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그것은 하나의 아비투스, 하나의 습관, 

                                                                                                  내재성의 장 속에서의 하나의 습관, 

                                                                                                         나라고 이야기 하는 습관이다. 




                                                                                  모든 인격주의, 심리학, 즉 언어학에 반대하여, 

                                                                                    사건들은 3인칭, 심지어 ‘4인칭 단수’, 비인칭 

                                                                                                         즉 ‘그것It’의 개념을 장려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철학적 개념」 -질 들뢰즈-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이다. 

                                                                    홀로 있는 주체에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시간과 타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들어가며: 철학과 문학 

     

    철학과 문학. 이 둘은 너무나 다른 동시에 너무나 깊은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왔다. 명확한 개념화와 철두철미한 논증을 바탕으로 하는 철학과 허구의 상상력을 기본으로 현실에 대해 ‘애둘러’ 말하는 문학은 언뜻 보아도 서로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문학은 철학에게 시들지 않는 상상력을 공급하는 수원水原이 되어왔지 않았던가. 푸코가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착상을 얻고, 들뢰즈가 프루스트를 탐독하며 하이데거가 미쳐버린 횔덜린을 연구한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한편으로 사르트르의 수다한 소설과 희곡에서 보이듯이 문학은 풍부한 픽션의 외피로 앙상한 철학의 개념을 보다 풍성하게 ‘사례화’ 해주기도 하였다. 

    

    이 철학과 문학 사이에 또 한명의 걸출한 작가. 바로 미셸 투르니에가 있다. 대학 시절 가스통 바슐라르의 강의를 수강하고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미셸 뷔토르 등과 작은 그룹을 형성하여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르루아 구랑에게 직접 인류학을 배우는 등 미셸 투르니에는 그야말로 인문학 분야의 기라성 같은 석학들에게 배우고 또 그들과 같이 공부하며 학문적 토대를 구축했다. (미셸 투르니에는 1949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떨어지는데, 당시 미셸 뷔토르도 같이 낙방하고 만다. 훗날 둘다 문학으로 방향을 전향한 이 두 천재는 공부할 때도 낙방할 때도 함께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런 그가 나이 40이 넘어 발표한 전혀 처녀작 답지않은 쳐녀작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철학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을 목도한다.  그는 첫 작품인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18세기의 근대적 개인주의를 극적으로 묘사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전복하며 주체의 붕괴과정을 뛰어난 철학적 성찰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원작과 동일한 배경과 등장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원작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는 사유를 펼쳐가는 투르니에의 솜씨는 훌륭하다. 










           

표상의 힘 혹은 주체의 탄생 

    

    철학사적으로 볼 때 근대철학의 가장 획기적이고도 충격적인 발명품은 무엇인가?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주체’라는 사실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근대적 주체’의 구체적 모형을 최초로 제시한 사람이 ‘데카르트’라는 사실 또한 별 무리 없이 공중公衆의 찬동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세계의 기원인 physis를 탐구하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했던 과거의 형이상학과 달리 근대 철학은 주체라는 전혀 새로운 문제틀을 제시한다. 이제 주체가 어떻게 세계를 표상하는지를 탐구하는 ‘인식론’의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화려하게 등장한 주체개념으로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은 싫든 좋든 그것에 대해 필연적으로 말해야만 입장에 처했다. 즉 근대적 주체에 반대하여 철학을 할 수는 있어도, 주체를 모르고서는 철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선 데카르트의 명제에서부터 시작해보자, “cogito ergo sum" 즉 근대의 주체는 무엇보다 생각하는 주체, ‘의식’의로서의 주체이어야 한다. 데카르트에게 주체는 ‘생각하는 것 res cogitans‘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회의에 부칠 수 있지만, 지금 여기서 회의하고 있는 나 자신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 방법적 회의의 귀결이다. 

    

    그런데 의식이란 주체에게 있어 곧 ‘표상하는 힘’이다. 표상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세계상의 시대」에서 어원을 분석하며 적절히 지적하듯 표상vor-stellen이란 자기 앞에vor 세우는stellen 활동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세우는가? 주체인 인간이 존재자를 대상으로서 세운다. 이것은 인간이 존재자와 관계맺는 방식을 스스로 설정한다는 뜻이며, 존재자 즉 세계는 인간의 계산/측정을 통해서 인간 앞에 세워진 그림(象)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인간 앞에 세워진 ‘그림으로서의 세계’ 곧 세계상weltbild만이 존재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논변을 따라 가다 보면 의심할 수 없는 ‘생각하는 자아’에서 출발하여, 이 자아가 인식하는 세계는 선한 신의 보증을 받고 있으므로 세계는 존재한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즉 세계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생각하는 자아’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러한 주체의 인식방식을 “주체의 밖으로 나가 표상이라는 전리품을 가지고 다시 귀환하는 행위” 라고 분석했다. 이제 존재자는 주체의 표상능력에 의해 포섭된 ‘전리품’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표상활동을 통해 비로소 인간(주체)은 세계를 근거 짓는 자가 되었으며 존재자는 인간의 계산을 통하여 측정된 ‘대상’으로서 정복된다.  근대의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놀라운 탐구력은 이러한 표상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처음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 크루소는 전형적인 근대적 주체의 모습으로 섬을 지배해 나간다. 그는 섬을 샅샅히 탐험하여 지도를 만들고 야생동물을 길들여 사육하며 농경생활까지 시작한다. 그가 스페란챠라고 명명한 무인도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주체의 표상활동에 의해 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러한 소설 전반부의 전개는 기존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섬의 지배가 가속화되어 갈수록 그것이 점차 수량화/단위화의 과정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근대적 주체가 세계를 표상하고 인식하는 근저에는 수학적 계량화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활덜린의 시에 나오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라인 강은 이제 수력발전소에 공급되는 수량을 계산해 낼 수 있는 원료로서의 라인 강이 된다. 이러한 과정의 극단을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물시계’이다.   

    

   “그가 밤이건 낮이건 함지 속으로 떨어지는 이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를 들을 때면 시간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두운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규칙화되고 지배되고 장차 섬 전체가 그렇게 되려 하듯이 오직 한 인간의 정신력에 의하여 길들여지게 된다는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나의 시간은 기계적으로 객관적으로 거부할 길 없이 완벽하고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똑딱거리는 소리에 의하여 논리화 된다.” 




      늘 균일한 ‘메트로놈의 음악처럼’ 시간을 분절하고 조각내는 물시계의 물방울 소리에 의해 섬의 시간은 시간/분/초 단위로 계산가능하도록 수량화/계량화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로빈슨은 섬의 시간을 자신에게 길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지배가 극단화 된 형태가 ‘도량형기 표준국’의 건립이다. 

   

     “그 이튿날로 당장 로빈슨은 도량형기 표준국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그 속에 그는 마치 재단 같은 대를 세우고 마치 이성理性의 무기들처럼 자의 표준형 원기, 피트, 그레인, 드라크마, 온스, 파운드 등의 도량형 원기들을 벽에 기대어 진열해 놓았다.” 

    

    수량화 /계량화의 기준인 도량형 원기들은 근대적 주체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성의 무기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빈슨이 마치 신성한 신전을 건설하듯 공들여 ‘도량형기 표준국’을 지은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리라. 섬 전체를 수량화한 로빈슨은 이제 섬의 모든 것을 자신의 표상체계 안으로 흡수하려는 근대적 주체의 욕망을 드러낸다.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이제부터는 측정, 증명, 확인되고 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되기를 요구한다. 섬을 측량하고 이 땅 전부의 평면을 축소한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토지대장에 기록해야 한다. 풀포기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붙이고 새 한 마리마다 발고리를 끼우고 젖먹이동물 한 마리마다 불로 지져 도장을 찍고 싶다. 이해할 길 없고 헤아릴 길 없으며 무엇인가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고 해로운 소용돌이로 가득 찬 이 섬이 추상적이고 투명하며 뼛속 깊이까지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변모할 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리라! ”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기반을 둔 주체의 표상방식이다. 들뢰즈가 “표상개념은 철학을 독살한다”고 했을 때 표면적 비판의 표적으로 삼은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였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들뢰즈가 진정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다. 이데아론에서는 이데아에 매개되는 존재자들 외에 이른바 ‘금고르기’의 과정에서 탈락된 것들, 즉 이데아에 매개되지 않고 인식의 사각지대에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e’ 라 불리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범주론에서는 이러한 비표상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모든 존재자(객체)는 하나의 예외 없이 끝없는 유類-종種 관계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여진 촘촘한 그물코에 걸려 주체의 표상체계로 포획된다. ‘풀포기 하나, 새 한 마리’ 조차 남김없이 표상의 낙인이 찍혀 주체의 소유가 된다. 근대적 주체는 이러한 철두철미 함으로 마치 블랙홀처럼 세계전체를 ‘자신이라는 지평’위로 빨아들여 소환하고 회집會集하고 그 모두를 소유한다. 

     

    이러한 로빈슨 크루소는 마침내 스스로 자칭 ‘영국령 스페란챠의 총독’에 취임한다. 섬의 모든 것을 샅샅이 탐험하고 지배하여 총독의 자리까지 오른 그의 모습에서 세계의 지배자, 세계를 근거짓는자로 우뚝 선 근대적 주체의 모습을 읽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타인없는 세계 - 주체의 와해 

     

    그러나 섬의 지배자로 선 로빈슨은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타인의 부재라는 상황이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라는 공간에서 주체는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타자란 주체에게 과연 어떤 의미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타자는 자아의 공간과 사간의식을 가능케 해주는 자이다. 사물 세계에 대한 우리 지각의 비투사성 때문에 우리가 사물에서 지각할 수 있는 부분은 늘 제한 되어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지각되지 않는 부분까지 종합하여 대상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이 어떻게 가능한가? 들뢰즈는 이것을 타자의 존재를 통해 설명한다. ‘돌연히 타자가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 즉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각하고 있을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고서만 우리의 의식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바와 같은 하나의 전체적인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자를 통해야만 이 전체화된 세계의 상관자로서 우리의식은 구성된다. 

    

    그런데 타자가 사라진 로빈슨의 상황은 어떠할 것인가? 당연히 주체의 세계에 대한 표상능력은 삐꺽거리게 되고 이것은 ‘사물들 존재의 바탕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주의력 전환 요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타인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당장은 우리들 주의력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언제든 그 중심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희미한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로 밀려난 나머지 당장은 그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러한 사물들의 어렴풋한 존재는 이리하여 차츰차츰 로빈슨의 정신으로부터 지워져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는 이같이 해서 전체 아니면 무無라는 식의 초보적 법칙에 따르는 사물들에 에워싸이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강력한 무기였던 표상능력을 상실한 주체는 ‘감각이 증거해 주는 것에 대한 의혹’에 시달리며 타자를 찾아 울부짖게 되는 것이다. 




       “그는 점점 더 빈번히 자신의 오관이 그릇된 느낌을 전달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지울 수 없는 의심으로 인하여 어떤 지각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섬에 대한 나의 비전은 섬 그 자체로 축소되었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인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내가 지금 있지 않은 모든 곳에는 측정할 길 없는 어둠이 덮여 있다.........나의 고독은 사물들에 대한 감각 능력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 존재의 바탕 자체를 파괴한다. 점점 나는 내 감각이 증거해 주는 것에 대한 의혹에 시달린다. 내 두 발이 딛고 있는 땅은 그 땅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밟는 것을 필요로 함을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 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셩벽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오 하나님, 그 누구인 것이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타자의 출현만이 나에게 기억이, 그러므로 시간이 생기도록 해준다. 어떤 평화로운 상태에 있는 내 앞에 불안스러운 얼굴을 한 타자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평안한 상태와 그 상태 안에 있던 나는 단번에 과거에 위치하게 되어버린다. 대신에 현재는 불안한 세계가 된다. 이런 식으로 타자의 출현이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분화시켜주지 않는다면 결코 나의 내감의 형식으로서 시간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자가 부재하는 세계는 곧 시간이 부재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결론은 로빈슨의 다음과 같은 고백과 정확히 공명한다.     




        “옛날에는 매일, 매시간, 매분은 그 다음 날, 시간 혹은 분 쪽을 향하여 이를테면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 모두가 그 순간의 의도에 의하여 흡수되곤 했다........순환운동은 어찌나 신속해졌는지 이제는 부동不動과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날들은 마치 다시 똑바로 일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날들은 더 이상 하루하루 차례로 쓰러져 버리지 않게 되었다. 날들은 수직으로 일어서서 그 본질적인 가치를 당당하게 확립한다. 날들은 더 이상 실천되는 과정에 있는 어떤 계획의 순서에 따른 단계들로 서로 구별되지는 않게 되었으므로,  그들 서로가 비슷비슷해져서 내 기억 속에서는 서로 정확하게 포개지고, 또 나는 똑같은 날을 끊임없이 다시 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타인 없는 세계에서 주체는 시간조차 인식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주체는 계기繼起적 시간을 누릴 수 없으며 과거도 미래도 없는 무無시간 속에 갇힌 신세가 된다.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다. 하나님이신 태양 아래서 스페란차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진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타인은 남성과 여성의 분화, 즉 두 성이 구별된 인간의 탄생 자체를 가능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들뢰즈는 타인에 의해서 성적 차이가 정초되고 정립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타인이 표현할 수 있는 것(가령 타인의 성기)만이 나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이 표현하지 않는 것, 즉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여자의 신체 혹은 남자의 신체가 표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나의 욕망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존재란 욕망에게 일정한 형태를 부여하고 남녀의 신체 위에 자리 잡게 해주는 선험적 조건이다. 그러나 로빈슨에게는 욕망을 성적 차이위에 정립해 줄 타인이 없다. 때문에 그의 욕망은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할지 모른 채 표류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내부에서 사회적 구조가 무너져 폐허가 됨과 동시에, 욕망으로 하여금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하고 여성적 육체와 결합하게 해주는 제도와 신화의 틀도 사라져버렸다.......이제 나의 욕망은 심지어 어떤 대상을 향하여 달려들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는 형편인 것이다.” 




     따라서 로빈슨의 욕망은 자연히 성도착자의 형태를 닮아갈 수밖에 없다. 성도착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는 그것을 타인에게 무례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성격 짓는 데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성도착의 근본적 이유는 타인이 가능케 하는 성적 분화가 이루어진 구조를 도착자가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이 분화되기 이전의 도착적 상태에서의 욕망은 일정한 형태가 없고, 특정 대상과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견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욕망을 해소하는 로빈슨의 방식. 이를테면 식물적 방도의 형태나 대지(섬)와 사랑을 나누는 등의 행동이 설명된다. 타인없는 세계에서 인격적인 성적 분??붕괴된 로빈슨은 이같은 비인격적인 성도착자의 형태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타인의 존재라는 것은 주체의 발생자체를 가능케하는 선험적 조건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타인은 주체의 시공간에 대한 인식구조를 있게하는 조건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남녀의 성 분화를 포함한 세계의 질서 전체의 조직에 관여한다. 대상을 인식하고 욕망하기 위해서는, 즉 세계에 대해 주체로서 활동하는 모든 방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타자’라는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타자를 갖지 못한 로빈슨 크루소라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표면적으로는 공격적인 표상활동으로 섬 전체를 그의 손아귀에 넣는 듯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타인의 부재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기반이 침식되는 주체의 상황. 여기에 바로 로빈슨의 딜레마가 있다. 이제 로빈슨이란 주체상像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걷잡을 수 없는 붕괴의 지점에 ‘방드르디’가 있다. 방드르디는 붕괴의 기폭제이자 촉매제이다. 그는 로빈슨이 ‘통치하는 섬의 겉모습을 장식하고 있는 그 거짓된 심각성의 가면’을 벗겨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시간을 토막 내던 물시계의 소리는 끊어졌고, 사육되던 염소들은 울타리를 부수고 도망간다. 특히 가축에 대한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판이한 태도는 특기할 만하다. 

      
    “그 얼마 안 되는 가축들을 한데 모아 먹이고 추리고 하는 것은 오로지 식량 면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훈련을 시키거나 서로 친해지거나 아니면 사냥이나 고기잡이의 연습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이 통나무 같은 머릿속에 일깨워 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물들에 대한 그(방드르디)의 관계는 그 자체가 인간적이보다는 동물적인 것이다. 그는 동물들과 동등한 자격이다. 그는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할 생각도 없고, 그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그는 짐승들에게 같은 무리처럼 받아들여지고 대접받는다. 그가 짐승들에게 보답해줘야 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로빈슨은 가축들을 그의 표상체계 내에서 철저하게 ‘식량’으로 수량화하여 인식하는 반면, 방드르디와 가축과의 관계는 ‘동물적인 것’이다. 방드르디는 가축을 식량으로 바라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보호하고 사랑해줘야할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는 애초부터 가축 앞에 주체로 서지 않는다. 주체로 서지 않기 때문에 방드르디에게 가축은 더 이상 표상활동에 의해 정립된 객체(대상)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가축은 식량도 사랑할 대상도 아니다. 주체/객체라는 근본적인 우열이 사라진 상황에서, 방드르디는 가축의 무리에 자연스레 합류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부채가 없는 완전히 평등한 관계를 이룬다. 
    
    자연과의 이러한 관계 맺기는 이미 세계 앞에 주체로 선 자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인간의 광기어린 자연지배의 욕망과 이에 대항하는 자연보호의 열정은 모두 근대적 주체에서 배태된 이란성 쌍둥이일지 모른다. 그 ‘지배’ 와 ‘보호’의 지반을 동시에 관류하는 것은 자연을 ‘대상화’시키는 주체의 욕망어린 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보호의 논리는 인간의 파괴적 욕망에 근본적으로 대항하는 주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지배는 단순히 탐욕과 욕심이라는 심성적인 문제나 이익추구라는 경제적 문제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객체로 삼고서만 성립되는 주체의 태생적 한계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객의 분열은 주체가 탄생하는 근본조건인 동시에 주체의 한계가 된다. 주체와 객체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린다. 루카치가 한탄하듯 하늘의 별자리와 지상의 길 찾기가 일치하던 행복했던 시절, 즉 자연의 원천인 physis(별자리)가 곧 인간의 진리(길찾기)가 되는 주/객의 합일 상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마치 우습다는 듯이 주체의 한계를 훌쩍 넘어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며 로빈슨이라는 주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특히 방드르디의 탄약고 폭발사건 이후 로빈슨이 이룩해 놓은 ‘스페랸챠 제국’의 속세적 질서는 결정적으로 와해된다.  로빈슨은 폭발로 폐허가 된 그의 건축물, 문명의 이기, 이성의 질서를 뒤로한 채, 방드르디(주1)가 펼쳐보이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에 급속도로 동화되어간다. 주체는 이제 로빈슨의 말을 빌리자면 점차 ‘비인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비인간화의 도정에서 로빈슨은 또 하나의 결정적이고 빛나는 사유에 도달한다.   

     “나를 타자와 동일화시키지 않은 채 나를 묘사하고자 할 경우 가장 먼저 확증되는 사실은 그 나라는 것이 간헐적으로, 그리고 따지고 보면 상당히 드물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존재는 부차적이고 이를테면 반사적인 어떤 인식 양식과 일치한다............대상들은 다 여기 있다. 그것들은 햇빛에 빛나거나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 있고 거칠거나 물렁물렁하고, 무겁거나 가볍다. 알고, 맛보고, 무게를 가늠하고 불에 익히는 등등의 행위를 하는 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도, 나를 불쑥 나타나게 만드는 반사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 사실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 그 대상들은 알려지고 맛보여지고 무게가 달아지고 심지어는 불에 익혀지고 평평하게 깎여지고 접혀지는 것이다. 인식의 일차적인 상태에서 내가 대상에 대하여 갖는 의식은 그 대상 자체이며 대상은 그것을 알고 느끼는 등을 하는 사람이 없어도 알려지고 느껴지는 등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셸 투르니에가 탐독했다는 「존재와 무」의 사상, 즉 사르트르(주2)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르트르는 그의 사유를 ‘의식’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 의식이란 기본적으로 늘 ‘~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은 늘 의식 외재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고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자기 안에는 아무런 내용(성향, 상태, 성질 등)을 가지지 않고 텅 비어있다. 그러므로 이쯤에서 눈치 챘겠지만 사르트르의 의식개념은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의식은 항상 외재적인 대상을 상관자로서 성립시키면서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은 절대적인 자발성으로 정의되며, 의식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의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떠한가? 사르트르는 자아란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의 원천이 아니며(왜냐면 의식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근거 지으므로) 의식에 대해 외재적인 대상에 불과하다. 즉 인격적인 내용들인 성격, 감정, 습관 등을 통틀어 이른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의식 상관자적 대상의 위치로 강등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던 모든 것, 인격적 주체의 내용과 본질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의식의 바깥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지향적 의식 속에는 자아란 없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책에 대한 의식이 있고, 책속의 주인공에 대한 의식이 있지만, 그때 ‘나’는 의식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의식이 반성활동을 할 때 그의 상관자로서만 출현한다. 반성적 의식이 대상으로 삼는 외재적 대상, 그것이 ‘나’이다. 
  
      여기에 사르트르의 위대성이 있다. ‘인격적 자아로서의 주체’에 앞서는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영역’의 발견은 ‘나의 의식’을 최종 지반으로 보았던 데카르트 이래의 모든 논의에 대항한다. 들뢰즈의 찬사처럼 사르트르는 비인격적인 초월적 장이 근원적인 것이고 인격적 자아란 이 비인격적 장으로부터 발생해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처음 발견한 선구자이다. 이제 데카르트 이후 근대를 지배해온 기본 테제인 코기토 명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나(자아)와 의식(사유)을 강력하게 비끌어 매주었던 매듭이 느슨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다음과 같이 코기토 명제를 거꾸로 세운다. 

     “나는 사실, 내가 존재하는 바가 아닌 양태에서 존재하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양식에 존재한다.” (주3)

     이제 더이상 내가 사유한다는 사실은 인격주체로서 나(자아)의 존재를 담보하지 못한다. 상기한 로빈슨의 고백처럼 “나라는 것은 간헐적으로 그리고 따지고 보면 상당히 드물게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존재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 자체는 철저하게 ‘비인격적인’ 자발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세계를 근거 짓는 자로서 우뚝섰던 근대적 주체는 이제 비인격적인 의식에 밀려 한낱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허물어져가는 근대적 주체에게 세계는 더 이상 표상활동에 포획당한 객체가 아니다.      
     
     “스페란챠는 이제 기름진 땅으로 가꾸어야 할 황무지 아니다. 방드르디는 이제 내가 교육시켜야 할 야만인이 아니다.”   
     
     더 나아가 로빈슨은 다음과 같은 언명을 통해 ‘이성=질서/자연=무질서=야만’ 이라는 근대적 사유에서 비롯한 등식을 완전히 전복하기에 이른다. 
    
    “야생의 상태로 되돌아 간 염소들은 이제 인간들에게 강제로 사육되는 동안 강요받았던 무질서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힘세고 똑똑한 숫염소들이 지배하는, 계통과 서열이 확실한 무리로 나누어 졌다.”   

     사르트르의 기획을 이어받아 그것을 극단으로 밀고 나갔던 들뢰즈의 신랄한 지적처럼 주체는 ‘하나의 아비투스’, ‘나라고 이야기하는 습관’에 불과한 것이 된다. 즉 주체란 존재론적 지위는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문법상의 주체(주어)의 지위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근대적 주체가 쌓아올린 오만한 바벨탑은 이미 무너져버렸고, 이제는 주체자신의 존재근거마저 박탈당할 위기에 빠졌다. 주체는 유명론적 이름에 불과 하다는, 이 사형선고를 받아든 로빈슨이란 근대적 주체/자아/인간의 운명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푸코의 예언을 통해 얼마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다음 파도에 씻겨 나갈 모래 위에 그린 얼굴처럼 결국 사라질 것이다”        




미래 - 새로운 타자의 도래 

    그렇다면 이 사라진 주체의 빈자리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주체 개념 페기의 성공여부는 주체개념이 했던 일을 대체해줄 보다 유용한 새로운 기능을 가진 개념을 창조해 주체 개념과 경쟁시킴으로써 전망해 볼 수 있다는 들뢰즈의 지적을 상기해보면 이 같은 질문은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 빈자리의 주인은 들뢰즈가 말한 비 인칭, 혹은 심지어 4인칭이라 불리는 비인격적인 익명적 사건들인가? 아니면 기존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필요한가?   
     
     여기서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타자의 모습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불현듯 등장한 ‘화이트버드호’의 선원들부터 살펴보자.
  
   “이 인간들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가치, 관심점과 싫어하는 점, 중력의 중심을 지닌, 상당히 논리 정연한 하나씩의 가능적 세계였다..........그 가능적 세계들의 하나하나는 순진하게도 자기의 현실성을 선언하고 있었다. 타인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현실로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는 가능태可能態 말이다. 이 같은 요구를 무시한다는 것은 잔인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짓이라는 것이 바로 로빈슨이 교육을 통하여 주입받았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독한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그것을 잊어버렸다.” 
  
     선원들은 ‘하나씩의 가능적 세계’이다. 즉 그들은 들뢰즈의 타자이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체정립의 근본조건으로서의 타자들이라 할 수 있다.(주4) 그런데 선원들은 또한 ‘현실로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는 가능태’이기도 하다. 잠재적인 가능세계로서 ‘가능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현실로 인정받으려 기를 쓰는 자들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음울한 타자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사르트르에게 타자는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탄생을 가능케하는 근본조건이다. 상기했던 바와 같이 사르트르에 있어서 인격적 주체(자아)의 발생은 의식의 반성활동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타자는 ‘시선’을 통해 ‘수치’를 발생시킴으로서 ‘비반성적 의식’에서도 주체가 발생할 수 있게 한다.(주5) 수치가 비반성적인 이유는 그것의 근본구조가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 정립적인 지향성의 화살을 돌리지 않으므로 자신 안에 아무런 내용(자아)도 가지지 않는다. 수치는 늘 ‘무엇인가에 대한 수치’이므로 항상 외재적인 대상을 정립적으로 지향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무엇인가’란 다름 아닌 ‘나(자아)’아닌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열쇠구멍을 엿보다 들킨 수치는 타자에 대한 수치일 수 없고, 오로지 ‘나’에 대한 수치이다. 요컨대 시선을 통해 등장하는 타자의 의식이 수치를 발생시키고, 수치는 수치의 대상으로 자아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선 앞에서 자아가 대상화 된다는 것은 곧 자아라는 인격적 주체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는 사르트르에게 ‘투쟁적 관계’로서 사유된다. 「구토」에서 부빌의 초상화를 기술하는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타자와의 만남은 내가 대상이 되거나 그가 대상이 되는 ‘시선끼리의 싸움’이다. 타자와의 관계가 투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수의식의 절대적 자발성, 즉 절대적 자유의 문제 때문이다. 맹목적인 자발성을 가진 의식이 그와 동류의 다른 의식을 만날 때, 양자의 절대적 자유는 서로에 대해 구속으로 작용하며 서로의 관계를 투쟁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타자의 시선이 나를 공격해옴은 바로 의식의 근본적인 지향성에서 기인한다. 

     또한 이러한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본성 때문에 누구도 노예의 자리나 주인의 자리를 영원히 차지하지 못한다. 타인을 향한 ‘나의 지향적 광선’은 타자를 끊임없이 대상화 시키고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하며 이것은 타인의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대상화 시킨 타자는 계속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투쟁을 통해 나를 대상의 지위로 격하시킬 수 있다. 즉 지금은 노예의 상태에 있지만 언제든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역전가능성’이 타자와의 관계에는 도사리고 있다. 

     의식은 공격해오는 타자의 시선과 투쟁하여 대상의 지위로 복속시키려 하지만, 대상화된 타자는 언제든지 투쟁을 통해 나의 등 뒤에 지향적 시선이란 비수를 꽂을 수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내가 두려워하며 다루는 ‘폭발물’에 비유한다. 요컨대 사르트르에게 타자와의 관계는 먹고 먹히는 투쟁 속에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화이트버드호의 타자들은 어떠한가? 선원들은 로빈슨에게 있어 지향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타자로 출현한다. 그들은 ‘지신의 자발성을 선언’하고 ‘현실로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순수 의식의 지향적 광선을 무기삼아 타인을 인식 지평위의 대상으로 정복하며 자신의 현실성을 선언한다. 이 피튀기는 지향적 광선들의 검투장에서 로빈슨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절감했으리라. 무인도에 오기 전까지는 로빈슨도 이런 타인과의 투쟁을 무의식적으로 당연시하며 참여했겠지만, 20년 넘게 무인도에 갇혀 지내며 주체의 지위를 상실한 로빈슨은 인격적 자아를 가능케 하는 타인의 시선을 잊은 지 오래다. 이제 그에겐 시선끼리의 투쟁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그토록 타인을 찾아 부르짖던 방드르디는 결국 화이트버드호를 따라 섬을 떠나기를 거부한다. 

    그런데 화이트버드호가 떠난 다음날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선원들을 따라가 버린 것을 알고 절망에 빠져 버리게 된다. 이 갑자기 찾아온 죽음과도 같은 고독 속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그를 구해내는 것은 한 헐벗은 어린아이(죄디)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타자와 전혀 다른 타자와의 조우를 목도한다. 로빈슨과 죄디의 관계는 더 이상 투쟁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구원의 사건’이다. 아제 전혀 다른 타자와의 만남을 분석할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새로운 사유의 선구자는 바로 레비나스다.

    레비나스의 츨발점은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있음 li y a’ 의 상태다. (때문에 들뢰즈가 최종적 목적지로 삼는 곳을 출발점으로 삼아 레비나스의 사유는 진행되고 있다.) 이 ‘있음’은 존재자에 귀속되지 않은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레비나스 철학의 첫째 과제는 이러한 익명적 존재로부터 어떻게 명사적인 하나의 존재자, 곧 주체가 출현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 익명적 존재로부터 인격적 주체의 탄생을 레비나스는 ‘자기정립’이라고 부른다.(주6) 
     
     레비나스는 자기 정립을 통해 태어난 이 존재자를 시간적 지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주체를 시간적 존재로 규정한 칸트나 하이데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자못 의아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현재를 비시간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것은 이미 데카르트에게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코기토의 확실성은 나에 대한 의식이 활동하는 그 ‘순간’에만 확보된다. 즉 자기의식이 활동하는 현재의 순간에만 주체는 출현한다. 그러므로 코기토는 과거의 나. 미래의 나 곧 시간적 존재로서의 나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실성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데카르트에게는 현재의 순간순간에만 출현하는 파편화된 주체만이 존재할 뿐, 시간적 지속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 비시간적인 코기토는 ‘자아’의 ‘자기’에 대한 연루라는 구조를 근본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자의 자기 지칭적 구조는 ‘권태’의 원천이다. 권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싫증이며, 자기 자신이 존재함에 대한 힘겨움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자기’가 권태롭고 피로할 때 ‘자아’는 이 자기를 자유롭게 떠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권태 속에서 허덕일 때 우리는 존재의 이런저런 모습들 가운데 하나로 도망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무리 피곤하고 괴롭다고 하더라도 ‘자아’가 ‘자기’를, ‘존재자’가 ‘존재를 떠날 수 없음은 숙명적이다. 때문에 자기에 대한 권태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쓰디쓴 운명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자의 존재 구조는 자아와 자기의 피할 수 없는 연관, 즉 자기성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자기성의 구조는 권태의 원천인 동시에 무시간적인 현재 순간들의 나열에 있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무시간적인 현재 속에 갇혀있게 때문에 ‘미래의 도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조각난 순간들의 나열 속에 갇힌 존재자에게 시간이 주어지는 것, 즉 무한한 미래 시간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의 구원의 사건 혹은 초월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레비나스는 무한한 미래 시간의 도래는 자아와 자기의 관계를 끊어버리는데서 성립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벗어남 ex-cendance’이라는 신조어로 명명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벗어남’이 가능할 것인가? 자아와 자기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자아가 아닌 것, 곧 타자와 관계할 때 그런 벗어남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타자는 나의 표상으로 절대 환원되지 않는, 즉 나의 어떤 이해나 개념을 통하여 거머쥘 수 없는 ‘이타성’을 지닌 타자여야만 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러한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이타성을 지닌 타자는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현한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인을 인식하거나,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인식 지평위의 소유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 소유할 수 없는 자, 어떤 방식으로도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자이다. 이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대항하여 ‘저항’한다. 그것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은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인의 나보다 높은 곳에서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명령하며, 나는 이 명령 앞에서 피할 수 없다.  

     이렇게 자아가 자기에게 몰두하는 근본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타인을 위한 수고에 전념한다는 점에서 비로소 ‘벗어남’이 이루어진다. 이제 자기에 대한 자아의 연루의 사슬은 깨어지고 자아는 ‘자기에 거슬러’ 타자를 위하는 자가 된다. ‘자기에 대한 관계’가 ‘타자에 대한 관계’로 변형될 때에, 레비나스 철학의 목표인 존재 너머의 초월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벗어남과 함께 시간의 탄생과 미래의 도래 또한 고통 받는 얼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절대적인 타자의 호소에 응답함으로서 가능해진다. 타인을 위한 수고는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자기 자신보다 더 걱정하는 것이다. 미래는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즉 ‘타인이 누릴 삶’으로만 나에게 찾아온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염려하고 보살피는 타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면 여전히 나의 미래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 미래는 아무런 규정도 되어있지 않은 전적으로 무한히 열린 미래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지적처럼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주7)

    이제껏 모든 것을 인식의 소유물로 삼아왔던 전체주의적인 주체는 헐벗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존재 구조 자체를 깨트려 초월하고, 윤리적 주체로 새롭게 태어난다. 로빈슨 또한 자신의 표상능력으로 거머쥘수 없는 헐벗은 어린아이로서의 타자. 즉 죄디와 조우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시간 너머에 펼처진 아이의 미래를 염려하는 방식으로 무한한 시간, 즉 ‘영원’으로의 초월을 이루고 있다. 존재 너머로 새롭게 탄생한 윤리적 주체에게 주어지는 ‘미래의 도래’를 투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찬란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시금 영원이 그를 사로잡으며 음산하고 대수롭지 않은 그동안의 시간을 지워가고 있었다. 어떤 깊은 영감이 완전한 흡족함의 감정으로 그를 가득 채웠다. 그의 가슴은 청동 방패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의 두 다리는 마치 기동들처럼 건장하고 꿋꿋하게 바위를 딛고 있었다. 황갈색의 빛이 그에게 변함없는 청춘의 갑옷을 입혀주었고, 금강석 같은 두 눈이 번쩍거리는 구리 가면을 빈틈없이 고른 모양으로 만들어 씌어 주었다. 신이 폭발하는 심벌즈 소리와 쩌르릉거리는 트럼펫 소리를 내면서 붉은 머리털의 왕관을 활짝 펼쳤다.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서 광물성의 그림자들의 빛을 발했다.”  





나오며: 비표상적 사유를 위하여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자연을 지배하는 근대적 주체의 화려한 ‘탄생기’라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주체의 표상활동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탈출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볼 때 소설에서 탈주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주체 개념 없이 살 것인가 혹은 새로운 주체와 더불어 살 것인가? 

    기실 이 두 가지 기획은 현대철학이 근대적 주체성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사유들 중 두 극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는 들뢰즈처럼 주체개념을 아예 없애버리고 비인격적 익명성으로, 인간 아닌 것으로, 비 인칭 혹은 4인칭이라 불리는 어떤 동일성도 전제하지 않는 파편적인 익명적 사건들로 살아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처럼 표상활동을 통해 타자를 자기의 지평위에 종속시키는 이기적인 주체가 아니라, 비표상적 타자의 도래를 통해 비로소 탄생하는 새로운 주체를 그려 보이는 것이다. 투르니에는 타인 없는 무인도에서 함몰되는 주체의 모습을 통해 주체 없는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사건들로 살아가는 가능성을 열어보이며, 한편으론 어린 죄디라는 타자의 출현을 통해 윤리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주체를 그려낸다. 

    일견 상이한 듯 보이지만 두 가지 기획은 모두 세계를 자신의 인식지평위로 종속시키는 주체의 표상활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거기에 내재한 폭력성에 반대하여 ‘비표상적 사유’를 주장하고 있다. 주체의 개념적 장치를 통해서 표상할 수 없는, 즉 인식적 소유물로 삼을 수 없는 비표상적인 것들 앞에서 근대적 주체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이 무너진 ‘주체의 빈자리’를 대체하기 위한 노력들. 이것은 그 수다한 현대철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근본테마가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투르니에의 소설은 첨예한 현대철학의 논점들을 가로지르며 그것의 아름다운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고전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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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 <주체성의 파괴를 가속화시키는 타자> : 여기서 잠시 방드르디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볼 때 방드르디는 무인도에 혼자 살고 있는 로빈슨에게 처음으로 뛰어든 이를테면 타자他者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뢰즈의 타자론을 검토하며 보았듯이 방드르디는 주체의 가능조건으로서 기능하는 타자의 효과를 발휘했어야 했다. 즉 타인을 잃고 붕괴의 위협에 허덕이는 로빈슨을 다시금 세계를 거머쥔 주체의 왕좌에 앉혀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방드르디는 정반대로 주체의 몰락과 와해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그는 한사람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와 전혀 다른 것.......,대상들, 물체들, 대지를 용해시키는 자. 즉 순수한 요소들의 계시자이다.” 방드르디는 타자가 아닌, 주체를 비인격적인 상태를 되돌리는 작업의 ‘공범자’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처럼 방드르디를 통해 드러난 ‘타자로 기능하지 않는 전혀 다른 타자’의 존재 가능성 또한 깊이 숙고해 봐야 할 문제다.   


   (주2) <사르트르의 재발견> :  사르트르는 당대에 너무나 유명하고 인기 있었기에 오히려 불행하게도 그의 책과 사유들은 발표되자마자 진중한 검토와 분석의 과정 대신, 과장된 제스처와 환호, 격렬한 논쟁과 반발 속에 파뭍혀버렸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급작스런 센세이션의 거품은 부풀어오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식어갔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 김빠진 맥주처럼 ‘실존주의’라는 한 마디로 요약되고, 그 낱말은 마치 한물가서 잊혀진 어느 철학사의 지층을 간신히 대변하는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잔인한 대중과 동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르트르란 천재를 씹을 새도 없이 찬사와 오욕 속으로 다투어 삼켜버렸으며, 채 소화되기도 전에 차가운 무관심 속에 서둘러 배설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렇게 간단히 요약되어 단지 지나간 철학사의 페이지를 채울 뿐인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 속에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인용되고 재탄생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자세히 다룰 순 없지만 그의 타자론은 레비나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사르트르가 제시한 ‘비인격적 의식의 영역’은 들뢰즈와 푸코의 사상에 고스란히 이어졌다. 흔히 구조주의자로 분류되는 라캉조차 그의 욕망개념을 사르트르의 ‘의식의 자발성’ 개념에 크게 빚지고 있다.      

   
    (주3) <라캉과 사르트르> : 그런데 놀랍게도 사르트르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라캉의 거꾸로 된 코기토 명제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나는 사유한다라는 의식이 없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사유하지 않는다.”      라캉에 대한 사르트르의 결정적인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주4) <가능세계로서의 타자> :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들뢰즈에게 있어 타자는 주체의 모든 지각활동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예컨대 두려움에 질린 얼굴) 우리의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잠재적인 부분까지 통틀어 전체로서 하나의 무서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엔 잠재적으로 타자의 시선이 가 닿고 있으리라 여기고,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잠재적으로 타자가 듣고 있으리라 여긴다. 때문에 들뢰즈는 타자를 ‘가능세계의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주5) <타인의 시선에 의한 주체의 발생> : 사르트르는 타인에 의해 비반성적 의식의 층위에서 주체가 발생하는 과정을 ‘엿보는 자에 대한 예’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열쇠구멍으로 무엇인가를 엿보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때 나는 혼자이고 그 엿보고 있는 의식은 엿보는 대상을 지향하고 있을 뿐, 그 의식에는 나(자아)란 없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누가 나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때 수치로서의 비반성적 의식이 생겨나면서 그 수치의 대상으로서 자아가 발생된다. 
  

   (주6) <자기정립으로서의 잠> : 레비나스는 이 ‘자기정립’을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다양하게 기술한다. 그 중에서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잠에 관한 이론’이다. 즉 코기토의 출현은 흥미롭게도 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깨어 있는 상태는 항상 깨어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왜냐하면 깨어있음은 ‘깨어남’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즉 ‘깨어있음’이라는 의식의 본성은 ‘깨어남’으로부터 성립하며, 깨어남은 무의식 곧 ‘자고 있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요컨대 잠을 거쳐야만 의식은 의식으로서 탄생할 수 있다. 이것을 ‘자기동일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보다 명확해 지는데, 익명적 존재 속에서 하나의 존재자가 정립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떠났다가 다시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일, 즉 자기동일성의 작업이 가능해야한다. 그런데 의식이 늘 깨어있기만 한다면 ‘깨어 있는’ 의식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획득할 방법이 없다. 오로지 의식은 잠이라는 망각 또는 무의식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어야만 ‘깨어 있는 것’으로서 스스로가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잠은 의식, 즉 주체가 탄생하는 자리이다. 


   (주7)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 동일하게 훗설과 하이데거의 타자론을 비판하면서 출발하였던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두 철학자의 타자론은 ‘비표상적 타자’와 ‘동일자와 타자의 비대칭성’이라는 크나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두 사람이 각기 도착한 ‘투쟁으로서의 타자론’과 ‘구원으로서의 타자론’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커 보인다. 이 둘 간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역전가능성’의 유무에서 성립한다. 사르트르에게 타자는 나에게 주체 혹은 대상으로 역전가능한 관계임에 반해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는 나에게 역전불가능한, 즉 무한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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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1 :  필자가 분석한 내용 외에도 투르니에의 소설은 많은 부분에서 철학적 성찰의 단초를 제공한다. 특히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로빈슨의 사랑(에로스)와 죽음(타나토스)에 대한 성찰과 그에 따라 대지적 사랑이 (투르니에의 말을 빌리자면 새로운 에로티시즘이) 발생하는 부분은 프로이트의 유명한 논문 중 하나인『쾌락원칙을 넘어서』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울 내용이다. 

  
   덧2 :  읽은 책의 판본은 최근에 나오고 있는 믿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라 그런지 독서함에 있어 특별한 번역상의 문제없이 매끄럽게 읽혔다. 그러나 소설 맨 끝에 붙어있는 김화영 교수의 해설은 심도 있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가스통 바슐라르에 대한 나의 무지가 결정적 요인이었으리라.(무식한 자의 설움이란.......) 해설을 읽으면서 바슐라르의 이론과 들뢰즈가 주장하는 ‘대상이전적인 요소’들을 연관하여 분석해보면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문득, 쓸데없이 들었다.;;;;      


  덧3 :  이 글은 많은 철학자들의 저서들과 그보다 더 많은 (책이름조차 잘 기억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2차서적들을 참고로 하여 쓰였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순수하게 나의 독창적 창작물은 글의 제목들뿐이지 않을까? 이 정도면 표절을 넘어 거의 짜깁기 수준에 가깝다. 당연히 일일이 각주를 달아 출처를 밝혔어야 마땅하지만, 필자의 군인이라는 신분 상 인용한 내용이 수록된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지 못하므로 (사실 2차서적의 경우 이 내용을 어느 책에서 봤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각주는 과감히(!) 삭제했다;;; 그러나 근대적 글쓰기는 타인들이 써놓은 텍스트의 공간 속에서, 기존의 말과 문장 사이에서 성립한다는 푸코의 지적을 생각해본다면 필자의 보잘 것 없는 글 또한 어쩌면 어설프나마 하나의 독창적인 잡문雜文으로라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