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탐방] 책마을의 아이콘 '매크로 동석'님과의 대화입니다! 하  
병장 김준호   2008-10-27 13:44:28, 조회: 278, 추천:0 

병장 김태형 

(44) 저는 단순하게 질문하겠습니다. 

(질문) 동슥씨 대체 정체가 뭐죠? 
단순하게.. 라기보다 지금 잠시 다녀온 소풍의 여파가 아직.....
  
역시 단순하게 답하겠습니다. 전까지 43개 질문에 답했는데, 제 정체는 오히려 더 오리무중입니다. 
단순하게.. 라기보다 얼마전에 물리적인 힘에 의해 이 파일 원본 날려먹은 여파가 아직...



상병 김동욱 
어쩐지 요새 동슥님의 댓글이 안보인다 했더니 출타중이셨군요. 크크크크. 다시 들어오신 걸 축하드리면서 저도 질문. (아직 10/1 인데 제 질문도 유효한것이지요? 그 애매함의 경계에 제가 서있는듯. 동슥님의 이전 글들을 읽어보느라 늦었어요. 흑흑) 
일상적인 질문으로, 간단히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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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건드리면 뭔가를 계속 끄집어낼 것 같은, 책마을의 도라에몽. 
(나쁜 뜻이 아니에요, 풋) 

(45) 칸트인가 까뮈인가가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라고. 그렇다면 뻔한 질문 두개. 

- 그렇다면 지난 20여년을 돌이켜 몇 명의 친구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동석님에게 어떤 이들이 떠오르나요. 동석님의 '사람'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특히 '우정'에 관해서, 결국 사랑 역시 이로 수렴한다고 생각하기에. 

-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사람과 만났을 때 주로 가는 곳은 어떤 곳인가요? (술집도 괜찮고, 구체적인 상호가 아니라 대략적인 분위기) 

이런걸 보고 일타쌍피라고 하던가요? (웃음) 전 꽤 친구가 많은편이라고 자부해왔습니다. 물론 지나고 나면 손을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게 또 인연이라는것도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 아무것도 없지만, 인복 하나는 타고났다고 생각해요. 인복 중에 그나마 아쉬운게 있다면, 여복(女福)이랄까요. (웃음)

전 초등학교 1학년때 자리잡은 동네를 아직까지 살고 있는터라, 오랜 친구가 참 많습니다. 초-중-고 받고, 재수학원 함께 다니고, 대학까지 함께한 친구도 있을정도지요. 제 글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친구들입니다. 누구를 추리기도 어렵군요. 

제가 집에 들를때마다 거의 함께 사는 친구의 이야기부터 해봐야겠습니다. 별명이 데몬인 친구인데, 진짜 악마처럼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라는건 아니지만, 제가 혹시 조금이라도 재밌는 부분이 있다면, 팔할은 그 친구에게서 비롯됐을겁니다. 초-중-고 동창이지만, 막상 지금처럼 친해진건 고등학교 올라와서 부터입니다. 명목상 저는 기숙사 범생이에 그 친구는 흡연실 불량배였기에 학교나 부모님은 못 놀게 하려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이(?)였던지라 오히려 그 반발심으로 더 붙어다녔는지도 모르겠군요. 그 친구는 어렸을때부터 주색잡기에 능숙했지만 절제할줄 알았고, 저는 삼년간을 전전긍긍하며 고민하던 진학문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과감하게 대학을 때려치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놀면서 번듯한 대학의 건축과에 합격한것도 신기한데, 그걸 또 포기하고 자기 꿈을 위해 요리관련학과로 진학한거죠. 뭐 그것도 곧 그만두고, 요새는 배우를 꿈꾸며 연기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제가 바람넣은 지분이 있는터라, 책임감도 적잖게 느끼고 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생업전선에 뛰어든 터라, 각종 알바 경험과 유흥경험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지라, 그쪽으로는 저의 멘토나 다름없지요. 그 쪽으로 가자니, 중학교때 민증을 발급받았던, 복학생 원반이 형이 떠오르는군요. 원빈을 반정도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원반’인 형은, 소년원을 다녀왔고, 몸에 문신 투성이지만, 왠지 순수한 알수 없는 형이었습니다. 중학생 신분으로 이미 술집을 넘어 사창가에 통달한 학교 입장에서는 악의 축이지만, 호기심 왕성한 할일없는 중학생들에겐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온 선구자와도 같은 존재였지요. (웃음) 정말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세계를 그 형은 일상인것처럼 소개해줬습니다. 그건 한창 청교도적인 심약한 범생이에서 삐져나오는 화를 어찌하지 못하는 돌아이로 변모하는 과정이었던 제게 해방구를 제시해준거나 마찬가지 였지요.

전 아직도 집에 들를때마다 고등학교적 선생님들을 만나 술을 풉니다. 대뜸 전화하는거지요. 긴말도 필요없이 바로 술약속이 잡힙니다. 한 분은 제 전인적 멘토라 할수 있겠고, 다른 한 분은 예술적 스폰서이자 문학적 스승, 또 다른 한분은 인생에 있어 든든할 선배라 할수 있겠지요. 그 중에서도 고삼하고도 수능 사일전 주말내내 술을 푸는 것으로 제 인생에 다가와주신 제 전인적 멘토이신 한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 상당히 같잖은 자의식의 건방진 고등학생이었던지라, 명문대 출신 국어선생님이 왠지 아니꼬왔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전 국어과목에서는 이미 선생들에게 배울게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지요. 전 수업시간에 자고, 선생님은 자는 아이 안 때리고, 타성과 폭력에 길들여진 전형적인 고삐리 이동슥에겐 그게 그리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그냥 몇 대 맞고 그냥 잘랬는데, 냅두니까 더 이상하게 생각한거죠. 그리고 수업시간에 무슨 소릴하나 조금씩 들어봤습니다. 국어수업인줄 알았는데, 인생수업이더군요. 흔히 말하는 386세대인데다 대학때 풍물패를 만들었고, 전XX소속인 선생님은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선생님이었습니다. 한번은 뒷산으로 넘어가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때 담배꽁초를 줍고 있는 선생님과 마주친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씩 웃으며 담뱃불을 끄시더니 주머니에 꽁초를 넣고 가시더군요.  그 다음부턴 담배꽁초를 절대로 바닥에 털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습니다. (입궁전까진 “절대로” 였습니다. 술 먹고 필름 끊겨 일어나도 주머니 한가득 들어있는 담배 꽁초 때문에 식겁했던 적도 있을정도로)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는 정말, 그 촌구석의 오만한 고등학생에겐 놀라운 이야기들 뿐이었지요. 철거촌과 여공노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 울음을 삼켰습니다. 세상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끼면서 뛰어다니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도, 그저 낄낄대며 듣다보면 눈물이 고이고, 가슴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남더군요. 선생님과 공연을 하기도 했다는 김광석과 안치환의 노래를 들으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의 좁아터진 세계를 깨고 세상으로 나가는 길 하나를 넌지시 알려준것이지요. 외려 사상적인 면이나 거창한 테제를 이야기 했었더라면, 거부감에 몸을 떨었을테지만, 생각의 단초만을 던져주고, 결론은 스스로 내라고 하는 선생님을 거의 여고생의 마음으로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허허. 그리고 수능이 정말 코앞일때, 선생님은 몇몇 녀석들에게 밥이나 한끼 하자고 하셨고, 저는 과감하게 2차를 외쳤지요. 그리곤 2차, 3차, 노래방에 선생님 집까지 쳐들어가서 집에 남은 음식과 술을 모조리 소진해버리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나선, 스승-제자 같은 거추장스러운 건 벗어버리고, 술 친구로 남았지요. 거기다 안암골 사범대 풍물패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선생님의 명성은 우연찮게 만나게 된 안암 여학우와 친해지게 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애프터 서비스에 부가 서비스 확실한 선생님인지요. 허허.

사람 자랑하느라 두 번째 꼭지는 깜빡해버렸군요. 어쨌거나 그 선생님이 부른 자리에 함께했던 친구들은 그 이후로 더 각별해져서, DSbbb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프로덕션이라고 만들었는데, 뭘 모르는 놈들인지라 엔터테인먼트를 가져다 붙인거지요. 그 친구들 중에 회기 술 다 먹고 다닌다는 시인 녀석과 안암 사람 다 안다는 특전사 예벽 녀석, 중년탐정 김정일과 헤어스타일까지 닮아 민족주의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는 부산 영도의 아들이자 열혈 대학신문국장이면서 아직까지 입영날짜도 안받아놓은 대책없는 녀석, 초딩적 마인드와 초당적 정치적 신념을 숨기고 전경을 때리고 있는 제주서 X경위 놈, 호스트바 선수 출신의 경마장 VIP, 사채시장의 기린아로써 밀입국을 밥먹듯 하다 지금은 불법조업을 몸바쳐 막고 있는 해경 녀석까지 온갖 이상한 녀석들의 군집이지만, 모두 제 여자에게만은 따뜻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렇지만 막상 여자는 없는 제 친구들은 차차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사람도 안가리고, 영화도 안가리고, 음식도, 술도 안가립니다. 단골도 한 두집 있지만, 가던곳 들르는 것보단, 새로운 곳 체험해보는걸 즐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서서 먹어야되는 맛집은 안 찾아요. 패밀리 레스토랑 이런데 가면 과잉 서비스에 몸서리치는걸 보니 서비스 비가 음식값에 격하게 포함되어 있는곳도 안 좋아하는 듯 하군요. 역시나 물은 셀프가 맛있죠. 

술은 안 좋아하는 술이 없는고로, 철길에 기름냄새나는 대폿집도 좋아하고, 꿀보다 단 폭탄주 먹으러 바도, (누가 사준다면) 갑니다. 물담배까지 할수 있는 곳이라면 게다가 나른하게 다리 뻗고 기댈수 있는 분위기도 좋아합니다. 또 앉을자리도 없이 서서 소주 한병에 오뎅 꼬치 먹는데도 좋아하구요. 그래도 대형 체인 이런곳은 별로 안 당깁니다. 어딜가나 그게 그거인 간판과 인테리어, 똑같은 메뉴와 유니폼까지. 요새는 피쉬 앤 그릴이 제일 안 당겨요. 그리고 보니 격하게 시끄러운곳도 안 좋아하는군요. 제 목소리가 파묻히는 목소리인데다 큰 소리내는것도 싫어하고, 무엇보다 말소리, 술잔 부딪히는 소리 대신에 정체불명의 음악소리만 터질 듯이 가득한 곳은 별로에요. 그러면서 나이트나 클럽은 기웃거리지만, 그건 다 외로워서 그런겁니다. (하하)

다시 생각해보니,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자리는 별 영향이 없는것도 같네요. 술과 사람에 환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46) 언젠가 불침번이란 걸 서면서, 깜깜해진 복도를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너무 이분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입대하면서 궁에 자리를 잡으며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은 어떤 것인지. 그렇게 궁생활을 대차대조표 내지는 손익계산서를 만들며 웃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습니다. 

입궁 전, 어떤 생각을 하며 이 곳에 발을 들였는지 궁금합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적어도 이것 만큼은- 잊지말자든지, 달성하자든지. (누군가는 궁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겠어!라고 하며 들어왔다는) 

바보 같은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 궁생활 동안 어떤 것을 잃었나요, 그리고 얻었나요? 

전 2006년 12월에 입학해서 2009년 2월에 졸업해요. 여기서 네 살을 먹는거죠. 잃은건지 얻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햇수로는 4년이네요. 끔찍하군요. 허허. 들어오면서는 특별한 각오랄것까진 없었는데 막상 지내다 보니 오기가 생기는게 몇 개 있더군요. 강요받는 몇몇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은 도저히 저로서는 체화할 수가 없는 것이라 아직까지도 부대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는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곳의 교육법으로는 누군가를 가르칠수 없습니다. 윽박지름과 위협으로는 누구도 배울수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가치를 가볍게 할뿐이지요. 그리고 하나 얻은게 있다면,  제 한계에 대한 자각입니다. 전 능히 혁명적 변화가 가능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부딪혔지만, 깨지는건 ‘나’더군요. 그렇지만 그렇게 부딪히고 깨지는 동안 얼마나 스스로가 무모했는지, 독선적이었는지를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입학 전의 사소한 제 행동들속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숨어있었는지도 깨달았지요. 

남들처럼 자격증을 딴다거나 운동을 제대로 했다거나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했다거나 하는건 못했습니다. 환경은 나쁘지 않았지만, 제가 애초에 그런것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성실함이나 근면성 뭐 이런거와는 처음부터 담을 쌓고 살았으니 새삼 달라지는게 이상하겠지요. 허허. 다만 작업의 여파로, 허리가 조금 상했고, 축구사역(?)의 여파로 무릎이 남아나질 않았으며 모든 부식의 유통기한이 지나서는 아니된다는 주상의 지엄한 어명덕에 모든 부식을 꾸역꾸역 삼키느라 다량의 살과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얻었고 무엇보다 끝이 없는 피로를 제게 주어 손가락 까딱할 힘마저 앗아가 버렸지만, 뭐 그게 학교 탓이겠어요. 제 탓이지요. 


(47) 제가 신병이 들어오면 다짜고짜 던지는 질문입니다. "꿈이 뭔가요?" 

이번 인터뷰 최초로 질문을 스킵하겠어요.(농담) 1번의 배상혁님의 질문과 겹치긴 하지만, 중간 중간 만만찮은 질문들과 대적하면서, 심지어는 이 파일을 통째로 날려버린 치명적인 시련을 극복(?)해나가면서 저는 그새 약간 달라졌다고 할 수 있기에 간략하게나마 다시 답을 하고자 합니다. 

일단, 전 영화를 만들고 싶지, 영화감독이 꿈이진 않아요. 세상의 슬픔에 몸 바쳐 슬퍼하는 것이 제 꿈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방법인 것이지요. 여기까지 쓰고 절에서 틀어준 다크나이트를 봤는데, 안간힘을 쓰는 배트맨을 보며 제가 호언장담하는 저 꿈이 얼마나 묵직한 무게의 일인지를 느낀걸 보니 저도 모르게 영웅주의에 젖어있었나 봅니다. 히어로물이지만 역설적으로 영웅주의에는 회의적인 영화의 결말을 보며 깨달았군요. 

그런 의미에서 소소한 꿈들을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앞서 주해성님 질문에 대한 답변에 언급이 있던 이야기입니다. 스스로의 궁핍조차 인식 못할정도로 문화적으로 열악한 제 고향에서의 시절을 떠올리며 후배들에게 배출구까진 아니더라도, 해방구까진 아니더라도, 출구로 나가는 길을 밝혀줄 하나의 비상등정도의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뭔가를 하고 싶기는 한데, 할 일도 할수 있는일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더해주고 싶은거지요. 그리고 그 운동이 각지로 전파되고, 하나의 연대로 구성하는 꿈을 꿔봅니다. 그리고 창피해서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밴드를 만들어서 자작곡으로 앨범을 내는것도 소소한 꿈중에 하나입니다. 저 같은 경우엔 음악적 재능이라곤 찾아볼수도 없긴 하지만, 동네 노래방 가수들을 한데모아 주기적으로 공연을 갖는 것이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48) 제가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툭 던지는 질문입니다. '요즘 행복하신가요?' 

음, 전 배가 불렀는지 행복하다고 느낀적도 불행하다고 느낀적도 별로 없었네요. 사실 뭔가에 성공해본적도 없고, 성취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해본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집에 갈 날이 슬슬 보이는 지금도 별 일은 없지만, 별로 행복하진 않네요. 그렇다고 불행한건 아닙니다. 불행하지 않으려고, 행복해지려고 그것에 얽메이는게 더 불행해지는 길이 아닌가 싶어 무덤덤하게 여기기로 했어요. 물론 집에는 좀 갔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49) 자, 공식질문입니다. 동석님에게 매크로란? 장난이고, 동석님에게 책마을이란? 

제게 매크로란 스스로 자칭하기도 했지만, 제 인생의 모토(세상 모든 무관심에 반대한다는, 혹은 딱히 바쁜 일 없이 그럭저럭 살자는)와 썩 어울리기도 해서, 마음에 드는 별명입니다. 제게 책마을이란 잊었던 친구와도 같습니다. 입학하고 쪄들고 쫓기느라 잊고, 현실과 나이에 받쳐 잃은 것들을 책마을에서 다시 찾았거든요. 집에 가서도 계속 함께 했으면 하는 좋은 친굽니다. 매크로나 책마을의 의미가 언급되는 여타 관련 답변들이 있어서 더 이상은 동어반복일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할게요. (죄송)


병장 이현승 
  일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시면서 날것의 표현을 즐겨하시는 퇴폐미의 달인이자, 책마을의 아울렛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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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제가 이번 슈가(이때문에질문이 늦었어요. 죄송)에 광주 비엔날레에 다녀왔습니다! 
중학교 소풍 때 느낀거 하고 지금 머리 커서 접하는 것하고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더 군요. 최근 현대미술의 경향을 싸잡아 규정하자면 개념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작가가 어떤 풍경이나 심상, 개체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 두는 것으로 미적 감흥을 얻게 하는 데요. 그렇다면 과연 (영화를 하셨던) 동석님이 생각하는 미적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신지요. 

헉헉,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 조금 지쳤습니다. 동문서답을 장황하게 하는게 보통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다음 분은 좀 명료하신 분이었으면 하는군요. 흐흐. 저도 비엔날레 갔는데 비와서 그냥 술먹었습니다. 루벤스였나 클림트였나 그 화가 특별전도 하던데 그 입장료면 술이 닷병이라 돌아섰습니다. 

미학에 대해 얼추 공부해본적도 있는데, 뭔가 알 듯 했던 건 그때뿐이고 무엇이 아름다운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라면, 앞서 질문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떠들기만 할 것 같아요. 차라리 제가 글을 쓰고 만든 영화 이야기를 해보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친구의 아이디어에 제 색을 덧입혀 만든 첫 영화는 니체가 그랬다는데, ‘모든 가면은 실체’라는 말에서 시작합니다. 장난으로 가제를 <가제는 개편>이라고 지었는데, 그 뒤로 다른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니 그게 제목인 셈입니다. 제목부터 말도 안 되는 이 영화는 부모님의 집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집을 나서다가 축구공을 맞아 기절했다 깨어난 뒤 모든 것을 낯설게 보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난데없이 버려진 철길을 배고 누워있다 깨어납니다. 그곳에는 검은 책을 보던 흰옷 사내가 앉아 있지요. (에, 그게 그땐 한창 이런 게 멋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사내와의 실랑이 끝에 다시 의식을 잃은 그는 운동장에서 눈을 뜹니다. 아까 공을 맞은 직후의 상황으로 말이죠. 남자는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인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낯설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낯설어진 것이지만요. 남자는 다시 부모님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부모님의 자리에 낯선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주인공은 놀래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님들이 평소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대하는 낯선 사람들을 보며 가까스로 자리에 앉아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부모님을 대했듯이 낯선 사람들을 대합니다. 다시 일상이 시작되고 거리를 걷다가 무의식중이었는지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구분도 안 되는 그 때 실랑이를 벌였던 흰옷 사내를 발견합니다. 남자는 그 흰옷 사내가 자신에게 무슨 짓인가를 한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 사내를 쫓아갑니다. 또 난데없이 그는 다시 철길을 배고 쓰러져 있었고, 흰 옷 사내는 다시 검은 책을 보고 있습니다. 남자는 사내에게 가족의 일을 따져묻습니다. 듣는척도 안하는 사내의 책을 집어 던지고, 다시 아까의 그 장소, 거칠게 어깨를 잡았던 흰옷 입은 사람은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니었다는걸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검은 책을 들고 있었지요. 그리고 다시 남자는 4인용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가족이라 부릅니다. 

형편없는 이 영화는 다행히 가족의 소중함을 설교하거나 현대사회 가족의 파편화 같은걸 성토하려고 들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막상 만든 저도 결과물을 보며 참담하긴 했지만요. 설교라도 하고 성토라도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했습니다. 이런 졸렬한 창작물에 창작 의도까지 덧붙이는건 제가 생각하는 미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머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단, 제가 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했던 메모가 떠올라 지금 시점의 입장에서 옮겨봅니다.

[이를테면 이동슥이라는 인간은 책마을에선 오지랖덩어리 매크로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분교에선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도 없고 표정도 안 좋은’ 골치덩어리의 가면을 쓰고 있고, 집에 가면 게으른 잠만보의 가면을 쓰고 있고, 여자 후배들 앞에서는 무골호인의 가면을 쓰고 있고, 친구들 앞에선 나쁜 남자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 무엇도 가식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또 어떤 것을 본모습이라고 할수도 없다.] 이런 뉘앙스가 아니었던것도 같은데, 어쨌거나 누구에게나 해명의 기회는 주어져야겠지만, 영화감독은 영화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조금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 이야기 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에 있어 이야기가 있고 없고를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문학, 연극, 영화에 음악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야기가 있는 예술에 대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취향일 뿐인데, 전 <좋은생각>류의 창작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즐겨 보고, 가끔은 몰래 눈물을 흘리며 보기도 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걸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당의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불쾌하고 냄새나는 것들을 가리는 것이라고 여기는 거지요. 일상에 지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된 것인지, 어째서 사람들이 지치고 외로운지에 대한 고민마저 유예시키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전 그런 아름다움이 담배처럼 백해무익한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에 가까우며 유익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X-RAY 사진’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차 싶기도 하군요. 허허. 그러나 앞서 말한 유익함이란, 어떤 계몽적-교훈적 효과도 현실적 이득도 아닙니다. 들판에 이름 없는 꽃들에게 느끼는 아름다움에 있는 유익한 정도겠지요. 그리고 예술이 추구해야할 미적 가치란 그 꽃을 그저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의정을 거르고 지나친 낙관과 비관을 경계하며, 그러니까 그 무엇도 기만하지 않으면서 상식을 가장한 편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들추는 것이야 말로 예술이 아닐까합니다. 이를테면, 주근깨 뻐드렁니 옆집 순이의 얼굴을 김태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주근깨도 뻐드렁니도 수많은 특징 중 하나일 뿐인 순이 얼굴 진면목을 잘 살리는 것을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뭔가 정리가 안되긴 하지만, 끝으로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답하고자 합니다. 저는 일종의 인용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제 기억에 여과된 현실의 단면을 그대로, 혹은 포르노그래피처럼 외려 더 현실인것처럼 재현하고 그것을 배치할 뿐이지요. 책마을에 써재꼈던 몇몇 배설적 언어들은 사실 그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것입니다. 또 어떤 이미지나 사상에 의해 배제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앞서 예로 든 <가제는 개편>의 경우처럼,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비틀거나 (에, 그게 의도는 그랬다는 겁니다) 주로 주목하지 않는 것들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51) 저도 이제 곧 머리에 개구리를 붙이게 됩니다. 제 나름대로는 궁 생활에서 배웠던 것도 
많고, 또 꾸었던 꿈도 많은 데 당장의 현실은 역시 답답합니다. 친구들은 주식에 투자하고 
CMA가 어쩌고 하는데 강록씨는 독서실을 뛰쳐나오라고 말하네요. 제 누님만해도 벌써 철밥통에 합격하셔서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최고라며 저를 압박중인데요. 동석님이 느끼셨던 이상과 현실에대한 괴리는 어떤 것이었는지, 둘 중 어느 것을 택하고 싶은신지, 소소하게 들려주세요! 

저는 현실과 이상이 대립항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상적인 현실주의자라거나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라거나 말장난 같고 이중개념주의자를 아는 우리로서는 웃기는 소리라고 여길만하지만, 양자 선택은, 초코우유와 딸기우유같은 선택에 기로에서 어떤 우유도 못 고를 우유부단한 제겐, 가혹한 거니까요. 사실 그건 이상에 불과합니다. 현실과 이상, 초코우유와 딸기우유처럼 양갈래 길에서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저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고, 한 마리 토끼도 잡기 힘든 경우가 많지요. 

자 이쯤해서 상투적으로 담배를 하나 물고, 전투적으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냥 제 생각이니 어조가 강경해도 그러려니 넘겨주시어요) 결혼을 할 때 사랑이냐 조건이냐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문제에 답하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있어야합니다. 물론 그 분석이 완벽하리라고 생각하는건 이상이 아니라 환상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인생이니 진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하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에게 중요한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겁니다. 동어반복 아니냐구요? 다르게 물어보죠. 자신이 월세방에 이부자리만 깔고도 내 님만 있다면 행복할지, 번듯한 아파트에 더블 베드는 깔아두어야 행복할지를 물어보는겁니다. 물론 이 문제는 선택지가 무수히 많습니다. 두 마리 토끼는 못 잡을지 몰라도 땅값 아주 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지만 작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할수는 있으니까요. 아니면 애초에 자신은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답이 있을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머리가 아픈건 어쩌면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지 않고 세상에서 쥐어준 선택지와 정반대의 선택지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록씨는 열람실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열람실을 나온것이고, 당구를 하자고 꼬드기는 것일겝니다. 그는 열람실에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람실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구를 하자고 하는것이겠지요. 그렇다고 그를 당장의 욕구에만 급급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그는 열람실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열람실에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 열람실에 들어가본적도 없으니 찾지 않았다는게 맞을겁니다. 그렇다고 열람실에서 철밥통을 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종용할 생각도 없습니다. 가늘고 길든, 굵고 짧든 그건 취향의 문제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늘고 길게 사는게 맞는 사람에겐 열람실이 강록씨의 당구장과 같을겁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쥐어준 선택지처럼 모두가 가늘고 길게 살아야만 해서 모두가 열람실에 제 자리를 잡아야만 하는건 아니니까요. 단지 열람실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출구를 표시하는 비상등 하나쯤은 달아줬으면 합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열람실을 나갈수 있게 말입니다. 아마 강록씨도 그런 생각에서 그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전 막상 저만의 당구장이 없습니다. 피시방에서도 답을 못 찾았구요. 영화관에서 마저 답을 찾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열람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어야 할때 말입니다. 그리고 보니 열람실에서는 누워서 책보는게 불가능하군요. 그냥 월세방에 이부자리 깔고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서 구한 선택지를 쥐어봐야지요. 땅값 아주 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지만 작은 ‘마을’을 만들고 사랑하는 님‘들’과 함께하는 것 말입니다.



(52) 계속해서 질문 들어갑니다. 앞으로의 교육은 위키디피아와 같은 지식의 총합체가 담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지식은 모니터 하나에 담겨져 있어 언제든 꺼낼 수 있지요. 미래에 선생님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역할(일테면, 상담자나 조언자)을 담당할 것이고, 그 누구도 아는 척 허세를 부리다가는 4살 때부터 인터넷을 만지는 초딩(제 조카 이야깁니다)에게 무시 안당하리라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식의 전 세계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저희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정말이지 이제 책을 몇권 읽었는지는, 가방끈이 얼마나 긴지는 명함도 못내밀 시대가 와버린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의 고깃값을 증명받기 위해 좋은 소속을 갖고 학위를 얻고 자격증을 따려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선별해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도 필요하겠지요. 그것보다 중요한것은 스스로의 지식체계를 갱신할수 있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태도일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습득에 따라 기존의 체계에 유기적인 변화를 주고 그에 따른 새로운 사유를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책을 몇 만권을 읽었고, 가방끈이 하늘지킴이 말년처럼 길어봐야 언제든지 초딩들에게도 망신을 당하면서, ‘하... 귀신같은 사람’을 읊조릴 수밖에 없는 시대니까요. 첨예하리만큼 전문화를 달리는 시대지만, 저는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다치바나 식으로는 ‘제너럴리스트’ 조금 어려운 말로는 ‘딜레당트’ (교양 애호가라는 뜻으로 지적유희를 즐긴다나요), 조금 다른 개념으로는 ‘소피스트’가 되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전문분야를 방치하면서 이것저것 건드리고만 다니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일찌감치 정해놓고 그 외의 것에는 폐쇄적인 지식습득과 배타적인 사고를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제가 그런 것 때문에 관심사나 지식의 스펙트럼이 넓은 책마을에서 매크로를 자처한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한자나 외우고 책이나 몇 권 더 읽으라는 마음의 소리가 없었던건 아니지만, 허겁지겁 책 몇권 읽고, 한자 몇 개 외우고 뿌듯해하며 멍하게 있는것보다 책마을에서 이것저것 찔러보고 찔려보는게 훨씬 유익한게 아닐까 싶어서요. (이건 자위행위의 혐의를 지우긴 좀 어렵겠어요. 허허)



김준호 님과의 인터뷰

1.

동석씨의 활동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와는 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때문에 이 질문은 저와 관련되었습니다. 

제가 본 바에 의하면(그리고 평소 '매크로'라고 칭하는 모습을 볼 때) 동석씨는 표현의 욕망을 심각하게 많이 갖고 계신 분입니다. 원래 관심 있던 부분이든 별 관심 없던 부분이든 가리지 않고 일단 접근을 하고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끔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동석씨가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아슬아슬하다는 표현은, 촌장으로서 지독히도 미약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저에 비해 동석씨가 하고 있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동석씨가 감당해야할 부분들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겪게 될 고통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점을 인식하고 일에 접근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해 얻는 부분을 스스로 축소시킬 가능성이 있고 때로는 비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면 일단 과부하가 걸릴 염려가 없고, 가늘고 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성까지 제공하지요. 

아마도 동석씨가 제가 생각하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고 바로 윗 단락의 모습을 택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혹 제가 생각하는 동석씨의 모습이 동석씨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과 닮은 점이 있다면,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책임져야할 부분들이 벅차게 느껴지거나, 머지않아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는 불안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 동석씨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허허 

지금까지 질문중 상당수가 서술형 시험문제 같아 점수를 한점이라도 더 받으려고 이것저것 끄집어 댔습니다. 조금은 괴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전 소통이 고픈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이건 단순히 제가 있는 곳에 사람이 절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작용할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루종일 말을 못하고 있다가, 반가운 사람과 전화를 할때처럼 이것저것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것이지요. 이 곳에서는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장님처럼 지내야 할때가 있습니다. 표현이 제약을 받는것이지요. 그 제약은 절 더 굶주리게 만듭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저 임금님은 벌거벗고 있다고 소리치지 못한 저는 결국 대나무밭을 찾아 헤맵니다. 속이라도 후련하게 털어 놓는것이지요. 그 상황에선 발화(發話, 發火)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꺼지지도 않았기에 저는 수많은 귀는 당나귀귀고, 발가벗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막상 (밖에서의)일상생활에선 그리 말이 없습니다. 표현의 물길이 있다면, 보통 수위는 낮고 물길은 잔잔합니다. 일상에서 저는 별로 거리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할 말을 하지 못해 답답해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제방과 바위덩어리로 수위는 높아지고 물길은 거칠어져갑니다. 넘치는 일도 종종 있지요. 그래서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정도 이상의 솔직함과 열성으로 표현의 물길을 트는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준호씨가 지적하신대로 요새는 한계에 부딪힌것도 같습니다. 말로는 세상의 모든 무관심에 반대한다며, 세상 전부를 마크할 것처럼 굴지만, 사실 전 조금 지쳐있습니다. 아무리 물꼬를 터봐야, 의사소통은 그리 수월하게 이뤄질 것이 아니라 그런지, 실컷 떠들어봐야 결국 소통의 불가능성만 다시 확인하는일이 다반사지요. 있는곳이 있는곳인지라, 말 한마디 하기도 싫을때도 생기고요. 그러나 애초의 표현을 하는 까닭이 어떤 의무감이나 의도에 의해서라기 보단, 그저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하는 짓인지라 지쳤다 싶었다가도 다시 떠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다 또 나가떨어지겠지요. 그래서 그 파열의 시점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몰입의 정도를 조금 조절할까 합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을 어쩌면 가상공간일, 책마을에서 해소하는건 도망치는 짓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가끔 너무 일을 크게 벌려, 제 목소리를 너무 키워버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파시스트를 자칭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제가 집에 간다고 해서 이곳에 영향이 있다면 아마 제가 책마을에 끼친 수많은 해악들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발을 빼고 싶지 않아도 조만간에 발을 뺄수 밖에 없는 때가 오겠지만, 그 전에도 발을 좀 덜 들일 필요성도 있겠지요.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제 관심분야건 관심분야가 아니건, 그나마 잘 알건 잘 알지 못하건 그것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건, 소피스트들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피스트들은 글쎄, 지식이 많은 사람보단 많은 일들에 대해 나름의 논리나 감상을 피력할수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 했다고 하더군요. 결국 그 논지에 휘둘리는 건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사람 욕심, 지식 욕심이 많은터라 어쩔수가 없는 면도 있겠네요. 허허. 

사족 : 이걸 작성하고 다크나이트를 봤습니다. 생뚱맞게도 과부하가 걸리는 배트맨의 모습을 보며, 준호님의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허허. 저도 달려야 하겠습니다. 




2.

개인적으로 해성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궁금해하고 있었답니다. 흐흣 


그런 배설적 단어들은 불편해야합니다. 그 배설적 단어들은 거짓 페미니스트이자 난봉꾼인 이동슥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혐오하는 자가 혐오하는 세계의 극한 단면입니다. 저는 그 혐오를끊임없이 건들고 후벼볼 생각입니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음담패설과 아무렇지도 않게 회자되는 성매매, (전 이 단어에동의하지 않습니다만) 또 그것을 은폐하려는 허위의식까지, 저는 그 일상적이면서 혐오스러운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불편함을 느끼게 하려 노력합니다. 그 혐오스러운 것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동의를 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불편해하며, 그 일상적인 것들을 불편하게 인식하게된다면, 못해도 그런 글을 쓴 저를 혐오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속죄양이라도 좋습니다. 자위라해도 될것입니다.
(주해성님의 6번 질문에 대한 이동슥의 답변 中)


이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저 또한 동석씨의 글에 등장하는 몇몇 단어들-여기서 '배설적 단어'로 표현하는-은 불편함을 끼치는 것은 물론, 글을 쓴 의도를 의심하게끔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위 대답을 통해 추측할 때 동석님은 자신이 속죄양이 되거나 자위라 불리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글에 등장하는 성폭력적 언어들에 불편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를 '위선을 피하기 위해 위악을 택한'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거짓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 급급한 '위선적 행위'를 버리고, 성폭력적 상황을 언어화하여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위악적 행위'를 택한 것이지요. 예전에 제가 몇몇 '위선적 행위'를-예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요... 아마 학내 장애학우의 교육권과 관련된 문제를 선거 기간에 반짝 정책으로 이용하는 행위였던 듯...- 비난하며 차라리 무시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을 때, 한 선배가 저에게 '위선을 피하려고 위악을 행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취지의 말을 했었답니다. 

동석씨의 개인적 경험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윗 단락의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무리일 지도 모릅니다. 허나 동석씨의 표현은 분명 '성폭력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설적 단어'들이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은 성폭력적 상황의 언어화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동석씨의 의도가 어쨌든 동석씨의 글과 표현이 '성폭력적 문제'를 갖고 있다면, '위악' 역시 '악'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위선'과 '위악' 사이에 있는 '무언가'는 도대체무엇일까요. 


“위선을 피하기 위해 위악을 택한 것” 저를 잘 아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께서 얼마 전에 제게 하신 말씀과 비슷해서 은근히 놀랬습니다. 참고로 그 분과는 술친구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교류를 했고, 또 제 글을 수시로 보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도 그렇고, 준호님은 매의 눈을 지니신 게 틀림없습니다. (웃음)

저 답변에 언급된 개인적 체험과 어느 정도 연관관계가 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전 위악적이라는 평을 조금 듣는 편입니다. 위선도 아니고 위악이라니, 듣는 저로서도 상당히 이채롭더군요. 스스로가 위선적이라는 혐의를 벗기 위해 위악을 택했는지, 아니면 원체 악한데 외려 위악을 가장하는지 지금으로선 저로서도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저 답변을 할 당시엔 위악적인 언어를 해명하려는 의도였겠지만요. 

먼저 주해성님의 질문에 언급된 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누나생각>의 경우 약간량의 과장과 왜곡은 있겠지만 제가 인식한 현실을 별 여과 없이 ‘싸놓은’ 것입니다. 말그대로 “성폭력적 상황을 언어화”한것이지요. 그러나 그 글이 쓰여진 것은 그전에 잡지에서 퍼다올린 글에 대한 제 나름의 보충설명이자 또 하나의 예시로 기능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자기연민만큼의 자기혐오를 드러내는 폭로이자 고해성사이기도 하지요. 혐오하는 자신에 대한 폭로에 어떤 위장이 들어가선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위악이라기 보단 그저 ‘악’입니다. 저는 이를테면 매를 비는것이었지요. 누군가의 폭로를 자아내고 그에 따른 예민한 비판을 유도하고 싶었습니다. 가는 사람은 있는데 갔다는 사람은 없는 바깥 사회에서보단, 갔다온 것이 무용담처럼 떠벌려지는 이쪽 사회에서 더 유효할지도 모르겠다는 성급하고 편협한 판단에 의한것이었지요. 물론 의도한데로는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불똥은 이상한곳으로 흘러가 무용담이 하나 올라오고, 에둘러진 비판이 달리고, 작성자가 스스로의 무용담을 삭제한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화장실 벽에 벼려진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실 유머라는 표현이 있듯, 화장실은, 특히나 이쪽 사회의 화장실은 배설하듯 내뱉는 음담패설이 일상화된 공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눌리고 비뚤어진 욕망이 맺히고 그 덩어리를 토해내듯 쏟아내는 차갑고 날선 음담패설들이 공기중에 떠돌다 쌓이면서 화장실 벽에 벼려지더라. 그런데 발화하지만 않았을뿐 같은 욕망을 품던 내가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제가 봐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굳이 ‘벼리다’라는 시어로 제목을 쓴건, 덜어내는 과정에서 빠지긴 했지만, (원문의 절반정도가 잘렸지요) 시간과 말들이 쌓여 말이 말을 두들기며 더욱 날카로워지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음담패설이 행해지는 공간에서 배설을 하며 답답해지는 심정을 표현하려는 의도와는 무관하게 끼워 맞춘 상징과 비유인지라 잘라 내버린 것이지요. (실은 급하게 쓰고 올리려고 보니 뭔가 아니다 싶어 별 고민 없이 블록지정해서 지웠습니다)

해명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답을 해보겠습니다. 일단 저는 위선이 선이 아닌 것처럼 위악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앞서 말한 대로, 전 ‘악을 위장’한 것이 아니라 제 ‘악’을 별 여과없이 까발렸습니다. 그런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내 악에 솔직하다’라거나 ‘나는 내 악을 반성할줄 안다’를 표현하려는 것이지요. 그럼 수용자들은 의도적으로 악을 위장한다고 생각할 공산이 큽니다. 어찌되었든 발화자에겐 ‘죄과 폭로와 반성’이라는 자기합리화를 타인들에게도 인정받을 만한 여지가 생기는 것이지요. 결국 그 행위는 결과적으로 위선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스스로 위선자라고 말하는 것만큼의 위선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자가진단을 밝히는 것은 제 논지가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려는 부분도 있으며 주해성님과 김준호님의 지적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음을 주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의의 의도와 목적이 어떤 방법이든 정당화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주해성님 질문에 답할 땐 개인적인 체험을 까발리며 발산된 감정에 그 뒤의 논지가 휩쓸려 자기합리화의 물결이 지속되었지만, 저도 의도야 어떻든 제 언어가 너무 거칠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흡사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스너프 필름을 찍는 거나 마찬가지의 행위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들을 지우지 않은 건, 글을 지운다고 해서 제 과거가 청산이 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죄과를 은폐하고 망각하는데 일조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른 방법을 찾기 전까진 제 글을 말끔하게 만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관심사와 펜이 ‘성폭력적 상황’에 맞춰져 있다면 그걸 적당히 에둘러 표현하기 보단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의 잔혹성을 설명하기 위해 스너프 필름을 만들진 않겠지만, 과학수사물의 구체적인 묘사를 빌려쓸 수는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각목을 휘두르고 주먹질을 할 때 마치 이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묘사 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시원시원’하게 쏴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제 자신이 불편한 것이죠. 물론 그것은 ‘영화’라는 가상현실임을 전제로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때리는데 쾌감을 느끼고, 잘 죽이고 잘 때리는 사람이 미화되는 것은 아무래도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전 외려 보는 사람을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는 묘사가 있는 영화를 편하게 봅니다. 총을 쏘는 것이, 각목으로 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몸속 모습까지 보여주며 환기시키기도 하는 과학수사물의 묘사를 빌려온다는 까닭이 거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글의 혐의를 벗기 위해 노골성의 탈피에는 노력하긴 하겠지만, 직설적이거나 구체적인 언어화는 적어도 당분간은 포기할수 없는 이유입니다.




공수 전환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 답변은 여기까지지만, 좀 더 이야기할 것들이 많을 듯 합니다. 일단 ‘성폭력적 상황’과 ‘영화’이야기가 나왔으니 김기덕과 홍상수를 빌어다 이야기를 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지지합니다. 홍상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사회적 파장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성폭력적 상황의 영화화’와 ‘여성비하’에 대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혹여 그들의 영화를 접해보신적이 있다면, 그들의 ‘성폭력적 상황의 영화화’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리고 인터뷰 첫 질문에 대한 일종의 “반사”질문입니다.(웃음) 준호님이 말씀하신대로 표현이나 활동의 방식만 보자면, 저와 준호님은 일종의 대척점을 이룹니다. 준호님의 질문에 대한 제 답변이 충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 답변을 하면서 준호님의 의중이 궁금해졌습니다. 

매사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점을 인식하고 일에 접근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해 얻는 부분을 스스로 축소시킬 가능성이 있고 때로는 비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면 일단 과부하가 걸릴 염려가 없고, 가늘고 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성까지 제공하지요.
(준호님의 인터뷰 첫 번째 질문 中) 

물론 제 성향에 맞진 않지만,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와 반대되는 방식의 저 행동양식이 준호님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수는 없을겁니다. 그렇지만 준호님이 책마을에서 보여주신 활동의 정도와 ‘자신과 관련있는 질문’이라는 준호님의 표현에 의하면 연관관계가 있는것만은 확실하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저와 관련있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시끄럽게 일만 치고 다니는 부촌장 이동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웃음) 
사실 제가 대담을 하기엔 상태가 매우 안 좋기에 일단은 (싸구려 커피와 줄담배와 밤샘으로 거의 혼이 나가고 있는지라) 가볍게 시작하는 의미에서 간략한 바이오그래피를 소개해주시지요. (하하)




(김준호님과의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51:52 

 

상병 양순호 
  아아. 이 드라마같은 이야기의 3번째를 보고 있어요. 이런 세상에나. 2008-10-27
14:13:03
  

 

상병 양순호 
  헐. 댓글을 쓰고 나니 상중하로 나뉘어버렸어요. 이런 맙소사. 2008-10-27
14:13:37
  

 

병장 이동석 
  다음편 예고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드라마로군요. 흐흐. 2008-10-27
15:01:49
 

 

일병 김예찬 
  우와 답변 삼부작 멋집니다. 2008-10-27
15:16:16
  

 

상병 김민규 
  단숨에 상중하를 다 읽었네요. 말 그대로 엄청납니다. 좀 텀을 두고 읽을걸 그랬나, 험한 산을 단숨에 달려올라온 느낌이랄까요. 수고하셨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이런저런 감상들이 있는데 이걸 무어라 풀어야 할지는 모를 그런 느낌이네요. 2008-10-28
01:03:37
  

 

상병 박정현 
  냐하하... 
선리플 후감상할게요(웃음) 2008-10-28
02:28:13
  

 

병장 이현승 
  우문에 현답 감사드립니다. 이제 정독을 시작해야 겠군요! 2008-10-28
07:35:07
  

 

병장 정영목 
  삼부작, 일단 다 읽었습니다. 심도있는 리플은 후에 남기겠습니다. 2008-10-30
16:37:32
  

 

병장 고동기 
  엄청난 질문과 그보다 엄청난 답변들입니다. 
질문을 올리려는데 마감일이 지나서 못올린게 후회가 되네요.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요? 2008-10-31
09:00:06
  

 

병장 이동석 
  다음에는 고동기님이 물어뜯길 기회가 있을겁니다. 흐흐- 

영목님 질문은 어려워서 쉽게 답을 못했는데, 요새 베토벤 바이러스 재방송 보면서 강마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허. 왜 내가 이걸 이제봤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200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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