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잡담
병장 이승일 04-07 16:14 | HIT : 323
#1
우리가 관찰하고, 보는 대상은 대부분 동일하다. 우리는 여러 자연물들, 천체, 작은 사물들, 사람들, 그들이 만든 사회,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나 자신의 의식을 경험한다.
과학자와 종교인이 관찰하는 대상들은 이렇게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자신들이 관찰한 대상에 접근한다.
과학자들은 더 단순하고, 더 간단하고, 더 작은 것들의 집합체로서 관찰된 대상을 설명하려한다. 종교인들은 더 크고, 더 풍부하고, 더 탁월한 것의 부분으로서 관찰된 대상을 이해하려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이 100이라면, 과학자들은 0~99 까지의 숫자들을 통해 100을 이해하려하며, 종교인들은 무한의 한 부분으로서 100을 이해하려한다. 이 두 관점은 모두 불완전하다. 과학의 경우,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이 더 작은 것들로 환원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면, 작은 것들을 다시 재정립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관찰하는 대상들의 존재를 부인해버리곤 한다. 다시 말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뒤바꿔버린다. 한편 종교의 경우, 너무나도 광활하고 모호한 영역을 헤엄쳐야하기 때문에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 말고는 거의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ㅡ 그러나 무지에 대한 고백이 오만한 앎보다 훨씬 진리에 근접해있다. 우리는 정말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서구 철학이 사실상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라. 그의 앎이 아니라 그의 무지로부터, 그 무지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2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뭉치를 풀 수 없을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똑똑한 일은 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일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능력한 현명함에서 별다른 매력을 찾지 못한다. 화려한 우둔함에서, 그리고 "만능 멍청이"* 에게서 사람들은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왜냐하면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앞에 붙여진 수식어들 - 무능력한, 화려한, 만능 - 뿐이기 때문이다.
#3
문학과 예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정신은 빛을 일어버렸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과학과 철학에 영원한 숙제를 제공해주며, 과학자와 철학자가 세상의 일부를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불쾌한 자극을 가해준다. "자, 이것도 세상의 일부야! 이것은 왜 무시하지!?"
#4
세상의 일부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전히 불완전함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이 이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마치 자기 자신은 빼놓고 학급의 사람수를 세는 아이들처럼) 그리고 그 작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제단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분명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5
가장 못 된 것은 물귀신 작전이다. 자신의 한계를 세상에 떠넘기려고 하는 것. 자신이 이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세상도 이정도 밖에 안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은 없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이러한 행동은 '나를 빼놓고 무언가 엄청나고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엄청나고 중요한 일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일어나왔고, 지금 이순간에도 항상 일어나고 있다. 물귀신은 자기 자신이 부둥켜안은 희생량의 무게 때문에 종종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곤 한다.
#6
우리는 소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대체로 충분히 일어날 법 한 이야기" 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에는 중대한 가정이 깔려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법 한지' 이미 알고 있다는 가정. 다시 말해 삶의 법칙들을 대충 알고 있다는 가정. (마치 물리적으로 일어날 법 한 일을 알기 위해서는 물리 법칙들을 대충 알고 있어야 하듯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법칙과 부딛혀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않을까? 말하자면 일종의 실험을 해보는 것이 아닐까?
만능멍청이* 책마을의 어떤 분이 사용하신 표현인데 주인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병장 배진호
잡담에 들어있는 내부 표현들은 잡담의 수준이 아니군요..
#1
무지에 대해서 앎으로써 우리가 조금 더 단순한 무지보다 좀 더 나은 무지라는
사실임을 동의 합니다.
#2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이 두가지의 상존성은 아마도
이러한 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얽혀있는 실타래 계속 보고 풀지 못한 채로 바라보고 있으면
그 답답함은 그 어느것보다 심각하죠! 차라리 라이터로 불태워 버린뒤
얽혀있지 않은 실타래를 하나 사는 것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3
문학과 예술.. 대단한 것이죠.. 우리가 생존하여 있고.. 우리가 생존이상의
것을 추구하게 되었을 경우에만... 우리는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존재를 외면케하는 한가지 동기가
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4
맞아요 오만입니다. 자신의 짧은 잣대로 세상을 헤집을 수 없겠고..
그렇게 제단하려고 하는것 자체는 오만이겠죠..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세상의 거대함 속에서..
아마도 고래사이의 새우처럼 눌러 터져버릴 것입니다..
아예 그럴경우 자신의 굴속에서 고래를 보지 않고 사는것이
새우에게는 조금더 현명할 수도 있"瑁?.
이 세상은 이 굴이 다라고 이야기하는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전부인양 우물 안의 세계까 전부인양 소리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겠죠..
#5
물귀신 작전.. 우물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동그란 원으로 보이고 그 속에서 하늘의 범위가 그만큼 좁아져 버린
사실을 안타까워 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하늘을 바라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신이 볼 수 있는 범위가
좁아져 버린 사람들은 조금 아쉽지만..
또 다른 사람들을 같은 우물속으로 들어가자고 유혹하는
개구리가 외는 것이 안타까울때도 있지만.
그것또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이 있음을..
인정해야겠지요..
#6-> 다음에... 04-07
병장 성태식
쿠핫. 재미있군요. 저는 이러한 종류의 내적 반성은 하지 않는데요.
주로 타인과 관계된 반성을 하지요.
승일씨와 저의 생각은 다 똑같은데, 요 부분만 다른거 같아요.
왠지모르게 거울을 보는거 같네요. 다 똑같은데 좌우만 다른. 04-09
병장 성태식
아. 어떤 철학사 책이던지 까먹었는데, 성격의 차이가 철학적 사유의 차이를 낳는다는 주장도 있던데요. 재미있는 주장 아닌가요? (웃음) 04-09
병장 심승보
태식/ 음, 어찌 보면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웃음) 04-09
병장 이승일
승보 / 저도 예전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겠죠. 성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개개인의 선천적 기질보다는 그 사람의 의식적인 목표와 많이 관련되어있으니까요.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아니라 동시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군요. 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