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정치의 종언과 자크 랑시에르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3-10 05:15:13, 조회: 348,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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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는, 그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 수록된 논문들 중 하나에서, 오늘날 판을 치는 <정치의 종언> 담론들에 대한 분석을 행한 바 있다. 이 논문의 서두(주1)는, 종언의 담론이 어떤 특유의 '약속'과 '시간에 대한 사용'의 변화에 기초해 있는가를 보여준다. 본래 어떠한 정치적 담론이든 나름의 새 시대상에 대한 '약속'과 그러한 시대를 불러오는 단절적 사건에 대한 수행적Performative 믿음을 가지는 법이다. 이때 기존의 정치적 급진주의와 결부된 혁명적 공포Terrorism는, 바로 이러한 '약속'에 기초한 채 자신들이 가져온 어떤 무분별성과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 낡은 정치 자체와 단절하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종말론적 약속의 비전이나 시간에 대한 특유의 단절적 해석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여기에 역사적 시간관에 대한 일종의 패러다임 변환이 개입한다. 과거에 '진보'란, 특히나 정치적인 의미에서 '급진적인 단절'의 가능성과 이로 인해 새로운 다가오는 시대에의 '약속'에 의지했다면, 오늘날에야 그것은 기존의 물질적-신체적-정보론적 교환의 영역을 외연적으로 확장하고, 모든 사회적 불투명성의 장막이 걷혀진, 합리적으로 구조조정된 경제적 편제가 야기하는 성장의 자연적 리듬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이때 미래는 단순히 현재라는 동질적인 소재에 기입된 확장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프랑스의 사로코지나 X국의 이XX이 당선될 때 내 걸었던, '젊고 역동적인' 종언의 담론의 비전이자 시대상이다. 그들과 더불어 기존의 '정치'란 막 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 <종언>의 담론이 지극히 양가적이며 동시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당선 이후에도 드러나듯이, 이러한 '사물의 경영'으로 드러나는 젊고 역동적인 정치는 새로운 정치적 적대Antagonism와 쉽게 마주치지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이면의 <정치의 종언>을 불러온다. 그것은 다시 옛 정치적 의고宜古주의로의 변화이다. 다시, 젊은 능력을 앞세운, 사회적 신진대사를 가장 잘 촉신시킬 줄 아는 정력적 행정능력은, 그것이 예기치 못하게 마주친, 그러나 이미 그러한 젊음 속에서 예견된 타자the others에 대한 순수한 증오와 퇴행적인 이해관계의 고착화라는 한계, 사회 자체의 결집력의 붕괴가능성이라는 정치적 '심연'에 마주친다. 결국 사회는 이 심연의 가장자리를 조직화하고, 무의미한 소음 속에서 의미를 인지해낼 수 있는, 권력 이전의 상징적 '권위'를 희구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의 종언>의 둘째 판본이다. 그러나 이는 이전만큼이나 새롭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그 기원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훌륭한 정치란 민주주의에 내속적인 대중의 소란과 분열적 정념들을 가라앉히고 일관성을 부여하는 통치자의 통치기술에 있다고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게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대적 맥락으로 재독해하는 랑시에르의 전략은, 그 <종언>이 아무리 신선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수사로 치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종언>은 어떤 판본이든, 결국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그것이 모종의 '반복-가능성'과 동일한 한계지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데 있다. 우리는 화려하게 지난 대선무대에 등장한 '정치의 종언'의 수사가 다시 동일한 의고주의적 회귀로 귀착되는 모습을, '촛X정국'을 거친 정X의 모습과 이후의 고 김XX 추기경에 대한 추모 열풍 속에서 새삼 재확인하게 된다.

  왜 이런 난국인가? 왜 새로운 종언은 동시에 이미 환원불가능하게 옛 것에 속해 있는 정치의 종언으로, 이렇듯 필연적으로 '이중화'하는가? 랑시에르는 이 물음에 대해 정확히 '비평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그는 <정치의 종언>의 담론이 생성되고 퇴락하는 역동적 과정 속에 원리적인 것을 발견한다. '종언'의 담론이 이처럼 자신의 한계 앞에서, 끊임없이 재갱신되어야하는 역사적 필연성 속에서, 역으로 우리는 어떤 '정치의 종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정치를 출현시키는 어떤 공동체의 현사실성-즉 잡다한 무리들이 분리될 수 없을만치 한데 섞여 공동현존하는 순수 다수성多數性-과, 이를 다시 상징적 틀구조로 재배가하는 치안적 개입 내지는 이들을 일정한 부분들로 셈하는 원리 사이에 필연적인 '틈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틈새는 환원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환원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존재론적'이고 다시 말해 일정한 사회과학적 지식과 무관한 필연성을 담지하기에, 이것이 작동시키는 사회적 불화不和는 영속적인 것이다. 이 불화는 다시, 사회의 기능과 자리를 분배하는 일정한 치안질서Police가, 본래적인 공통적 감수성을 훼손했다는 정치적 고발과 더불어, 이를 교정하는 대안적인 감성적 짜임의 재창안, 그리고 이와 맞물린 새로운 정체성들에 대한 동일시의 발명과 분배의 언어적-문학적 실천들을 작동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정치화' 과정의 영속성과 동시에, '주체화' 가능성의 영속성을 보증한다. 이것은 기타 정치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종언>의 담론을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알려준다. 

  그러나 랑시에르에 대한 아주 상식적인 반론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랑시에르가, 공통적 계쟁係爭의 공간을 구성하는, 다시금 정치적 과정과 주체화를 활성화시킬 바로 그 '사회적 틈새'의 필연성이, 모든 형태의 (종언의) 담론의 가능지평 상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원리적 사실을 보여주고 논증하는 모든 노선에 대한, 매우 소박하고도 소시민적인 반응이다. 이것은 예컨대, '사회적 틈새가 환원불가능하다면 왜, 오히려 단순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강력한 총체적 치안질서를 인위적으로라도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그것을 막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말인가?' 혹은 오늘날 신보수주의자들의 희생자-담론스러운 수사대로라면, '정치의 과잉이 가하는 고통과 불의에 대한 선량한 불평들을 가로막기라도 해야한다는 원칙이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권리로부터 박탈당했는가?'라는 반문들을 추가할 수 있다. 모든 엄밀한 이론적 숙고들은 바로 이러한 단순한 소시민적 제스처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문제적인 상황'을 구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뻔뻔스러운 반문들은, <종언>의 기저에 놓여 있는 일종의 공통감각Common sense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계급투X>과 <프롤레XX아>라는 고전적 정치적 주체성의 범주를 재전유하는 랑시에르만의 방식들을 고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기존에 논의되었던 실정적 사회학적 범주로서 '계급'Class로 생각되던 것이나, 사회 내의 물리적Physical 관계성로서 사고되는 계급적 관계와 무관한 방식으로 사유되어야만 한다. 이것들은 오히려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원리적인'Prescriptive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마X크X의 사유를 배반하지는 않는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러한 고전적 범주[계급투X,X동계급,프롤레XX아]에서 이보다 더욱 고전적인 모티브, 수학-존재론적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이러한 원리적 사고의 단초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프롤레XX아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한정된 역사적- 상황을 이루는 순수 다수성Multiplicity의 수학적-보편적 집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집합적 주체성은 그것이 속한 특유한 상황의 보편성을 체현한다. 왜인가? 일단 수학적 의미에서 '집합'Set은 그 원소들이 구성하는 특정한 사물의 모임의 질서나 사회적 관계 내지는 집단과 다르다. 단순한 사물의 모임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일정한 관계성Liaison을 함축하며, 부분들의 단위와 이들 간의 상하위계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특정한 짜임Plot과 배치를 지닌다. 그러나 수학적 집합의 질서는 동일한 모임을 구성하는 이 부분들을 순수한 공동현존의 보편적-이성적 질서 속으로 해소시킨다. 관계성을 결여한 집합은 어떠한 사회적 상태나 집단의 부분조차도 아니며, 이 집합의 원소原所들은 원소의 정의상 어떤 사회의 유기적 부분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 이렇듯 특유한 국면의 짜임을 초과하는 수학적-추상적 집합력은, 바로 그 사회적 국면에 공통적인, 순수 논리적인 공동현존의 양식을 가장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바디우는 프롤레XX아가 지닌 특권적 위상의 심원한 이론적 근거를 칸토르의 현대수학적 집합론에서 발견한다. 이것은 사실상 마X크X의 통찰에 대한 재해석이기는커녕 그것과의 완전한 '일치'이다. 다시, '그것'이 특권적인 집단적 주체성인 이유는, 그것이 가장 빈곤하고 비참한 계급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존재가 그것을 포함하는 상황의 질서--곧 자본주의적 질서--자체의 '살아있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질서 내의 'X동계급'은 어떠한 안정된 사회적 부분들 중 하나로, 자본주의적 경제를 지탱하는 국가장치들의 구성요소들로서 온전히, '셈'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다른 '셈'의 질서를 예고하는 하나의 집합의 구조이다. 그런데 어떤 부분의 부분도 아닌 이러한 계급적-혁명적 집합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결코 실정적인 사회적 질서로 '이항'되거나 '번역'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그 사회를 횡단하는 돌발적 <사건>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주2) 이러한 해방적 '순간'은 기존의 사회적 나눔을 철폐하고 더 경직된 무언가로 필연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존의 사회적인 부분들 간의 '나눔'이 단순히 그 유의미성과 '요점'을 상실하기 시작하는 강렬한 순간이다. 이는, 가령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보편주의적 언표가, 결코 이들 간의 차이의 나눔을 도착적으로 부인하고 억압과 무관해지는 기적적인 은총恩寵의 지점에서 전형적인 사례를 얻는다. 요컨대 이것이 랑시에르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주3)를 사고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동시에 그가 <연대>와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평등은 모든 부분의 질서로의 나눔 이전의 존재론적 다수성에 대한 이론적-원리적 참조를 내포하지만 동시에, 이는 아직 어떤 부분조차 아닌 존재자에 대한 횡적 연대를 통해서, 아직 소음에 불과한 것으로 들리고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일정한 언어와 가시적 몸통을 부여하는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서만, 기존의 계급투쟁과 프롤레티라이라는 기표는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러한 정치-주체성의 보편적 작인(이것의 또 다른 명칭인 프롤XXX아, 어떤 부분의 부분도 아닌 한에서 보편성을 체현하는 계급적-집합)이, 그것에 나름 이론적인-원리적인 근거가 있다는 게 해명되더라도, 여전히 문제되는 것은, 이러한 근거를 활성화되게 하는 어떤 조건이 있느냐이다. 랑시에르에게 이 조건이 어떤 자명성으로 남아 있다. 물론 랑시에르가 매번 소묘한 정치적 주체성의 가능조건 자체를 과잉결정하는 특유의 상황적 조건들에 대해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 관한 그는 누구보다 빼어나게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유럽인들이 아니라 랑시에르를 수용하는 우리와 같은 '비유럽인'들의 포지션을 문제삼는 것이다. 요컨대 랑시에르가 특권화한 어떤 횡단을 감행하는 시도들에는, 그것을 담지하는 특유의 주체성에는, 분명히 하나의 조건이 있다. 예를 들어, 우선 바디우가 이야기하듯, 이는 칸토르를 '위시한' 서구 근대적인 수학적-합리성의 사유의 토양이 없다면, 원리적인 투쟁적 주체성은 애초에 '사고될 수 조차 없다.' 이 점에서 철학계의 인기 있는 블록보스터 급 좌파-사상가들이 가진 <유럽중심주의적>Euro-centric 자부심에는 일정한 요점이 있는 것이다.(주4) 말하자면 평등주의적 정치적 변혁들의 혁명적 근원에는, 유럽문명적 유산이라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 이는, 다시, 어떤 '약속' 내지는 '시간의 사용'과 관계되는, 말하자면 이러한 사용에 대한 '믿음'에 참여하고 서약하고 명명하는, 책임의 수행적Performative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로고스Logos의 기원에는, 바로 이러한 로고스를 떠받치며 이 질서 자체에 폭력적으로 연루되는, 반성적 결단들의, 반복 가능한 수행적 구조가 있다. 이러한, 해방과 평등자유Ega-liberty의 현실적 실현을 관철시킨, 결정적인 매 국면마다 유럽문명 자체의 유산으로 계승되어 온, '폭력성'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사고한 사상가는 놀랍게도 해체주의자, 자크 데리다이다. 요컨대, 이러한 정치적 로고스Logos를 떠받치는 '폭력' 없이는 평등자유도 해방도 프랑스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약속'과 고유한 '시간의 사용', 이와 맞물린, 도래할 해방적 전망에의 역사적 개방은, 그것이 어떤 실정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에 연루되기 이전의, 근본적인 연루되기의 결단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결단은 결코 주체 자신의 심정적 결단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개개의 결단을 초과하는 한에서의 하나의 역사적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문명'의 조건이다. 이것이 담보하는, 정치적-학문적-사상적 토대의 반복 가능성이 없다면, 이 토대를 재해석하고 전복하는 어떠한 해체Destruction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왜냐하면 정의상 악무한의 지평으로 개방된 것으로 보이는, 해체조차도, 바로 토대를 재해석하고 전복하는 방식으로 반복 가능한 기원적 '토대'에, 한정된 방식으로 참여하고 연루됨의 구조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해체는 토대의 보존에 대한 책임을 고지하는 일련의 유산Hertitage에 대한 책임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주4) 그런데 애초에 랑시에르가 대결했던, <정치의 종언>은 바로 이 유산 앞에서의 책임 자체의 용도폐기가 아닌가?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유럽인들인 우리에게 이러한 유산을 애초에 가지고 있느냐이며,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창안하느냐의 문제이다. 요컨대 자크 랑시에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또한 랑시에르 본인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랑시에르는, 어떠한 사회적 분할과 이에 결부된 감성적 틀이란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무한한 방식으로, 이를 문제시할 수 있다는 통찰에 근거해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한낱 자기능력에의 반성적 예감에 불과하다. 이것은 가령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지극히 협소한 영역(취미판단)으로 회수된다. 하지만 칸트 본인의 비판적 통찰은 다음에 기초한다: 어떤 실천/인식능력의 한낱 주관적인 자기음미를 넘어서, 이를 '정말로' 실행하느냐의 여부는, 단순한 의지력에 달려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실제로 적법하고 올바르게 사용되었는지 어쨌는지는 개별 주관으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칸트의 실천이성적 비판의 요점이 있다. "부조리로 전락할 수 있음을 감수하고서도, 어떠한 정치적-과학적-미학적 프로그램을 과감히 수행하는 능력은 어떤 '이상'Idealism 없이는 불가능하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규제적 이념'이다. <정치의 종언>은 바로 이 이념이 종말했음을,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 더 이상 무효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말하자면, 랑시에르와 더불어 이에 대한 팬덤들은 이 '문제', 지극히 심각한 하나의 문제를 우회한다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는 이 '이념'을 일정한 '공포정치'를 통해서만 부활시킬 수 있다는 데 전적으로 내기를 걸고픈 욕망을 느낀다. 

(주1) 정치적 종언의 현실주의 유토피아
(주2) 피터 홀워드, A subject faithful to truth
(주3) 자크 랑시에르에게 있어, 이 둘은 분석적 구조에서 분리불가능한 범주들이다.
(주4) 이 유럽 중심주의에 관해서, 슬라보예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무엇보다 9.11 테러에 관한 자크 데리다와 하버마스의 대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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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4:06 

 

병장 김무준 
  아래 명교님과 의견이 비슷합니다. 사실 정치적 문제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동안 침묵해왔던 것도 있지만, 이곳이 철저한 의식화교육이 이루어지는 집단임을 미루어 볼 때. 다소 왼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보여서 말입니다. 정치의 정政자도 모르고 철학도 도통 모르기에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한국에 도입된 정치체계와 그 발전방향에 동양의 그것(딱히 대체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깽깽이가 해석한 것이 맞다면요. 

그러나 역사적으로 미루어봤을 때, 공포정치나 파시즘을 바탕으로 한 국가들이 결코 평화롭거나 아름다운 종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습니다. 국가의 종말이 어찌 아릅답겠냐마는. 

물론 일정한- 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원익님이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으렵니다. 더이상 정치적인 이야기를 꺼내면 깽깽이도 왼쪽에 치우친 다소 급진적인(깽깽이가 해석한 원익님의 사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될까 두려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재밌네요. 스릴 있기도 하고요. 근데 문제가 될까봐 가지로는 외치지 않으렵니다. 후에 시즌 투에 오시면 이런 논의를 나눌 굇수들이 뽈뽈거리고 돌아다닐 테니 정모, 혹은 시즌 투에 참여하시는 것도 상당히 괜찮을 것 같네요. 

뱀발. 단어선택의 오류가 있어서 다시 댓글을 답니다. 2009-03-10
12:26:19
  

 

상병 김예찬 
  얼핏 읽어도 자크 랑시에르, 가라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의 저서가 하나의 글에서 전개되는군요. '씬'에서 가장 Hot하지만, 사실 제대로 파고 들어가면서 읽은 사람은 그닥 없고 일종의 지적 취미 공동체 안에서 소모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드는 이 세 사람을 이정도까지 끌고 나가다니.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2009-03-10
13:24:27
 

 

병장 김무준 
  그러니까, 이런 텍스트를 해석하려면 텍스트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이나 이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대체 정치나 철학은 머리가 아파 뭔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예찬씨의 해석을 보고 위에서 해석한 것과 원익님이 말씀하시려는 부분이 조금 다른 것임을 알았습니다. 으어어어어어. 

깽깽이는 예찬씨에게 정치를, 민규씨에게 경제를 맡기고 파던 거나 계속 파야겠습니다. 아아. 쪽팔려라. (훌쩍) 2009-03-10
13:28:24
  

 

상병 김예찬 
  저도 그냥 오독誤讀의 한 케이스를 보였을 따름입니다.. 

무준씨가 기대하던 괴수가 드디어 나타났는데 부딪혀봐야죠. 껄껄. 제가 근시일내로 무준씨도 흥미로워할 떡밥을 던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익님이 좀 시간적 여유가 되신다면 좋겠는데.. 아쉽군요. 2009-03-10
13:32:14
 

 

병장 김무준 
  한동안 명예의 무덤에서 살다가 심경의 변화(?)가 있어 떡밥을 물려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이거 달려들려고 해도 홈그라운드가 아니라 영 그렇습니다. 정막장인지 곱창인지도 집에 간 모양이고, 킴민큐인지 김막창인지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 원익님을 포함해 여러 괴수들이 정글로 모여들고 있군요. 바야흐로 책마을 제 칠의 전성기? 무튼 지식인과 깽판 매니아들이 다들 퇴장한 상황에서 괴수들이 새로이 유입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어쨌거나. 매번 이런 텍스트를 접할 때 마다. 그동안 뭐했나 싶기도 하고, 자격지심이 팍팍 생성됩니다 그려. 근데 떡밥 던지셔도 아는 분야가 아니면 멍때리고 보고 있을 거야요. 2009-03-10
13:42:05
  

 

상병 이석재 
  ...저도 사실 자크 랑시에르라는 인물을 여기서 처음봅니다. 에휴, 일단 아직 따라갈려면 너무나 멀었네요. 꼭꼭 씹어먹어도 소화가 될까 말까인데..으헝헝. 2009-03-10
14:03:18
  

 

상병 김예찬 
  음, 무준님과 달리 전 <가지로>를 외치렵니다. 

<가지로>가 글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연장시키는지, 아니면 글을 하나의 유물과 화석으로 박제시키면서 글이 여러 사람에게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현재의 책마을 회원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책마을 회원들에게도 이 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싶구요. 그 때는 이 글에 대한 더 많은 문제 의식을 던질만한 사람들도 지금보다 더 많기를 원합니다. 

요새 생각하는 건데, 몇몇 글에 자주 등장하는 학자에게 그에 대한 전통적인 별명인 '프로메테우스'를 붙여서 대체해서 쓴다던가, 아니면 무언가 약자를 사용하던가 하는 등의 회피 스킬을 사용하면 좋겠군요. 물론 그렇지 않고 좀 더 에두른 표현을 쓰더라도 알아볼 사람은 알아보겠지만. 2009-03-10
17:03:33
 

 

병장 이우중 
  일단 저도 가지로부터 외치고, 아니 눈물부터 좀 닦고... 
참 부끄러워지는 무늬만 사회과학도입니다. 

어라? 하버마스가 살아 있었나? 했다니까요... 
그나저나 아까 쪽지에도 말씀드렸는데 여기 물어보는 게 더 빠르겠군요. 
9.11 테러에 관한 데리다와 하버마스의 대담을 볼 수 있는 곳을 아시는 분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이야기고 시간도 꽤 지났는데 작년 언젠가 례비-스트로스 100세 생일을 맞아 사르코지 대통령이 직접 그의 집을 방문해 "프랑스를 대표해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고(정확하진 않지만 뭐 이런 뉘앙스의 말을) 했다네요. 요런 분위기랄까 풍토는 좀 부럽기도 해요. 

그나저나 드라마보다 토론 프로그램이 인기라던 프랑스도 요즘 드라마 시청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더군요. 과연 경제불황 앞에는 장사가 없는 걸까요? 허허. 2009-03-10
18:24:03
  

 

상병 이석재 
  이거 나중에 사회과학도 모임이라도 열어야 하겠는데요, 이곳엔 왜이리 괴수가 많은걸까요. 2009-03-10
20:54:56
  

 

병장 이찬선 
  우중님// 데리다와 하버마스와의 대담은 
<테러시대의 철학> 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편집자는 아마 지오반나 보라도리 일겁니다. 2009-03-13
10:23:24
  

 

병장 이찬선 
  아참! 가장 중요한 걸 까먹었군요 

가지로!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서 랍니다. 씨익- 2009-03-13
10:24:36
  

 

병장 김민규 
  아 그냥 경탄했습니다. 
가지로 2009-03-14
12:46:08
  

 

병장 이우중 
  찬선님/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이 무식한 놈은 편집자 이름 보면서 실실 쪼개고나 있네요. 허허허... 2009-03-18
10:25:10
  

 

상병 신익수 
  혹시 오산에 있는 원익이??? 2009-03-19
05:58:05
  

 

상병 박원익 
  혹시 계룡의 익수??? 2009-03-19
16:52:58
  

 

상병 신익수 
  맞구나 원익이... 
나 계룡 아니야. 대구에 있어. 대구는 동익이 형...... 이런데서 보다니 반갑네 2009-03-19
23:45:59
  

 

상병 박원익 
  맞다, 나 정신이 어떻게 楹ず(눈물이 주르륵). 나도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 자주 연락하자(웃음) 2009-03-20
09:19:44
 
[re] 랑시에르, 혹은 원익님의 글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일병 홍명교   2009-03-10 11:35:40, 조회: 162, 추천:0 

우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개월만에 생활의 여유를 찾아 이렇게 이틀에 한번이라도 책마을에 들리는데 이런 보석같은글을 건질줄 몰랐어요. 개인적으로 <정치의 종언>이라는 책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읽어볼 엄두는 감히 내지 못했구요, 랑시에르의 다른 저작도 읽어본바 없습니다. 원익님이 쓰신 글로만 토대로 해서 제 의문점과 궁금점을 남겨봅니다.

class의 이론적 근거를 수학적 집합론에 접목한 이론적 시도는 처음 접해봅니다. 이 글만 보아서는 명확히 알수가 없네요. 제 머리가 나뻐서 인지도 모르고요. '그것'이 특권적인 집단적 주체성을 갖는 이유가 질서 자체의 살아있는 모순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만약 그 말이 참이라면 파시즘으로의 경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결과일 수 있겠네요. 

마지막 부분에서는 치밀어오르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셨는데, 그 '공포'정치란 어떤 '공포'를 말하시는건가요? 파시스트들에 의한 '공포'를 말하시는건 아닐것이고. 파시즘에 맞선 피칠갑의 대중적 저항? 아니면, 게릴라들의 테러? 아마 전자이리라 생각되는데... 일단 궁금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생각엔 그건 위태로운 지점이 있는 전략같이 느껴지네요. 요컨대 대중 이데올로기는 어떤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수행되는 과정 속에 내재된 것일텐데, 그것이 어떤 식으로 갈수있는가에는 대중에게 어떤 욕망이 있으며 그 '운동'에 어떤 사상이 개입되어있느냐가 문제일텐데요. equalibertism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삽입될 정도로 대중이 순수하다고 생각할 순 없습니다. 

물론 랑시에르는 일전에 무수히 반복된 그런 비판을 충분히 감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윗글에서는 <사건>이라는 말로 제기된 이 논리가 오해의 가능성이 너무 커보입니다. 마지막에 드러내신 '공포정치'라는 방법론은 이 '사건'과 맞닿아있는 지점이 있어보이는데, (제가 오독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소간 좌익소아병 스타일의 맹동주의적 요소가 보여져, 아무래도 논리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건이라는 것이 아무리 이데올로기의 약한 지점을 끊어내는 일계기로서의 작용한다지만 역사와 정세에 있어서 사건이란 어떤 충돌하는 정황의 반영지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거든요. 물론, 어떤 계기는 대중들의 행동을 폭발시키기도 합니다만, 그건 수만가지 양태와 이벤트 중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궁극적인 상승곡선은 되려 다른 차원에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저를 문화ㅈ파나 네그리주의자라거나 비폭력 이상주의자라고 오해하진 말아주세요. 저는 오히려 사건에 얽매여온 한국 ㅇ동의 오뚜기를 정반대편으로 구부리려는 시도가 지금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말해오곤 했던 것이니까요.

제가 랑시에르를 거의 접해보질 못했기 때문에 궁금해서 여쭤보는건데요, 소위 그 '정치적-과학적-미학적 프로그램'을 수행해나가는데 있어서의 이념의 종말에 대한 극복 내지 전복이 어느 지점과 연결되어있을까요? 랑시에르는 정치적 방법론에 있어서 대충 어느 지점에 있는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데리다? 지젝? 발리바르? 아니면 차베즈류의 수정주의 행동파? 그가 그 '프로그램'에 수식을 붙이는데 있어서 과학이나 미학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된 근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미학은 68ㅎ명으로부터, 과학은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로부터 출발했을 것 같은데, 그냥 보기에는 그 역사적 유산이 랑시에르 자신의 진짜 '욕망'에 옥쇄로만 작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네요. 논리전개상으로는 그저 '정치적 프로그램'이라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론인데 말예요.

몇가지 비판지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의 종언>이라는 텍스트가 유럽중심주의의 용도폐기를 강경하게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낍니다. 다만, 그 지점만큼은 신자유주의 시대 정치의 종언을 설명하고 그에 따른 전략을 내는 것보다는 도리어 이념적인 매너리즘에 빠진 활동가들의 정치적 각성을 제기하는 지점에 훨씬 더 무게가 무게가 실려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어쨌건간에 무지 용기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덧글도 덜덜 떨면서 씁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13 13:3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4:17 

 

병장 김무준 
  정치는 어려워요. 엉엉엉. 2009-03-10
12:27:27
  

 

상병 김예찬 
  제가 '해독'한 바로는 '공포 정치'는 다분히 자코뱅주의를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사건>은 알랭 바디우가 사용한 개념인데, 뭐라고 해야할까요. 저는 동경대 전공투들이 사용했던 '해방구'라는 용어에서 <사건> 개념과 동일성을 느꼈습니다. <사건>은 특정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는 뜻이 아닙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개인이 온전히 (정치적) 주체로 바로 서게 되는 열린 시공간적 계기를 <사건>이라고 지칭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군이 겨우 이정도를 가지고 피아노를 치게 하겠습니까? 

(사실 저도 좀 후덜덜..) 2009-03-10
14:34:23
 

 

상병 김예찬 
  랑시에르는 알튀세르를 '떠난' 제자로 유명합니다. '불평등에서 의식이 각성하고, 연대를 통해 평등을 향한 정치적 변혁을 이뤄낸다'라는 전통적인 Left들과 거리가 있죠. 전통적인 L 지식인들이 자신의 계급적 기반을 떠나서 P들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려는 것에 비해, 랑시에르는 애초에 그러한 계급간 나눔이 없는 '평등한 인간'의 상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평등한 인간들이 분할과 나눔에 의하여 지배와 피지배로 '나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분할과 나눔에 의하여 감각/감성 역시 제한되는데,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함으로 지배적 구획지음을 타파해야함을 주장합니다. 2009-03-10
14:44:48
 

 

병장 김무준 
  오. 여기도 경고하나 추가요. 원익님은 주제처럼 민감한 부분을 박박 긁어 주시는 군요. 후다다닥 두 댓글에 달려있는 이모티콘을 삭제하지 않으시면, 책마을 주민들의 경악과 함께 아이피 차단을 드시게 될 겁니다. 2009-03-11
00:41:05
  

 

책마을 
  상병 박원익 

"class의 이론적 근거를 수학적 집합론에 접목한 이론적 시도는 처음 접해봅니다. 이 글만 보아서는 명확히 알수가 없네요. 제 머리가 나뻐서 인지도 모르고요. '그것'이 특권적인 집단적 주체성을 갖는 이유가 질서 자체의 살아있는 모순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만약 그 말이 참이라면 파시즘으로의 경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결과일 수 있겠네요." 

방금과 같은 문제제기, 분명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명교님의 우려에서부터, '파시즘'에 대한 우려라기보다는, 저 유명한 '전체주의'에 대한 우려를 읽어냅니다. 거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고?>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ㄳ주의와 파시즘 간의 숨겨진 동일성들을 겨냥한 회의주의를 탁월하게 논박합니다. 정치적 주체성과 수학 이론 사이의 접목을 '알랭 바디우'의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그만의 특이한 생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제가 아는 바로는, <조건들>, <사도바울>, <철학을 위한 선언(맞나???)> 등이 있으며, 유감스럽게도 그나마 가독성이 있는 것은, <사도 바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요지는 유럽중심주의 용도 폐기가 아니라, 그 유럽적 유산에 대한 우리 나름의 계승 내지는 '재발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유럽 민주주의는 사실 단두대의 공포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일정한 '공포'가 어떤 유산으로서 계승되기를 저는 바라는 것이고요.... 2009-03-11
07:21:25
  

 

상병 김예찬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는 민중적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를 낳을 수 있다는 (저 같은) 우파 자유주의자들이나, 일부 진보파들의 우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책입니다. (한나 아렌트로 대표되는) 서구 지식인들이 급진적 논의들에 대해 전체주의라는 망령을 소환함으로써 (에둘러 표현하자면,)'더 적극적인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넓게 말해서 '윤리학'과 수학 이론 사이의 접목은 이미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작업입니다. 요즈음의 인문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러한 시도가 재조명 받고 있는 것은 그 동안 얼마나 우리가 '분과 학문의 시대'에서 살아왔는지 증명하는 사례 같아서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2009-03-11
08:48:56
 

 

일병 홍명교 
  박원익, 김예찬 / 
가르침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네요. 마지막으로 철학 세미나를 하고 학교를 뜬지 몇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대학시절의 확고불변했던 정치적 스펙트럼 때문인지 제 공부는 정말 알튀세-발리바르와 프로이트 정도에서 딱 멈춰있거든요. 모르는게 많네요. 앞으로 많이 좀 가르쳐주세요(웃음) 
그나저나 지젝은 역시 참 이론이 '과격'(?)하네요. 전에 <300>에 대한 비평을 읽은 적이 있는데, 영화감독이 되고자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볼땐 논란의 여지가 참 많더라구요. 2009-03-11
10:15:21
  

 

상병 김예찬 
  지젝이 <크라잉 게임>에 대한 영화평을 쓴게 있는데 저는 참 신선하고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젝의 영화평은 대상에 대해 무리한 전복을 시도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2009-03-11
11:21:51
 

 

병장 김민규 
  명교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예요. 2009-03-14
12:48:11 
 [re] [독서후기] 박원익님의 <정치의 종언과 자크 랑시에르>를 읽고.  
상병 김예찬   2009-03-10 13:19:17, 조회: 171, 추천:0 



이 글은 <정치의 종언과 자크 랑시에르>라는 글에 대한 자기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독서 후기입니다. 원익님의 원 글을 거칠게 오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먼저 원익님의 글을 선행하여 읽는 편을 추천합니다.


먼저 자크 랑시에르가 누군가 부터 이야기하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의 저서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 된지는 불과 1~2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의 저서들이 국역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몇 가지 해프닝(한 국역본에 대해 오역을 지적하며 번역자를 비판한 블로거들에 대해 역자가 고소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으로 한국의 번역 풍조에 대한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었는데, 작년 12월에 방한 강연을 하면서 자크 랑시에르는 어느새 한국 지식계의 가장 HOT한 이름으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 뜨거움이 '지적 취미공동체'사이에서만 공유되는 선정적인 아이콘으로 그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원익님의 글에서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우려가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입니다.) 

랑시에르는 노동 계급의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서 노동자라는 계급 의식은 이제까지의 논의들이 기초했던 것처럼 계급적 동일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한 대립항으로 탄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식인과 노동자-무지렁이라는 분할을 벗어나, 스스로 책을 읽고 시를 쓰면서 감성적/미학적 사유를 통한 '주체화'에 나섭니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정치철학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 나와있는 그의 저서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감성의 분할>,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것들>(제목이 맞나요? 음.), <무지한 스승> 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그의 책이 번역되기 시작한지 1~2년도 안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에서의 랑시에르 수용이 상당히 급속하게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수행적Performative이라 함은 진위판단을 가리지 않고, 성공, 혹은 실패라는 귀결을 낳는 목적을 내재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단절적 사건에 대한 수행적 믿음'이라 한다면 제 나름으로 거칠게 해석하여 '사건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겠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진보'가 '급진적 단절'(=혁명적 사건)과 이로 인해 도래하는 낙관적 미래상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진보'란 전 사회의 자본주의화, 그리고 이로 인하여 풍요와 합리성의 현재를 맞이한 이들에 의해 '성장에 대한 지속적 추구'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에 있어서 '미래'는 해당 시대와 단절된, 급격하고 전복적인 변화의 의미였다면, '현재'에 있어서 '미래'는 현 시대의 연장선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단어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 담론'들이 내포하던 '이상적 미래를 향한 지속적인 추구'라는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자유민주주의 - 자본주의 체제를 '역사의 종언'이라 선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곧 '정치의 종언'입니다.  
  

그러나 자크 랑시에르는 이러한 '정치의 종언'이라는 표현이 가진 정치적 의도와, 그 취약함을 지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란 민주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민중들의 반발들을 어떻게 무마시키는가, 라는 통치의 기술이라고 했습니다. 랑시에르는 '정치의 종언'이라는 표현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정치'의 일환이며, 옛 정치의 새로운 귀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책마을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거의 주기적으로 선언되는 '책마을의 위기'란 과연 정말로 위기입니까? 반복되는 위기의 귀환 양상을 생각해봅시다. 애초에 책마을은 이러한 '위기'를 내면화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탄생한 곳이 아닙니까?)

한 공동체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다종다양한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름 붙여지거나, 국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정치경제적 맥락, 혹은 사회공간적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분리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사회적으로 재배치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와 재배치의 과정은 다종다양한 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와 질서들을 고스란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요구에 대한 반영의 불가능성', 곧 '사회적 불화不和'는 영속적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충돌이 생길 수 있고, 이러한 충돌은 새로운 의식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그러한 의식화는 여론/문학/예술 등등의 다양한 표현의 경로로 표출되고, 다시 재생산됩니다. (압축적 근대화가 가져온 충격과 갈등은 그 반대급부로 '정치 의식'을 발생시켰습니다. '전태일'은어떤 과정을 거쳐 분신하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의식화'가 몇 십년을 거쳐 '민주화'라는 공허 속으로 수렴 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랑시에르는 이러한 양상을 통해 등장한 (정치적) '주체'의 출현이야 말로 '종언'에 대한 반대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아주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반론을 제기해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왜 다양한 요구들을 다 들어주려고 노력해야하는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느라 경제 발전에 족쇄가 채워지는게 현실이다.그냥 주류 의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경찰력을 써서라도 진압해버리면 안되는 것인가?"

정치에 대한 엄밀한 이론적 작업들도 이렇게 단순한 반응에는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론이 '정치의 종언'의 기반이 되는 공통감각(거칠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견해. 이는 '일반성'이지 결코 '보편성'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보편성'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다면.)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계급'에 대한 논의는 사회학적 범주나, 사회 내의 관계성 - 이를테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갈등 관계 - 등에서 그쳤습니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쉽게 말하자면 수학에서 말하는 집합과 원소들의 관계에서 기존의 계급 논의를 벗어난 새로운 논의 범주의 단초를 발견합니다. 수학적 의미에서 '집합'은 사회적 집합과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사회적 집합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궁 편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대대 - 중대 - 소대 - 분대, 소령 - 대위 - 소위 - 병장의 식으로 단위와 원소들 간의 상하 위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학적 집합의 질서 안에서 모든 원소는 충돌하지 않고 화해하며 공존합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공동체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겠죠. 

  바디우는 그의 정치철학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가지는 특권적 위치를 칸토어의 현대수학적 집합론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는 영원한 이론적 기반인 K.M의 통찰과도 일치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질서 아래에서 보여지는 '살아있는 모순'입니다. 자본주의적 질서 내에서 그들은 안정된 사회적 기관이나, 자본주의적 경제의 구성 요소로 온전히 '셈'해지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현대 경제학에서 단지 임금과 노동 시간, 노동력과 관련한 하나의 상품, 구조적 일부로 치부될 뿐입니다.) 그들이 현재 온전히 '셈'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후 그들을 '셈'의 질서로 포함하는 새로운 집합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집합'은 결코 기존의 사회적 질서의 개혁이나 변화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것은 바디우적 의미에서 <사건>으로서만 존재합니다. 이러한 순간적인 <사건>은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철폐하고 다른 질서를 도입하는 필연적 대체(이른바 현실ㅅㅎ주의적 혁명론이라고 이야기 되곤 하는)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하는 강렬한 순간입니다. (자세한 논의는 알랭 바디우의 저작인 <사도 바울>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차이와 나눔을 부정하는 보편주의적인 메시지가 담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것은 랑시에르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 정치, <연대>와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차이와 나눔을 부인하는 보편적 원리로서의 '평등'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소음'과 '그림자'에 불과해 보이는 이들에게 그들 스스로 주체로 자각할 수 있게 만드는 <사건>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기존의 '계급'과 관련된 정치적 논의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정치젝 주체에 대한 생각이 이처럼 나름의 이론적 근거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더라도, 이러한 근거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조건이 있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것은 랑시에르와 그의 정치철학의 주 대상으로 하는 유럽인들 보다는, 랑시에르를 수용하는 우리와 같은 '비유럽인'들에게 더 문제 제기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서구 근대적인 수학적-합리성의 사유가 기반이 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원리적인 투쟁적 주체성은 애초에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철학계에서 Hot하게 이야기되는 인기 좌파 사상가들이 가진 유럽중심주의적 자부심에는 일정한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평등주의적 정치적 변혁들이 이야기되는 기반에는, 유럽문명적 유산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럽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정치 담론들이 내재하고 있는 '약속'과 '미래의 추구'라는 믿음에 참여했던 기억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담론'을 내세우고 해방과 평등-자유의 현실적 실현을 위하여 '폭력성'을 수반했던 반복적 역사, 이를테면 프랑스 대혁명을 들 수 있겠지요. 이러한 '폭력성'이 정치적 담론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고 실현시켰던 역사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사고한 사상가는 의외로 해체주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입니다.

데리다는 이성의 키워드로 전개되온 근대/문명라는 프로젝트에 대한 '해체' 역시도 이러한 근대라는 '유산'에 대한 책임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해체'라는 것 역시,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토대를 재해석하고 전복하는 방식으로 '구조의 재생산'을 이뤄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랑시에르가 대결했던, '정치의 종언'은 바로 이 유산에 대한 책임의 용도폐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랑시에르를 사유하기 이전에 앞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과연 한국에 이러한 '유산'이 존재하는가, 만약 없다면 그 것을 어떻게 창안해 낼 것인가, 가 아닐까요? 그러나 한국에서 랑시에르를 수용하는 방식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랑시에르에게도 일정한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사회적인 분할과 그에 결합되어 있는 감성적 틀이 명확하지 않고,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문제시 될 수 있다는 통찰을 근거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해방론이 가지는 감성적/미학적 혁명이라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변혁은 언제나 개별적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이를 도래시킨 무언가에 의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경제적 조건이 되었든지, 그에 의해 촉발된 정치적/이념적 힘에 의해 되었든지 간에..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13 13:3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4:27 

 

상병 이석현 
  덕분에 이해하는데 많이 도움이 營윱求. 고마워요 

태클거는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 대체(이른바 현실ㅅㅎ주의적 혁명론이라고 이야기 되곤 하는)이 아니라, 
->필연적 대체(이른바 현실ㅅㅎ주의적 혁명론이라고 이야기 되곤 하는)가 아니라, 
인것같습니다.(웃음) 2009-03-10
14:30:01
  

 

상병 김예찬 
  감사합니다. '정치젝'도 보이는군요. 이건 o미.. 2009-03-10
14:45:36
 

 

병장 이우중 
  예찬님/ 지젝의 영향일지도..낄낄낄. 아, 이따위 저질 말장난. 

"그나저나 '폭력성'이 정치적 담론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고 실현시켰던 역사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사고한 사상가는 의외로 해체주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입니다." 

는 정말 의외로군요. 하기야, 포스트모더니즘 역시도 결코 프리-모던이나 안티-모던이 아니라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요. 구조를 부정하는 후기구조주의가 말이 안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리고, 쪽지 보냈습니다. 2009-03-10
18:34:28
  

 

상병 김예찬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규정했던 영미 철학자들에 대해 데리다가 긍정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 보면 될지도 모르겠네요. 음. 2009-03-10
19:04:10
 

 

상병 박원익 
  책 제목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는지요? 근데 제 기억력도 정확한 편은 못 되어서... 아무튼,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2009-03-10
23:47:58
  

 

병장 김무준 
  사장님 여기 경고하나 추가요. 아무리 분발하시더라도 이모티콘을 쓰시면 경고 먹습니다. 2009-03-11
00:39:17
  

 

책마을 
  상병 박원익 

이런 식의 '번역'이 필요한 글이라니,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웃음) 번역투에 오염된 글들은 정말, 외국 사상가들을 읽는 한국독자들의 천형인 것 같습니다... 별 다른 오독은 보이지 않으며, 제가 그러한 것을 탓할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2009-03-11
07:21:53
  

 

상병 김예찬 
  번역된 개념어를 글에 녹여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글을 내놓는 공간을 고려해야하구요. 정리되서 올라갈 글 기대하겠습니다. 저번 글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박민규의 뺑뺑이 안경 사진과 함께 글을 보니 재미있더군요. 2009-03-11
09:19:23
 

 

병장 김민규 
  캬하 
브라보 2009-03-14
12:4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