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와 벌> : 이론으로 무장한 살인자의 비극적 형상
병장 이건룡 05-18 10:41 | HIT : 330
예전에 본 '문학성'이 무엇이라는 질문을 상기해보건대 과연 책이 범람하고 똑같은 책이 시간에 따라 재출간하고, 각종 문학소개가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문학성'이 무엇이라는 질문이 필요할까? 라고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문학성이라는 모호한 꼬리를 따라 나아가는 것도 좋을 시대에 살고 있으니 '문학성'라는 허울뿐인 추상적인 질문에 시달릴 필요가 있을까? 하물며 두 줄 남짓한 물음에.
그렇지만 내버려 두지는 못하고 그런 겸에 추앙받는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정리를 다시 정리해 본다. 물론 최근 언급한 바도 있고, <매치포인트>도 보았기에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오랜만에 끄집어낸다. 사실 '문학성'이 무엇이라는 물음에서 의욕을 끄집어 오기란 무리니 문학성을 따지기에 무색한 작품이기에(우리시대에는 이런 책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당시 참고 했던 책은 <죄와 벌>과 <콘스탄틴 모촐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예전에 두서없이 짜 맞추어 본 글을 다시금 고쳐 적는다.
(*< 매치포인트>의 놀랄만한 <죄와 벌>의 내러티브 변주를 살펴보자면. 로쟈에게 보인 사회지위의 상승 욕구가 아닌 추락을 달가워하지 않는, 자신의 안정을 위한 불가피했을 법한 부루주아적 思考 아래의 범죄로 변모되었다(지위 사상을 위해 여자를 꽤야 하고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살인을 해야한다). 그 외에서는 영화 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시대에 교양이 있는 자(부루주아)들이 애호하는 소설가로 탈바꿈됨을 어렵지 않게 영화에서 읽어 볼 수 있다. - 이에 관해 적어 볼 법한 주제이기도한 반면 이미 적였을 법한 주제이니 더 좋은 글을 찾아보는 게 좋을지도)
"슬픔 자아분열의 힘든 순간 나무 판자위에 누워 나의 형기를, 채우면서 그 소설을 생각했습니다. 그 고백은 결정적으로 내 명성을 높여 줄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중
이론으로 무장한 살인자의 비극적 형상(죄와 벌)
페테르부르그, 춥고 어두우며 축축한 도시가 죄와 벌의 무대가 된다. '영악한'작가인 그는 페테르부르그에 배회하는 유령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작품의 주 모티프 삼았다(*그는 사건사고의 수집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같은 유혈의 목격자인 달 아래 페테르부르크遮?배경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움 공간보다 유령이 배회하는 곳으로 표현한다. 그의 어느 짤막한 풍자소설에서 빌려온 공간이 듯, 공동묘지라는 공간으로 배여 오는 도시의 전 시대 주인들의 썩은 물이 섬뜩한 "중량감"으로 이 공간을 오염시켜진 공간이기도 하다. 이로써 광기와 비명의 무대가 완성된게 아닌가 싶다.
소설은 주로 범죄의 심리학적 해석, 죄와 원인들, 범죄가 범죄자의 영혼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라는 법대를 휴학한 가난한 대학생이며 소위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그런 온전치 못한 사상에 굴복한" 청년이다. 이 청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소설들에 등장하는 도덕률을 비웃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 중 하나이며 그 또한 신에 굴복하지 않는 죄인이다. 다른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들처럼 맹목적 운명과의 싸움에서 비극적인 신화의 주인공들처럼 파멸한다.
'강인한 성격'의 로쟈(*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다)의 신념은 도덕의 힘 앞에 굴복하지 않지만 포르피르, 루쥔, 스비드리가일로프 그리고 소냐와의의 대화들로 인해 자신 만의 세계가 그들로 인해 심하게 갈등을 하게 되고 새로운 경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는 주 소설의 테마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보아 작가의 확연한 윤리와 도덕의 경계를 독자로 하여금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로쟈가 아닌 주위의 인물을 통해 죄와 벌을 읽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의 삶을 짓누르는 가난에, 제 1부에서 로쟈는 '거미처럼 그들(가난한 이)의 체액을 빨아 먹는' 노파를 죽였다. 추상적인 공상에 관념은 잠식당하고 그의 '본성'은 자신의 새로운 도덕적인 틀의 파괴의 고비를 극복하지 못한 체 자신의 추악한 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허나 "주인공은 더 이상 자기의 삶을 제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극은 관성에 이끌려 갈 뿐이다. 불가사의 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살인자를 그의 희생자에게로 인도한다." 우연적인 기회에 이끌려 병적인 상태인체로 도끼로 노파와 그녀의 동생을 죽이게 된다.
이후 그의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새로운 윤리적인 각성과 극단적인 냉소주의와 자기협오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이론, 즉 나폴레옹 사상, 자신의 인본주의적 신념에 입각해 이 세상에 '이'만도 못한 해로운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였다. 이후 병의 악화와 그의 정당화 하려는 새로운 윤리적인 각성과 냉소주의와 자기 협오는 빠지며 이후 유형지에 까지 이어진다. 그의 범죄 행위에 대한 궁극적 진실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일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유형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법적인 처벌의 무효성을 내 비친 적 있다. 그렇다면 그의 죄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내 소설 속에서도, 그 외에서도 범죄자들에 대한 법제화된-처벌이 법률 제정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위협적이지 않으며 그 이유는 그 범죄자가 스스로 느끼는 그런 처벌에 대한 도덕적 욕구 때문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암시되어 있습니다."<도스토예프스키>)
로쟈의 '나폴레옹 사상'은 인류의 공헌을 위함을 상정하고 있으며 이론은 적그리스도의 원칙에 세워져 있다. '강인한 인격(나폴레옹 같은 위인)'에게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피 흘림을 허가하는 자신만의 양심이 있다. 이 교만한 악마는 고독한 장엄한 속에서 슬퍼한다. 로쟈는 말한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지상에 있을 동안 엄청난 슬픔을 경험한다."
"나(로쟈)를 보고 계신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과 여기에서 애기하는 내양심이 말하겠다. 나는 내피도 줄 수 있다."<죄와 벌>
실제적으로 유용한 범죄를 저지르고 난 뒤, 그는 '여생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빚을 갚으면서 영예롭고 정직하며 착실하게 살겠노라'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는 어떠하였는가("타자를 위한 살인, 완전한 이타주의라는 명목아래 권력과 돈을 갈망하는 행위 에 내재되어진 정교한 역설에 매혹된다"). 과도한 개념과 가난한 자들로 구현되는 비참함은 그에게 사회에 대한 경멸로 환원되어 주인공의 이미지 속에 표현되고 있다. "라스콜로니코프는 지하생활자가 시작한 반란을 계속 시작하여 대심문과의 폭정에 이르는 길을 준비한다." 그의 이면 또한 대심문관과 같은 무신론자로 묘사되어 있다(소냐의 복음서 낭독 장면을 참고하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소설에도 흔히 등장하는 '무신론자'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으로 부터의 자유는 순수한 악마주의, 그리스도의 부정이자 운명에 대한 예속으로 드러난다." - <도스토예프스키> 중
자수와 '나폴레옹 사상' 가운데에서 그의 선택("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삶이다. 나는 삶을 갈구하며 살아남을 것이다.")은 생존에 대한 각오이자 자신에게 스며든 '갑자기 우울한 슬픔'과 '무한한 교만' 그리고 삶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앞으로도 존속하기 위한 투쟁의 무대인 것이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플롯중 하나는 마르멜라도프와의 만남이다. (*도스토예프스키ㅇ의 <네바 강의 환각이라는 글을 환기된다). "우리의 삶의 결과를 결정하는 무의미한 우연한 사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실존적 존망"조의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세계와의 조우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비극을 몸서리치게 해준다(마르멜라도프 : "춥고 어둡고 축축한, 무엇보다도 축축한 가을 저녁 풍금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올 때, 행인들 모두 창백한 푸른빛의, 병색이 짙은 얼굴을 한 채 걸어 갈 때, 이미 그보다 바람 한 점 없이 진눈깨비가 수직으로 내리고 그 사리로 가스등이 빛날 때, 그런 때가 몸서리치게 좋습니다."<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 소설에서 보다 가난한 자의세계를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세계가 주는 로쟈에게 주었던 교훈은 "선은 지극히 무력하고 고통은 부조리하다는 관념이다." 술주정뱅이 (하급관리)마르렐라도프의 죽음, 가족의 끔직한 가난을 바라보며 로쟈는 '권력 재취에 대한 관념'을 범죄를 통한, 나아가서 돈을 통한 권력을 얻어야 한다는 가난의 상흔을 느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의 가난한 삶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멜라도프의 세계가 준 우연한 인상은 인간의 무한한 슬픔과 희생(소냐)의 무익함이라는 두개의 모티브가 흐른다(*소냐는 가족의 가난 탓에 자신을 희생한다).
"나는 단언한다. 고통 받는 인류, 그들이 고통을 뼈 절이도록 잘 알면서도 그들을 돕거나 조금의 이익이나 위로조차 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완전한 무능력에 대한 인식이...... 인류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죄와 벌> 중
로쟈는 윤리적 번민의 긴박함 속에 자신을 옭아매는 혹은 자신을 지켜보는 두려운 눈을 가진 이들 가족들과 친구들, 그 외의 인물들을 피하기 시작한다. 마치 '가위를 휘두르며' 그들과의 공동생활로부터 자신을 오려냈다. 그러나 그와 그녀, 죄인(살인자와 창녀)의 교감은 이미 한 몸이 되었다. "그녀(소냐)에게 떨어지는 것은 불가능 하다. 피로써······, 그들은 영원히 한 몸이 된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 진행 되는 우연하게 다가온 소냐에 대한 그의 고백은 가난에 대한 몸서리쳤던 인상(마르멜라도프의 딸인 그녀와 가난의 가족사) 속에 이끌리기게 된다. 로쟈는 자신의 삶을 구차하게 연명하기 위해 뻔뻔한(자의적) '인권(스스로 책정한 권리)'을 허울삼아 자신을 마치 타인들의 눈앞에서 결박시킨 체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심판을 극도로 저주한다. 그 안에는 자신의 죄에 연연하는 연약함을 벗어젖히어 버리려는 몸부림 칠 분이다. 그는 결코 나폴레옹이 아니다. 자신의 윤리적 기치는 선량한 본성을 벗어젖히어 버리지 못해 두가지 인격 사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죄와 벌>중 신비로운 장면중 소냐에 대한 그의 고백의 대목에서 들어난다.(폭로된다)
로쟈의 새로운 인격의 탄생, 그의 나폴레옹 사상, 인본주의의 약점이 들어나게 된다. 고통 속에서 그의 번민과 성찰은 교활한 이미지를 생각하는 일에 착수하게 되지만 불완전한 가운에 그가 말하는 인본주의적 허울일 뿐 이다는 선고를 받게 된다. 그는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다('본성'은 범죄자를 배신하게 된다).
" 지금까지 단 한사람도 이 불합리한 잠꼬대를 폐기시키면서 대담하게 모든 질서의 고리를 잡아 지옥으로 날려 보낼 수 없었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가라는 생각이 불현듯이 햇빛처럼 선명하게 스쳐갔다. 난 이런 대담성을 가지길 원했고 그래서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죄와 벌>
로쟈가 소냐에게 한 고백 속에 자신은 울름을 터트리지만 그(도는 우리)에겐 언제나 그러 하였듯이 삶의 마지막 선택(기민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죄에 회개를, 무릎을 꿇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의 이론 즉 나폴레옹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실제 자신의 고백처럼 자신은 단지 가난이 싫어서....다른 이와 같이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싫어서 이런 공상을 키워나갔을 것인지 모른다. 그의 살인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믿음은 꺼져가는 모닥불에 남은 재가 바람에 흩날리듯 허무한 자취만을 남길 뿐이다. 그는 노파와 같은 세계 안에 있는 보다 "미학적인 한 마리의 이"일 뿐이다. 그곳에서는 숭고한 이상은 없고 단지 추악한 범죄자의 탐욕만이 남는다.
< 죄와 벌>세계 아래에 "강한 인격은 세계의 질서에 반항하여 일어선다."……. 그러나 "힘의 도덕성은 폭력의 철학이다"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신념아래 '강한 인격을 자진' 부조리한 세계를 거부하는 사내의 증오, 그리고 행동의 그릇됨은 그에게 폭로되게 된다. 역시 로쟈 또한 폭력을 통해 얻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은 주구장창 몇 번이고 반복하고 말하고 있는 교만한 인격이다. 더구나 그의 기민한 계적적인 성찰에 정당화하기 위한 기구한 그의 관심, 인류를 위한 그의 생각과 말은 몇 번이고 태엽이 풀리듯이 반복할 뿐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환상은 단지 그가 교만함을 품을 수 있을 뿐 고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속한 힘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는 힘없는 노파와 가냘픈 여인을 죽였을 뿐이다. 그의 힘에 대한 자신보다 약한 이를 짓밟을 뿐이다.
"글쎄 내 행동이 그들에게 왜 그토록 추악해 보이는 것일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한다. '사악함 때문인가?' 그런데 '악'이란 또 무슨 뜻이지? 내 양심은 평화로운데 말이지……."
모촐스키의 <죄와 벌>의 독해는 현재 <죄와 벌>과는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다(이의 염두하여 <죄와 벌>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인간 위에 순결한 베일을 덮어씌움으로써 그런 진실은 가려내야 했다."<도스토예프스키> 그에 의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일기를 보면 원래의 의도 그와 같은 결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쟈는 유형지에 가서 소냐에게 사랑을 느끼며 그간 몰이해 했던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확신하지만 이는 당시 검열 분위기 탓에 꾸며진 허구이다. 이후는 불성실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몇 대목을 그대로 인용한다(사실 글 자체가 불 상실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가 수치감을 느낀 것은 자신이 어떤 눈 먼 운명의 지시에 따라 맹목적이고 필사적으로 번거롭고 어리석게 파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특징은 그의 장엄한 형상에 월계관을 씌운다. 그의 적들 가운데는 이런 장엄한 인격에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다. 그에겐 하나의 맞수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운명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맹목적 운명과의 싸움에서 비극의 주인공처럼 파멸한다."<도스토예프스키>
"'강인한' 인격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러시아 민중들에게 맡긴다. 민중들의 이러한 심판은 소설의 종교적 관념을 전달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은 더 괴롭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무신론은 끊임없이 인간의 신성화로 희귀 한다.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내가 하느님이다. '강인한 인격'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며 그는 성공한다. 그의 자유는 무한했다. 그러나 이는 무한함속에서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자유는 순수한 악마주위, 그리스도의 부정이자 운명에 대한 예속으로 드러난다. 무신론적인 자유의 과정을 쫒은 다음, 작가는 우리를 그의 세계관의 종교적 토대-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외에 다른 자유는 없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운명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인도하고 있다."
"이 소설의 관념 정교회적 세계관, 정교회 신앙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안락 속에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고난의 대가로 얻어진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행복을 벌어들인다. 그것은 항상 고난을 통해서 가능하다. 여기에는 어떤 부당함도 없다. 그 까닭은 인생의 소명과 의식은 찬성과 반대에 의해 성취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경험을, 몸소 체험해야한다.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것이 지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과정으로 지각되는 이런 직접적 의식은 그토록 강렬한 기쁨이기에 수 년 동안 고난의 대가가 될 만한 "의식의 원천"으로서의 고통에 대한 개념을 <지하생활자>에서 이미 표명된 바 있다. 고통은 지상의 법칙이다. 삶을 수용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고통의 길을 택하며, 이와 같은 '인생의 소명'속에서 강려한 기쁨을 체험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삶에 집착할 그의 악마적 사상 때문에 죽지는 않다. "살아있는 과정"전체를 통해서 그는 신비적 힘과 결합되어있다."
p.s ....문학성에 대한 물음을 아직도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글을 다시 읽었을 때에는 예전의 모촐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을 때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인물에 압도되는 형상. 우리는 너무도 많은 문학성을 입증하는 자료를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위대성을 쉽게 읽어 볼 수 있는 시대이다. '문학성'이라는 값진 보물이 찰나의 영감마냥 가볍게 떠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읽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향수>의 그루누이 같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면 가능할까(재능보다 그의 노력이 더많이 묘사되었지 않았던가)?
'문학성'이 낚기길 기다리기 이전에 먼저 그 책에 대한 손이 닿기 쉬운 자료를 먼저 읽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 병장 김지민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11 09:28)
병장 김병완
짝짝짝~!! 가지로~! 05-18
병장 이승현
잘 읽었습니다. 건룡님.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압도적입니다.
미학적인 이에 불과한 것은 우리에게 기생해 사는 '인류'라는 기만적인 관념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무신론자의 특유한 예로는 끼릴로프가 있겠군요. 그러나 결국 부정은 반응적 힘일뿐이라는 생각 또한. 도대체 우리가 대면하는 운명이란 무엇인지, 우리를 지상에 붙잡는 삶이란 대체. 05-18
병장 이건룡
승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서는 앞으로 갈길이 멀죠. (막연한 표현이지만) 특히나 오늘날 감성으로는 읽기 어려운 '중량감'을 가지고 있으니. <매치포인트>에서나 <달콜, 살벌한 애인>(?맞나)에서 처럼 교양의 잣대로만 찾는 경우도 있고.....(시네 21에서 다룬 기사입니다)
병완// 감사합니다 05-18
병장 이승일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명작이지요.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봅니다. <인간>을 외친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 세계를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는지 말입니다. 아무튼 여러 인용문들을 옮겨주셔서 생동감있었던 것 같습니다. 건룡씨는 이 소설(의 주제)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05-22 *
병장 이건룡
니체가 식물에 기생하는 진딧물 경우로 인간을 생각한 글이 생각이 나는 군요. 당시 글에 세계라는 아비규환의 (진딧물이 서로 엉겨 붙어있는) 지옥 속에서 비 인류적인 충돌을 뛰어 넘을 인류 서로를 연결시키는 다리가 되겠다는 글이었는데 당시 <죄와 벌>에 대한 감상과 매치가 잘되더군요. 너무 복잡하군요. 으레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듯싶은데 나중에 말해 놓고 제 스스로도 후회되지 않을 가 싶어 답변하지 못하겠습니다. 나중에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 다룰 법한 주제도 생각이 나고. 복잡합니다. 패스입니다. (머슥) 05-23
병장 이건룡
한가지 좋은 정보가 있군요. 지금 읽다보니 로베르 브루송감독의 영화들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차용한 주제들이 많다 하더군요. 생각해 보건데 다룬 작품에서 주제를 인용하거나 쓰이는 대목은 <죄와 벌>(그러한 명작들의)에 대한 감상에 좋은 이해의 도구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모촐스키와 같은 세밀한 이해는 이질감이 드는게 사실이지요. 러시아 문화에 대한 부정확한 환상은 나중에 배신할 공상도 크고. 차라리 경박하지만 과감한 이해의 도식을 수용하는 문화또한 좋겠지만..그것 역시 생각할 여지가 많으니...... 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