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간 부로 전 병력은 기상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방송시설이 노후한 탓일까, 귓가를 간지럽히는 미약한 방송소리에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연습을 수 백 번이고 반복해와서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오늘 아침은 힘겹기만 하다. 일으킨 상체가 너무 무거워 나는 앞의 관물대에 ‘툭’하고 고개를 기댔다. 이제는 나름대로 계급도 오를만큼 올라서 약간 늑장을 부리는 정도는 용서될 터이다. 멍하게 뜬 시야의 하이바와 탄띠의 영상이 점차 흐릿해져 가는 찰나 방송은 다시 울렸다.

“전 병력은 제설도구 지참하여 행정반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응? 제설도구?
나는 잠 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TV 뒤에 큼지막하니 달려 있는 하얀색 창 너머는 새벽 특유의 어슴프레함은 커녕 완전한 어둠에 잠겨있었고, 그 흑의 공간을 반딧불처럼 눈 송이들이 이리저리 노닐고 있었다. 문득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아직 새벽 2시다. 젠장-.

“아. 제길 -. 왜 눈은 내리고 지X이야. 내릴 거면 평일에나 내리던가. ”

옆에서 동기 인우가 입을 펠리컨처럼 죽 내민 채 투덜거리며 메트리스를 밀어 넣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휴일이었구나. 어제 대충 생각해놨던 휴일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활동복에 밀어 넣었다. 이등병들은 이미 제설도구를 챙긴답시고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전투화를 신기로 했다. 어차피 활동화로는 눈을 치우다가 전부 젖어버리고 말 것이다. 활동복에 전투화를 신어도 돼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 상병 4호봉이다. 그 정도 짬밥은 된거겠지?

“뭐야? 준상아. 전투화 신으려고?”

옆에서 신일우 병장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더니 말했다. 약간 움찔했지만 말투에서는 그다지 악의나 책망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그냥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예. 어차피 눈 치우는 데, 활동화는 다 젖어 버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많이오나? 야. 바깥에 눈 많이오냐?”

신일우 병장이 바깥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지르자, 곧 “예. 많이옵니다!”라고 대답이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도 신어야겠다.”
“그게 좋으실 겁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전투화를 잽싸게 신고 스키파카와 작업용 전투모를 눌러쓴 후 바깥으로 나왔다. 이미 일,이등병들은 저마다 작업도구를 준비한 채 2열 종대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참 부지런하다. 나도 한때는 저랬었지. 눈은 기상했을 때보다 더 많이 내리고 있다. 한참을 서있었는지 다들 옷이 상당히 젖어있다. 감기 걸릴텐데. 눈살을 찌푸렸다.

“야. 다들 챙겼냐?”
“예!”
“합판은 몇 개나 챙겼어? 충분히 챙겼지?”
“5개입니다. 있는 게 그거 밖에 없어서..”

어느새 나온 인우가 담배를 꼬나물며 일, 이등병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야. 아무나 1소대 가서 합판 2개만 더 빌려달라고 해. 저번에 그쪽에서 우리 합판 부셔
먹은 거 있으니까. 달라고 하면 줄 거다”
“예! ”

이등병 두 명이 부리나케 뛰어갔다. 인우는 라이터가 없는 지 호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졌다. 

“준상아. 라이터 없냐?”
“여기”
“너는 왜 담배도 안 피우는게 라이터는 맨날 들고다니냐”
“빌려 태우는 주제에 말이 많네”
“쌩큐”

라이터를 던져주자 인우는 냉큼 라이터를 받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 뿜어져 나온 하얀 연기는 이내 잔상처럼 흐릿해졌다. 눈은 더욱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이등병 두 명이 큼지막한 합판 두 개를 낑낑대며 들고 왔다. 인우가 침을 탁 내뱉었다. 

“이런 씨X. 눈이 그쳐야 쓸던 말던 하지. 쓸어봐야 아무 소용없잖아?”
“당직사령 명령이라던데?”
“젠장. 사단장님한테 잘 보이려고 별…”
“야야. 당직사관 나왔다.”
“쳇-“

인우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병장들도 우루루 몰려나와 있었다. 얼굴에 다들 짜증이 가득하다. 책임 분대장인 신일우 병장은 당직사관에 가서 이것저것 전파사항을 전해 듣고 있었다. 당직사관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더니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우. X발. X같아서.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 데 무슨 제설작전이야?”
“뭐래?”

병장들이 신일우 병장 주변으로 달라 붙었다. 신일우 병장은 잔뜩 골이 난 듯 침을 탁 뱉었다.

“본청 주변을 다 쓸란다.”
“전부? 미친거 아냐?”
“아 짜증나. 가는 길만 쓸면 되지. 이렇게 눈이 오는 데 아~ 승질나네.”
“왜? 당직사령 지시래?”
“그렇단다. 자기도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데.
야. 다들 가자.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
“아~ 역시 전역 만이 살길이다. 너 몇 일 남았냐?”
“한 90일?”
“오. 좋겠다. 난 아직도 세자리야…”

병장들이 시끌시끌 몰려가자 상병 1도 김재룡 상병이 나머지 소대원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눈은 상당히 많이 쌓여서 뽀드득 뽀드득하는 소리 대신 푹푹하고 발이 파고드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벌써 많이 쌓였는데…”
“엄청 빡세겠구만. 한 두 시간으로 될려나? 이게?”

본청 주변은 띄엄띄엄 놓여져 있는 차를 제외하면 온통 새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라이트를 이리저리 비추자 눈은 시퍼렇게 불빛을 반사해냈다. 

“빨리 빨리 해버리자. 재룡아. 애들 지휘해라. 난 사무실 들어가 있을 란다”
“예. 다 되면 부르겠습니다”
“당직사관 오면 화장실 갔다고 적당히 둘러대”
“걱정마시고 얼른 가십쇼”
“그래. 수고들 해”

신일우 병장을 위시한 병장들은 뒤 돌아 보는 일 없이 제각기 사무실로 뿔뿔히 흩어졌다. 

“시작하자. 인우 네가 애들 절반 정도 대리고 합판으로 눈 쓸어내고, 준상이가 나머지 애들 데리고 따라붙으면서 빗자루 질 해라.”
“예. 어차피 아스팔트라 치우기 쉬워서 금방 끝날겁니다. ”
“그래. 그나마 다행인게 슬슬 눈이 그치는데”

김재룡 병장의 말에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시커먼 하늘에서 퐁퐁 내려오는 눈발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30분 정도면 다 그쳐줄 것 같다. 

“자자! 얘들아 시작하자! 합판 하나당 두 명씩 들고 따라 붙어!”
“옙!”

인우가 애들을 이끌고 합판으로 눈을 밀어 내기 시작했다. 다른 부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사령부에 있는 탓에 바닥이 전부 아스팔트다. 게다가 차가 많이들 왔다갔다 해서, 안치우면 금새 타이어가 눈을 짓밟고 지나가 눌러 붙어 버리곤 한다. 모랫바닥이면 그저 흩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아스팔트면 어지간해서는 치울 수가 없다. 그 상태로 얼어버리면 최악이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도 않은 병력으로는 온 종일 작업해도 그다지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뒤에 애들을 학익진처럼 길게 늘어뜨린 후 인우들이 남긴 눈 부스러기들을 쓱싹 옆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제설작전은 쉽다. 눌러붙기 전에 아스팔트 위에 살포시 앉아있는 눈 가루들을 합판으로 확 밀어붙인 후 빗자루가 따라붙으며 옆으로 밀고 밀어내 배수로로 털어내면 그만이다. 면적은 상당히 넓지만, 합판을 대고 일제히 달리면 눈이 좍 쓸려버리니 말이다. 그건 나름대로 즐거운 작업이다. 이렇게 자다 깨워서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일,이등병들은 달리기 시합을 하는지 저네들끼리 신나라하면서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힘도 좋아-. 나는 하품을 하면서 빗자루를 놀렸다.

인우가 합판으로 눈을 대충 쓸어내고 나면, 내가 세세하게 마무리를 짓는 패턴으로 30분 정도를 작업하자 본청 주변의 눈의 절반 가량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제 눈은 거의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애들을 잠시 쉬게 해주고 나와 인우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인우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몸을 움직일 때는 몰랐는데, 땀이 점차 식자 겨울의 냉기가 몸을 파고들어 나는 부르르 떨었다. 

“30분만 하면 더 끝나겠다.”
“아. 젠장. 옷이 다 젖었어. 뜨거운 물 나오려나? 샤워하고 자야겠는데..”
“지금 시간이 몇신데.. 7시나 되어야 나오려나?”
“아. 짜증나. 병장 색히들은 다 짱 박혀가지고..”

인우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너도 병장 되면 짱 박힐 거잖아.”
“아니지. 이번 겨울이 마지막이니까. 병장의 겨울은 없다”
“그럼 제초 작업은?”
“짱 박혀야지.”
“그럼 똑같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지금은 고생하고 있으니까”
“너희들 뭐냐?”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인우와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당직사령이었다.
반사적으로 경례를 했다.

“충성! 본부대입니다. 제설작전 중인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설작전? 누가 시켰어?”

나와 인우는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분명 당직사관 말로는 당직사령이 시켰다고…
일단 나는 들은 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아. 그게. 당직사관이 시켰습니다.”
“너희 몇 시부터 작업했어?”

손목시계를 보니 3시가 살짝 넘어가고 있었다. 

“2시에 기상해서 바로 내려왔습니다.”
“2시? 그땐 아직 눈 엄청 내리고 있었잖아?”
“예. 그렇습니다.”

당직사령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본청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이거 다하려면 얼마나 더 걸리나?”
“30분 정도면 다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마무리 짓고 올라가도록. 당직사관한테는 내가 말해서 취침시간을 늘려
주도록 조치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충성!”

당직사령은 이내 지통실로 모습을 감추었다.

인우는 얼굴을 찡그린채 다 타버린 담배를 손으로 튕겼다. 갈색의 담뱃재가 수북히 쌓인 하얀 눈 위에 점점이 흩어졌다.

“뭐야. 당직사관 말로는 당직사령이 시켰다고 했잖아?”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아 몰라.몰라. 그냥 빨리 끝내고 올라가버리고 자자. 생각할수록 잠만 더 깬다.”
“그래. 얘들아. 빨리 끝내고 올라가자.”

다시금 시작된 작업은 페이스를 올린 탓에 30분도 채 지나기 전에 눈을 완전히 소거할 수 있었다. 합판을 들고 이리저리 달렸더니 런닝이 땀으로 후줄근 해졌다.

“젠장. 나도 다 젖었다”
“합판이 은근히 빡세다니까.”
“으. 기분 나빠”
“수고했어”

이것저것 작업 마무리를 지시하던 김재룡 상병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아. 수고하셨슴다. 슬슬 올라가지 말입니다. 이 정도면 훌륭한데”
“어. 그렇지 않아도 애들 시켜서 병장들 빼내오라고 했어. 
보나마나 쳐 자고 있겠지.” 
“에~이. 어차피 김재룡 상병님도 얼마나 남으셨다고.. 10일도 안 남았지 않슴니까?”
“뭐. 그렇지. 그래도 난 짱 박히지는 않을 란다. 옆에서 구경만 하더라도”
“오오. 근데 쉽지 않을겁니다. 전 지금도 빡센데”
“너는 지금부터 짱 박힐 생각하니까 그렇지.”
“그런가? 으헤헤헤.”

셋이서 낄낄거리고 있자니 병장들이 이내 터덜터덜 잠이 덜 깬 얼굴로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신일우 병장 역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눈을 거의 맞지 않아 옷이 뽀송뽀송하다. 고개를 돌려 막내를 보았다. 주황색 활동복이 눈에 흠뻑 젖어서 선홍색에 가까워 보인다. 

“으하~암. 다 했냐?”
“예.”
“가자. 그럼”
“당직사관님한테 보고 안 해도 되겠습니까?”
“보고는 무슨. 어차피 자고 있을게 뻔한데. 가자”
“아. 아까 당직사령님이 저희 작업하는 거 보시더니, 취침시간 연장해 준답니다.”
“오. 굳 잡. 얼마나 연장해줄려나.”
“1시간은 더 주지 않겠습니까?”
“하는 김에 점호도 하지마라. 야. 가자!”

병장들이 낄낄대며 올라가자 우리는 다시 일,이등병들을 인솔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설작업으로 몸이 다들 흠뻑 젖어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올라가자마자 애들 씻겨야 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물이 나오겠습니까?”
“당직사관이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보일러병을 시켰겠지. 고생했는데.”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본부대로 복귀하고 나니 병장들은 이미 내무실에 전부 들어가 있었고, 신일우 병장이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터덜터덜 올라오는 우리를 보고선 텅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다들 여기 줄 서 있어. 보고하고 올 테니까”
“예”
“아. 귀찮아. 제발 자고 있어라”

투덜투덜 거리며 신일우 병장은 행정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금방 끝나겠지 싶었다. 새벽에 전 병력이 내려가서 작업을 하고 복귀하는 길이다. 벌써 4시에 근접하고 있었다. 하~암 나도 모르게 하품이 새어나왔다. 

“아. 젠장. 왜 이리 안나와. 애들 다 감기 걸리겠네”
“그러게. 아 추워. 졸려. 배고파.”
“넌 거지냐?”
“이 꼴이 거지꼴이지 별거 있나”

이내 행정반 문이 열리고 신일우 병장이 나왔다.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었는지 얼굴이 온통 구겨져 있다. 짱 박혀 있던 거 걸렸나?

“아 젠장. 야. 재룡아. 애들 데리고 들어가라.”
“예”

나와 인우도 몸을 돌려 들어가려는데, 신일우 병장이 붙잡았다.

“준상, 인우 너희는 남아라”
“?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씨X. 너희 때문에 나만 조낸 욕 먹었잖아. 너희가 당직사령한테 그랬다메? 당직사관이 
작업 시킨거라고. 엉?”

신경질을 벅벅 내는 신일우 병장을 보며 나와 인우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예. 당직사령이 나와서 이거 누가 시킨거냐고 물어보기에 그냥 대답했을 뿐입니다.”
“이런 씨X. 당직사령이 그렇게 나오면 당직사관이 무단으로 시킨걸 눈치 까고, 적당히 
둘러대야지. 짬밥은 뒷구멍으로 먹었냐? 생각이 없어요. 생각이. 어휴. 씨X 
덕분에 나만 욕 다 들어 먹었잖아”
“…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슴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숙였다. 상대하기도 귀찮다. 인우도 졸린 지 적당히 고개를 숙였다. 신일우 병장도 귀찮았는지 대충 손을 내 저었다.

“야. 됐다. 가서 잠이나 자자. 어우. 취침시간만 날렸네. 에이”

애꿎은 눈더미를 발로 차 날리며 송일우 병장은 내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인우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무실에서 쳐자고선 말은 잘 하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 새벽의 싸늘한 공기로 하얀 입김이 휘날렸다. 



“인우야”
“왜.”
“담배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