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관한 소고
사실, 정의라는 말은 꽤 낯간지러운 말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가끔, 아주 가끔 보는 정의에 관한 말들이라곤 고작 경찰 모집 포스터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 앞장서자’ 라든지, 전쟁영화에 등장 할만한 ‘정의를 위해 승리하자’라는 대사이거나, 만화영화의 ‘정의는 이긴다!’와 같은 것이 전부다. 정의라는 말은 스스로 내뱉기에는 꽤 부담스럽다. 그건 어릴적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에서 종종 봐온 일본 출신의 지구를 지키는 후레쉬맨 시리즈나 세일러문 언니들이 항상 적인 괴물들을 이 정의의 이름을 용서하지 않으셨기에 그를 지켜봐오며 자란 세대의 트라우마일지도. 거기다 내가 내 입으로 ‘정의’를 말하면서 정의의 사도를 자처한대도, 흔히 말하는 순결하고 지고지순한 ‘정의’에 대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공평무사함을 갖추고 있을 리가 사실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 시대와 이 사회에서는 정의(正義)라는 것의 정의(定義)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대도, 수많은 사람들의 핸드폰 종류만큼이나 다르고 많은 가치관의 홍수 속에서 정말 정의란 뭐지, 뭘까라는 생각외에 마땅히 이건 정의야,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정의를 수호하자, 라는 식의 결론은 어림도 없다.
그러나.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해서, 정의를 말하는게 힘든 것은 아니다. 가장 정의를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바로 정의가 무엇인지 알게 어렵게 만드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다. 정의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추상적인 감정들은 옳은 것, 도덕적으로 선한 것, 공평무사한 것, 그리고 만화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하길 바라는 공정한 사회질서의 구현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정말 영화나 만화,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나 중학교 도덕책에 길들여진 사고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종종 심리적 코웃음을 치고마는 이유다. ‘정의’라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은 이젠 산타클로스는 굴뚝이 없어서 오지 못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유사하다. 이제는 더 이상 정의라는 말에 속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회 속 경험과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다보니 세상에는 어릴 적에 막연하게나마 믿어왔던 ‘정의’라는 굳건한 기준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부정의의 시대를 살아간다. 부정의의 시대에 정의를 말하는 것은 이를테면, 돼지갈비 전문점에 들어가서 소 등심을 찾는 것만큼 왠지 상황착오적이다. 그런데 우리를 더 난감하게 하는 문제는 모두의 정의는 없지만, 각자의 정의는 날이 갈수록 고립된 방에서 확고해진다는 것이다. 정의라는 말이 지향하는 범주는 사회나 집단, 공동체 등의 광장이 아니라 개개인의 좁은 방에서 맴돌고 있다. 그러니 사회에서 모두가 믿고 따를만한 정의,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추구할만한 정의라는 건 찾아보기 어려울 수 밖에. 누군가 앞서 이야기했지만,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넘어서야 할 적과 벽과 거짓은 곳곳에 산재해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소설속의 이야기이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여럿을 상대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어렵다.
이렇듯, 우리는 정의를 말하기엔 꽤나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다. 정의를 좇으려고 해도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정의를 내세우는 까닭에 상대해야 할 대상들이 주변에 엄청나게 산적해있다. 어떤 정의론을 내밀어야 다른 사람들의 정의와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사실,하나의 정의론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당장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법이 있다고 해서 카오스가 당장 코스모스로 화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유의미하다. 법이 우리 사회의 질서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대립을 막기 위해 사전에 각자의 영역을 구분짓는 가로막이 되듯,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선을 추구하고, 자신과 타인,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준이 되는 철학을 우리 스스로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당신의 정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시대와 사회를 불문하고 언제나 유효적절한 질문이 된다.
앞서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오늘의 사회는 무수한 정의들이 대립한다. 이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이 아니라 모두 사회와 공동체와 개인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나름의 고민들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사회에서 온갖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정치 세력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해를 고려하는 자신의 정의를 형형색색의 깃발에 죽죽 그려놓고 그것을 서로 들이밀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정의가 우세하는 형국이 전개되고 있다. 그 정의는 연대를 필요치 않으며, 오히려 강력한 경쟁을 먹고 산다. 나의 자유가 엄청나게 소중함을 누구에게나 인식시키지만 타인은 조금 먼 발치에서 바라보게끔 만든다. 열심히 살라고 언제나 다그치지만 그 노력은 언제까지 무엇을 위해서 지속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하는 정의. 각자의 정의들이 어느덧 알게 모르게 이 정의로 수렴되고 설득당하며 이 정의는 커다란 모습을 띄게 되었다.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자신의 저서인 <정의론>에서 제기한 것과 같이, 요즘 가장 각광받는 정의는 바로 공리주의다.
정치학자 헨리 시즈위크는 공리주의의 핵심적인 사고를 ‘한 사회의 중요 제도가 그에 속하는 모든 개인이 누리는 만족의 최대 총량을 달성하도록 편성될 경우 그 사회는 정당한 질서를 갖춘 것이며 따라서 정의롭다’는 것으로 정리했다.(존 롤즈의 <정의론> 5절에서 재인용) 고등학교 윤리책에도 기술되어 있는 이 정의를 보고 있으면 바로 지금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망령이 떠오른다. 앞서 다른 논의에서도 여러번 나온 이야기이지만, 기업의 평가는 수익으로 이루어진다. 수익이 손실보다 클 때 기업경영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공리주의적 관점에 선 기업의 입장에서는 폐기물 처리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폐기물 투기에 대한 벌금보다 비용이 클 경우, 차라리 벌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이 회사의 이익이고, 회사의 이익은 회사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익이므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공리주의의 맹점은 그 이익과 성장이 과연 누구의 이익이요, 누구의 성장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때문에 집단과 집단, 사회와 사회의 비교에서 최대량의 산출로 보다 공리주의적인 정의로움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성원들의 만족이 최대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어떤 CEO가 기업의 총수익을 얼마나 올렸고, 수출이 얼마나 증가시켰고 하는 그러한 수치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수치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은 정말로 그 기업의 모든 사람의 기쁨과 행복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 기업의 수익과 손실이 국가 경제를 좌우한다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 기업의 성장은 이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기쁘게 박수쳐야 할 그 무엇인지 말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오늘날까지 잔존하는 지루한 공리주의의 딜레마이자, 우리가 풀어야 하는 최대의 숙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있다. 좋은게 좋은것이라는 사고방식, 전체를 위해서는 소수가 양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파시즘에 가까운 다수결에 대한 맹신, 각종 수치와 지수에 사로잡혀 있는 근시안적 태도, 개개인은 각자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무수한 섬과 같다는 극단적이고 그릇된 자유주의적 사고 등,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이제 한번쯤 질문을 던져도 될 것 같다. 당신의 정의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당신의 깃발은 어떤 바람을 타고 나부끼고 있는가. 한 사람의 정의는 크고 거창하고 오직 도덕적으로 선하며 자신을 희생해서 타인을 위하는 영화나 소설의 순교자풍의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정의는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마음속의 나침반이다. 대개 우리의 나침반은 자신의 행복을 향해 스스로를 나아가게 만들도록 한다. 하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은 타인의 삶과 완전무결하게 무관한 그런 삶 속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아무리 무관한 것처럼 보여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참된 자유주의는 아마 나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자유 역시 소중하고, 모두의 자유가 보다 최대한도로 보장되기 위해서 바닷가의 가는 모래알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자유의 일부를 조금씩 갉아내어 일정한 공간에 더 많은 자유의 모래알들을 채우려하는 노력에 그 진심이 담겨있을 것이다. 정의도 이와 같다.
롤즈는 <정의론>에서 자신이 세운 정교한 모형에 비추어 세운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 말한다. 그리고 이 정의의 원칙들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하고, 이것이 제한되는 경우는 그 제한으로 인해 생기는 이익이 최소 수혜자least advantaged에게 최대 이익을 가져다 줄 때만 허용된다>고 주장한다. 가족구조와 상속, 태어날 때의 출발점이 꽤 다르다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했을 때, 정의의 원칙들이란 공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위의 저러한 원칙들이라는 롤즈의 정의론에 나 역시 꽤 동의하는 입장이다. 허나, 그것을 검증하거나 비판하며 ‘정의란 이런것이다’라고 내놓는 것이 이 글의 골자가 아니다. 나는 그저 공정한 질서에 몸을 담고 싶어하는 만큼, 나 역시도 타인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공정함은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수치나 통계로 가늠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가쁜 숨을 내 쉬는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문제가 되어야한다.
사실, 정의를 다루는 방법 중에 가장 쉬운 일은 상대주의적인 결론으로 도망가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도망일 뿐이지, 원래 가야 했던 길로 돌아올 수 없다. 각자의 정의가 다를 뿐이야 하며 자본가에게는 자본가의 정의가 대학생에게는 대학생의 정의가 있다는 식의 회피는 결국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공허한 외침이다. 각자의 정의가 있을 뿐이라면 무엇하러 우리는 대화를 하는가. 그저 이익을 두고 접점이 생기는 경우에만, 세렝게레티 초원에서 맞닥뜨린 사자와 하이에나처럼 각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될 뿐인 것이다. 그러나 굳이 스르로를 동물 수준으로 낮춰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의 종족은 휴먼인데.
각자의 정의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분명 저마다 다른 층위에 있다. 무엇을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은 각자의 판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굳이 진부하고 낯간지럽지만 정의를 말하는 것은, 온갖 어려운 여건과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많은 정황들 앞에서도 사람은, 사람은 공동체를 지향하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순수한 악이란 존재하지 않고, 위악(僞惡)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연인이 있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의 부와 권력이 주어진대도 정말 혼자서 세상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그 진부한 가족과 휴머니즘의 테마들은 영화라는 매체 내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진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부함은 우리에게 늘 조금 부족하고, 심정적으로는 너무도 갈구하는 그것임에 틀림없다. 정의는 그러한 우리의 본성, 공동체와 선을 지향하는 마음을 파고든다. 함께 행복하게 웃는 사회는 개개인의 저마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노력과 연대로 맺어지는 것이다. 정의는 그를 향해 나아가는 긴 항해요, 함께 꾸는 달콤한 꿈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개 아픔을 동반한다. 내가 아프고, 희생한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감히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공정함과 우리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마음 역시 그러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나에게 이 글을 쓰게 했다. 정의란 단어가 주는 무게에도 불구하고.
상병 송희석 (2006/03/23 08:58:48)
正義를 다시 定義내리기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상원님의 글은 매우 흥미롭게 읽었으며, 그중 대부분은 저역시 그렇게 판단합니다만, 조금 더 보충설명을 부탁할겸 글을 남깁니다.
[그러나.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해서, 정의를 말하는게 힘든 것은 아니다. 가장 정의를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바로 정의가 무엇인지 알게 어렵게 만드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다]
과연 정의를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게 하는 세상때문이라 한다면 이것역시 회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규정하는 도덕 때문에 우리스스로가 정의라는 개념을 스스로 국한시켰다고 판단하시는거라면 이것은 오히려 도덕책에 나오는 정의대로 행동할것입니다. 당연히 머릿속의 국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결국 국한이 아닌 자신의 의지가 더 지배되는 것입니다. 결국 전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정의를 말하기엔 꽤나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다. 정의를 좇으려고 해도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정의를 내세우는 까닭에 상대해야 할 대상들이 주변에 엄청나게 산적해있다. 어떤 정의론을 내밀어야 다른 사람들의 정의와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사실,하나의 정의론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당장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의를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해야할 대상이 주변에 많아서라 칭하는것은 너무 개념을 좁게 보신듯 합니다. 물론 자신의 정의가 옳다는 대상들이 주변에 많은것은 사실일것입니다만, 그것보다는 세상에 몇몇의 정의들로 인하여 정의개념이 침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정의론이 있다면 사회가 당장 정의로울순 없어도 서서히 정의로울순 있습니다. 주변의 쓰레기를 투척하는것은 나쁘다. -라는 하나의 정의만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쓰레기가 투척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행복하게 웃는 사회는 개개인의 저마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노력과 연대로 맺어지는 것이다. 정의는 그를 향해 나아가는 긴 항해요, 함께 꾸는 달콤한 꿈이다.]
물론 서로가 웃기위해서는 노력가 연대로 맺어진다 판단할수 있지만, 그것역시 세상속의 한 정의라 생각합니다. 정의와 연대를 같이 판단한다면 결국 연대마저 현재 정의처럼 어느것이 옳고-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워 질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의는 저마다의 노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신이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그대로 실현하는것! - 이것이 바로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정의가 아닐까 하는 작은 생각을 해봅니다.
상원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역시 좋은글이네요!
병장 최정근 (2006/03/23 09:54:53)
정의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나만의 정의의 뜻을 세우고, 나만의 정의만 옳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네요. 잠시동안 고개를 푸욱 숙이게 됩니다.
병장 백영준 (2006/03/23 10:26:42)
힘의논리에 지배되는 정의
집단의 이익 속의 정의들에 대해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글 이었습니다.
상병 조주현 (2006/03/23 14:36:14)
잘 읽었습니다. (짝짝짝! 감사합니다)
85Hz로 브라운관을 때리고, 제 눈을 때리는 CRT모니터에서 한글자한글자 놓치지 않고 정독하기위해 침침한 눈을 비벼가면서도 끝까지 읽어내렸답니다.
매일밤, 책마을로 정독으로 지치고 꿉꿉한 눈을 부여잡고 피로의 비명을 지르는 저에게
신이여, LCD모니터를 선사하소서.
상병 엄보운 (2006/03/23 16:08:22)
잘 읽었습니다. 앞서서 논의 하며 롤즈의 정의론을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원님께서 이렇듯 올려주시니 너무 기쁘네요. 상원님 덕에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병장 한상원 (2006/03/24 00:47:10)
희석님//죄송하지만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주말중에 꼭 댓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정신이 좀 없어서요. 그리구요, < 세상에서 규정하는 도덕 때문에 우리스스로가 정의라는 개념을 스스로 국한시켰다고 판단하시는거라면 이것은 오히려 도덕책에 나오는 정의대로 행동할것입니다. 당연히 머릿속의 국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결국 국한이 아닌 자신의 의지가 더 지배되는 것입니다.> 해석 좀 해주세요. 이 부분에서 좀 막히고 있거든요.(긁적)
상병 송희석 (2006/03/24 06:33:52)
상원님// 저의 글쓰기의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저는 상원님이 도덕이란 개념을 추상적 개념 - 어릴때 도덕책에서 배웠던 것들, 누군가에게 배운것! - 이라 칭하는것에 반대하며, 그것은 머리속의 남아서 코웃음치는 것이 아닌 마음속 의지로 부터 시작된다 말하고 싶은것입니다. 이정도면 될까요?
병장 한상원 (2006/03/24 12:32:28)
희석//네, 잘 알았습니다. 주말 중에 꽤 긴 글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요즘 이상하게 좀 바빠서. 어쨌든 고마워요.
상병 송희석 (2006/03/24 13:59:06)
상원/별말씀을여! 좋은 답글을 남겨주실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감이 돕니다. 처음으로 상원님과 톨레랑스한 대화를 할수있을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웃음)
병장 한상원 (2006/03/24 14:23:30)
이제까지 희석씨와 저의 대화에는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만의 착각이었나요.(웃음)
상병 송희석 (2006/03/24 14:39:43)
별문제는 없었는데 톨레랑스한 대화는 없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