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자본의 미래
병장 이승일 04-15 21:21 | HIT : 315
= 정치와 자본의 미래=
세계는 참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한 경제학자는 "역사라는 이름의 기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나가 떨어진다." 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럴 것이다. 가장 예리하고 명민한 사람조차 단지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가 직선이었다면 미래도 직선 속에서, 현재가 곡선이었다면 미래 역시 그 곡선의 곡률 속에서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대체로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일컫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때문에 미래에 관해 사소한 예측이라도 해보려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대중없는 짓인지를, 그리고 아마도 자기 생각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이 말은 지금 나 자신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하나의 조잡한 예측을 해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미래 사회에는 현재 우리가 정부라고 부르는 기구의 역할을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요소가 떠맡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흐름 위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현실성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며, 아마도 틀릴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종의 재미를 위해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 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진행시켜볼 생각이다. 만약 정부라는 기구의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대체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 과정이 진행될 것이며, 어떤 맥락 위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지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약간은 허황된 이 가정의 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측면을 몇 가지 제시할 생각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결론은 가장 비겁한 사람들이 즐겨 말하듯, "뭐 그럴 수도 있다" 는 것.
[1] 지방정부의 변화
"풀뿌리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꽃" 이라고 불리 우는 지방자치제가 우리나라에 시행된 지 약 20년 정도가 지났다. 본래의 정치적 성과를 얼마만큼 달성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정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조금이나마 바꾸어놓았고 또 바꾸어가고 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인 것 같다. 중앙정부는 너무나 멀리 있어서 지역민들의 세세한 불편과 이익에 도저히 신경을 써 줄 여유가 없었지만, 소규모 지자체는 어쨌거나 소리치면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정부의 눈높이는 그만큼 낮아졌고 권위 또한 낮아졌다. 과거의 정부는 공포스런 힘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우리는 20여 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을 보게 되었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 부산으로 오십시오. 부산에 여러분의 미래가 있습니다~" 라고 TV에 나와서 광고하는 부산시장의 모습, 과연 20여 년 전에 이런 장면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그는 '역사라는 이름의 전차'의 1등석 손님이었다고 해도 과한 비유는 아닐 것이다. 광고하는 정부. 그것도 '공공의 가치' 라던가, 국정 전반에 대한 홍보가 아니라, 지자체 자신의 재정적 이익을 위한 광고라니. 산뜻(?)하지 않은가?
한편 지자체의 내부에서는 더욱 산뜻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서울시를 필두로 해서 지자체 공무원들의 봉급제도에 성과급 시스템이 도입된 것이다. 열심히 일한 직원은 더 높은 봉급을, 그렇지 못한 직원은 낮은 봉급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퇴출까지도 이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연공서열 중심의 봉급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점점 성과급 요소가 증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순히 더 효율적이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철밥통'에는 이미 작은 구멍이 뚫려버렸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아마도 시간의 문제일 듯싶다. 한편 최근에 도입 되고 있는 공무원 성과급제는 아직 '상대적인' 성과급제인 것 같다. 다시 말해 공무원들의 총 봉급은 거의 고정되어있는 상태에서, 목표 성과에 미달한 사람의 봉급 일부를 초과 성과를 달성한 사람의 봉급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한번 급여에 유동성이 생긴 이상, 그 유동성은 절대적인 유동성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지자체의 봉급 총량이 그들의 성과 총량에 의해 변동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아직 큰 현실성은 없다. 왜냐하면 공무원들의 성과는 단지 지자체의 재정수입을 늘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자체 단체장의 선거결과와 같은 정치적 문제, 기타 민원이나 사회적 평가 등 수많은 요소가 공무원들의 성과와 관련되어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성과가 우수하다고 해서 일반 기업처럼 그들에게 보상해줄 돈이 마땅히 뚝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자체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충실하게 재정을 관리했느냐에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지자체의 독립성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재정적 독립성도 증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성과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놀랄 만큼 커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각 도시의 지자체들은 사활을 걸고 '세금 팍팍 내주는 기업'을 유치하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기업은 그 스스로가 막대한 세금을 내주는 것만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임금을 제공함으로써 추가적인 세금 수입원까지 창출해준다. 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이미지와 중요성을 제고시켜 중앙정부로부터의 지원도 수월하게 받을 수 있고, 주민의 전입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이모저모로 방그레 웃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이다.
자, 이 모든 변화들을 동시에 생각해보자. 지자체는 기업을 유치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세원을 확충하고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물론 이 노력의 주체는 개별적인 공무원들이다. 그들은 지자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개인의 성과급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단체장이 기대하듯이, 그 노력은 대체로 지자체의 이익으로 연결된다.) 확보된 재정 수입은 물론 지역민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되어야한다. 그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값(세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자체가 제공하는 사회적 서비스의 수요자이며, 동시에 주주이다. 이렇게 보면 지자체란 하나의 기업이요, 회사가 아닌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자체와 기업과의 차별성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자체는 결국 또 하나의 기업,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기업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우리는 서울 강남구청과 같은 지방자치단체를 보며 이러한 변화를 좀 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강남구청은 종종 서울시의 정책에 반기를 들며 주주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곤 한다. 강남구청은 그 어떤 지자체보다도 주주들의 지분 비율이 높은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계속된다면 사람들은 결국 "지자체가 어떻게 비영리 조직이냐? 이젠 대놓고 너희 영리를 추구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 사회는 오히려 그러한 문제제기를 기회로 삼아 지자체를 어엿한 공기업으로 변모시킬지도 모른다.
[2] 중앙 정부와 사회 중추기능의 변화
지방자치단체가 기업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는 것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최종 결과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반면 중앙 정부의 경우에는 그것이 과연 어떻게 변화할지 그 양상을 가늠해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 중앙정부가 관할하고 있는 사회의 중추적 기능은 너무나도 중요해서 과연 민간이 그것을 떠맡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3권을 비롯하여, 국방, 외교, 치안, 교육, 사회 간접자본 확충, 재정 / 통화정책 등의 역할은 너무나도 공공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 따위에 그것을 기대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의심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킬 수는 없을지, 한 가지 기능씩 생각해보도록 하자.
먼저 <행정>의 기능을 생각해보자. 행정부에 기업적 요소가 도입되는 것은 이미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우리가 지방자치단체의 변화를 예상하면서 생각했던 점들은 중앙 행정부에도 일정부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훨씬 더 느리고 복잡하게 진행되겠지만 말이다. 기업화된 행정부의 모델을 우리는 식민지시대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동인도 회사는 정부로서의 모습과 기업으로서의 모습이 혼합된 공기업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인도와 관련된 무역, 재무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문화, 사회적인 문제 역시 담당했다. 사람들은 이 회사가 단지 착취의 기구였을 것 이라고만 생각하지만 - 그리고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지만 -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인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했다. 인도의 발전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도가 계몽되고 발전해서 유럽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지만 자신들의 인도 점령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계몽주의, 공리주의가 정당화될 것이고 그러한 세계관에 확신을 갖게 될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식의 행정 기구가 충분히 그것의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미래에는 행정부가 담당하게 될 일 자체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국가간 경계가 희미해지고 국가의 개인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면, 당연히 그에 수반하는 제도도 변화 할 것이다. 예컨대 주민등록제도가 폐지되고, 사회보험 등의 기능은 거대 보험회사에 의해 흡수 될 수 있다. 결국 할 일의 절대량이 줄어들고, 남은 일들은 '자본의 바다'에 던져질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외교>의 영역은 어떠한가? 우리는 FTA협정의 내용을 통해 투자자의 국가에 대한 제소가 앞으로 일반적인 현상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이것은 국가의 법적 독립성보다 자본의 힘이 더 우위에 있어야한다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다. 국가라는 물리적 성벽은 자본의 힘에 의해 점점 더 낮아질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그 유적만 남긴 채 붕괴 될 것이다. 자본과 재화가 정보화 되면서 빛의 속도로 지구를 누빌 수 있게 되었고, 물리적인 거리보다는 정보의 연결망이 자본과 재화의 이동에 있어서 훨씬 중요한 요소로 변해가고 있다.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다국적기업의 지점들 간 정보적 거리는 한 나라 안의 다른 기업들 간의 거리보다 가깝다. 한 국가가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며, 외교는 단지 전 세계적인 자본과 재화의 연결망이 안정적으로 확충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요청되는 윤활유 역할에 머무를지 모른다.
< 국방>의 경우 역시 국가의 정체성 약화와 함께 그 중요성이 줄어들 것이다. 전 세계에서 국지적인 전쟁이 끊임없이 발발하고 있는 현재상황에서는 전혀 그럴법하지 않은 이야기인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마찰은 결국 모든 나라를 자본 +민주주의로 바꾸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 이후에는 전쟁의 위협이 급격하게 감소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만큼 사랑이 넘치는 체계라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장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국가단위 이상의 수준에서 얽혀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은 결국 국경이 없이 자유로이 이동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한나라의 자본이 다른 수많은 나라와 얽혀있게 된다. 이 얽힘의 정도가 심해지고 복잡해질수록 전쟁의 위협은 감소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오직 자본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공한다면 일본의 경제는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떠 앉게 되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원하는 일이 아니다. 특히 자본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현대의 군사력은 정치권력의 통제 하에 있고, 정치권력은 자본권력의 지배 하에 속박되어가고 있으며,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중동, 중국, 그리고 한반도 위쪽까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LAN 선이 완전히 깔리고 나면 대규모 물리적 전쟁의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질 것이다. 모든 나라는 상대국가가 공격해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신뢰나 협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계산에 의한 것이다. 군비감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고, 전통적인 형태의 전면전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상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제국주의 시대 이후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변모해왔는가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과거의 전쟁은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전쟁이었다. 말하자면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 범위를 넓히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 이후, 침략은 전혀 새로운 목표를 위해 이루어졌다. 식민지화가 그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정치적 영토를 넓히는 것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확장하는 데에 목표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광케이블을 전 세계에 설치하려는 것이다. 이 설치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아마도 이번 세기 안에 마무리 될 것이다. 물리적 군사력이란 오직 이 설치작업을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한 방법일 뿐이다.
한편 대규모 전면전의 가능성이 희미해진다고 하더라도, 테러와 같은 국지 전쟁의 위협은 존재할 것이며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 전 세계가 자본/민주주의 하에 통합되고 나면,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는 반발세력은 없어지겠지만, 여전히 소규모 반대세력들이 테러와 같은 방법을 통해 거대한 자본의 권력에 도전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테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가단위의 대규모 군사력보다는 현재의 경찰 병력과 같이, 좀 더 섬세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어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치안에 대한 필요와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현대 국가가 수행하고 있는 치안의 역할이 어떻게 변모할 수 있는지 생각해봄으로써 국가가 제공하는 '디펜스 서비스'의 변화를 함께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치안 기능의 일부를 이미 민간 업체가 떠맡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세콤 등의 각종 보안업체가 그러한 기능을 한다. 물론 이들이 맡고 있는 영역은 아직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다른 부문에서의 민영화/기업화 조류와 맞물려 온전한 치안서비스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미래의 치안업체는 각종 경제주체들을 절도와 같은 사소한 폭력으로부터 보호함은 물론이고, 테러와 같은 심각한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사회 간접자본>과 같은 재화의 생산은 그 어떤 민간 경제주체도 쉽게 홀로 떠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협력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실 생각해보면 현재도 궁극적으로는 각 경제주체들이 힘을 합쳐서 SOC를 확충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정부가 대리인의 자격으로 정책을 시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만약 정부가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합의의 기능을 기업들 간의 회의가 대신할 수 있다면, 정부라는 중간과정은 생략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기업들의 수가 너무 많고 이해관계가 다양하며, 모든 국민을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합의에 의해 합리적인 결정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래서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몇몇 대기업들에 의해 시장이 안정적으로 분할되는 상황이 도래하고, 이들 기업에 대다수의 시민들이 속하게 되고 나면, SOC 문제에 대한 합의는 정부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경실련과 같은 단체에서 SOC의 확충을 위한 예산 확보와 집행을 모두 결정하게 될 수도 있다. 어차피 결국 이들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일반 시민의 이익은 이미 기업의 이익 속에 흡수되어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형 기업의 근로자로 살아갈 것이고, 기업의 이익 증대에 반대할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극히 미약한 수준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 재정/통화정책>과 같은 경우는 어떠한가? 아직까지 세계의 경제는 정치/법적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며, 그 간섭을 받고 있다. 이 간섭의 강도는 때때로 증가하기도 하였지만, 지난 400년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거의 일관적으로 감소해온 것이 사실이다. 아직 경제 시스템이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적 개입은 여전히 필요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그 정도는 점점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재정정책은 이미 그 실효성이 의문시 된지 오래 이고, 미래에도 그러한 것이 계속 존재할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통화정책을 조율하는 기구는 분명히 미래에도 여전히 필요할 것이며, 이것은 영리 기업에서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SOC 의 경우와 같이, 통화정책도 기업들 간의 협의체 내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제로 간주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은행의 통화정책도 결국은 정치권을 매개체로 하여 경제 주체들의 의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한정된 대기업이 시장을 분할하여 경제 주체들 간의 관계가 안정화 되면, 정치권이라는 매개체는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장애물로 여겨질 것이다. 그 결과 거대 경제주체들의 직접적인 합의에 의해 통화 정책이 이루어지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 교육>역시 변화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교육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사실 근대적 공교육이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그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의 일부로 등장 했다기 보다는 뚜렷한 사회적 목표를 갖고 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근대가 지향하던 합리적 인간형, 시민사회의 법을 따르고 그 발전을 책임질 구성원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목표는 국가라는 공공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공공의 목표는 더 이상 사회 전체의 목표를 담아둘 수 없는 좁은 그릇에 불과함이 드러날 것이고, (이미 드러났다) 교육은 모든 종류의 목표에 봉사하기 위해 분화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기업에 적합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이 중추를 이룰 것이다. 우리는 기업들이 요즘 대학에 '기업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인재를 배출 해 달라' 라고 호통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대학은 결국 이들의 구미를 만족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기업이 자신들의 요구를 교육과정에 직접 반영하려고 할 것이다. 쓸데없는 것 덜 배우고, 실용적 지식에 더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이다. 기업들이 세운 사교육 기관을 졸업한 사람은 당연히 취업 시 상당한 가산점을 부여받을 것이고, 이는 모든 학생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한편 초등 교육은 수학, 영어, 약간의 예체능 정도를 전문적으로 실시하는 기업형 학원들에 맡겨질 가능성이 높을 듯 하다. 지금 존재하는 학원들보다 훨씬 거대하고 잘 구축된 시스템을 가진 학원들에 의해서 말이다.(메가스터디와 같은?) 이러한 현상이 보편화되면 의무교육은 너무나도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결국 폐지될 수밖에 없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기업에 완전히 흡수된 형태가 될 것이고, 일부는 말하자면 대학원이 독립한 형태가 될 것이다. 독립한 것이라기 보다는 독립 당한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기업의 구미에 맞지 않는 학문들도 빌빌거리며 살아남을 것이며, 또 하나의 길드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 길드의 목적은 교육에 있다기 보다는 연구에 있다. 미래의 대학은 세계의 발전을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곳일 수 있으며, 어쩌면 그 속에서 또 다른 시대의 서막을 예상케 하는 지식이 탄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법률>과 관계된 영역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사실 정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는 근간이며, 그 마지막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법률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궁극적인 공공성의 가시화된 표상이다. 만약 미래에도 정부가 여전히 존재해야한다면, 그것은 아마 법의 집행과 수호를 위해서일 것이다. 법의 영역을 일반 기업이나 기업들의 협의체 내에서 다룰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법이 가지고 있는 공공성은 그러한 정도로 해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법과 관련된 공적 기구가 미래에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구에서 다루게 될 법은 민사, 형사적인 부분에 국한될 것이며, 상거래나 무역 등과 같은 영역은 모두 기업들 간의 협의체에 맡겨질 것이다. 그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난잡하게 이야기한 내용을 가지고 미래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의 수행이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배분될 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듯이 시장은 소수의 거대 기업들에 의해 분할 될 것이고, 이 기업들은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회사는 사회의 한 부분이라기보다는 삶의 양식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업의 근로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업에 정체성을 두게 될 것이다. 50년 후 대다수 청소년들의 꿈이 "삼성 역사에 길이 남는 위인이 되고싶어요" 일지 누가 아는가?
현재 '전문직종' 이라고 불리는 직업들도 대부분 기업에 편입될 것이다. 의사는 의료 기업에, 법조인의 대다수는 법률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 될 것이다. 현재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각종 프리랜서들은 그와 관련된 거대 자본이 형성되고 나면 대부분 그 안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현재는 새로운 시장과 영역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과도기적인 시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프리랜서가 많이 눈에 띄는 것이지, 과도기가 지나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사회는 다양한 유형무형의 재화를 생산하는 영리 조합들 - 즉 길드 - 의 집합체로 구성될 것이며, 이들 사이의 마찰과 분쟁의 조절은 공공 정부가 아니라 이들 스스로가 구성한 협의체가 대부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어떤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보다는 어떤 기업의 일원인가에 더 달려있게 될지 모르며, 궁극적으로 국민이라는 개념도 단지 문화적, 전통적인 의미로서만 존속할 가능성이 크다. 도저히 영리적 조합들이 수행할 수 없을법한 법률 서비스의 경우,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제한적인 법률기구로서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며, 이 법률 기구야 말로 현재 정치 기구의 실질적인 미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기능을 모두 민간자본에 뜯기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정부의 모습이다. 어쩌면 이마저 지금은 예상할 수 없는 다른 방식으로 해체되어버릴지도 모른다.
[3]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 역사적 맥락
나는 정말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일어난다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날 것인지의 질문을 해볼 수는 있다. 이 모든 변화는 대체 어떤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단지 근대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생산성 증대에 따른 파급적 효과일 뿐인가? 부분적으로는 분명 그렇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더 큰 규모의 흐름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는다.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통제로서의 정치권력'으로부터 '규율로서의 자본 권력'으로의 전이를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주로 사회의 경계선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의 힘이 작동했다. 반역자와 우호자를 나누고, 적과 아군을, 광인과 정상인을, 이방인과 시민을 나누는 데에 힘 행사의 주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역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공개처형을 실시하고, 광인을 몰아내기 위해 마녀사냥을 하고, 적을 제거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공격했다. 이때의 권력은 사회의 경계선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의 미세한 부분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이 권력은 "~ 를 하지 말아라" 라는 소극적 권력이지 "~를 해라, ~를 해보자" 와 같은 적극적 형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일상은 정치 권력이 아니라 종교나 그 이외의 문화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생산성이 증대되면서 단순히 경계선만을 터치하는 권력은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권력은 생산성 증대를 위해 사람들을 북돋아야했고, "~ 하지 말라" 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를 하자, 그게 좋은 것이다" 라는 구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구호와 함께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을 침투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푸코는 규율이라고 부른다. 규율은 명문화된 법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수준에서부터 사회 전체적인 구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행동과 이념과 일상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이다. 법 권력이 이미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며, 단지 규율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법적 권력으로부터 규율로의 전이는 동기부여로부터 가감점제도로의 변화와도 유사한 것 같다. 전자는 소극적으로 집단의 경계선 유지를 위해서만 노력지만, 후자는 적극적으로 집단 내부를 질서지으려고 하지 않는가.
푸코의 통찰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이 법을 기반으로한 정치적 형태로부터 자본주의적 규율의 형태로 변형된다고만 예상했지,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원천을 갖는 것임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푸코의 설명 속에는 단 하나의 권력이 있을 뿐이고, 그 권력이 시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갈 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권력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양상을 띠고 있는 것 같다. 그 두 양상이란 정신적(정치적) 권력과 물질적(자본적) 권력이다. 이들은 서로 은밀한 관계를 주고받아 왔지만 전혀 이질적인 것이며 상반되는 운명을 지닌 것이다.
우선 고대사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권력 변화의 양상을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먼저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리는 고대 사회가 제정일치의 사회였음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고대사회는 '신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였던 것이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황하 문명 등부터 시작하여 모든 고대 문명에서 신탁이 행해졌고, 그것은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신으로부터 나온 권위가 아니라 단지 제사장들로부터 나온 권위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불합리하게 느껴졌고, 신정은 결국 폐지되었다. 그리고 왕이 등장했다. 이제 통치자는 하늘이 아니라 땅 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왕의 권위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신, 또 하나의 독단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핵심은 의회나 관료들에게 넘어갔다. 영국의 명예혁명 등은 이 과정의 산물이다. 조선은 그 건국과 함께 신료 중심의 왕조가 되었다. 그 후 선거에 의해 의원이나 관료들이 선출되었고, 권력의 핵심은 이들에게 넘어갔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들의 권력 역시 불합리하게 느끼고 있다.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의 권위는 예전과 비교하자면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추락했다. 그들은 더 이상 진정한 권리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권력이 정말로 모든 개개인에게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미래의 어느 순간 '대의' 민주주의라는 구조조차 여전히 문제가 많다고 지적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결국 정치권력은 모든 사람이 원했던 것처럼 더욱 더 다수에게 직접적으로 분배 될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러한 변화는 진작부터 실현되고 있다.
한편 자본권력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제정일치의 사회에서는 애초에 물질적 부라는 것 자체가 중시되지 않았고,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해도 신전 건축이나 제사와 같은 한정된 영역에만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왕권 사회역시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교역을 통해 상인집단이 형성 되었고, 중세시대에 이르러서는 조합을 만들면서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권력의 힘에 비한다면 그 힘은 너무 작은 것이었으며, 여전히 너무 많은 통제를 받고 있었다. 상인집단이 역사의 표면에 자신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물론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부르주아계층은, 정치권력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가장 중심적인 사회적 계층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여전히 왕족과 귀족층 아래에 머물러 있었고, 왕족과 귀족들의 생각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부르주아들은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자본 세력의 혁명적인 해방은 미국 건설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자본은 고루한 유럽의 정치적 통제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었고, 그 전에 꿈꿀 수 없었던 자유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어쩌면 자본의 독립기념일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 자유는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되고 있으며,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지상의 모든 곳 위에 그 힘이 전달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권력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의 궁극적인 주어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다. 자본의 역사는 그것이 정치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었으며,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배경으로서 요청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런 정치적 실체도 구성하고 있지 않은 민중은 자본 앞에서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 제사장과 왕은 있어도, 민중은 없다. 민중은 배부르게 해주면 복종한다. 따라서 자본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집합체들이 해체되어야하며,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될 때 자본주의도 완성된다. 권력은 점점 작은 단위로 나뉘어가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분배 되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 그리고 그것은 일면 사실이지만 - 그 뒤에는 점점 더 강해지는 자본의 힘이 존재한다.
정치/경제적 변화는 언제나 사고체계의 변화와 함께 진행된다. 객관성, 공공성이 절대적으로 신봉되던 시대를 한참 뒤로하고, 우리는 그것의 계속적인 해체를 목격하고 있다. 해체주의는 단지 현대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 권력의 확장과 함께, 그리고 정신 권력에 대한 불신과 함께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대인은 인간을 완전한 것의 일부로 간주했지만, 이제 우리는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의 복합체로 간주한다. 우리는 가장 작은 입자들, 가장 작은 먼지들의 조합에 의해 우리의 정신이 설명되길 원한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먼지가 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어느 역사가는 인류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지도 모른다. 신에 의한 지배를 받기 싫어서 물질에 의한 지배를 선택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말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위대한 것에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의미에서 무의미로. 유에서 무로.
인간이 운전하는 역사라는 전차가 얼마나 굽이치는 선로 위에서 이동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종착역은 어쩌면 허무가 아닐까? "무를-위해-모든-것을" - 이것이 그 열차가 사용하는 연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4] 미래 그 이후의 미래
과연 이것이 전부인가? 결국 인간은 자신들이 생산한 재화에 의해 지배당하고 말 것인가? 아니,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나쁜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인류는 애초에 그것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이야 말로 인류가 고대하던 유토피아가 아닌가? 미래의 인류는 더욱 큰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게 될 것이고, 정치권력의 횡포와 관념의 허상, 그리고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각자에게 맡기고 싶다.
분명한 것은 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미래 그 이후의 미래를 결정하리라는 것이다. 인류사적으로도 그렇고, 아마도,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그럴 것이다.
병장 진규언
너무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승일님이 언제나 천상의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미래학 서적보다도 깊이 있고 진지한 내용인 듯 합니다. 오히려, 앨빈 토플러의 근작보다도 낫다고 보이는건 저뿐일까요.(웃음)
중앙정부의 기능중 <국방> 분야에 대한 견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리스트인 토머스.L.프리드먼이 그의 저서 몇권에서 강조하며 이야기했던 이론이 '골든아치이론'인데, 다시말해.. 세계전쟁 이후 골든아치(세계적인 패스트푸트 체인점 맥도날드의 로고)가 진출한 나라들 사이에서는 결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었지요. 맥도날드가 진출했다는 것은, 어느정도 개방이 이루어졌고, 일정 수준 이상의 구매력을 보유한 개인들이있어야 할텐데 그만한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들끼리는 전쟁을 할 수가 없었겠지요. 암요, 서로간 경제적인 연결고리가 점점 커지는 마당에 전면전을 벌이면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마지막 문단에서 생각할 점을 휙 던져주셔서, 생각에 잠겨 봅니다. 04-16
병장 박요한
김동춘 교수의 신간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의 내용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서론에 실린 글에 보면 기업사회의 특징을 몇가지 실어놓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자본의 고유한 권력인 생산 지휘권이 극대화되고 사회 영역으로 확대된다.
2. 정치-사회가 기업 활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봉사하는 역할을 한다.
3. 기업의 생산성이 곧 국가나 사회의 생산성으로 간주된다.
4. 1인 1표의 원리가 아닌 소유 지분만큼의 권리 원칙이 기업 외의 사회조직에도 적용된다.
5. 대기업 및 기업가 단체가 단순한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영역까지 간섭한다.
6. 정치 활동, 정책 생산, 법원, 미디어 등은 주로 대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7. 국민-시민-주민 혹은 기업의 판매망 안의 모든 사람들은 곧 소비자로 불린다.
8. 모든 정부-사회 조직의 우두머리는 경영자 CEO를 이상적인 역할 모델로 설정한다.
9. 조직의 목표가 기업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조직, 예를 들면 교회와 학교까지도 기업의 모델을 따라서 자신을 재조직한다.
10. 정치-사회 엘리트층까지도 주로 기업 경영자 출신이 차지하게 된다.
11. 노조활동은 대체로 기업 경영의 방해물로 간주된다.
12. 행정보는 기업조직을 모델로 한다. 정부 부처 중에서는 경제 부처가 다른 모든 부처를 압도한다.
13. 경제학이 사회과학 중의 사회과학이 되고, 또다시 회계학과 경영학이 경제학을 대신한다.
14. 경쟁력이 없는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 공공성은 곧 무책임과 동일시된다. 04-16
병장 진규언
요한, 말씀하신 그 책이.. 바로 제 눈앞에 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을 '순서'가 아닌지라 잠시 참아두고 있는데.. 이렇게 언급해주시니 의지가 불끈불끈 샘솟네요. 04-16
병장 박요한
재미있게 본 책 중에 하나인데, 서론이 가장 인상깊었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 내용들은 비전공자인 저에게는 좀 어려운 개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 규언님이 올려주신 후기를 보고,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 강의>를 보게 되었답니다. 새로운 시각을 열게된 좋은 책이 였던것 같습니다. 04-16
병장 이승일
요한 / 요약해주신 항목들을 보니 정말 와 닿습니다. 김동춘 교수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약해주신 변화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04-16 *
병장 박요한
김동춘 교수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현재의 사회는 시장의 식민지 상태다. 기업은 사회의 한 부분으로의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
글쎄요. 저는 좀 혼란스럽습니다. 경영학을 공부했던터라..기업자체 뿐만 아니라 경영학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시각은 거부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경영학이란 어떠한 학문인가에 대해서 저는 경영학이란 단지 기업에만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 모든 조직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조직이라도 경영학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운영된다면 조직의 목표 달성을 크게 이룰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몇몇 경영학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구요. 사실 기업의 존재로 인해서 사회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등, 긍정적인 기여를 한 부분도 많습니다. 그만큼 지금까지의 여러 조직 중 기업의 성공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룬 조직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자면 경영학을 적용해서라기보다는 기업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외적요인들이 존재했다라고 반론이 생길 수 있겠지만,,,)
경영학이라는 학문이 옳게 적용된다면, 어느 조직에라도 적용된다면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업과 사회, 정부의 중간지점, 제3섹터라 불리는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적 기업'을 표방하는 조직들도 있고, 그러한 조직들은 여타 기업들과 달리 사회적 서비스의 제공과 사회적 이익을 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들의 존재는 기업의 조직모델을 갖추고, 정부나 사회가 할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서로 양극적인 주장들을 펼치고 있는데, 둘 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 주장들을 잘 생각해서 새로운 길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인간이 어떻게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냐에 대한 고민들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경영학 자체 내용보다는 이념적이고 사상적인 부분들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들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경영학은 아래의 발췌글을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34.3.1.5:3000/bbs/zboard.php?id=nity_book01&page=1&sn1=&divpage=1&sn=on&ss=on&sc=off&keyword=21 세기&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2 04-16
상병 이지훈
와~ 이런글은 책가지로 옮겨야 할것 같아요!!
자본주의의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너무 잘 집어 주신것 같네요.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교육부분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기업화 되어가고 있는 대학교와 그에 따른 학문에 변화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요즘들어 인문학의 위기라는 소리가 많이 들려오는데 그 위기의 원인은 바로 자본주의의 입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업들은 자기네들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들만 지원하고 있고(제생각에는 근시안 적인 시각인것 같은데 말이요.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따라서 그런 학과에만 학생들이 몰리기에 많은 학과들의 인기가 시들해 지고 있는 실정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현상은 어쩔수 없는 변화이기에 정확인 지적이신듯 보입니다.
아무튼 승일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 많은 것들을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후훗
이런 글들이 올라온다는게 너무 즐겁습니다. 매번 너무 잘 읽고 있어요.(오늘은 리라이팅을 하려고 프린트해볼까 합니다 흐흐) 04-16
일병 김준호
너무 암담한 미래네요. 근데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정치권력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말이 의아하네요.
인용하신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는 '집단 다수의 유용한 규모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다수를 참으로 유용하게 만들어 놓기 위한 것으로서, 다수를 지배해야하는 권력의 장애 요소들을 감소시키는 세밀한 기술적 창조의 집합'이 규율이라고 나와 있고, 권력의 전술을 규정하면서 권력 체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순종성과 효용성을 동시에 증가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전까지 권력의 경제를 지배했던 '선취-폭력'의 원칙 대신 '부드러움-생산-이익'의 원칙이 등장한 것이며, 이는 곧 자본의 축적이 인간의 축적이자 규율권력의 작동을 요구한다는 것이죠.
쓰고 보니깐 승일님의 긴 답글이 달릴까봐 살짝 좀 많이 무섭네요 (웃음) 04-16
일병 박준연
김현진씨의 (아실려나 모르겠네요.) 리플을 전합니다.(웃음)
이승일씨의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잘쓴 글이네요.
자본주의 중심적 해석이 지닐 수 있는 난점과 조금은 도식적인 구조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만 뺀다면 ... 04-16
병장 박요한
몇가지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그 내용들이 제가 본 책에서 언급되어 있기에 한번 올려보고 싶군요.
" 거대 자본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게 되면서 오늘날 대학에서는 이러한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학과나 강좌는 폐쇄, 축소의 운명을 맞게 되었고, 교육과 출판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훨씬 커지면서 지식인들은 학문사회보다는 미디어에 기대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있다.
......
학생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전공과 지식을 학습해야 직업을 갖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는 지식분야에 몰리게 된다. 학생들은 교육을 점차 투자로 인식하게 되고, 돈을 들여서라도 상품가치가 있는 분야의 학위를 획득하려 한다. 그리고 대학 교수의 충원에도 재단 이사회 등의 권력이 개입하여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심사'의 외양을 지니면서 비판적인 학자들이 진입하기 어렵게 만든다." ('한국의 지식사회와 지식권력', pp.200~2001)
" 자본은 곧 권력이다.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보아온 기존 관념은 권력과 시장을 별개로 보는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자본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정치, 사회관계라고 본다면 기업사회는 바로 관계로서의 시장, 자본의 본래적 성격에서 곧바로 도출할 수 있는 사회 모델이다. 기업사회는 정치적 민주주의 위에서 발전할 수는 있지만, 한국사회의 특유한 혈연주의, 그리고 군사정권이 뿌려놓은 권위주의 등의 문화적 자원과 결합되어 있다. 소유권을 성역화하는 소유권 절대주의가 그것이다. 외환위기와 IMF 관리를 겪고 나서도 일부 혈연집단이나 폐쇄적 혼맥으로 구축된 재벌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 재벌은 혈연적 네트워크, 탈법적인 증여 등의 방식을 활용해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기업사회는 21세기적 현상임과 동시에 19세기, 20세기의 한국 문화 사회의 토양 그리고 냉전하의 군사주의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pp.28~29)
" 기업사호에서의 처벌은 사유화된 한국통신 KT에서 나타났듯이 구금-체포-고문-학살이 아니라 명예퇴직 강요, 분사, 비정규직화, 해고, 비연고지 근무 요구 등이다. 그리고 그것은 처벌이 아니라 기업 경영 합리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p. 30) 04-16
병장 임창욱
이렇게 큰 틀에서 세상의 흐름을 보신 다는게 대단하군요. 회사가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 된다는 말이 정말이지 섬뜩합니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04-16
병장 이승일
준호 /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구분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았는데, 김준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을 근본적으로 나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했는데 말이지요.
우선 저는 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권력은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들) 에게 가하는 것입니다. 이 때 권력의 주체는 그것을 가하는 대상의 어떠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 권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며, 무력이 권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살고자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모든 권력은 근본적으로 동일할 것입니다. 때문에 권력을 둘로 양분한 저의 관점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그 분리가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합니다. 권력이 타겟으로 삼고 있는 욕망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에 의해 그 권력의 성격을 다르게 규정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 권력이 단지 물리적 폭력에 의해 건설된다고 믿지만, 그리고 최초의 건설은 실제로 물리력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의 유지는 결코 물리적 폭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권력이 궁극적으로 기대어있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오히려 관념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더 객관적인 것, 더 공공성을 띨 수 있는 것, 더 옳은 것, 더 바람직한 것을 구축하고 싶어하는데, 바로 이러한 믿음이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제가 자본권력이라고 부른 것은 분명히 다른 종류의 욕망에 기대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재화에 대한 욕망입니다. 둘 모두 어떠어떠한 욕망에 기대어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욕망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가에 의해서는 구분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욕망은 언제나 뒤섞여 드러나며, 권력자는 그 욕망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는 한 이용하려고 하겠지만 말입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창욱 /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의 서두에서 말씀드렸이 '뭐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이지 그 이상의 의미나 확실성을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희망이 우리 미래를 밝혀주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