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풍경은 아름답다. 그러지만 편리하지 안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장을 만들고 자동차, 버스등을 만들었다. 하지만 매연이 지독하다. 산이나 나무가 많은 곳은 다른 곳 보다 공기가 맑다. 사람들 지구를 더럽히고 있다. 한개에 쓰래기는 곳 큰 쓰래기로 변한다. 공해를 줄이기 위해 전기로 가는 자동차를 만들고 있고 공장은 매연을 많이 보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사람은 나무를 마구 베으고 있다. 나무는 우리들한테 큰 도움을 준다. 가구로도 만들고 종이로도 만들고 나쁜공기를 좋은 공기로 바꾸는 나무는 고맙다.

더러워져 가는 지구를 우리 모두 살리자.

이 글은 제가 3학년때 쓴 일기 중에서 발췌한 겁니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읽으니 참 재밌습니다. 제가 어릴적 생각했던 것들이 우습기도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좀 이상한건 1학년에서 고학년으로 갈수록 글씨체와 맞춤법이 모두 엉망이 된다는 것인데, 아마 나이 들수록 일기 쓰는걸 무지 싫어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기를 채우는 전체적인 주제는 학원을 갔다던지, 게임한 것, 운동한 것같은 굉장히 일상적인 이야기들 입니다. 
위 일기는 보시다시피 93년도 마지막 날에 쓴 것 입니다. 그래서 이런 무게감 있는 주제로 일기를 썼는지는 지금에 저는 알길이 없습니다. 중요한건 14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위에 주제는 분명 통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도 따듯했습니다. 2월 어떤 주는 마치 봄처럼 포근했습니다. 햇살은 선명함은 더이상 겨울바람에 제약을 받지 않는것 같았지요. 따듯한 겨울을 기분좋게 반겨줄 법도 한데, 제 친구는 지구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인양 아파했습니다. 

뉴스에서는 그럽니다. 온난화가 가속화되어 양 극의 얼음이 녹아 수면이 높아지고 있다고. 뿐만 아니라 합병증 처럼 찾아오는 각종 질병 덕에 지구가 힘들어 함을 여러 매체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온난화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자동차와 공장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가 가장 큰 주범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의 주범은 미국이라고들 합니다. 미국이 환경단체에서 조언하는 수준으로 공해를 낮추지 않고 있다는 거지요. 사실 이해를 못하는건 아닙니다. 미국도 미국의 입장이 있을테니깐요. 그들은 그들의 위치를 고수해야할 사명같은게 있을겁니다. 그것이 설령 나쁜 방향으로 간다해도, 어쩌면 되돌릴 의지같은건 삐뚤어진 사명에게 길들여져 있을지도 모르니깐요.

원인과 주범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전체를 모색하여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것이란 어쩌면 단순한 인식이 아닐까요. 자신의 입장과 사명같은걸 초월한 도덕적인 인식 말입니다. 

한개에 쓰래기는 곳 큰 쓰래기로 변한다. 

우리가 더이상 자연을 착취의 수단으로 보아선 안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잘못이 열의 잘못이 되도록 방치하는 어떤 어두운 운명 때문입니다. 이건 어쩌면 필연적인 원죄에서 비롯된 세계의 숙명일지도 모르지만. 또한 이런 숙명을 파훼해야 하는 것또한 우리의 숙명이라 저는 부르고 싶습니다.

옛날 풍경은 아름답다. 그러지만 편리하지 안았다.

숙명을 형성하는 자연스러운 흐름. 그건 어쩌면 편리하지 않음 일까요? 이미 인류는 편리한 세상과 옛날 풍경을 한손 위에 얹혀 놓을 능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 능력이 인류에게 주어지지 않는 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걸 선택해야 할까요?

우리는 세계의 일부입니다. 신체로 따져서 나는 손가락이고 너는 발가락이라는 이라는 것과 다른 의미로 말입니다. 우리는 인체의 DNA처럼 미세하지만 전체의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일부이면서 전체인 존재입니다. 세계 역시 우리의 일부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 이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 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우리의 고귀한 사유는 이기로 불태워져 검은 연기로 타올라 푸른하늘을 더럽히라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지구의 육체와 우리의 사유를 동시에 공유함으로 얻어지는 진정한 존엄성을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일구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상병 박재탁 
  정우씨는 곧 밸런스 앤 하모니를 외치는 드루이드가 되실 것 같아요! 03-02   
 
일병 박준연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물을 사먹고, 
이제는 공기까지 상품으로 나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10년, 20년 후엔 어디까지 갈지 벌써부터 걱정이 드는군요. 03-02 * 
 
상병 서동영 
  환경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분명 필요하다고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맞습니다. 다만, 매스컴과유수의 환경단체에서 보도되는 많은 관련 자료들이 가끔씩 지나친 과장으로 지구 전체가 무슨 대종말이라도 맞이하는 것처럼 비관적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핏 해봅니다. 예전에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는 책에서 읽고 느낀바 있어서 적습니다. 

사실 요런 환경문제보단 , 
파스칼의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는 말이 눈에 쏙 박히네요(방긋) 03-02   
 
병장 김효진 
  소위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는 자들의 글을 읽으며 느낀 점은, 그들의 모든 주장이 철저히 인간중심적, 자기중심적, 환경주의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너무나도 환경주의적이었습니다. 생태주의, 녹색운동, 생명운동 등의 용어와 구별되는 환경주의는, 글자 그대로 자연을 우리를 둘러싼 무엇으로 보지, 그것이 즉 우리 자신이라 보지는 않습니다. 자연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도구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생명이 자연이란 이름으로 환원되면서도 오직 인간만은 자연과 구별되는 지배자로 보는 근대의 기계주의적 사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우씨가 말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이러한 사고와 배치되는, 전체이자 부분인, 자연과 공감하고 공명하는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파스칼의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는 그와 대구를 이루는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라는 대목과 반드시 같이 이해되어야하지 그 부분만 따로 읽었을 때는 파스칼의 사유를 로고스 중심주의에 가두는 꼴이 됩니다(파스칼이 탈 로고스 중심주의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인용된 부분은 그런 단초를 품고 있다고 읽혔습니다). 전 여기서 말하는 '사유'를 곧 공감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거대한 우주와 개인인 나를 인식하자면 개인은 너무도 왜소하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되지만 사유를 통하여 '나'를 자연 전체로 확장시킬 때(전 이 확장이 공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된다고요. 
지구 대종말이 일련의 급진적인 주장처럼 당장에 닥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당장이란 것은 다분히 현 세대에 국한된 것이지 보다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사태를 보자면 몇 세대가 지나거든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되리라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지구-자연-우주를 도구적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언제나 이러한 결말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어서 위험합니다. 낙관론자, 기계문명을 예찬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술혁신의 속도가 지구가 파괴당하는 속도를 앞지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일례로 선진공업국에서 각종 환경 규제로 자국에서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기업을 내몰고선 그것이 진보이며 환경을 중시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기업이 생산해내는 것들은 그 국가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필요로 하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혹은 여전히 그런 삶의 방식을 권장하기 때문에)라도, 그러한 제약이 없는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공장을 이전시키고 그곳에서 생산된 반환경적 상품들은 여전히 매장에서 선진국민들이 지갑을 열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니 뭐니가 다 허구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대종말은 유예될 뿐입니다. 03-02   
 
병장 김효진 
  어릴 때 이런 글을 쓰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공감하는 능력이 원래부터 인간에게 갖추어져있고 해서 인간이란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이자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요즘 어디에서나 유비쿼터스 유비쿼터스 떠드는데 진짜 유비쿼터스적 인간이란 이곳과 저곳, 시간과 공간을 넘을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능력인 공감의 능력을 잘 구현하고 있는 인간이라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공격적으로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통념에 대한 반박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03-02   
 
일병 구본성 
  세계가 환경 위기라고 하는 결정적 시점을 겪을 것이라 예상되는 시기는 100년 안쪽입니다. 우리 세대 혹은 다음 세대가 맞닥뜨릴 문제입니다. 지구의 한계 수용능력은 60억정도의 인구라고 합니다. 지금만 해도 수억의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부의 불균형에 의한 영향도 크지만, 전체적인 식량자원의 부족이란 배경이 깔려있습니다. 지구의 경작가능한 면적 속에서 식물을 심은 다음 광합성 효율을 계산하고 그로 인한 포도당 합성량을 계산하고 그것을 전부 인간에게 공급한다고 해도 160억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멜서스 시대는 현재의 상태를 평가할 만한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대다수 학자들은 좀 더 섬세한 평가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책에선 연못 위의 수련에 대한 비유를 이용하더군요. 수련이 2배씩 증가한다고 했을때 30일만에 연못을 덮어버릴 수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29일까지도 연못의 반이 온전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9일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기에 예측되는 환경의 위기에 대해 인식해야 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봅니다. 03-02   
 
 병장 임정우 
  효진 / 장대한 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워 갑니다. 그리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는걸요(웃음) 나중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보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03-02   
 
상병 서동영 
  잠깐 나갔다오니 여러 좋은 댓글들이 많이 달렸군요, 특히나 '회의적 환경주의자'에 대해 상담히 민감(?)하게 글을 쓰셔서 조금 당황스런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환경에 대한 전반적 지식이 부족한 저이지만 간단히 피력해 보겠습니다. 
제 뜻은 간단합니다. 일단 환경을 도구로 보느냐, 공감으로 보느냐를 떠나서 현 상태를 최대한 정확히 측정하고 대중은 그 측정결과를 최대한 왜곡없이 전달하는 것입니다. 03-02   
 
상병 서동영 
  잘못 클릭했다(...) 

여러분은 네이쳐나 다른 환경단체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선에서 믿고 계십니까.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는 책의 저자는 여러 측정 자료들을 바탕으로 내리는 환경단체들이 틀렸다고 하진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처럼 자원은 고갈되어가고 있고 빙하는 녹고 있으며 지구 해수면은 분명 상승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게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백년안에 지구자원은 고갈되고 우리는 해수면 아래 수중도시에 살고 있을까요? 정확한 자료를 갖지 못한 상황이라 단언 하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위와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최대한 정확히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몇 십년 안에 석유는 고갈되고 인간은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무수한 학자와 연구자들은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굶주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더 많은 이들이 그것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적아가 불분명한 자연과 많은 피를 흘리며 지내왔고 지나온 세월들을 무 싹둑 자르듯 돌릴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분명하다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으로 현실을 무참히 비관하고 숲으로 걸어가는 일은 그렇게 떳떳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환경은 과거 뿐 아니라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의 책임이라는 연대의식을 가졌음 하는 바램입니다. 03-02   
 
일병 구본성 
  현실을 직시해야겠지요. 저는 통계치들이 현실이라고 생각해서 한 얘기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인공보철물'들로 이빨 때우듯이 구멍난 지구 생태계를 메우면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위기를 얘기하는 것은 그것이 한계에 달해서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것 같다는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식량자원의 생산성 증가율이 둔화되었고, 수산자원들도 점점 한계를 들어내고 있고, 댐에 의한 물부족 해결도 한계에 들어서고 있는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르완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프리카에서 번영을 누리던 르완다의 경우 급격한 인구증가와 부족한 식량 자원이란 배경 속에서 인종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지금의 르완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위기를 얘기하는 것은 이러한 측면일 것입니다. 인류가 구석기 시대로 회귀한다는 것보다 '환경'이란 요소가 갈등을 야기하고 그것이 세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그러한 것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대안은 사실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환경의 위기를 '과장'이라고 쉽게 생각해 버릴수 있을 것 같은 기우덕분에 댓글을 답니다. 준비하려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쉽게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고, 가만히 해결되기를 기대하기도 하니까요. 물론, 오버하는 것은 사람을 쉽게 피곤하게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겠지요. 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