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과 치열함, 그리고 가치 
 병장 이승일 06-12 06:41 | HIT : 220 







[1] 중용과 치열함  

 우리가 바퀴벌레 등에 묻은 먼지 처럼 풍화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단지 윙윙거리거나 웅웅거리는 소리만 내다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단지 무(無)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무언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길 원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중용과 치열함이라는 덕목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중용, 치열함이라는 단어로 말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우리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것이 정말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여러가지 것들도 포기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러한 骨?함께 아우르고 균형을 맞추어나가는 것이 정말로 올바르게 사는 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고귀한 미의 세계에 몰입한 천재 예술가의 삶이 위대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놓친 일상성의 편안함이 더욱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자의 생각이 담고 있는 삶의 태도를 치열함, 후자가 담고 있는 태도를 중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용의 삶을 치열하게 추구한다" 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겠고, 이 경우 중용과 치열함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게 되겠지만, 이 때의 치열함은 내가 의미하려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삶의 태도 자체, 혹은 형식에 대한 치열함이지, 삶의 실질적인 내용을 이루는 가치에 대한 치열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용이나 치열함은 가치가 아니라 태도이다. 
 중용과 치열함은 일종의 자원배분의 문제이다. 우리가 할당할 수 있는 정신적, 시간적, 물질적 자원의 양은 명백히 유한하며,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가장 유망한 주식에 올인할 것인가. 

 우리는 동서양의 여러 위인들을 통해 이 태도가 그 자체로서 어떻게 다르며, 얼마나 상이한 삶을 이끌어내는지 알고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중용의 덕목이, 서양에서는 치열함의 덕목이 더 찬양받았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문명을 이끌어온 '천재' 들의 삶은 그 상당수가 비극적이었는데 이는 그들의 놀랄만한 '올인투자'의 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설사 비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일상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무언가 외골수적이고, 어딘가에 홀려있다는 느낌을 풍기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굉장히 거슬리는 것으로 평가해왔다. 그것은 창조성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광기로, 결여로 취급되었다. 자연의 이치는 결코 인간을 광기로 이끌지 않으며 가장 평온하면서도 안정된 상태로 이끈다는 것이 동양 사회의 보편적인 믿음이었다. 이 두 문화권의 수혜를 모두 받은 우리는 따라서 갈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는 전혀 문화적인 문제가 아니며, 모든 문화권에서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갈등일 것이다. 단지 일반적인 분위기가 지역적으로 차이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 속에서 사람들은 가끔 유쾌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여러 가치들이 사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상황에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예를 들어 어떠한 사업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오직 그 사업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연애나 결혼 따위도 더 할나위 없는 시간낭비로 생각하여 멀리 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결혼 후 부인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결혼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사업적 성과를 얻어내게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사업과 사랑이라는 가치는 결코 경쟁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중용과 치열함은 그다지 다른 선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와 같은 가치들의 상호 연결성을 미리 알기는 힘들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연결관계는 대체로 나중에 가서야 밝혀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희망만을 토대로 중용과 치열함의 태도를 융합시키거나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중용과 치열함의 태도 모두 명백한 삶의 진실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 쪽도 삶에 대한 가벼운 시각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반면 이 중 어떤 것도 다른 쪽 태도가 달성할 수 있는 영역을 완전히 포함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에 비추어보건데, 중용을 추구하는 사람이 치열함을 추구하는 사람과 같은 위대함을 이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치열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중용의 덕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온전하고 균형잡힌 삶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두 태도 모두 어떤 명백한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태도가 각기 다른 삶의 진실성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을 전부 포함할 수 있는 보다 나은 태도로부터 중용과 치열함의 태도가 모두 따라나오기를 기대해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태도의 한 후보를 추천해보고자 한다. 이 후보는 다음 두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 태도이다. 

1. 모든 가치는 중요하다. 
2. 각 가치의 중요성에는 우열관계가 존재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사소할 수도 있겠지만, 이 두 원리는 우리를 다음과 같은 삶의 태도로 인도한다. - 우선 모든 가치는 중요하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양한 것에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한다. 그 어떤 것도 '쌩까도 상관 없는 것' 은 없으며, 따라서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의 중요성에는 차등이 존재한다. 어떤 것은 더 중요하며, 어떤 것은 덜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유가 없을 때에는 결국 더 중요한 것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여유란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괄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양한 것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통해 더욱 풍성한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여유가 없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반드시' 포기해야하며 이 때 포기되는 것은 당연히 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른다면, 중용과 치열함은 그 어떤 것도 삶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일관된 태도가 아니며, 상황에 따라서 선택될 수 있는 일종의 전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들을 지휘하는 상위의 일관된 태도는 모든 가치의 중요성과 그 우열관계를 동시에 인정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2] 가치의 우열 

 여기까지는 아마도 큰 이견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가치의 중요성이 실제로 어떠한 우열관계를 갖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단지 개인의 판단에 맞겨두고, 개개인의 판단 하에서 위의 원리를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나는 단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우열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문제를 간단히 하기 위해 나는 단지 두 종류의 가치만 고려하겠다. 아주 거칠게 말해서, 나는 정신적인 가치가 물질적인 가치보다 더 우월하며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니체와 프로이트, 마르크스와 호크하이머 등이 등장하여 전복시켜놓기 전까지 인류가 보편적으로 수용했던 믿음이다. 이들은 물질적이고 하부적인 것이 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신은 단지 그것에 수반하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견으로부터 정신분석학과 유물론과 공산주의와 과학주의, 그리고 경제환원론이 출현했다. (언뜻보면 매우 성격이 다른 것 같은 공산주의와 경제 환원론은 사실 동일한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다.) 이들은 현대인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오늘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조차 일단은 물질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지 그 후에 정신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있다. 이 믿음은 물질적 조건이 더 선행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된 것이고, 당연하게도, 중요한 것이란 선행하는 것이지 후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삶의 의미나 고귀한 가치, 이상 등이 중요하다고 말하긴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이란 여러가지를 선택 할 여건이 허락되어있지 않을 때, 하나만 결정해야할 때 선택하는 어떤 것이다. 오늘날 경제적 여건과 정신적인 가치가 상충할 때 후자를 선택할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일단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건강하게 된다고 믿는다. 우선 경제가 발전해야 문화와 예술과 학문이 발전한다고 믿는다. 우선 돈을 벌어야 하고 싶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웰빙을 추구하고, 정치인들은 경제발전에 사활을 걸며, 학생들은 취업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이것이 불만족스럽지만 현실적 여건 하에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현실은 웰빙을 추구하는 오히려 더 마음의 건강으로부터 멀어지고, 경제발전에 사활을 거는 국가들은 문화와 예술과 학문에서 점점 멀어지며, 취업에 올인하는 학생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로부터 점점 격리된다. 몸의 건강만을 위한 노력은 보신식품에 대한 집착으로 마음을 더욱 병들게 하며, 오늘날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들은 사실 경제가 발전하기 이전에 문화와 예술과 학문이 풍성한 결실을 맺었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우리 시대가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의 토대가 아니라 오히려 한 부분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한 조각의 부분을 통해 전체를 얻으려고 시도할 수 없다. 오히려 전체가 주어질 때 부분도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건강하게 할 때 몸이 건강할 수 있으며,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느정도는 행복할 수 있다. 반면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몸이 건강하다고 해도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몸과 마음 모두가 건강한 상태이다. 서구의 경우를 보았을 때, 학문과 문화와 예술의 순수한 발전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 현대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원천기술들은 서구의 자연과학으로부터 비롯했는데, 이것은 애초에는 전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탐구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선진국들은 관광산업과 문화산업 등의 3차 산업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남기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문화와 예술의 선행발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반면 경제적 이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학문과 문화와 예술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인 성과도 제대로 거두지 못한다. 우리는 우선 경제력이 있어야 나머지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역사가 진행된 방향은 정반대였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물질적인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다지 오래된 가치관이 아니다. 이는 단지 최근 200 여년동안 형성된 믿음이며, 200 여 년동안의 숱한 병패의 원인이기도 하다.우리가 정신적인 가치를 성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멀리 있어서, 하부적인 것을 거쳐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진심으로 그것을 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애초에 현실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에 비해서는 덜 중요하다. 그것이 어쨌건 중요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신적인 것과 함께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가치를 소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균형을 통해 중용의 덕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고 최상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더 중요한 것, 더 큰 것을 선택해야하고 치열하게 그 선택지를 붙잡을 수 있어야한다. 나는 지난 200년간 과연 이 선택지가 무엇이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인류의 믿음이 크게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전복 된 것을 다시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되느다.




 병장 배진호 
 후훗 좋은 내용이네요.. 
 참 어려운 부분이죠.. 
 어떤 것이 중요한지 판단하는것도 너무나 어려운 부분이고.. 
 중용의 태도를 지니는것도 어려운 일이고.. 
 올인하는거 조차도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렇게 어렵다는 말로 핑계를 대고 있는거 같지만 실상으로 
 꽤나 모든것을 조율하는 것은 쉽지 않은일 같네요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겠지만 말이죠 06-12   

 상병 이재홍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동안 승일님 글이 어려워서 고생했는데, 
' 타자의 시선'도 그렇고 이번 글도 그렇고 제가 천착하고 있는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즐겁네요. 

 게다가 저에게 있어 두 문제는 종종 뒤엉켜버리곤 합니다. 

 모든 가치는 중요하나 우열관계가 분명 존재할 때, 
 타인(혹은 사회)와 나의 우열의 기준이 다를 때는 어떡해야 하나? 

 나냐? 남이냐? 
 사랑이냐 우정이냐? 
 안정이냐 도전이냐? 

 비슷비슷한 장단점을 가진,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놓고 고민합니다. 
 애시당초 저울질이 안되는 걸 저울질하는거지요. 

 결국 핵심은 이거더군요. 

 내가 밀어붙이느냐 마느냐. 
 어느정도 선까지 밀어붙이느냐. 

.. 이거 우유부단한 사람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 같군요. 

 그래서인가 가끔은 물불모르는 광기가 부럽기도 하답니다. 06-12   

 병장 배진호 
 저도 그런데 후훗.. 그런 광기를 동경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광기를 갖기는 싫더라구요.. 나름대로 저스스로에게 
 만족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 부러운때가 가끔있죠.. 우유부단이라는 것은 
 너무나 제 자신이 나약함을 느낄때가 있다라는 것이니까... 

 그게 강점이예요..! 06-12   

 병장 김대환 
 제 생각에는 서구가 예술과 문화 방면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인 여력이 뒷받침되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는 오래전부터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두고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부를 얻었습니다. 그런 부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지금처럼 예술에 신경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로마시대때는 식민지가 없었어도 예술의 전성기였지만 우리나라도 고려, 조선시대때(즉, 식민지 수탈을 겪기 전의 조금은 풍족한 상황)는 우리나라도 문화,예술방면에서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나 세계 여러 나라들처럼 식민지 수탈을 당한 뒤 먹고살기가 힘든 상황에서도 과연 예술이나 문화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클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댓글을 길게 다는게 처음이라 표현을 잘 못하겠습니다. 그냥 제 생각을 적은거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06-12   

 상병 김현진 
 저 또한 경제적 여력이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다는 대환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문화 예술은 생산 비용도 들겠지만 소비할 만한 경제적 여건도 필요하지요. 쉽게 말해, 먹고 살 만 해야 딴 생각도 하게 된다는 거.(......) 

 한 가지 태클을 걸자면, 로마는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스 또한 마찬가지였구요. 06-13   

 병장 진규언 
 묵묵히 <가지로> 

 조금 늦게 읽었지만 저릿한 자극이 됩니다. 승일님 나중에 생활이 궁핍해진다거나, 소일거리가 필요하게 된다면 '자기계발서' 한권쯤 쓰시는게 어떨까요(웃음) 제가 일상이 극단적으로 곤궁하더라도 기꺼이 돈주고 사겠습니다. 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