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에 대한 두 이해 
 병장 이승일 03-24 19:01 | HIT : 150 




 영원한 존재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의 영원한 삶을 믿었다. 그들은 영혼이 물질과 다르며, 물질은 변화하고 사라지는 반면 영혼은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믿었다. 플라톤 역시 영원히 존재하는 대상들에 관해 이야기고, 그것을 이데아Idea 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이데아'도'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이데아들'만'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머지 것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물체들은 이데아의 모사이며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놀라운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관념idea은 허구일 뿐이며, 물질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고대인들이 보기에 존재한다는 痼?또한 영원한 것이어야했고, 오직 영원한 것만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중세의 교부들이 확인하고자 했던 것도 영원히 지속하는 것들이었다. 신, 개념, 논리 등등이 그것이다. 영원성을 결여한 지상의 사물들, 사건들, 육신 .. 등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었다. 

 순간적 존재

 그러나 근대로부터 시작된 지적 개혁은 이 모든 구도를 역전시켰다. 신을 포함한 모든 추상적 관념들의 세계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자신이 허구인 것으로 선포되었다. 존재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지상, 이 육신,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물질들 뿐이었다. 추상적 관념이나 가치 따위는 이 물질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빚어낸 환상이며 착시현상인 것이다. 이 물질들의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이며, 변화하며, 또한 붕괴한다. 어떤 소립자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멸망이란 오직 시간의 문제일 뿐. 존재란 그렇게 순간적이며,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주의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는 우리의 운명이다. 

 파멸

 인류는 이렇게 존재의 본성을 영원성으로부터 무상성으로 타락시켰다. 과거의 인류는 영원 불멸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자 노력했다. 현대의 인류는 가장 짧게 존재하는 소립자가 무엇인지 찾아 헤매인다. 그래서 빛의 속도로 달려도 고작 원자 반지름의 거리밖에 가지 못하는, 그 순간밖에 생존하지 못하는 입자를 찾아내고 환호한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하게 믿는 명제가 있다면 '모든 것은 결국 변화한다'는 명제이다. 영원한 것은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다 없어질 것, 결국 사라져버릴 것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현대사회는 정말로 '파멸을 위한 실험실' 이다. 

 도대체 무엇이 존재하는가? 정말로 '있다' 는 것은 무엇인가? 괴델은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결코 유한한 시간과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임을 알 수 있을것이라 말했다.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사라질 수 있는가? 만약 어떤 것이 사라진다면, 즉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우리들은 스스로의 유한한 운명을 비극조로 노래하고 그것에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우리는 비극적 감정이 굉장히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나의 도착증일 따름이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기쁨을 원하지, 슬픔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슬픔을 원한다면, 그것은 단지 영원한 기쁨을 얻지 못할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며, 슬픔도 참을만 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인식시킴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결말은 결국 파멸이다. 
 영원하지 못한 모든 것의 결말은 결국 똑같다. 유한한 삶이란 결국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물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워도 영원한 것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아, 인간이란 정말 얼마나 어리석은가? 명백한 허상을 존재하는 것으로, 유일한 존재를 허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얼마나 절망적일 정도로 우둔한가? 나는 오늘에서야 그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병장 임정우 
 유한한 것은 유한하다는 점에서 영원한 것보다 아름답지 못할테고, 영원한 것은 자신이 영원함으로 수많은 유한한 것들을 덜 아름답게 만들었단 측면에서, 저를 비롯한 유한한 것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03-25   

 병장 성태식 
 영원한 것을 통해 기쁨을 얻으려면 종교에 귀의하는 방법이 최선이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종교를 전해줄 수는 없습니다. 

 신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기쁨은 영원한 무언가에서 발견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조그마한 능력으로 그 영원한 무언가에 닿으려면 아마 스스로를 속여야 할 겁니다. 어쩌면 종교 역시 스스로를 속이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그런 기쁨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아마 안 될 겁니다. 두 기쁨은 다른 종류의 기쁨이니까요. 

 물론 인간적 방법으로 영원한 기쁨에 다다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면 영원하지는 않아도 우리 모두가 다다를 수 있는 기쁨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굳이 영원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닐까요.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영원에 도달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 혼자서, 아니면 승일씨 혼자서, 누구나 혼자서는 영원에 도달할 수 있을거예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불행을 극복하는 무언가도 꼭 필요하기는 필요하지요. 

 꽃이 피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기뻐합니다. 
 꽃이 질 것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거예요. 
 순간적인 기쁨 또한 하나의 기쁨이니까 우리가 그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03-26   

 병장 배진호 
 영원에 대한 이야기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저 또한 이 생의 단편성과 짧은 생에가 주는 고통으로 인한 
 패배감에 무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 영원'을 얻고 난 이후로.. 사실상의 두려움과 무서움은 
 그것을 잃는것 이외에는 거의 없어진 것 같습니다.. 

 얻었다가 실질적으로 교만한것이며 사용해서는 안될 
 그런 말 같다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나의 믿음은 얻었다라고 하는것이 맞다라는 
 믿음이기때문에.. 얻었다라고 하는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쨋건 영원의 기쁨이라... 
 찰나의 연속성.. 기쁨의 연속성.. 

 태식님 누구나 혼자서 어떻게 영원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전 그 의문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영원성이라... 03-26   

 병장 이승일 
 태식 / 우리가 영원, 무한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상상 아래에서의 영원, 무한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소극적으로 상상하는데 그칠 수 밖에 없죠. "~보다 긴" , "~ 보다 큰" 이라는 술어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점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 결코 그 실체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의 기쁨을 혼자서 느낀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상상 속에서의 '말 뿐인' 영원, 무한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인 기쁨을 만끽하는 것은 중요하고 또 필요할 것입니다. 그 순간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또한 영원성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열리기도 하지요. 물론 그것은 언제나 부족한 상태에서 머물지만 말입니다. 

 진호 / 그것을 관념으로써 받아드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한계이고, 그 안에서는 분명 어떠한 기쁨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한과 무를 혼돈하죠. 영원함이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어떤 지루한 무엇처럼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무한함, 그리고 영원함이란 모든 것들과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심지어 이 키보드와 지금 이 순간조차 포함되지 않을 수 없지요. 제가 그렇듯, 진호씨 역시 그 기쁨을 부분적으로나마 알고 계신 것 같아서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