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의 삶이 지옥 
 병장 이건룡 04-09 15:21 | HIT : 185 



 크지슈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십계 시리즈는 지젝이 표현하는바 '죄인들의 연대', 즉 계명을 어긴 죄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주제를 일전에 너무 형편없이 적어 미련이 남는다. 그래도 케에슬롭스키 감독에 대해 처음 적은 글인데 너무 엉망이었다. 스스로 책망하건대 제멋대로이고 방만한 글쓰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더구나 제목을 잘못 알고 있었다. <어느 운명에 관하여>가 아닌 <어느 운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 어느 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계명에 대응하는, 과학을 맹신하는 아버지(파웰)와 아들 그리고 이들 부자의 신의 불신에 초조하게 바라보는 고모, 결말은 과도한 과학의 맹신에 의한 아이의 죽음과 남은 자의 슬픔을 다룬 이야기이다. 반면 고모의 애상 속에서 현대의 과학의 숭배 분위기에 위험에 빠진(빈곤해진) 종교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후자의 감상 면밀하게 따르면 영화는 고모의 애상과 '지금'의 초현실적 공포를 받아들이면서 영화의 시작, 끝맺음이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내러티브는 애상이라는 '각성'의 순간으로 초점으로 모아진다. 

 영화는 고모의 회상, 플래시백으로 시작한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인한 긴장 속에 벌어진 비이성적인 사건으로 인해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분노와 절규, 절망감에 이끌려 신을 저주함으로 원망하나 성상 앞에 무릎을 꿇은 체 나약함과 함께 체현되는 초현실적인 기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이 전부라면 진부한 드라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의문, 후자의 감상에 통해 역사적 사례의 좀 더 다른 구성을 시도해본다.  

'지금 여기서의 삶이 지옥'이란 문구의 이해를 통해서.("파국이란 앞으로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그때 이미 존재 했던 것이다. 스트린드 베리는 이렇게 말한다. 지옥은 앞으로 다가올 어떤 한 것이 아니다.-지금 여기서의 삶이 지옥이다.")  


 처음 도입부의 고모는 지나가다 잠시 멈추어 상점의 유리창 너머의 TV속 우르르 나오는 아이들 중 죽은 아이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보는 이 또한 붙잡혀 고모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표정에 따라서 보는 이들은 이 영화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후 회상이 이어진다.그러나 결말에서는 이어지는 고모의 모습, 초현실적영역에서의 침범하는 아이를 받아들이는(과도한 클로즈업으로 비춰진 아이의) 모습에 마조히즘적인 기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질적인, 혹은 구원의 순간은 '붙잡힌 이'이에게 섬뜩함과 동시에 고모와의 일체에서 분리(일탈하게) 된다. 마침 카메라는 더 이상 시선을 같이 하지 않고 TV를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으로 점점 물러난다.


 이로 말미암아 고모를 통해서 죄를 지은 자들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뒤를 밟아 파멸과 구원의 변증법적인 '시선'을, 아이를 바라보는 고모의 눈물을 머금는 눈동자의 영향(애상) 아래, '각성'을  획득하고 이후 결말의 초현실적인 공포 속에 보는 이는 '응시'를 멈춘다.(아이러니 하게도 고모에게는 구원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과도한 클로즈업은 스크린을 뛰쳐나오려는 악령과 같은 아이를 야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고모의 표정은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이 잠결 와중에 고모의 기억, 무기력한 타자로 관여와 끔찍한 기억, 남동생 고통과 자신의 고뇌가 '울혈'되어진, '봉인된 시간'들을 기억해 낼 수 있다. 다시 말해 '봉인된 시간'으로 인한 새로운 해석은 아이의 죽음과 아이의 부재, 공백을 내면화한, 형이상학적인 불안에 다면 다각 측면에 내몰리는 아버지의 의심과 신에 대한 저주, 성모상의 눈물로 체현된 기적의 의미를 재전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를 통해 한 여인의 마조히즘적인 신학 구도라는 물음으로 바뀐다. 이지점에 와서 자신의 동생과 동생의 아들의 죽음을 통한 신앙에 대한 믿음의 확고함이라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그렇지만 의미심장한 마지막 컷. TV 화면상 잡히는 아이의 과도한 클로즈업(흡사 유령과 같은)은 현재를 위기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에게 피어오는 야릇한 표정을 보아 그녀는 '날것'인 구원을 '단단히 거칠게 움켜'잡는다. 구원은 벤야민이 말하듯 '개념이라는 돛에 불어오는 절대적인 것의 바람에 돛의 각도는 상대적이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구원은 우리에게 섬뜩하지만 죽은 아이의 침범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우리에게는 실재의 과잉적인 잉여 일 테지만 그녀로 하여금 내러티브 상 죽은 아이를 살리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이후의 내용에 대해 미뤄 집작 해 볼 때 이 지점이야말로 '지금 여기서의 삶이 지옥'라는 문구의 이해를 풀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개인의 존재에 있어서 죽음에 의해 봉인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 호르크하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