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공화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 반공주의와 그 변용들
- 후지이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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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반공'이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 '반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단지 '콩사탕이 싫어요!'라는 외침이 전부였는가? 오늘날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건국'을 중요시하는 뉴라이트 진영과 '민족'을 중요시하는 개혁 진영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과연 그 것은 실제로 어떤 역사적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는가? 후지이 다케시는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단지 '반공'에 그쳤던 것인지 재조명해보는 이 논문을 통하여 단지 정치적 다툼의 후방 지원에 불과한 오늘 날 한국 현대사 논쟁이 얼마나 텅 빈 것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1.
제 1공화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물론 '반공주의'지만, 그 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또 변해 갔으며, 결국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 '근대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우리는 이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분단 국가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부딪힐 수 밖에 없었던 과제는 바로 '국민'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분단 국가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바로 민족과 국민의 불일치라는 조건이었다. 특히 본격적인 반정부 무장 반란이었던 여순 사건은 당시 민중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없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 것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그들은 콩산주의를 사상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사상을 세울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일민一民주의였다. 1949년부터,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범석, 연합신문사 사장 양우정, 문교부 장관 양호승 등의 인사들은 이 '일민주의'를 중심으로 '국민 만들기'에 착수한다.
일민주의란 무엇인가? 이승만이 공보처 발행물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일민주의는 대략 이러한 강령을 따르고 있다.
1) 경제상으로는 빈곤한 인민의 생활 정도를 높여 부요하게 하여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 것
1) 정치상으로는 대다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 계급의 대우를 받게 되도록 할 것.
1) 지역의 도별(道別)을 타파해서 동서남북은 물론하고 대한민국은 다- 한민족임을 표명할 것.
1) 남녀 동등의 주의를 실천해서 우리의 화복안위의 책임을 삼천만이 동일히 분담케 할 것.
여기에 이어서 발표된 글에서는 일민주의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라마다 각각 저이를 위해서 싸우는 것 같이 우리도 우리를 위해서 콩사탕과 싸우는 것이니 이 싸움이 아직은 사상적 싸움이므로 이 정도가 변해서 군사적 싸움이 될 때까지는 사상으로 사상을 대항하는 싸움이 되고 있으니 민주주의로 콩산주의를 대항하는 것은 사상이 너무 평범해서 이론상 엄밀한 조리에 들어서는 콩산주의의 선전을 대항하기 어려울 것"에 따라 일민주의를 제창하여, 콩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의 일체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바로 일민주의의 목적이었다.
일민주의는 1949년 4월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데, 비슷한 시기에 ㅈ익 전향자들을 조직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우리에게 <태국기 휘날리며>로 익숙한 바로 그 단체다.)이 결성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민보도연맹은 "사상은 사상으로 투쟁하여 상대방을 극복"하고 "일반 국민까지" 포함한 "일대 국민 운동"을 벌일 것을 주장하며 결성되었다.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ㅈ익 세력을 탄압하는 한 편, 또 이들을 포섭할 사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이승만이 제시한 '일민주의'였고, 이를 체계적인 사상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연합신문사 사장 양우정이였다.
양우정은 일제 시기 카프, 신간회, 적색농조 등에서 활동한 ㅅㅎ주의자였다. 그러나 1931년 검거되어, 1934년 전향하고 해방 이후 부터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언론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주장하는 이승만의 정치 노선이 "민족 전체의 복리와 행복을 목표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초대 내각을 구성하면서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으로 조봉암을 발탁하는 등 중도파를 포섭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양우정은 이러한 중도파 포섭 노선을 이론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것이 바로 민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민주의 이념이였다. 또, 이러한 이념적 방향은 ㅈ익과 전향자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이 '민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민주의'가 후에 가다듬어 진 것이 바로 '일민주의'였다.
대한민국을 지지한다면 사회민주주의(자본주의 비판)도 허용한다는 일민주의의 입장은, 1930년을 전후해 일본에서 일부 사상검사들이 천황제를 인정한다면 자본주의 비판을 허용한다고 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유도한 것과 동일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 것은 세계적으로 대공황 이후 1930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하는 양상과 유사한 경향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국가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제헌헌법에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이 들어간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일민주의에는 강한 반외세적 요소가 있다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민주의의 이론가였던 양우정과 안호상은 외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하고, '민족'의 사상을 세워야한다고 역설했는데, 이 것은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배격하는 이론이였다. 이러한 주장에서 우리는 쉽게 파시즘, 혹은 나치즘을 떠올릴 수 있다. 저항적 민족주의와 파시즘의 친화성은 이미 터키의 케말 파샤 정권이나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이미 임정시절 부터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우며 '전체에 개체를 바쳐야 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일민주의와 사상적으로 친밀했던 그는 일민주의보급회 명예회장을 맡아 좌우를 아우르는 '국민 만들기' 기획에 착수했다. 그러나 1년 만에 벌어진 한국전쟁은 이러한 '국민 만들기' 기획을 일단 파탄시켜버리고 말았다. 그 파탄을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다.
2.
이승만은 한국전쟁의 와중이였던 1951년, 자유당을 조직하면서 일민주의를 다시 꺼내들었다. 초기의 자유당은 민족청년당 계열, 이른바 '족청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이범석, 양우정, 안호상 등이 바로 일민주의의 대표 인사들이자, 또 대표적인 '족청계' 인물들로, 이들은 자유당의 주요 간부로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주중대사(대만)로 재직하다가 1951년 8월에 돌아온 이범석은 당시 대만에서 추진되고 있던 중국국민당의 개혁 정책에 영향 받은 바 있는데, 국민당의 "청년, 지식분자 및 농민, 노동자, 생산자 등 광대한 노동 민중"을 기초로 하여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포퓰리즘적 당 개혁을 인상 깊게 바라본 이범석은 이승만에게 이러한 개혁의 필요성을 보고했고, 이승만 역시 '농민과 노동자를 토대로 삼아' 자유당을 조직할 것을 천명하게 된다. 자유당은 대중에 기반을 두고 국가와 일체를 이루는 정당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은 그 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주창하고, 족청계 일민주의 인사들이 창당을 주도한 것을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 것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이미 유엔군이 참전했고, 서방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 완전히 편입된 한국의 사정 상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민주의는 상당히 민족주의/전체주의적 단서가 가득한 이념이였고, 그 것에 대해서는 이미 미국에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유당이 직접적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의 창당 선언문에서는 일민주의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많은데, 이를테면 "쏘련 콩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그 동시에 "이기주의적 자본만능의 사회"에 반대하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의사에 의하여 우리 스스로 운영하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인 협동 사회를 건설하자는 부분이 바로 그러하다. 자유당의 강령 역시 일민주의 강령을 골자로 내용을 추가한 정도에 그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민주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협동'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협동'이라는 개념은 일민주의가 '하나'의 민족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교했을 때 이미 존재하는 여럿의 협동을 이야기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유엔참전국들과 한국의 협동이라는 상황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협동' 개념을 사상적으로 제시한 인물인 백종덕이 상당 부분 1930년대 일본 학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백종덕이 내세운 협동주의란, 1930년대 중후반 일본 고노에 내각의 이론적 브레인이였던 쇼와 연구회가 내놓은 '동아협동체', '협동주의'에서 빌려온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세한 부분은 '<역사와 반복> 읽기'의 '2. 일본에서의 역사와 반복'을 참조할 것.) 결국 일민주의나 협동주의 모두, 사상적 기원을 파시즘에 두고 있는 유사-파시즘에 가까운 것이었다.
3.
당시 문교부 산하에 있던 국민사상지도원은 '국민 만들기'의 사상 기관으로 활약한 부서였다. 대학교수등을 위촉하여 '사상강화' 강연회를 열고, '사상 총서'라는 책자를 발간하는 등 국가 이데올로기 전파를 위한 기관이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월간지 <사상>이라는 기관지를 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그 편집주간을 맡은 사람이 바로 우리에게 군부독재에 맞선 재야 민주 인사로 잘 알려진 장준하였다.
<사상> 지는 그 창간사에서 "대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 역사를 개척할 결전 국민의 사상과 정신을" 강조하고 "세계사적 의의를 가지는 대공전쟁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세우며 "전민족의 지향과 이상을 하나로 귀합시킬 수 있는 사상과 이념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잡지였다. 국사학계의 거두 이병도와 철학자 김기석 등이 주요 필자였는데, 민족, 국가 등의 '전체'를 강조하는 논리로 뚜렷하게 전체주의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상> 2호에 실린 좌담회인 '사상 운동의 회고와 전망'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상당 부분 1930~40년대 일본에서 열렸던 '근대의 초극' 좌담회와 비슷한 성격을 드러내는 이 좌담회는 백낙준, 이병도, 김기석, 배성룡, 박현숙, 이교승 등 당대의 지식인이 참여하고 장준하가 사회를 보았다.
이 좌담회에서 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이병도와 김기석이었는데, 이병도는 콩산주의라 하여 다 나쁜 것은 아니고 자유주의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각각의 장단점을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생활, 사회 생활과 같은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는 양자의 장점을 끌어와야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 의식이었다. 김기석 역시 "민주주의나 콩산주의 모두 개인의 이익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공리주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앞으로 한국의 사상은 "부분이 전체를 살리고 전체가 부분을 살리는 개個와 전全의 변증법"이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사상적 경향으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주의'를 언급하며, '민족민주적 사회주의 건설'로 높게 평가하는 발언을 한다. 사회자였던 장준하 역시 "콩산주의나 자본주의를 완전히 지양시켜서 새로운 지도 이념이 나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민족의 고유한 정신인 '협동 정신'을 강조하고 자본주의와 콩산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민족이라는 '전체'를 내세운다.
콩산 진영과 대격돌한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 국가 기관의 기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상>지에서 이러한 내용의 좌담회를 열었다는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흔히 이야기되는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가 실은 '반공/반자'를 내세운 '파시즘'의 재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격화되고,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사상적 기반에 경계심을 품게 되면서 일민주의/협동주의/자유당의 '민족-전체' 이념은 점차 제거당하기 시작한다.
4.
1952년 1월, 미 대사관이 국무부로 보낸 보고서에는 이승만의 정치 이념이 '프롤X타리아 독재'를 번안한 포퓰리즘적인 것이고, 또 친 이승만 세력의 지도자들은 분명히 '국가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특히 원외 조직으로 출발한 이승만의 자유당이 현행 헌법 질서를 무시하고 대중들을 자극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그에 이어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구속하자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에 의하여 그의 정적들은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고, 이승만 만큼 한국 국민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끼칠만한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신에, 이승만의 이념적, 실천적 '행동대장'이었던 이범석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미 대사관에 의해 이승만과 이범석 사이의 이간질이 벌어졌고, 결국 이범석은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자유당의 핵심 세력이었던 '족청계' 역시 된서리를 맞게 된다. 좌익 전향자들이 많았던 '족청계' 인사들이 사상 문제로 공격 당하게 되면서 이승만에게 버림받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당 간부로 족청계를 뽑지 말 것'을 지시하고, 이범석, 양우정, 안호상 등의 인사를 자유당에서 제명하고 만다. 이는 자유당에서 일민주의를 주장하던 세력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하며, 또 ㅅㅎ주의적 경향을 가졌던 사람들도 존재할 수 있었던 민족주의적 영역이 정치적 지배 블록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당의 정치 이념 역시 혁신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50년대 말에 이르면 자유당의 강령은 '민족-전체 이념'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중시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 것은 야당인 민주당과 이념적으로 동일해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정치 공간에서 이념적 문제가 더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관지였던 <사상>지 역시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된다. 편집 주간 장준하는 미 공보원과 접촉하여 <사상> 3호 부터 미국의 용지를 공급받게 된다. 그 후부터 <사상>의 논조는 급격히 변화하여, 전체주의적으로 민족을 강조하는 것에서 민주주의적인, '세계 속의 한국'을 강조하는 글들이 실리기 시작한다. 지식인들 역시 '자유와 개인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논리를 펼치게 되며, 콩산주의에 대한 대안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이념으로 바뀌게 된다.
정부 기관과 지식계가 이처럼 사상적 변화를 겪고 있을 무렵, '사상전'은 이제 군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귀순자와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대북 이념을 가다듬던 군부의 심리전 담당자들은 5.16 쿠데타 이후 반공=경제성장이라는 흐름을 타고 정권의 주요 인물로 급부상하게 된다. 50년대 말 부터, 이미 사상적인 부분에서 군부가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한국에서 군부 독재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5.
흔히 한국 현대사의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반공주의'와 '근대화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반공주의' 이념은 원래 전체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것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콩산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 그 주류였다 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해야한다는 문제 의식이 이념적으로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어떻게 덮여지고, '근대화론'이 그 이념적 위상을 확고히 차지하게 된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논문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일준 <한국에서의 근대화론 수용 과정>)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50년 전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자본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어떻게 다시 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정권과 국가와 결탁하여 전체주의적-민족주의적 결론으로 치달은 그들의 길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해야한다는 고민 자체는, 우리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역사와 반복>을 통하여 '근대의 초극' 논의를 재탐구하듯이, 한국의 우리 역시 수십년 전의 논의들을 공부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는 것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후지이 다케시의 이 논문은 그런 의미에서 소모적인 정치-역사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병장 박원익
예찬님이 정리한 글을 보면 언제나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 글을 보면서, 소위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정치세력의 역사적 기원이 어디쯤인가를 생각할 수 있겠군요. 결국은 자유당의 테두리 안에서 탄생하고 버림받은 원-파시즘 세력이 오늘날 재야-민주세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우울한 생각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네요. 물론 역사적 기원이 논리적 원인과 반드시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습니다. 2009-12-07
01:54:55
김예찬
'주류'라고 보는 것까지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민족주의적 재야 세력 일부에게 어떤 의혹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글루스 블로거 초록불님은 일민주의의 이데올로그였던 안호승이 어떻게 오늘 날 한국 유사역사학('환빠들')의 태두가 되었나 분석하고 있지요.. 더 흥미로운 것은 '환빠'들은 한때 <사상>지에서 안호승과 같은 노선을 걸었던 이병도를 '식민사학의 주구'인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구요.
우리가 보통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장준하와 미국의 관계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2009-12-07
07:48:33
김소망
한 때 학회 동아리에서 흔히 스스로를 "진보진영"이라 일컫는 민족주의자들이나 민족주의 좌파들이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는 백범 김구를 볼 때만 하더라도 그의 사상적인 기반이 다소 파시즘적이다라고 말할 만한 개연성을 어느정도 갖추고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근거 없는 발언으로 몰린 적이 있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근거 없는 발언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러한 회고와 함께 읽는 이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이 글에서 "저항적 민족주의와 파시즘의 친화성은 이미 터키의 케말 파샤 정권이나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라는 말이 나왔는데, 사실 파시즘이 구체적인 하부구조적 측면으로 드러난 이탈리아나 독일 역시 당시 유럽에서의 국가간 권력구도에서 보자면 약자적인 측면에 놓여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최고 이론가였던 로코가 그들 자신을 "프롤레타리아 민족"이라 칭했던 데서도 드러납니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발전과 생산양식에 취약한 약소민족들의 저항 의지와 민족국가 형성 의지가 전근대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영웅주의와 결합하는 순간 파시즘적(혹은 원익씨의 용어를 빌리자면 "원-파시즘")인 체제가 탄생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2차대전 직전의 독일과 이탈리아가 그렇고, 스탈린의 소비에트가 그렇고, 지금의 북한이 그렇지요.
현대사의 이러한 흐름을 보았을 때 “단지 정치적 다툼의 후방 지원에 불과한 오늘 날 한국 현대사 논쟁”은 “텅 빈 것”에 불과한 것을 넘어 오히려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잘 생각해보면 파시즘을 우리 정치의 한복판으로 소환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생활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일 수도 있지요. 2009-12-08
09:53:08
김예찬
그래서 더욱 한국현대사에서 '민중', 혹은 '대중'의 성격이 어떠했는가 규명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실 6월 항쟁만 하더라도 정말 다양한 성격의 민중 - 시민 들이 참여했지요. 보통 야당/중산층/자유주의/민주개혁/시민 세력과 재야/노동/제헌/ㅈ파 등등으로 이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안에서도 또 어떤 분화가 있었고, 거리에 나선 대중들의 어떤 방향이었는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구요.. 2009-12-08
10:36:15
김소망
예 맞습니다. 각 이데올로기들이 지향했던, 그들이 자신들의 현현(顯現)에 있어 그 재료로 삼았던 개념(정치적인 실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애매모호하므로)인 민중이라는 개념에 대한 연구가 보다 미분화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미분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선성을 뛰어 넘어야 하겠지요. 그 작업은 고체성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액체성, 혹은 기체성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09-12-08
15:54:15
병장 정택민
한국 현대사는 저에게 너무 어렵군요.. 사탐 11과목 중에서도 근현대사는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흐으.
장준하씨와 <사상계>('사상'이 '사상계 맞죠?) 에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나저나 스티븐슨(?)을 암살한 인물도 장준하 아닌가요? 2009-12-08
16:26:30
김소망
저의 희미한 기억력에 기대보자면, 스티븐슨을 암살한 인물은 장인환, 전명운(훈? 기억이 안나네요)일겁니다. 2009-12-08
16:29:06
김예찬
가끔 몇몇 ㅈ파 이론가들은 대중의 성격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확인은 안해봤지만 제 생각에 <사상>과 <사상계>는 동일 잡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시기가 좀 다른 것 같구요.. 사실상 기관지였던 <사상>이 폐간되고, 민간 잡지로 바꾸면서 이름을 이어 받은게 <사상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스티븐슨 암살범은 장인환 전명운이 맞구요. 사실 전명운이 직접 죽이진 않았고, 총알이 안나가서 그냥 스티븐슨을 구타하다가 장인환의 총에 맞아서 부상당했죠 (...) 2009-12-08
17:04:15
홍명교
잘 읽었습니다. 전혀 몰랐던 걸 또 알게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