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종언"의 일반 형식에 관하여-책마을에서 논의된 각종 '종언'담론들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9-24 18:01:45, 조회: 31, 추천:1
1.
가라타니 고진이 제출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가 한국에서 수용된 양상들을 보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종언'의 테제가 단순히 문학이라는 장을 넘어서, 다양한 영역과 수준에서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넘어서, '종언'의 일반형식에 대해 사고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피력해본다. 즉 "X가 종언에 이르렀다."라는 말로써 그것이 구성하는 어떤 '모순'이 있지 않은가? 특히나 근대문학의 종언이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수용되는 일련의 양상들을 보면서, 나는 '종언'에 함축된 어떤 첨예한 이율배반이 망각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X가 종언했다고 할 때 우리들은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개운치 않은 구석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X라고 하는 대상이 '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준에서 그것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또한 뜬금 없이 반복하는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 그것이 더 나쁘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더 나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어떤 대상이 종언했다는 메시지를 혼쾌히 수락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근대문학이 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에서 깨끗하게 손을 씻지 못하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 고진의 종언테제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이다. 나는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 모종의 유혹이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거기에 단호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동시에 생각한다.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문학을 근대문학으로서 지탱하던 일련의 역사적 조건이 변화했다는 수준에서 이해되고 있다. 근대문학은 역사적 환경이 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처럼 특권적인 담론의 중심, 혹은 무수한 문학청년들을 끌어들였던 그러한 유혹의 수단이 되지 못했다. 이런 노선을 더욱 더 멀리 밀고 나간 인물이 있다면, 그는 고진의 번역가이자 비평가인 '조영일'이다. 그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한국문단의 종언으로 바꿔 말하며, 문단의 해소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가 '한국문학'의 위기를 파악하는 방식은 일견 지극히 단순한데, 그것은 외국의 번역서에 비해서 한국문학이 팔리지 않는 사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환경'의 변화로서만 생각해야할 것이 아니다. 한국문학에 위기가 도래한 것은, 그 동안 한국문학이 내용 상의 질로 승부한 것이 아니라, 문학 외적인 권위와 제도적인 요소들을 등에 업고서 별 내실 없는 문학작품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문단의 권위에 종속된 비평이 별 내실 없는 문학들에 순문학의 아우라를 부여하는, 모종의 '문학적 베팅'(투기)으로 기능하면서 결국 '공황' 즉 팔리지 않는 사태로 귀결된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근대문학의 종언, 즉 문단문학의 종언이다. 그것은 이제 끝났으며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해 봤자 소용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문학 중에서 팔리는 게 있다면 그것은 '문단문학'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팔리지 않는 문학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단의 스타들을 중심으로 어쨌든 꾸준히 작품이 팔리며, 또한 명성을 얻는 사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태, 가령 공지영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이 베스트셀로로 등극할 때 조영일 씨의 즉각적인 반응은, 그러한 작품에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식의 진부한 문화비평이었다. 원래가 그가 지적했던 것은 사실의 수준, 한국문학이 '팔리지 않는 사태'인데, 여전히 '팔리는' 작품에 대해서는 이렇듯 당위적으로(어쨌든 팔리는데, 이런 건 팔리지 말았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는 개별 작품 수준에서 대단히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고진과 달리,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개별작품의 차원에서도 대단히 강박적으로, 그것을 깍아내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비평가로서 얼마나 모순된 잣대로 사태에 접근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오히려 '근대문학의 종언'이, 그것이 전달하는 외상적인 메시지가 한국의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문단문학은 이제 끝났다"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문단문학은 영원하다"는 수준에서 받아들여져야하지 않을까? 후자가 전자에 비해 훨씬 나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문학은 팔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 여전히 명성을 얻고 팔릴 가능성이 있는 작품들은, 그것이 훌륭하든 형편 없든 무관하게, 문단의 허울 뿐인 권위를 입고 생산된 작품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대중의 눈에도 문학의 권위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을 정확하게 읽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정확하게 읽을 줄 모르는 대다수의 독자들 가운데서, 문단 내부에서 생산된 작품들이 인기를 얻으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어떤 권위를 지니는 것, 이것이 정확히 '한국 근대문학의 종언'이 아닌가?
2.
혹자는 책마을에서 '학생 스포츠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것은 조영일 씨의 '종언'테제에 대한 수용과 어떤 대칭을 이루고 있는듯이 보인다. 그것이 종언에 이르렀다는 근거는, 그것이 서점에서 팔리지 않는 소설책들처럼, 과거만큼 '흥행'에 성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생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이전만하지 못하다는 것인데, 과연 그것만으로도 학생 스포츠의 현 상황에 대해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온당한 일인가? 나는 여기서 학생 스포츠에 대한 당위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종언' 담론을 어떤 자명한 '사실'을 자신의 당위로 나아가려는 토대로 삼으려는 시도들이 걸려드는 함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치 세계무역센터가 주저앉은 터(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려는 저 진보적인 애국주의자들(우리와 별 관련 없는 자들이지만)처럼, 우리는 같은 수준의 논의를 문학에 대해서 혹은 학생 스포츠에 대해서 펼치는 게 온당한 일인가?
나는 여기서 잠시 우회해서 '대의大義'Cause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언젠가 슬라보예 지젝은, 항상 어떤 보편적 진리의 차원을 역사 속으로 '개시'하는 사건의 가능성이 있음을 승인하는 알랭 바디우에 대해 그가 모종의 '칸트주의'로 퇴행하는 게 아니냐며 의문을 던진 바 있었다. 그가 칸트주의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마치 칸트의 도덕철학이 그렇듯이 바디우 역시 경험적 수준에서 그저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과 그러한 삶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최근에 출간한 책에서 그는, 오늘날과 같은 탈근대적 환멸의 시대에서 ㅈ파들 가운데서 다시 보편적인 '대의'에 대한 옹호를 되살려야만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것은 혹자들 가운데 그가 다시 알랭 바디우에게로 '복귀'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나는 여기서 오히려 지젝 자신이야말로 칸트주의로 퇴행하고 있으며,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칸트주의와 애초에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자신의 저서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오늘날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영미 식의 극단적인 공리주의적-실용주의적 가치관이 칸트의 엄격한 독일식 금욕주의 윤리와 엄밀히 짝패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러한 예리한 통찰을 오늘날에도 되살려 볼 수 있는데, 가령 모든 사회적 영역 전반의 '경제화'와 더불어 무조건적인 '원칙'과 '대의'를 삶 속에서 상실해가고 있다는 저 흔한 진단은 오히려 그러한 단순한 '삶'과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대의' 간의 간극이 더욱 벌어지는 사태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단순히 주어진 삶과 그것을 살아가게 만드는 어떤 원칙 간의 칸트적인 대조야말로, 오늘날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실용주의자들의 화두가 아닌가?
오늘날 대의를 상실한 단순한 동물적 삶이야말로 경멸받고, 심지어 공공연한 사회적 통제의 대상으로 지목되기조차 하는데, 가령 '잉여'라는 흔한 표현이 바로 그러한 사태를 드러낸다. 조르주 아감벤이 정식화한 '호모 사케르'를 우리 나름대로 번역한 단어라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이 용어는, 말 그대로 사회적 교환 속에서 그대로 노출되어버린 '벌거 벗은 삶'으로 표상된다. 아무런 자격증도 없고, 어떤 스펙도 없고, 어떤 자기계발도 하지 않는 그렇나 삶은 그저 무가치하게 흘러가버리는 삶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더욱 단단하게 벼리고, 삶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원인-대의Cause를 상정해두지 않으면 곧바로 전면적인 사회적 교환 속에서 일련의 무상한 상품-재화의 요소들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마치 너머의 불사의 삶이 있다는 듯이 끝없는 고행을 반복해야한다. 이것이 이미 칸트가 했던 이야기인데, 말하자면 통상적인 '자기개발'에도 이러한 칸트적일만치 숭고한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3.
나는 이러한 '대의'에 일어난 모종의 위상의 변화에 기초해서, 매우 가설적인 차원에서 이른바 종언의 일반형식에 관해 정식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알랭 바디우와 지젝과의 관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가령 지젝이 보편적 대의에 대한 옹호를 요청할 때 그가 바디우의 입장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바디우 자신의 입장에 비춰 볼 때 아이러니한 일인데, 왜냐하면 정작 바디우가 말한 '진리-사건'이란, 혹은 사건으로서의 진리란, 정확히 그러한 대의가 일상적인 삶의 수준에서 회복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엄밀한 논점은 단순히 보편적 대의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대의를 철저히 고수하는 것 자체는 '사건'의 지평이 열리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라면, 오늘날 허무주의자들에게도 나름의 '대의'가 있을 것이다. 다소 소박한 사례이긴 하지만, <천하무적 씨름부>에서 트랜스젠더 수술을 꿈구는 한 소년의 대사를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같은 처지(아웃사이더)인 한 친구와 밤을 세면서 술을 마시는데, 그의 친구는 자신에게 어떤 '꿈'도 남아 있지 않다면 한탄하며 그에게 꿈이 뭔지를 되묻자, 주인공은 버럭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내 꿈이 뭔지 알아? 내 꿈은, 그냥 사는 거야." 주인공의 친구는 여기서 마치 TV 전도사와 같은 화법("삶의 대의를 가져야만 파멸을 막을 수 있다!")을 구사하고 있는 반면에 여기서 주인공에게 주어진 삶의 대의는 정확히 일상적인 수준에서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바로 그 지평에 주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디우의 진리-사건은 정확히 말해서, 삶의 어리석은 리듬과, 그러한 삶을 여전히 살아가고 연장하게 할만한 대의 사이의 깊은 '간극'이 닫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논점으로 돌아온다면, 아마 문학을 지탱하는 것은 순수문학만의 어떤 문학적 '대의'라 할만한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근대문학의 종언이 함축하는 것은 그러한 문학적 대의가 소멸하고, 대중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게 결코 아니다. 사태를 그런 식으로 본다면, 오히려 우리는 역설적으로 아직도 근대적 형태의 문학(문단문학)만이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으로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학생 운동가들이 '시대적 양심'으로 학생사회를 대표하는 양 비쳐지는 시각이 놀랍게도 지금에서도 존속되고 있다는 걸 보게 되듯이 말이다. 말하자면 표상의 수준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대의'가 남아 있으며, 어떤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러한 표상이 여전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언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결코 뭔가가 대의로서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이 종언에 이르렀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영향력'을 어떤 수준에서든 여전히 발휘하며 유지하고 있다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문학의 권위(대의)가 종언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우리는 역으로 그것이 단지 우리의 삶 너머에 있는 뭔가로 여전히 표상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해야한다. 다시 말해 단순한 삶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대의 사이의 간극이 형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을 봐야만, '순문학'이라는 존재가 대중에게 발휘하는 모종의 '전이'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의 대의가 오늘날 실종되었다고 개탄하는 것 이면에는, 그러한 (학생운동의) 순수한 대의(정의)가 여전히 일상적인 멍청한 삶을 더더욱 잘 정당화하는 무언가로 표상되는 악순환이 자리잡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학생운동의 종언'을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매우 잘 수용할지는 모르겠지만, 화용론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태도는 학생운동의 일상적인 지리멸렬한 모습을 초월한 채 그것을 정당화하는, 학생운동 자체의 대상-원인object-Cause 자체의 위상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종언에 이른 어떤 대상-정의, 혹은 대상-대의object-Cause는, 역으로 그것이 '끝났기' 때문에, 오히려 '표상'의 차원에서 더 '잘' 기능하고 있다는 역설이 아닐까? 따라서 학생운동의 종언(게슴츠레)이든, 근대문학의 종언이든(조영일), 텍스트의 종언(김예찬)이든 간에 그러한 종언의 선언에 대응하는 보다 다양한 '연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왜 자각해서는 안될까? 다시 말해 무엇이 종언했다는 선언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선적으로 어떠한 제안으로 귀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령 그것이 단선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대표적으로 '조영일' 씨와 같은 도착적인 비평(문단문학은 진작에 망했어야 했다!)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것이 단선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이유는, '종언의 테제'는 구조적으로 그 이면에 그 자체의 수행적 모순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논리적 구조를 대략적으로나마 소묘하고자 시도했다.
어쩌면 우리는 종언의 담론의 다양한 수준에서(근대문학의 종언, 학생운동의 종언, 텍스트의 종언), 그것이 맞딱뜨리는 구조적인 곤궁을 보다 자세하게 해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곤궁은, 애초에 종언에 이른 영역을 지탱했던 '대상'(대의)이 더욱 더 그러한 영역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유리된 채 자족적으로(몰역사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서 연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상으로부터 보다 급진적으로 단절하거나, 혹은 그러한 대상을 다시 우리의 '편'으로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 '복원'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접근되어야 할 양갈래의 길은 아닌가? 다시 말해, 근대문학의 종언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문단문학을 해소해야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단보다 더 내실 있는 '권위'를 문단 외부에서 만들어내기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운동이 담지하고 있던 정의가 유효성을 상실했다면, 그러한 정의감을 다시 일상적은 수준에서 복원해야하지 않을까? 텍스트가 아무에게도 진지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사태의 절반만을 파악한 게 아닌가? 가령 정운찬 씨가 대중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은 어떤가? 물론 그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아무도 그의 논문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종언이라는 테제는, '텍스트의 권위'가 여전히 현실적 실존과 유리된 채로 '살아 있다'는 사태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만 온전히 파악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러한 종언의 '아이러니' 때문에라도, 종언이 구성하는 실천적 방향은 다의적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가설을 내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