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독서후기] 정과리, '들어라 청년들아'  
병장 김요셉   2009-05-20 11:08:31, 조회: 120, 추천:1 

휴가 때면 가끔 혼자 들르곤 하던 바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것인지, 아예 오늘은 쉬는 날이라 그런 것인지 문이 닫혀있다. 혼자서 술이나 한 잔 할까 했더니, 별 수 없다. 광주에서 산 지 십 년이 훨씬 더 넘었는데도 아직 혼자 가기 괜찮은 술집은 여기 외엔 찾지 못했다. 다시 또 거리로 나와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가, 힘들게 찾아 들어간 카페는 흡연이 안된단다. 어쩌지, 그냥 집에나 갈까, 하다가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 정성스럽게 내렸다는 블렌드 커피를 주문한 것을 이러길 참 잘했구나 싶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다. 담배보다도 맛있다.
작고, 커피도 팔고 와인도 파는데다, 카페 한가운데 스탠더드 피아노 한 대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으며 잘 찾아보면 구석에 기타까지도 한 대 놓여 있는 주제에 어째서 흡연은 되지 않은 것인가 불만, 불만하며 앉아있자니 랭보의 시집까지도 보인다. 심지어!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74년에 처음 출간된 시집이고 92년에 16쇄까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현이 옮겼다는 것도 출판일이나 재판일 따위가 나와 있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알았다. 책날개엔 랭보의 사진 한 장도 옮긴이의 이름도 없이, 랭보의 약력이 단지 네 줄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1854년 아르덴의 샤를르빌에서 출생. 1873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완성. 1886년 「채색판화집」발표. 1891년 사망.

1854년의 출생과 1891년의 사망. 그 가운데의 1873년과 1886년은 차라리 없는게 더 나은 사족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사람은 태어남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니까. 모두가 그런 것이니까, 또 기형도 시인의 말대로,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이겠느냐고, ‘출생’과 ‘사망’ 두 단어만으로도 한 사람의 생은 완전해 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굳이’ 그 두 단어 사이 어디쯤에 대한 ‘삶’에 대해 더 설명해야만 할까.
내겐 언제부터인가 하루키의 글들이 죄다 개소리로만 읽혀지기 시작했는데, 죽음이 어떻게 삶 속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에서, 뭐라더라, 아무튼 죽음은 삶의 그림자로써 존재한다느니 그 둘은 항상 옆에 붙어있다느니 하는 그런 진부해서 진리같은 명제들 말이다. 그 둘이 완전히 다른 지점에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잘 모르긴 해도 삶이 죽음보다도 몇 배는 더 치열하고 고되고 슬프고 기쁜 일일 것인데 그 둘을 어떻게 같은 선상에 두고 볼 수 있는가. 죽음이야, ‘1891년 사망’ 한 문장만으로도 한 치의 빈틈없이 무결하게 완전해 질 수 있는 것이고 삶이라면 1873년에 무엇을 썼든 1886년에 무엇을 발표했든 두 문장이 아니라 그 이상, 몇 개의 연도와 몇 개의 기록으로도 다 설명되지 않아 불완전하고 미결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 둘을 마찬가지의 것으로 다룰 수 있는가. 삶과 죽음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밖에 없다.
랭보가 그랬듯 나도, 너도, 누구나 죽는다. 죽어 완전한 하나의 문장을 남길테다. 몇천몇백몇십몇년 사망.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렇게 된다. 몇 년 사망이든 몇만몇천...년 사망이든 전부 다.
그러니 단지 그 뿐이라면 좋을텐데. 모두가 단지 ‘몇 년 사망’ 한 문장만을 남기기만 하면 이래저래 귀찮은 일도 없을텐데 왜 굳이 1873년의 일과 1886년의 일을 끼워넣어야만 했을까. 왜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할까. 정말이지, ‘굳이’. 너도 굳이, 나도 굳이, 다들 ‘굳이’

정과리 교수의 칼럼집을 읽었다. 칼럼집을 읽기는 아주 오랜만인데, 짧은 호흡의 글은 좋아하지 않는지라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아니라면 칼럼집이라든지 하는 책은 대체로 피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작가라는 것도 대체로 뻔해서, ‘김규항’류의 래디컬하고 전투적인 부류라거나 ‘김경’이나 ‘이충걸’같은 소위 ‘보그체’의 속물적인 글들을 즐겨 읽는다. 정과리는 뜬금없다. 그의 평론이라면 몇 편 읽어 봤지만, 그마저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절반 정도 읽다가 덮어버렸다. 몇 편의 글을 제하곤 그리 와 닿지 않더라. 가령, 담배꽁초에서 시작해 ‘피해의식의 힘’에까지 이르는 잡념은 날카로워 보인다기 보담 지나치게 깐깐하고 엄격해 보인다. 나 같은 요즘 청년은 점잖고 엄격한 보수를 존중하고 경외할 줄을 모른다. 다만, 책의 문턱에서 던져진 화두 하나만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그 부분만을 자꾸 다시 펼쳐 들여다보게 된다.
“삶은 살 만한 것인가?”
정과리의 스승 김현이 1980년 이후 자주 던졌던 질문이라고 한다. 80년이라면, 74년 김현이 랭보의 시집을 번역해 출간한지 육 년 째 되는 해 이자 광주에서 그 일이 일어났었던 바로 그 해가 아닌가. 정의와 민주와 사상이 폭격당한 범선마냥 침몰하고 있던 그 해, 그리고 그 해 이후 김현에게 삶이란 끊임없이 진정 살아야 할 만한 것인가 되풀이해 물어야 할 만한 것 이였나 보다.
김현은 질문뿐만 아니라 그 대답 역시 남겨두었다. 첫 번째 대답은,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하고, 살 만한 것이니까”였다. “웅크린 짐승같이 살지 않”기 위해선 그렇게 삶은 “살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김현, 「상처와 치유」, 『분석과 해석』, 문학과 지성사, 1990). 이 대답에는 긍정의 여지도 부정의 여지도 없다. 삶은 옳고 그름의 판단 너머에 위치한 당위다.
두번째 대답은 정과리의 언급에서 그대로 옮겨 적는다. 

또 하나의 대답이 있다. 그이는 소설의 세계가 “작가의 욕망에 따라 변형된 세계”라고 정의한 다음, “그 세계는 작가가 해석하고 바꿔놓은 세계이다. 그 세계가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작가에게 중요하지 않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자기의 욕망이 만든 세계라는 사실이다.”(「소설은 왜 읽는가」, 같은 책)라고 적었다. 이 대답은 당혹스럽다. 질문의 존재이유를 아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변형으로서의 소설은 세계의 실상을 아랑곳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서 읽으면 그이가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당신은 그 질문을 이제 문학적 글쓰기로부터 글읽기의 운동 속에 옮겨 놓고 있다. 소설은 “‘여기 내 욕망이 만든 세계가 있다’라는 소설가의 존재론이,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라는 읽는 사람의 윤리학과 겹쳐”지는 자리라는 것이다.
정과리, 『들어라 청년들아』, 사문난적, 2008, 16p

당위형으로 제출된 대답도 쓰는 이의 욕망과 읽는 이의 윤리학이 겹치는 지점에 위치한 삶의 활로도 둘 다 썩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 그러나, “삶은 살 만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답들을 빤히 들여다보며 나 역시도 별 수 없이, ‘굳이’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느냐 질문하면서도 삶에 대한 대목을 지나칠 때면 그 엄숙함에 절로 묵념하듯 그 부분을 한참을 곱씹는다.
끝내 이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 지 찾지 못하겠다. “그래도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아서 ‘1891년 사망’, 같은 완전한 해답을 얻지 못했으니, 죽기 전엔 그런 답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니, 1873년과 1886년의 랭보처럼 위태하게라도 꾸준히 살아보는 수 밖에 없다.

좀, 살아보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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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59 

 

병장 김형태 
54.4.11.94   읽어도 읽어도 뭐라 대답할길 없이 어려운 문제라 제 삶에 피드백만 될 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05-20
12:18:32
 

 

병장 이지훈 
18.49.9.198   무섭고도 즐거운 이야기랄까요. 잘 봤어요. 2009-05-20
22:43:58
 

 

상병 정근영 
20.3.1.45   이게 얼마만에 보는 요셉님의 독서후기인지. 
랭보라하면, 식스티나인에서 겐과 그 친구가 즐겨보던 그로군요. 
삶이 완전하다면 죽음이 있을 수 없고, 죽음 앞에서 삶은 불완전할 수밖에요. 
애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인식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죽음이 아니라, 뚜렷이 보이지도 않고 예측할 수도 없는 '삶'이란 놈밖에 없었으니, 어떻게든 삶 속에서 발버둥쳐봐야죠. 
잘 읽었습니다. 2009-05-21
11:09:10
 

 

병장 이동열 
22.36.32.20   정과리교수가 저희학교 교수님였던것같기도 하고... 문학수업때 그의 글이 실린 책으로 공부해서 그런지 이름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름만 들었지 마주친적이 없었기에 요셉님의 글로 만나게 되어 왠지모를 반가움이 앞섭니다. 

기왕이면 살아보는것, 재미나게 같이 살아봅시다. 혼자서 발버둥치기에는 함께할 사람들을 만난것 같지 않나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