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제도와 운동의 이율배반 혹은 조잡한 이분법  
병장 박원익  [Homepage]  2009-10-05 00:30:58, 조회: 68, 추천:0 

  이율배반이라는 논리적 관계범주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모순'이라는 형식논리적 관계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순을 이루는 두 항은 반드시 둘 중 하나만이 참이 되는 반면, 이율배반은 양쪽 다 거짓이거나, 양쪽 다 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지요. 가령 세계에는 끝이 있다, 없다/자연에는 자연을 형성한 목적이 있다, 없다/모든 것은 인과법칙에 의해 사전에 미리 결정된다, 인과법칙에서 자유로운 행위를 시작할 여지가 있다 등등. 단지 양자택일만을 허용하는 불모적인 모순율과 달리, 이렇듯 이율배반의 항은 보다 흥미로운 첨예한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문제를 이율배반으로서 포착한다는 것은, 일견 모순된 선택지를 이면에서 구성하는 근본적인 사고지평을 묻는 과정의 시작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지금까지 정치의 가장 주요한 이율배반은 '자율(자치)'과 '권위(권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저는 "권위를 자치의 수준에서 실현시키는 것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지금껏 사고해 왔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범용한 종언의 담론에서는 '삶'과 '대의'의 이율배반이 얽혀들어가 있었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망각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삶의 수준에서 제시될 수 없는 대의가, 상위의 레벨에서 재현될 때 바로 그 대의가 종언을 고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종언담론에서 다양한 연산이 도출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게슴츠레님이 염두에 두고 있던 이율배반은 제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과 사뭇 다릅니다. 어쩌면 게슴츠레님과 김예찬님 그리고 홍명교님은 저와 다른 이율배반의 지평에서 사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 번의 '논쟁 아닌 논쟁'이 모종의 근본적인 오해 내지는 간극에서 촉발되지 않았나 하는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요. 그러니까 서로 다른 지평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헛발질을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글을 통해 이러한 곤란함을 보다 더 잘 자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게슴츠레-김예찬님에게 만일 이 글에 호응한다면, 그것의 성패 여부는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각자가 파악하는 정치적 이율배반 위상을 어떻게 맞춰갈 수 있는지에 걸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거칠게 말해 '운동'과 '제도(대의-재현장치)'가 이율배반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환언하자면 이것은 대의되지 못하는 '몫 없는 자들'과 '국가'라는 두 항이 이율배반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온당한 정식화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해방적 투쟁들 또는 운동들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제도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라는 이중구속을 맴돕니다. 극단적 폭력과 합의라는 쌍둥이 적들로부터 정치를 방어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적 정치를 옹호하는 문제 혹은 제도적 틀걸이 안에서 능동적 시민권을 재창조하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국가라는 재현장치에 포착되지 않는 해방적 운동이 여전히 제도적 장치를 통해 스스로를 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맴돌고 있습니다. 게슴츠레님은 이러한 문제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이 둘 사이의 '절충'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로서는 절충이 아니고서야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말하자면 "틀걸이 안에서 능동적 시민권을 재창조하는 문제"는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든지 유시민씨 등속의 인물들에 의해 충분히 언급된 문제이며, 저는 이러한 문제가 그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민주주의를 사고해야한다면서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민권과 제도라는 양극의 긴장을 생산적으로 바라보자고 말한다면, 저는 가차 없이 이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거나 다름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곤란함은 그대로 바디우나 고진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드러나는데, 제가 봤을 때 이 글에서 고진과 바디우는 다소 '발리바르-화化'된 뉘앙스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게슴츠레님이 매우 정당하게 언급하듯 발리바르에게 '제도'와 '운동' 간의 관계가 문제라고 할 때, 마치 고진과 바디우가 동일한 문제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디우와 고진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이 둘이 발리바르와 두는 거리는 그만큼 넓고 깊다고 해야할 겁니다. 과연 바디우는 게슴츠레님이 언급했듯이, 모든 존재론적인 상황은 그것을 재현하는 상위의 차원을 지닐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며 국가의 심급을 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국가를 궁극적으로 정치적 오류의 장소로 격하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디우는 자신의 존재론을 결코 발리바르처럼 운동과 제도라는 조야한 이분법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운동'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또 다른 심급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점이 이해되고 있지 않습니다. 게슴츠레님이 바디우의 철학이 존재론과 동시에 사건의 철학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정당하게 지적했지만(이는 제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죠), 여기서 사건의 차원이 단순히 돌발적인 것으로만 인식되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진리-사건의 장소는 또한 상황 속에서 재현될 수 없는 존재론적인 부분을 또 다른 형태로 현시present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부분을 재현re-present하는 것과도 또 다르지만, 그러한 현시는 동시에 존재 그 자체와도 다릅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구조가 엄연히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상-재현되는 장소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진리-사건의 장소 역시 '제도적'인 부분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디우에게서 무시되고 있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는 고진 역시 발리바르 식 이분법을 넘어선 지점에서 독자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차 말하는 이야기이지만, 고진이 말하는 어소시에이션 역시 '제도'로서 사고되어야 합니다. 그가 어소시에이션을 단순히 대중의 풀뿌리 자치조직 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건, 세계공화국으로를 봐도, 트랜스크리틱을 봐도, 네이션과 미학을 봐도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진이 '제도'적 요소를 포용했다고 말하는 게슴츠레님의 생각은 옳습니다만, 이는 반쯤만 옳은 이야기이지요. 왜냐하면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은 정확히 말해서, 과거의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염두에 두었던 권위와 자율의 이율배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발리바르의 쟁점과 사뭇 다른 지평에 놓여 있습니다. 예컨대, '자율'을 이야기하더라도 프루동과 같은 아나키스트에게나 고진에게나 거기에는 이미 선험적으로 제도적인 요소가 선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민중의 자발적인 풀뿌리 운동과 이를 재현하는 상위의 조직, 기구, 제도 등속이 결코 이들의 사고 속에서 근본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0-13
10:10:12 

 

병장 김예찬 
  저번에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저도 원익님이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알랭바디우 입문 글에서 제가 의문을 품었던 것도 이러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건'을 선언한다는 것은 결국 예언적인 것(도래할 '사건'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기 마련인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무엇을 캐치하고 그 것을 어떻게 '사건'으로 정식화해나가냐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