에도 페미니즘의 덩치와 넓은 스펙트럼을 언급하셨지만 그래서 페미니즘의 가장 위험한 급소는 충분히. 귀찮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전까지 차려야 할 예의가 너무 많아요. 학생들은 4년만 버티다 기존 사회로 편입해버리면 되는데.
음..또.
저는 스스로를 마초라고 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권신장의 필요성과 의의에 동감하고 있으면서 장난스레 스스로를 마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것은,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언제라도 귀찮으면 마초가 될수 있다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막이나 안전장치 같아 보여서요.(제가 은근 막힌구석이 많습니다(땀))
그냥 든 생각이에용. 요즘 페미니즘 관련 글을 자주 접하다보니 과거 E여대 신문사에 놀러갔다
휘말렸던 '일선 페미니즘을 하시는 여자대학생들'과의 혈투가 떠오르는군요. 아..피똥쌀뻔 했드랬지요.(먼산)
병장 주영준 (2006/05/04 10:25:17)
동환 / E대학 신문사는 우리 신문사와는 좀 다르게 제법 실천적인 활동도 펼쳐내는 친구들이 많죠. 하지만 무엇보다 E대학 신문사의 핵심은 교지와의 '실천적 연대'가 잘 된다는 것. 반전정세때 인근 상가에 '평화의 비둘기 붙이기' 이벤트도 아마 교지와의 연대 속에서 실천한 걸로 기억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가 참 드물죠(아마 E대학 말고는 경남의 P대학이 거의 유일할 거에요). 우리도 그랬더라면 동환 씨하고 나는 면식이 있었을텐데, 아쉽네요(농담입니다, 농담).
'나는 마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은 분명히 스스로의 겸손이나 심리적 방어막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적당히 쿨한 척 하는 사회과학도들의 특기이고, 한때는 저도 비슷한 생각으로 그런 언사를 내뱉고는 했구요. 하지만 지금은 글쎄, 구체적으로 사건화된-울타리 안 표현으로 하자면 '문서화된'-가해자였던 경험도 있고, 실제로 아직 감수성이나 이론의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기에 여전히 그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귀찮으면 도망 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결의, 의 표현입니다. 나의 부족함에 대한. 그리고 이 글에서도 마지막 부분에 그러한 맥락에 대해 밝혔구요. 그나저나
교육학 시리즈. 이거 빨리 해야 할 텐데.
준응 /이 건 조금 있다가 이야기할께요.
병장 김동환 (2006/05/04 10:37:39)
영준//
그게. 폐쇄적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좀 쿨하지못한 구석이 있어요. 학교 '기관'이라는
타이틀에 묶여있다는 의식도 그렇고 아무래도 절실하지가 못하니까요.
저는 정말 막연히 아쉽군요. 면식이 있었다면 좀더 많이 배웠을텐데. 캬캬.
상병 이상훈 (2006/05/04 12:23:21)
많은 고민의 흔적이 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이러한 주제로 이야기 하신 듯해요.
군대에서 수많은 언어적/비언어적 행위들을 반성하게 됩니다.
여성이 없을 때도 잘해야되는데..(자책)
그래도 래디컬 운동, 김규항 씨의 논쟁은 참 어려운 문제같네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술적으로 회피하는 부분이거든요..
저도 어떻게하면 정면돌파할 수 있을지 궁리해봐야 겠습니다.
상병 이훈재 (2006/05/04 14:01:10)
실제로도 무례한 인상을 갖고 있는 저도 마음의 키가 자란 것 같습니다.
병장 주영준 (2006/05/04 15:34:53)
준응 / 골프장에 관련된 것은 준응 씨도 아시다시피 '오해'에 대한 풀이 과정에서 이야기한 예시이기에 참 미묘한 이야기가 필요할 듯 싶습니다. 일단, 페미니즘의 전선 차원에서 나는 그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다면 그와 관련된 실천을 하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유태계 독일인 사회학자 '칼'은 이 지점에서 '구체적 사실로부터 추상적 분석을 창조해내고, 그러한 추상적 분석으로부터 구체적 실천을 하라'는 단순명쾌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네. 실천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선상에서 이루어지는데 내 몸은 하나이니 우선 순위의 문제가 있겠죠. 그리고 우선 순위의 문제에서 아마 골프장 문제는 제게 좀 멀리 있을 듯 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프장 문제가 문제 내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사소한 문제이기에 우선 순위에서 밀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 억압적인 문제들, 그러니까 우선 순위가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실천이 존재하기에 그러한 실천이 '실천의 우선 순위'에 오르게 되는 겁니다. 말장난 같지만, 그만큼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기에 이런 식으로 씁니다. 또한 페미니즘 내부에도 많은 분파가 있기에, 골프장 문제를 두고도 전략상/또는 전술상으로 얼마든지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전술상의 문제에서, 전체 여성의 '여권'문제로 전선을 파악하여 여성-노동자 조직이라도 얼마든지 골프장의 차별을 철폐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뭐. 페미니즘을 떠나 제 입장을 이야기하라면, 역시 저는 다른 부분의 활동을 고민해보겠습니다. 골프보다 내게 직접적인 나의 문제가 많을 테니까.
그리고 실제적인 예에서 이 골프장 문제가 크게 일어난 것은 타이거 우즈 덕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03년 즈음에 이 클럽에서 PGA경기가 열렸는데 우즈가 차별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이유로 경기 불참을 선언했던가 그랬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보통 이 '골프장'같은 예를 이야기할 때 '그건 부르주아적이야. 굶어 죽는 여공이......'어쩌고 반박하는 작자들은 평소에 사회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코딱지만큼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얼마든지 냉소적으로 쏘아붙여도 준응 씨 쪽에 승산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너는 제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사냐? 너 불우이웃돕기 천원이라도 내냐'라는 기본 초식으로도 침몰할껄요. 물론 보통의 경우입니다.
상훈 / 일단 김규항이 01인지 02인지에 써갈겼던 '그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의 칼럼은 무가치한 쓰레기입니다(모르는 분을 위해서 잠시 설명하면 김규항은, 나는 한국 페미니즘이 도무지 마음에 안든다. 그들은 주로 중산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등등 등등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이 싫다. 그러니까 제가 본문에서 부르주아성과 관련된 오해를 다루는 부분과 관련된 그런 악선동을 늘어놓는 짓을 했습니다.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내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전체 페미니즘이 아니라 몇 몇 페미니즘이다' 이런 식의 자기만 간신히 빠져나가고 공세는 공세대로 내쏠 수 있는 구멍을 남겨두면서). 네. 물론 페미니즘의 부르주아성에 대한 공격은 이론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좌파의 탈을 쓰고 한 페이지 남짓한 내용도 제대로 들어갈 수 없는 분량으로 '악선동'하는 것은 참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오해와 악선동의 글입니다. 그래. 그런 페미니즘 싫어하라고 하십시오. 나도 김규항이 지적한 식의 페미니즘 조류에는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규항이 그런 식의 글을 그렇게 풀어내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래디컬 페미니즘 / 뭐. 이 지점이야말로 논의의 여지가 많은 것 같은데. 내 주위에서 쉽게 보이는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근대적 경제체제와 가부장제 양쪽과 관련한 사회/페미니스트이거나 아직은 고민과 공부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인지라서 저도 잘 모르겠네요. 소위 '고렙' 래디컬 페미니스트도 있긴 하지만 내 주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뭐한지고로. 구체적인 사안들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술적 회피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때로 피치못해 하는 경우가 있죠 (웃음)
동환 / 쳇. 언론협의회 판 만들면 신문사만 맨날 안와가지고 삐친 언협 인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상병 안대섭 (2006/05/04 16:25:03)
아, 김규항씨 그 칼럼 씨네21에서 한바탕 했던거 아닌가요? 어렴풋이 기억나네요. 03년도였을거에요 아마.
병장 주영준 (2006/05/04 16:26:12)
대섭 / 프리미어인지 하는 잡지의 최보은인지 하는 편집장인지 하는 사람하고 논쟁이 재밌게 되었던 듯. 저도 정확히 기억이.
상병 조주현 (2006/05/04 17:56:28)
즐거운 글이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아는바가 없던 저에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맨날 음악과 노는것만 좋아했었기 때문일까요, 안일했던 예전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짜릿함도 동시에 느꼈습니다. 차츰변해가는 자신을 만들어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현대 사회학은 아직도 펴보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책들 먼저! 라는 안일함이 죄라면 죌까요.
그러니까, 좋은 글 감사합니다(꾸벅)
병장 박준응 (2006/05/04 18:39:56)
영준 /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당신의 말은, 그리고 지금껏 당신이 내뱉은 수사의 칼날 중 가장 매서웠던 것은,
'그건 부르주아적이야. 굶어 죽는 여공이......'어쩌고 반박하는 작자들은 평소에 사회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코딱지만큼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얼마든지 냉소적으로 쏘아붙여도 준응 씨 쪽에 승산이 많을 겁니다.
랍니다. 네, 그렇죠. 실천을 코딱지만큼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쉽게 오해와 편견에 빠져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초보적인 초식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참 부끄러워지는 군요. 과연 그 코딱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궁금하구요. 글부터해서 답변 모두 명쾌해서 되려 제가 기분이 좋군요.
병장 노지훈 (2006/05/04 21:54:06)
boo라보! (웃음)
병장 박형주 (2006/05/04 23:39:29)
일단 린지 저먼과 우에노 치즈코에서 멈칫. '내셔널리즘과 젠더'는 통 못 구하겠더군요. 그리고 그람시가 부하린에 가한 강력한 공격-고작 사회학의 위치로 전락시켰다-을 떠올리는 지점에서 한번 더 멈칫.
재미있는 것은 김규항과 똑같은 얘기를 정희진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장 자체가 쌩뚱맞거나 영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문제는 역시 그러한 주장을 둘러싼 맥락이라는 건데, 그 논쟁은 김규항이 좀 지나치게 욕을 먹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박근혜 사유하기, 였나 하는 누구라도 한마디 했을 법한 건에 발끈한 것을 발단으로 하는 점으로 정상 참작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다시 말해 그와 같은 논리를 다른 입장을 취하는 페미니스트가 개진했다면 그것이 그렇게까지 비판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물론 주된 비판의 지점이 그 지점(내용이 아닌 그의 포지션)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타당하다고 생각되지만 역시 '지나치다'는 느낌은 남는 거구요.
주류 여성운동 혹은 페미니즘이 중산층 이상 되는 이들의 운동이라는 비판은 영준씨가 언급했듯 애초에 경제적 운동과 다른 전선을 지녔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하면서 도매금으로 페미니즘 일반을 싸잡아 매도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모든 여성을 포괄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페미니즘 혹은 여성운동이 중산층 이상 주도로 간다는 것은 물론 비판의 여지가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그리 설득력이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역시 영준씨가 언급했듯 그 다양한 스펙트럼과 쉽사리 동일시할 수 없는 각 조류들이 도매금으로 매도된다는 점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요.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관제 부인운동의 전통이나 '주어진' 권리(참정권이라거나), 민족 문제와의 관련에 대해 뭔가 좀 얘기를 했으면 좋겠지만 생각이 정리가 덜 된데다가 자료도 하나도 없어서 뭐라 쓸 내용이 없는 게 안타깝네요. 다시한번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음 저는 아는거 쥐뿔도 없더라도 페미니스트이고자 합니다. '노력하는 마초'같은것보다는 건강한 태도라고 생각하거든요. 내입으로 페미니스트입니다. 라고 하긴 좀 그렇고. 아,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남자 제일 싫어한다던데.
병장 주영준 (2006/05/05 17:05:13)
형주 / 드디어 형주님이 출동하셨군요(책마을 메인게시판 이훈재 님의 '지루한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 17번째 이파리 참조). 이거. 바싹 긴장해야겠습니다. 하하.
우선 정희진의 주장과 이야기는 제가 실제로 접하지 못했기에 함부로 말하기가 애매한 지점일 듯 합니다. 뉘앙스와 맥락이 굉장히 중요한 미시적 분석에서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전반적인 논리'만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도 전반의 논리'만'으로는 어느 정도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것을 예민한 눈으로 보았을 때 굉장한 폭력성이 드러난다는 것이 그에 대한 공격의 핵심이 되는 거지요. 오랫만에 정희진이란 이름을 들어서 신나는 어린이날 하루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 스탠스를 잡기에 가장 애매했던 '부르주아성'이 역시 여러가지로 이야기가 되는군요. 준응씨도 그렇고, 형주씨도 그렇고. 네. 다시 강조하는 건, 이것은 '나의 페미니즘/특정한 페미니즘의 조류' 혹은 '나의 정치'의 입장을 위해 쓰여진 글이 아니라 '페미니즘 전반'에 대해 쏟아지는 오해와 악선동에 대한 <척살>을 위해 쓰여진 글이라는 겁니다. 제가 '페미니즘의 전선은 당연히 다른 전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은 그와 관련된 부분이었구요. 물론 실제로 그렇습니다. 환경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그런 것처럼,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체 인간 해방을 위한 활동이지만, 그것 자체의 독자적인 영역과 전선을 가진 입장입니다. 페미니즘에게 환경보호를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건, 20세기 초의 러시아 혁명군에게 여성해방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억압의 전선은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기에 얼마든지 '실천적 연대'는 가능합니다(글쓰기의 환경과 관련하여, 예시 들기의 적정치 않음과 용어 선정의 적정치 않음이 참 어렵습니다만, 이런 문제제기를 하신 형주 씨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반전 운동에 동성애자들이 무지개 깃발-동성애자인권연합의 상징적인 깃발-을 앞세우고 정말 가장 열성적으로 함께 한 것 처럼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본문과 관련한 '일반 페미니즘' 이야기.
'애초에 모든 여성을 포괄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그리 설득력이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의 부분이 참 저로서 해석 곤란입니다. 두 가지로 해석이 나와서요. 첫째 해석은, 형주씨가 '페미니즘은 성을 전선으로 파생되는 운동이고, 그러한 운동에서 성 외의 다른 권력관계-계층이라던가 하는-의 우위에 선 여성이 운동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필연이고 실제로 그러하니 영준의 접근법은 위험하다'. 둘째 해석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 전체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이나 그 내부의 특정한 페미니즘 조류이다' 이거. 써 놓고 보니 두 개의 해석이 아니라 두 개의 오해인 듯한 느낌이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흐윽.
첫째 해석과 관련해서라면, 저는 형주씨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다층적인 전선이 만드는 억압 상황-인종/성, 성/계층, 인종/계층 따위의-에서 한 억압 상황의 피억압자가 자동적으로 다른 억압 상황의 피억압자와 연대를 하지는 않습니다. 소수인종의 인종차별철폐운동 내에서 얼마든지 성적 억압을 파생하는 경우-백인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성적 공격을 은유적으로 선동한다거나 하는-가 역사적으로 있어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인종철폐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수도 없구요. 피억압의 경험으로 출발한 운동이라면 그 정도의 예의는 차리게 됩니다. 조금, 이 아니라 제법 관념적인 주장일 수 있겠지만-일테면 실제 한국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여성주의의 대립지점을 보자면 대략 난감. 하지만 한국 민족주의 운동을 나는 아직 '피억압자의 운동'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조금 저어되는 구석이 많아서-말이에요.
또, '사실 자체를 부정'이라고 하셨는데, 이 지점에서 저는 다시 한결같습니다. 여성운동의 사실 자체가 타 권력관계에서 상위에 있는 사람이 '끌어가는' 식의 운동입니까? 7,80년대 페미니즘이라고 할 만한 여성 정치운동이 시작할 때 즈음의 이야기라면 모르겠지만-그때는 분명 제 진보 운동의 '분파 운동' 수준이었으니까-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중 운동이죠.
둘째 해석과 관련해서라면, 저도 형주 씨와 같은 입장입니다(푸핫). 넘겨집는 감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서 제가 굳이 페미니즘과 경제적 운동의 전선을 분리해 설명한 이유는 저의 페미니즘이나 정치와 상관 없이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오해와 관련한 것이었구요.
한국적 특수성과 관련해서는, 이거 정말 재미있을 듯 합니다. 저 역시 생각도 안되고 자료도 없는데. 예전에 한번 잠깐 고민하는 척 할때 주워섬긴 자료 중에 '한국 페미니즘 운동은 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 내에 분파 운동으로서 시작되었다' 식의 자료가 있어서, 그쪽으로 몇 번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물론 현재 페미니즘을 전체 운동 내의 분파운동이네 어쩌네 했다가는 당장에 '그래서 맑시스트나 파시스트나 설거지...'이야기가 튀어나오겠지만. 기원과 특수성의 탐구에서 80년대 민주화 관련 자료는 분명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여성운동의 기층-기층이란 것도 참 웃기지만. 성매매 피해 여성 재활이라거나 하는 일선 활동-인자들 중 많은 분들의 시작이 '페미니즘 자체'라기보다는 소위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여성 관련 관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물론 소위 '영 페미니즘' 계열로 일컬어지는 한국내 페미니즘에 대한 접근은 다른 관점에서 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테지만. 그리고 형주씨가 언급한 관제 부인운동, 은 제게 좋은 인사이트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마초라 언명하는 것과 페미니스트라 언명하는 것 관련해서도 은근히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역시 저는 아직은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쓰기가 저어됩니다. 동환씨나 형주씨와는 달리 실제로 다치고 다치게 한 적이 있는 경험을 아직 제 안에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 때문이랄까요.
한참 쓰다 보니까 석순. 보고 싶네요. 형주씨의 전직이 궁금하기도 하고. 전공은 신방이었다지요?
병장 박형주 (2006/05/05 21:55:05)
영준/정희진은 공공연히 '한국 여성운동은 중산층 고학력 여성 주도적이다'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그의 정치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나올 법한 주장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저 명제의 사실 여부를 따지자면 이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근거가 페미니즘 전반에 대한 폄하의 목적으로 제시되었을 때(본인이 인정하든 안하든 김규항의 경우라거나)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역시 그 뉘앙스와 맥락의 차원이라는 점이라는 겁니다. 영준 씨도 이 지점에서는 크게 생각이 다른 것 같지는 않구요.
저 애매한 문장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두 가지 의미 다라고 하는 편이 맞겠네요. 의도한 것은 첫 번째 의미에 가깝습니다만. '주도적'이라는 표현이 아주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표한다'거나 '끌어간다'는 뉘앙스라기보다 '보다 대중적/사회적으로 부각된다'는 의미에서 주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점에 관련해서, 일단 '페미니즘'이라기보다는 '여성운동'이라고 해 두죠. 예로 호주제 철폐 문제나 YWCA의 일련의 활동들(물론 테트리스 따위 이야기가 아닙니다)이 여성 노동자 문제보다 더 쉽사리 이슈화되고 행동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 같은 경우의 중요성과 의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들 자신의 조직화라거나 차별 시정, 정당한 권리 행사, 여론 환기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는 거죠. 반면 '여성신문'같은 그나마 여성계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언론사의 사장이 보수 정당에 입당했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물적 기반이 있는 집단 혹은 조직의 경우 그 계급적 관점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주 새삼스럽다거나 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여성신문을 본 적이 없어서 평소 그 신문의 정치적 스탠스가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약간 찜찜한 구석이 있지만, 그 특정 여성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두고 일어났던 일련의 논쟁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 사안이 워낙 민감하고 특이한 건이었다는 점이 있지만, 여성 노동권이라거나 하는 사안에 비해 더 쉽사리 이슈화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타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쪽이 '끌어간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계급운동이 아닌 이상 계급적 우위에 있는 쪽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여성운동이 아무리 대중운동이라고 해도 말이죠.
다만 저는 여성운동이 전반적으로 중산층 이상 주도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점이 내부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여성운동 또는 페미니즘의 근본적 모순이라거나 한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구요. 그것이 영준씨가 말했듯 피억압의 경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상의 이론적 진화를 통해서, 그리고 다른 운동과의 연대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하니 '관제 부인운동'에 관해서 약간 언급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이후 소위 '부인'운동이라는 것은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인의 자유,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자생적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부인도 교육을 받아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식의 동원된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고 봅니다. 물론 '여성 해방'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한 축인 기독교 여성운동 역시 자유주의적 개인 해방의 논리보다는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고 제국주의 논리를 설파하는 기능을 했다는 점에서 서구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예로 여성 선거권이 도입된 것이 결코 서구에 비해 늦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여성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어진'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여성운동은 관제 운동, 그리고 기독교 운동이 지닐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발전해 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그러한 운동들을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무산 운동이 20년대 등장했지만 시대상황과 관련해 늘 순탄치 못했다는 점 역시 지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2,30년대와 70년대의 여성 노동자 운동이 더 큰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거겠지만 여성운동 전반에서의 보수적 성격이 강화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몇 가지 예를 더 들 수 있을 듯 하지만 역시 글쓰기의 환경상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네요.
'관제'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운동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민족운동과의 불가분의 관계 하에서 발전해 왔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피식민국 그리고 분단 체제에서 여성운동이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은 일정 부분 진보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보수적 성격이 더 부각된다고 보지만요. 얼마 전에 '1세대 여성학자'니 '여성운동의 대모'니 하는 이효재의 책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7,80년대 쓰여진 글에서도 '여성운동은 민족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와서 저런식으로 주장하는 경우는 잘 없지만, 당시로서는 저 인식 자체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시대적으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인식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효재는 계급적 민족적 관점을 강조하는 점에서(게다가 진보적 기독교 운동과 관련해서) 분명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준씨가 언급한 민주화 운동과의 관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고. 다만 영 페미니즘-짐작은 가지만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계열의 경우 앞서 언급한 특수성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데도 동의합니다.
별수없이 반쪽짜리 논의가 된다는 점이 아쉽지만 뭐 우리끼리라도 의미있을 수 있다고 봐요. 개인적으로는 대학 저학년 세미나 정도 한 수준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놓는 터라 좀 아쉽긴 합니다만.
상병 송희석 (2006/05/05 22:29:41)
이게 저학년 세미나 정도 수준이라면 거참, 내가 여태까지 대학 세미나를 우습게 생각했던것에 대해서 심히 반성을 해야겠네요. 좋은글 보고 갑니다. 할말은 참 많은데, 옆에 쓴 거 마무리해야겠네요. 쩝.
일병 황성규 (2006/05/06 11:43:54)
단지 '학년'만 저학년이고, 학번은 그렇지 않을수도..
병장 한상원 (2006/05/08 17:01:54)
최근의 책에서 정희진씨는 장애인과 여성, 경제적 약자인 계층 등등 사회의 소수자 중심의 운동 사이에서 복잡하게 나눠지고 있는 전선 위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인 백인 남성과 장애인인 흑인 여성의 연대는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한가와 같이 장애/비장애 문제와 인종문제, 계층문제가 극도로 복합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양상이라는거죠. 저 역시도 매번 온갖 논쟁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에는 그 복잡한 전선들을 헤집어 가지런하게 하는 것에서 지치기 시작한달까.(사실, 저는 전선을 가지런하게 하는 일이야 말로 정치의 본연이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쨌든, 저는 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소수의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현실이 여권 신장의 길을 어그러뜨리고, 오히려 여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새로운 분열을 낳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뉴스에도 10대 기업 여성 취직률 늘어-이런 식으로 화면 아래에서 흐르는데, 정작 10대 기업의 직원 중 여성 비율은 20%를 겨우 전후하는 수준이고, 그 중 롯데나 풀무원 등등과 같은 기업에는 영업, 판매직의 여성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죠.
덧붙여, 부르주아성은 비단 페미니즘에서만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진영의 변혁에서 누가 혜택을 볼 것인가, 저 발화자는 어떤 정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가라는 핵심을 비껴가는 논리로서 질문의 정확한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것 같아요. 견해나 발언이 계층이나 소속 집단과 같은 사회적, 개인적 정황에 좌우된다는 것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정작 발언의 모든 추적은 대개 그런 배경으로 향하게 되는 듯 합니다. 부자니까, 가난하니까, 예전에 뭐뭐 했었으니까.
어쨌든 글 너무 너무 잘 읽었습니다. 나름대로 부족하지만 많은 고민을 하는 부분인데 또 들을 기회를 기다리게 되는군요.
상병 송희석 (2006/05/08 19:16:28)
영준 : 형주 // 전 두분께 진심으로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영준님이 지적하신 6가지를 벗어난 꽤 의외에 페미니스트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통해 꽤나 당황스러웠고, 사고방식이 전혀 달랐으며, 결국 소통이 불가능해서 입만 아픈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뭐 이런 사적인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저는 이것을 집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현 페미니스트중 극히 일부 - 솔직히 일부는 아닌것 같습니다. 몇몇 뛰어난 학자들도 지적하는 민족주의에 숨겨져있는 남성우월주의 비판 - 중 신화에 숨겨져있는 남성우월주의나 혹은 민족주의에 숨겨져있는 남성우월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틀이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이런겁니다. 단군신화에 따라서, 환웅은 환인의 서자로서, 환인의 아들인 단군은 신 = 아버지 = 자신 이라는 계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신성한 하늘의 존재인 반면에 그의 어머니는 열등한 존재, 곧 인간이 되고싶어 환웅을 찾아온 곰이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입니다. 그리고 웅녀에게는 인간이 되기 위해 환웅의 말에 순응하며 견딘 끝에 여자로 다시 태어날수 있었습니다. 인간보다 열등한 곰이 여자로 다시 태어나는 길은 백일동안 마늘과 쑥으로 연명하며 긴 어둠의 동굴을 통과해야 가능한것이고, 나아가 그것은 신탁을 받은 환웅의 말을 절대명령으로 받아들여야 이뤄지는것입니다. 결국 태초의 말씀이 있었으니 라는 것이 결국 태초의 환웅의 말씀이 있었으니 웅녀가 있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뜻일까요? 여기서 그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여자는 환웅을 잉태한 어머니가 될때에야 비로소 남성공동체와 역사의 참여할 기회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즉, 민족주의가 살아있는 단군신화에서 그러한 페미니즘을 고찰하는 것입니다.
허나 과연 그것이 제대로된 페미니즘일까요? 단군신화는 분명 민족주의가 가득찬 신화입니다. 당시 근대화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맞물리고,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다시 민족분열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위기와 상실의 위협에 맞서야 했던 우리 민족사가들에게는 과거는 찬란한 영광의 역사나 이민족으로부터 굳건히 맞서 민족과 국가를 지켜냈던 항거의 역사가 있어야 하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에 의미는 고구려의 찬란한 영광을 다시 기억하고 복원하는 방식을 택한것이고, 추후에 민족정신이나 민족혼이 살아숨쉬는 즉, 화랑정신이 숨어있는 신라가 새로운 조명을 받기도 하는 겁니다.
근대 계몽주의성격장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당연한 것인데 - 당연합니다. 그당시 시대적 상황에 미루어보아 그렇게 하지라도 않으면 민족뿌리가 영원히 임나임본부설같은 엉터리 설에 파묻힐것 같기도 해보이니까요 - 이것을 남성우월주의식 민족주의담론이라 여기고, 환원주의식으로 빠져들어 그것을 공격한다면 과연 정당한 걸까요?
과연 그렇다고 영웅적 모습을 같고있는 '잔다르크'를 위새하여 이야기한다면 그것또한 페미니스트들은 - 여기서 주의할점! 제가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주의담론에서 반론을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뜻합니다. - 여성의 여성성은 결국 남성과 같이 위대한 영웅적 모습으로만 표현해야 하는가? 식으로 물고 늘어지지 않을까요?
자! 이제 저는 궁금해서 이분야에서 뛰어난 형주님과 영준님께 물어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점이란, 민족주의에 살아숨쉬는 역사적 고찰을 남성우월주의식에 담론뿐이라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해서 말이죠. 만약 영준님과 형주님이 제가 말씀드린 페미니스트들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왜 이렇게 생각할수 밖에 없을까요? 더 근본적인 시대적 상황부터 파고드는것이 당연한것 아닐까요? 아니면, 신화가 숨겨져있는 그러한 모습이 존재했다면,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남성우월주의가 없는 신화는 과연 존재하나요? 자 이제 답변을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병장 한상원 (2006/05/09 08:05:57)
희석/확립되어 있는 역사적 사료라든지 신화의 경우에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참고해야 하겠지만, 페미니즘을 말함에 있어 적어도 남성중심의 사회였던 그 신화나 사료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식의 부족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만) 페미니즘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신화나 사료의 전적인 폐기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에까지 이어져 오는 그 신화나 역사적인 남성적 영웅상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의 극복에 초첨이 맞춰져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희석씨 말씀처럼 민족주의적인 신화나 역사담론들이 필수불가결한 시대정황이었다 해도, 그것이 그 스스로를 비판에서 자유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역사적 정황이나 신화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정당하지 못하다 하는 것은 1960년대의 경제발전이 사회의 기본권을 무시한 그 위에 이룩되었지만 그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역사나 신화에 대한 비판이나 재구성은 분명히 필요로 한 것이고 페미니즘처럼 근대의 한참 이후에 생겨났거나 힘을 얻었을 가치라도 그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고 충분히 비판할 수 있습니다. 미시사나 신문화사 등도 정치사나 구조론에 중심을 둔 역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향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쯤쓰니 잘 모르는 부분에 너무 발을 깊게 담그려고 하는 건 아닌가 후회도 됩니다. 영준씨와 형주씨에게 뒷일을. 켁.
상병 송희석 (2006/05/09 08:45:01)
상원/ 비판은 물론 가능합니다. 그것이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화나 역사적 사료를 통해 페미니즘에 반박자료로 쓰기에는 '책임'범위를 너무 크게 갖는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러이러한 신화나 역사적자료에는 남성우월주의시각이 존재한답니다! 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현대 남성우월주의시각까지 같이 덤비기에는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것입니다.
물론! 허준같은 드라마를 통해 남성영웅주의식 태도를 비꼬는것이야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그.러.나! 비판의 화살을 드라마가 아닌 모든 사회적현상으로 확대해석하는것은 조금 바람직 하지 못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즉, 모든 역사적 사료나, 신화적 사료를 바탕으로 현대 남성우월주의가 과거로 인해 발생한것이라는 꽤 환원주의식 시각에 대해서 이러한 페미니즘은 정말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라면, 그런 비판을 하기보다는, 시대적상황속에서 이러이러한 역사적 사료나, 신화 사료는 필수불가결하게 남성우월주의가 들어가있으나, 현 시대적상황속에서 허준같은 드라마는 꽤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식 사고방식이 들어가있는것이 아닌가? 라고 비판하는것이 더 타당할텐데 말이죠.
그냥 뭐 그렇다는 겁니다. 저는 과거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현 시대에 같이 묶는것은 '과거의 대한 책임'까지 같이 떠맡기는 꼴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것마저 받아들이라 한다면 저는 아니요! 라고 말할테니 말이죠. 이상이랍니다. (이거이거 내가봐도 너무 위험한 발언들이 참 많네! 에고.)
병장 주영준 (2006/05/09 08:55:15)
형주, 상원, 희석 / 이거 논의의 흐름이 완전 funny and excite한게 the game of death와 필적하는군요. 허접한 글이 논의의 촉발이 될 수 있음에 굉장히 행복합니다. 천천히, 다들 재미있게 논의될 수 있기를 바래요. 저도 천천히 참여하겠습니다만, 오늘은 회식 숙취의 여파에 그만 gg...
병장 박형주 (2006/05/09 20:39:26)
희석 님의 글 속에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결론에서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나가긴 합니다만. 어쨌든 별수없이 민족주의 일반에 대한 기본적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민족주의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시대와 발전 국면에 따라 변화하고 때로는 상이한 기능을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분구조와 양립할 수 없는 평등한 국민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과 압제에 대항해 국가적 해방과 결부되었을 경우에 있어 일정 부분 진보적 역할을 해 왔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구요.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 왕의 목을 칠 수 있었던 에너지는 이전까지 없었던 평등한 '국민'으로의 통합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나폴레옹의 지배에 맞서 독일지방의 지식인들이 내세웠던 저항의 주체 역시 과거에 결코 언급되지 않았던 '민중'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국민'이었다는 예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군이 재발굴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반상의 구분이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인 한민족'이라는 의식은 신분질서를 뿌리채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었을 테니까요. 개항 이후 외세에 대항해 모든 조선인을 통합하고 국민적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상징으로서 단군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물론 동의합니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는 그 현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과거의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잊혀진 영웅이 되살아나고, 전통이 만들어지고, 아와 피아를 가르는 민족적 저항의 기억을 저 멀리 고대로부터 끄집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현재적 목적에 맞게 발견되고, 가공되고, 날조됩니다. 무사 정권 하에서 아무런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 못했던 일본 천황이 새삼스레 야마토 민족의 상징과 구심점으로 등장하고, 몇십 년 전까지는 누구도 입지 않던 격자무늬의 치마 킬트는 어느순간 스코틀랜드인의 전통으로 군복 디자인에 도입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주의적으로 재구성된 역사에 대한 비판은 현재와는 무관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닌 지극히 현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문열이 조선시대 양반집 부인을 들고나왔을 때 비판의 맥락이 그의 일련의 정치적 행동들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신화나 사료에 남성우월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남성우월주의적 신화와 역사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가부장적 체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화와 역사에서 남성중심적 요소를 비판하는 것은 과거에 현재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재구성된 과거 담론과 현재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게 된다는 말이죠.
한국의 여성운동은 오랫동안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국가, 민족, 해방, 통일 같은 거대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먼저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3세계적 상황에서 그러한 거대담론을 외면하는 것은 공허하거나 반동적일 수 있고, 일정 측면 통합과 저항의 기제로서의 민족주의와 결합해 진보적 역할을 수행한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배제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고 계급과 젠더의 문제를 민족 문제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여성운동과의 모순을 일으키는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보수적 민족주의에서 여성은 어머니와 순결한 처녀라는 전통적 이미지로 형상화됩니다. 주권이 침해당하는 것은 아내나 딸이 겁탈당하는 것에 쉽사리 비유되고, 민족적 분노는 그것은 자기 여자의 정조를 지킬 수 없는 무기력한 남성의 분노와 굴욕과 감정적으로 동일한 지점에 있습니다. 진보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개인'이나 '여성 해방'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국가 발전, 통일, 민주화 등의 목적에 여성 문제가 동원되고 환원됨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젠더의 문제를 남긴다고 할 수 있겠지요. 쟌다르크가 페미니즘의 여전사가 될 수 없는 것은 간단합니다. 프랑스를 대표해 군대를 이끌고 적을 제압하다 처형된 성스런 처녀라는 이미지는 그야말로 바람직한 민족주의적 여성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거든요. 한국사에도 유관순이라는 아주 유사한 이미지의 여성이 존재합니다만. 쟌다르크는 가부장제나 민족주의와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신사임당이 페미니즘과 무관한 것처럼 쟌다르크도 절대 페미니즘의 대안이 될 수 없죠.
현시대의 과제는 그 만들어진 전통과 은폐되고 날조된 역사에 문제를 제기하는 거라고 봅니다.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 가려진 성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현시대의 페미니즘에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서 모자란 부분은 영준씨가 친절하게 답변하시겠죠. 하하.
상병 송희석 (2006/05/10 09:22:42)
형주/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도 형주님과는 일맥상통합니다. 다만 우리는 현시대의 과제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출발하는것 같습니다. 일단 민족주의를 의논하기전에 먼저 역사를 한번 논해보도록 합시다. 역사라는것이 사실이 아니라 사실-효과에서 만들어진 담론의 결과물이라 치면, 우리는 다양한 방향에서 역사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질문하고 탐색하며 검토하는것이 맞습니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것이며, 이런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는 닫혀있는것이아니라 열려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란 현재외 미래의 재심사 대상인데, 이것이 너무 남성으로만 가득찼다고 비난하다는것이 저는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가 객관적이거나 사실적인것이 아니라 사실-효과에 기초한 담론이라는것은 당연하지만 이것은 얼마만큼 역사, 즉, 민족주의 역사성을 객관적인가를 문제삼아야 할것입니다. 역사는 정체성위기 또는 혼돈의 시기에 올바른 정체성을 모색하고 확립하려는 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역사, 즉, 민족주의는 국가의 상실이라는 첨예한 모순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야 했던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주의 혹은 역사는 위대한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의 혼란과 분열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미래상을 그리는 일이 가장 시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민족주의를 탄생한것입니다.
그런데? 왜 한국의 여성운동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오로지, 젠더화하는 젠더전략에 기초했다고 비판하는지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민족의 범주를 전사중심, 페미니즘으로 말하자면, 전사로 명예롭게 죽을수 있는 남성 중심의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서, 여성의 여성성은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거나 배제되는 젠더의 비대칭성이 강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물론 역사적 유교주의까지 비판하는것이야 이해를 하지만, 이것을 결부시켜 형주님 말대로 성의문제를 건드리는것에 대한 효과는 대체 무엇인가요?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받은 한국적 가치들, 아니 민족의 가치들은 객관적으로 보니까 정치적으로 관련된 이데올로기성 남성들의 기나긴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여성에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주관적인 사고방식 아닌가요?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우리 국민교육 헌장에서 써있는 내용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 은 남자들만 이땅에 태어난것이냐며 비판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폐쇄적인 여성과 역사동일성의 논리는 결국 집단의 동일성,순수성의 논리를 무시하는 결과입니다. 민족의 역사를 단일주체로 상상해서, 민족을 전일적 전체로 놓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요? 결국 여자가 없다는 환원주의 의식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민족주의는 적으로 간주되고, 이에따라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양극화 대결의 논리를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과감히 말하지만, 역사 혹은 민족주의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성의문제를 건드리는것이 페미니즘의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역사나 민족주의에 숨어져있는 성의 결핍문제는 비판하되, 그것을 현시대에 남성우월주의와 연관시켜 공격하는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차라리 사실과 효과가 결합된 역사에서 찾지말고, 현 사실에 대한 문제로만 공격을 하면 충분히 객관적일수 있다는 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이야기해보네요. 그리고 왜 반쪽 세미나가 되는지 알수 있을것 같아요. 솔직히 제가 글쓰면서 계급환원주의까지 꺼낼려다가 순간 멈칫하는군요. 쩝.
상병 송희석 (2006/05/10 12:59:01)
위에 오타
현재외 -> 현재와
병장 주영준 (2006/05/10 13:38:02)
반쪽짜리 세미나지만 이쯤 되면 다른 완성형(?) 논의에 비해 모자랄 것은 없다는 느낌입니다. 희석 씨의 논쟁적인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굉장히 큰 소득이고, 역시 이 분야의 최종병기이리라고 생각했던 형주씨의 글을 보게 된 것도 행복할 뿐입니다(흐으, 지구에서 그의 레벨이 이정도라면 혹성 베지터에서 만나게 될 형주씨는 그야말로 최종병기일듯. 전율입니다)
논의는 흘러흘러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이미 넘어선,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논의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페미니즘과 타 분파운동-전체운동/분파운동의 종속구조를 전제한 의미에서 분파운동이 아니라, 그저 '독자적 영역을 가진 운동'으로의 의미로 이 단어를 쓰는데 더 좋은 단어가 있으면 그걸 쓰고 싶습니다-의 관계성, 그 중에서 민족과 여성의 문제로 진행되었군요. 역시 이 분야는 아무리봐도 자기소개에서부터 넘치는 포스를 주체하지 못했던 형주씨의 대활약이 기대되고, 이미 대활약중인지라 참 즐겁습니다. 그래도 이거, 분에 넘치게 한 마디 하고 싶어요. 후훗.
희석 / 최근의 답글에서 형주씨는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 가려진 성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현시대의 페미니즘에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겠죠'라고 이야기하셨고, 희석씨는 '왜 한국의 여성운동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오로지, 젠더화하는 젠더전략에 기초했다고 비판하는지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반론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희석씨를 공격하고 싶구요.
희석씨는 '민족주의는 국가의 상실이라는 첨예한 모순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야 했던것입니다. 우리 민족주의 혹은 역사는 위대한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의 혼란과 분열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미래상을 그리는 일이 가장 시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민족주의를 탄생한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희석씨의 논리는 여러 정합적인 과정을 지나 '역사나 민족주의에 숨어져있는 성의 결핍문제는 비판하되, 그것을 현시대에 남성우월주의와 연관시켜 공격하는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차라리 사실과 효과가 결합된 역사에서 찾지말고, 현 사실에 대한 문제로만 공격을 하면 충분히 객관적일수 있다'로 귀결됩니다. 포인트가 두 지점에서 나뉘는군요. 첫째,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서. 둘째, 역사나 신화에 대한 공격과 현실에 대한 공격의 분리에 대해서.
일단 첫번째 문제. 형주씨가 말한 대로,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거대담론은 제3세계 국가로서는 충분히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담론입니다. 하지만 그 내부에 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팩트이고, 희석씨도 충분히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문제와 연결해서 이야기해봅시다. 희석씨 역시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나, 페미니즘이 그러한 역사에 대하여 그것을 '젠더화하는 젠더전략에 기초했다고 비판하는지 알수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일단, 희석씨가 가지고 있는 오해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가부장제 이론을 전면에 내걸고, 인간 사회의 중심 모순으로 가부장제를 상정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경우 희석 씨의 페미니즘에 대한 파악은 일정 정도 타당합니다. '아주' 래디컬 페미니즘의 경우에는 근대 국가이든 계급환원주의이든 결국 가부장 체제 유지의 전술로 파악하기도 하고 하니까. 하지만 그런 입장은 나로서도 희석씨로서도 그다지 동의하지 못하는 입장이니 넘어갑시다. 그걸 가지고 페미니즘 전체를 비판하기에는 참 애매한 문제일 테니까.
그러면 이런 오해를 넘어서 논의를 해 봅시다. 오해의 유무와 관계 없이 논쟁적인 부분이 희석 씨의 입장에 존재합니다. '역사나 신화에 대한 공격보다는 현실 자체에 대한 공격이 페미니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부분. 근대에 창조된 역사나 신화는 의도적으로 여성을 배제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전술적 고려에 의해 전술적으로 여성이 배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의도성의 여지와 상관 없이 그렇게 만들어진 구성체에 의해 여성이 배제되었다는 것은 현실입니다. 그것이 탄압받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구성된 민족주의라고 할 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형주 씨의 입장에 대해 희석씨가 동의했다는 건 이런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리고 여기서 희석 씨는 말합니다. 그러한 구성체에 대한 공격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자고. '민족의 가치들은 객관적으로 보니까 정치적으로 관련된 이데올로기성 남성들의 기나긴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여성에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주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피해의식'을 운운하는 것은 이중의 가해입니다.
희석씨 역시 '민족주의'를 역사적 구성체로 파악합니다. 그리고 역사적 구성체의 분석에 있어 저는 일전의 '쉬운 사회학-종교'에서 이야기한것 처럼 그 내적 정합성과 폭력성의 틀을 이용합니다. 민족주의는 희석씨나 형주씨 모두 인정한 대로 내적으로 부분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의 여성에 대한 폭력성은 일정 정도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형주씨의 예시 참조). 그러한 것에 대한 분석은, 과거에 대한 창조적 구성 이전의 단순한 '분석'의 수위에서도 현대의 문제들에 대한 공격의 효율적인 무기가 됩니다.
자. 여기까지는 희석 씨의 이야기와 관련된 이야기구요. 여기 내 이야기를 조금 덧대보겠습니다. 다른 모든 해방적 사회과학이 그렇듯, 페미니즘 역시 그 이전에 이야기되지 않은 억압을 이야기하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해방적 사회과학 이상으로, 페미니즘은 '말하기'를 중요한 요소로 접근합니다. 이 '말하기'란 포스트모던에서 이야기되는 그런 '새로운 언어/문법 찾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의, 그야말로 정치와 경제라는 근대적 틀 안에서의 그저 '침묵된 목소리 찾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른 피억압 집단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목소리도 침묵 속에 존재했으니까. 그것도 그러한 침묵이 다른 피억압 집단과 약간 다르게 역사 속에 '은폐된 침묵'으로 존재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성의 침묵/배제 메커니즘에 대한 역사적 탐색은 또 다른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양극 대결은 무의미하다고 생각치 않습니다. 아마 이 논의를 더 진전시키려면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가치관의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역시 반쪽자리 세미나인지라 침묵. 그저 일반론만 이야기하자면, 민족주의 내부에 반여성적인 부분에 존재한다면 그것과 페미니즘의 충돌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 반여성적인 부분이 형주씨나 몇몇 페미니즘 조류의 주장대로 '민족 가치 자체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배제의 메커니즘의 발현'이든, 아니면 '민족주의가 현상적으로 전개될 때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극복될 수 있는 한계'이든간에, 억압적인 무엇에 대한 논쟁은 중요한 무엇이겠지요.
흐아. 논쟁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마구 뻗쳐나가는 와중에 개입하게 되어 한 가지 이야기를 하기보다 정신없이 여러 이야기를 떨어뜨리게 되어 조금 민망하기도 합니다. 이제 오해가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도 가능할 것 같은데, 누가 발제문 비스레한 것을 질러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형주 / 여자친구에게 절판된 내셔널리즘과 젠더. 를 빌렸습니다. 1학년 때 슬쩍 대충 본 책이라 그만. 그리고 여자친구가 대학원 진학 준비와 관련하여 근대/국가/민족/성 담론에 대해 우에노 치즈코보다 혁명적인 이론을 구상해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은 아직 비밀이라고, 다 쓰면 보여준답니다. 보게 되면 올려드릴께요.
이제 오해가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도 가능할 것 같은데, 누가 발제문 비스레한 것을 질러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상병 송희석 (2006/05/10 14:28:42)
영준/ 아무런 아이템 없이 더이상 글쓰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특히 형주님과 영준님에 대한 탁월한 분석은 오히려 제가 계속 수준미달 논쟁을 벌이는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이부분에 대한 공부 부족 원인일것입니다. 또한 영준님이 말씀하신 '피해의식'언급문제에 관해 밀도깊게 이야기할부분이 상당히 많지만, 그것과 현재논의와는 전혀 다른것이기 때문에 영준님이 말한 혹성-베지타에서 만날기회가 있다면 꼭 이야기해봅시다.
그리고, 덧붙여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형주님 논의는 제가 한참 배워야할 수준인것 같습니다. 영준님도 마찬가지고, 특히 우에노 치즈코보다 혁명적인 이론을 만들었다는 여자친구라는 분과 언젠가 이야기하고싶은 마음도 드는군요.
아무튼 저는 여기서 물러갑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병장 한상원 (2006/05/10 21:52:21)
리플 서른개째 채울려고 씁니다..가 아니라. 논의가 정리되는 것 같아서 괜히 아쉽군요. 하핫.
저도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역사에 대한 비판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은 역사적 구성체로 민족주의를 보는 시각처럼 현재를 기준으로 이미 숱하게 평가되고 회자되는 것들, 그리고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제 몫 찾아주기의 관점으로 보고 싶습니다.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친일 청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다른 정치적 목적들을 떠나서라도 단지 과거로 편입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응분의 몫을 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역사적 주체와 객체들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겁니다. 페미니즘의 흐름이 오늘날에서 과거의 숱한 담론들을 비판하고 재평가하는 것도 존재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무수한 여성들의 위상이나 역할을 밝히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들이 없었더라도 그 부재를 만들어냈던 구조와 기성 담론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현재를 이끌어가려는 시도겠죠. 아, 세분의 이야기에 괜히 변죽만 울리는 격입니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요. 켁.
그리고 이건 정말 다른 이야긴데 말이죠.
이런 숱한 입장들과 사상들이 오가는 논쟁의 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마스터 플랜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밀려옵니다. 희석씨 말을 거칠게 요약했을 경우 시대의 필요와 요청에 따라 충실히 기능한 민족주의라 할지언정 말이죠. 역사적 구성체의 시선에서 바라봤을때는 민족주의든 역사관이든 신화든 현대적 관점에서는 새롭게 재구성되고 수정, 보완, 재평가 되어야하는 필요가 언제 어디라도 끊임없이 나타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마 앞으로의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모든 억압기제라든지 배제의 구조 등이 하루아침에 번쩍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이상 푸코의 작업처럼 그 역사를 발굴하는 작업을 치밀하게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른 생각, 다른 관점들을 마주하게 될런지요. 그리고 숱한 무관심들을 참여로 변신시키는 정치적 연금술을 꿈꾸어야 할까요. 가끔 그래서 두렵고, 힘겨울 것 같고 그렇습니다. 이 닫힌 공간에서도, 무기 하나들지 않고서도 치열한데 말이죠.
병장 박형주 (2006/05/10 22:15:04)
희석 / 기본적 주장은 이전 리플에서 다 했고 영준씨가 언급한것까지 해서 더이상 새로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의문을 제기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 직접 답변하는 게 예의겠죠. 재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 주신 데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요. 자 그럼 가봅시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민족주의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젠더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데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죠.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여성운동은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한 세기 가까이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내셔널리즘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는 연구 혹은 운동은 90년대 이후에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는 역시 80년대 후반까지의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겠죠. 다시 말해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무시'나 '몰역사성'이 아니라 '과잉'이라는 겁니다. 최근에 들어서야 가능해진 그러한 비판의 맥락은 여지껏 민족주의에 매몰된 여성운동의 경향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것이 될지언정 결코 민족 개념의 역사성을 배제하는 무조건적 환원주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목적은 거칠게나마 세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남성 지배의 사실을 발견하고 그 가부장제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전해져 왔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둘째, 그 남성 지배의 사실이 어떤 목적으로 역사화되는지, 즉 그 담론으로서의 역사가 필요로 하는 현재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셋째, 전통적 역사 서술에서 잊혀진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 다시 말해 소수자의 역사를 발굴하고 새로이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단군 신화를 예로 들자면, 단군 신화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분석하는 것이 그 첫 번째에 해당하고, 민족주의자들이 단군 신화를 통해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 자주적인 영웅적 남성상이라는 점을 발견하는 것이 그 두 번째, 당시 고대 사회의 모계 중심성을 발견하고 그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그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페미니즘적 역사 인식은 지극히 그 목적이 뚜렷한 주관적 역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물간 실증주의적 원리 따위가 아니라 키스 젠킨스의 말처럼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소수자의 역사를 쓰는 것이 이전까지 남성 지배층 중심 역사의 편향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있다는 것이죠.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은 직접적으로는 성의 문제가 아닌 개인과 국가간의 문제입니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희석님의 주장과는 반대로 오랫동안 한국 여성운동에서 그러한 인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겁니다. 비약과 환원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기 이전에 그 인식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왔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비판도 역시 극히 최근에 와서야 나타난 것이 사실이구요.
역시 이전 리플에서 언급했지만, 역사가 현재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는 이상 그 과거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역사를 비판하는 것이 그 역사를 필요로 한 현재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 될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일본이 20세기 초의 역사에 근거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 그에 대항해 조선과 신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한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모두 역사적으로 독도가 어디에 귀속되었는지를 따지는 것이 목적이 아닌 현재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현재 한국이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지만 과거사를 들춰내는 건 영준씨가 언급했듯 현대의 문제에 대한 효율적인 공격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일본의 우익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는 단순한 채택반대운동 따위가 아닌 그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이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논쟁적일 수 있는 두 가지 사례에 대한 가치판단은 역시 보류.
영준 / 찌질 학부생 수준에서 애초에 대단한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죠. 그 이상을 지향하고 있긴 하지만 역시 현시점에서의 한계는 눈에 빤히 보이는거고. 낯뜨거운 언사는 일종의 반가움으로 이해하도록 할게요. 굳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는 그것.
그리고, 혁명적 이론이 뭔지는 몰라도 닥달해서 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상병 송희석 (2006/05/11 06:09:47)
상원/ 마지막 문단이 꽤 고민하게 만드네요.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따로 화답은 안하겠습니다.
형주/ 으흠. 특별히 또 이야기할 필요는 없고, 다만 과거의 문제를 비판하는것이야 당연하고 그것이 효과적인 공격무기가 된다는점은 영준님과 비슷하네요. 다만 저는 아쉽다는 것이죠. 쉽게 생각해서 독도문제를 단순히 역사적으로 공격하는것이야 매우 쉽지만, 그것이 국제재판소까지 가서 증거채택효과가 가능할까요? 심히 회의적입니다. 일단 독도문제는 넘어가고, 이러한 과거 민족주의나 혹은 남성주의가 가득찬 자료들이 절대적으로 공격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 실효성이 없는 논쟁일지 모른다는것입니다. 더더욱 유교주의를 살아온 시대에서 결국 역사를 비판할수밖에 없는, 그것이 어쩔수 없는 시대를 살아온 우리역사일지라도, 그런 안타까움밖에는 느껴지지 않네요. 그냥 그래요. 조금 아쉬워서 그래요. 물론 당연히 비판할수 있고, 남성지배층 역사이지만, 아쉬워요. 그냥 아쉽네요.
그래서 너무나 아쉬운 나머지 있다가 배식 끝나고 시간나면 민족주의를 토대로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를 올려볼테니, 형주님과 영준님은 좋은 답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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