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회 병영문학상 소설 분야 공모작
5사단 본부근무대
05-73057247
상병 박수영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들은 아주 낯설고 생소하지만 동시에 익숙하다.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 같은 지속의 세계에 어떤 갑작스러운 변화나 돌발적인 상황에 맞닥뜨릴 때, 삶은 이레귤러 바운드 마냥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불확정의 가능성과 조우하게 된다. 당연한 듯 의심없이 옮기던 발걸음을 그런 불확정성 앞에서 무엇을 근거로 어디로 옮겨야 하는가? 과연 나는 미지에의 공포를 이겨내고 전진 할 수 있을 것인가.
◆
'가장 싫은 선임이 있습니까? 있다면 누구이고, 이유는 무엇입니까?'
슥슥
쪼그리고 앉아서 별 생각 없이 연필심을 놀렸다
설문지에 묻혀 진 흑연 쪼가리는 금세 다른 설문지에 묻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공포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감겨진 망막 뒤 켠에서 형광등의 잔영이 어지럽다. 잠시 후 눈을 떴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낡을 대로 낡아 흉하게 칠이 벗겨진 회색빛 복도는 언제보다도 길어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무실까지 가기 위해선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단 1cm 의 거리라도 그냥 움직이는 것이 없이, 내 발을 이용해서 '직접' 움직여야 한다. 때로 '순간이동' 이나 '시간이동' 따위의 상상을 해보지만 항상 그런 류의 망상은 현실의 견고함에 덧없이 무너져 내릴 따름이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멈춰 있는 발을 다시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 딛는 발걸음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정적을 타고 멀리 들려오는 내무실의 분주한 소리가 달팽이관을 넘어간다. 평소라면 바쁜 발걸음을 놀리다보면 어느새 내무실에 도착해 있고는 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나는 다른 잡일이나 업무로 다시 바쁘게 움직인다. 하루에 두 세 번 정도 갈굼을 당하고, 게눈 감추듯 세끼 밥을 챙겨먹고, 무릎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열심히 청소를 하고, 22시가 되면 지친 몸을 좁은 매트리스에 눕힌다. 야간 근무가 없다면 금상첨화다. 한 번도 그걸 행복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지금 막 그 행복함의 카운트가 하나 올라갔다.
주춤 주춤.
그렇게도 멀게 보이던 복도가 어느새 뒤로 물러서고 나는 내무실 문 앞에 섰다. 청소가 끝났는지 내무실에는 나직한 잡담소리와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만이 울려 퍼지고 있다. 손목시계를 흘끗 내려다보니 21시를 막 넘어서고 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끼릭하고 문이 미약한 소음을 내며 열렸다. 그러자 방금까지도 분주함에 감싸여 있던 내무실에서 거짓말처럼 정적이 내려 앉았다. 문을 열고 옮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압박감으로 인해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침상 한 가운데에 나른한 듯이 누워있는 사람이 리모콘을 천천히 조작한다. TV가 꺼지고 내무실은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한 가운데에 뻣뻣하게 섰다. 힐끔힐끔 노려보는 선임들의 시선이 따갑다. 식은땀이 등으로 흘러내린다.
“김선우”
“예.옛!!! 이병 김.선.우!”
그의 차갑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적을 찢으며 내무실에 울려퍼졌다. 반사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뛰어갔다. 반응은 민첩하게, 속도는 빠르게, 그러면서도 소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자대로 오자마자 수 많은 주의사항을 들어야 했고, 나는 그 주의사항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야 했다. 그의 목소리는 신경가스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내무실 구석구석 번져나갔다. 몸속으로 스며드는 그 서늘한 기운에 그의 앞에 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진다.
“너. 미쳤구나.”
비스듬히 누워서 이제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TV화면을 응시하던 유봉남 병장의 시선이 나를 향해 돌려졌다. 찢어진 눈매가 나를 바라본다. 오싹하다. 그저 욕지거리나 주먹질을 휘두르는 다른 선임들과는 계통이 다른 공포감이었다.
선임들의 갈굼은 흔히 “미쳤냐?” , “죽고싶냐?” 등의 질문이나 의문문으로 시작했다. 그럼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곤 “죄송합니다.” 를 연신 읊었다. 그건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면 대개는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 되곤 했다. 잘 해봐야 뒤통수 한 대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단정 지어졌다. 나는 미쳤다. 다리에서 시작한 떨림은 이제 손을 거쳐 입까지 전해져왔다. 공포가 뇌를 하얗게 물들였다. 어떻게든 대답해야 했다. 덜덜 떨리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은 익숙한 ‘죄송합니다’ 였다.
“죄....죄송..합니다.”
“뭐가?”
꿀꺽. 마른 침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서...설문지...에.. 유..유봉남 병장님 이..이름을...”
“똑바로 안 말하냐? 죽인다. 너”
“죄..죄송합니다!”
유봉남 병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차마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떨며 서 있었다. 침상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유봉남 병장의 발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위에서 코웃음치는 웃음이 들려왔다.
“고개 들어”
“예..예!.. 크.쿱..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부에 강한 격통이 느껴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질러진 발은 고스란히 나의 복부를 푹-하고 꺾었다. 나는 아픔에 순간적으로 소리를 낼 뻔했으나 간신히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나서야 복부에서 각목으로 후려쳐진 것 같은 둔중한 아픔이 느껴졌다. 의식이 멍해지고 숨결이 거칠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몸을 추슬러 몸을 다시 꼿꼿하게 편다. 눈물이 새어나와 시야가 뿌옇다. 그 덕에 유봉남의 매서운 얼굴이 일그러져 보인다.
“올라가서 벽 보고 앉아있어. 병신같은 새끼.”
나는 그 말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 재빨리 슬리퍼를 벗어 가지런히 밀어놓고선 침상으로 물러서면서 올라가 회색 벽을 마주했다. 마치 사극에서 왕을 알현하고 물러서는 듯 한 움직임이다. 뒤로 수 보를 후퇴했고, 벽에 도착했다. 여전히 배는 욱신욱신 아프고, 심한 긴장 탓에 정신이 없지만 이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시야가 너무나 뿌옇게 되어 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활동복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정체를 드러낸 회색 벽은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쩍쩍 금이 가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거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얼마 후 긴장이 풀리는지 다른 선임들에게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병 일도 어떤 새끼야”
하지만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번엔 발 대신 가차 없는 싸대기가 다른 이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또 신음을 삼켰다. 상병 일도인 정상혁 상병일 것이었다. 나는 차마 뒤돌아 볼 수가 없어 계속 금을 노려보았다. 금 투성이의 회색 벽에 쪼그려 앉아있는 내가 투영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결국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랫것들 관리 안 하지. 이 잡것이.”
내무실은 다시 팽팽한 긴장에 감싸였고 그 날 점호는 길고 괴로웠다. 그리고 나는 고통 때문인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서글픈 감정 때문인지 모르는 눈물을 흘려가며 회색벽을 밤새 마주해야 했다.
◆
유봉남은 우리 내무실의 독재자다. 다른 내무실이 분대장이나 짬밥이 많은 병장‘들’에 의해서 분위기가 좌우되는 것과는 달리 우리 내무실은 유봉남 한 사람의 말에 의해서 모든 것이 좌우되었다. 듣기로는 이등병 때 상병과 맞장을 뜬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상병과 함께 영창을 나란히 다녀 온 후로 선임들은 그를 거의 건들지 않아 왔고, 시간이 지나 분대장에 병장 일도인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분대장이라고 해도 상병 후반이나 병장 초반 정도로 도저히 유봉남에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180cm이 넘어가는 큰 키에 찢어진 눈매와 흉흉한 인상. 말 보다 주먹이 먼저 나갈 법한 사람. 아. 이 사람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그것이 유봉남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더욱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은 이 사람이 바로 내 사수라는데 있었다.
스팀이 뿜어져 나오는 좁은 사무실 안에서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그는 옆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서 잡지를 읽었다. 간부님은 자주 자리를 비우셨고, 사무실에는 나와 유봉남 두 사람만 있는 일이 잦았다. 공간이 정적에 잠기면, 나는 유봉남이 앉아 있는 오른쪽으로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왼쪽과 정면의 90도만을 움직였다. 마치 무쇠로 된 장벽이 막고 있는 것처럼. 가끔 유봉남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만 나는 놀라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런 환경은 나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았다. 처부가 다르면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일과 후나 되어야 내무실에서 만난다. 처부가 같더라도 사수가 아니라면 다른 일을 하느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유봉남은 내 사수였고, 나는 잠자리와 근무 나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유봉남과 항상 붙어있어야만 했다. 서로 간에 오가는 대화는 갈굼과 사과 뿐이었다. 아니 사실 갈구고 때리는 건 굳이 유봉남이 아니더라도 다른 선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말 나를 미치게 했던건 아무렇지도 않게 잡지를 읽다가 가끔씩 보내고 하는 날카롭고 서늘한 응시와 꾸벅꾸벅 졸다가도 문득 내지르는 갈굼의 한 마디였다. 나는 어디서도 자유롭지 못했고, 긴장에 사로 잡혀 있었다.
보통 선임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선 후임들을 갈구더라도 일대일로 만나게 되면 위로의 한마디라도 건네거나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유봉남은 달랐다. 그는 언제, 어느 순간에서라도 흉폭했다. 사무실에서 나를 갈구곤, 내무실에 와서 점호를 취하기 전, 점호를 취하고 나서 언제든지 다시 누군가를 향해서 차가운 욕설을 퍼부었다. 게다가 그가 더욱 무서운 것은 그것이 오로지 ‘같은 내무실의 병사’로 한정되어 졌다는 것이다. 간부들에게는 깍뜻하고 정중한 태도로 대했음은 물론 다른 부대나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타 내무실 병사들에게는 잘 대해주었다. 차라리 유봉남이 앞뒤 가리지 않고 폭발하는 미친 개 같은 자였다면, 금세 도태되거나 쫓겨났겠지만 그는 교활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였다. 그는 내무실의 군기를 확립하는 깍듯하고 번듯한 분대장으로 간부들에게 인식되고 있었다.
그가 전역하려면 앞으로 3개월, 그의 위치는 확고했고, 그 동안에 그의 아성이 흔들릴 일은 없어보였다. 우리 내무실 사람들은 그의 전역일을 한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이 구원처럼 보였다. 내무실은 정체되어있었고 도무지 나아질 기미라곤 보이지 않았다.
◆
분명히 무기명으로 했음에 틀림없던 설문지의 결과는 어느새 유봉남 병장의 귀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번뜩이며 그 설문지의 작성자를 찾고 있었다.
어느날, 일과가 끝나자마자 유봉남은 모든 병사들로 하여금 종이에다가 글을 적게 했다. 일,이등병들은 어리둥절하며 종이를 꺼내 시키는 데로 적었지만, 상,병장들은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다만 각자의 펜 움직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타고 흘렀다.
잠시 후 유봉남 병장이 천천히 걸어가며 종이를 훑어봤다.
간간히 들고 있는 종이조각을 들여다 보았다.
그렇게 천천히 걷던 유봉남의 날카로운 눈매가 내 앞에서 멈췄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앉아 있는 내 시야에 종이조각이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있는 종이조각은 어딘가 기억에 있는 설문지의 복사본이었다.
그리고 그 설문지에는 내 필적이 가지런히 적혀있었다.
“이. 말아먹을 놈의 잡종새끼가.”
유봉남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눈이 분노로 희번득 거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덜덜 떨었다. 어째서 저게 유봉남 손에 들어 가있는가 그런 의문이 머리를 가득 매웠다.
그 순간 방송이 울렸다. “김선우. 이병 김선우. 지금 즉시 행정반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나였다.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구원의 손길을 만난 난파객처럼 떨리는 손으로 슬리퍼를 신고
행정반으로 향했다. 하지만 용건은 유봉남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것이었고, 30분이 지나자 나는 다시
지옥으로 발걸음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선우야.”
“예!. 이병. 김.선.우!”
“근무 나가자. 암구어는 숙지 했지?”
“예! 이병 김.선.우. 금일의 암구어는...”
“알고 있으면 됬다. 나가자”
오랜만에 듣는 따스한 음성이었다. 정상혁 상병과 함께 탄약고 근무를 나섰다. 그 일로부터 3일이 흘렀다. 사건 이후 나의 생활은 수 배는 빡빡하게 바뀌었다. 유봉남의 명령으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은 감시되어졌고 조금만 실수를 하거나 꾸물거려도 바로 욕이 날아 들어왔다. 심지어는 화장실을 가거나, 전화를 하러가는 사소한 일에도 감시인이 따라 붙고 있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오로지 무표정만이 허락되었다. 나는 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경험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자유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바로 이 근무시간이었다. 유일하게 유봉남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시간. 이때는 사수들도 나를 갈구는 것을 그만두었다.
탄약고에 도착하고 나는 초소 바깥에서 좌 경계총을 하고 섰다. 정상혁 상병은 평소에도 사리분별이 명확하고 공정해서 좋아하는 선임이었다. 그런 그가 나 때문에 유봉남에게 뺨을 후려 맞았기 때문에 나는 미안한 감정에 어쩔 줄 몰랐다. 심한 욕이나 싸대기 한 두 대 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내가 그라도 그랬을 것이다. 몇 일 지나지 않으면 병장인 까마득한 계급인데 이등병 때문에 뺨을 얻어맞다니, 누구라도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김선우”
“예! 이병. 김선우!”
정상혁 상병이 나직하게 말했다. 올 것이 왔구나. 나는 각오를 굳혔다.
“요즘. 힘들지? 유봉남 그 자식 때문에”
“예?”
너무나 뜻밖의 말에 나는 최대의 금기어 중 하나를 내뱉고 말았다.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계속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아..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실수로..!”
“아아. 괜찮아. 괜찮아.
힘들지? 요즘?“
여전히 고개는 탄약고를 향한 채로 나는 힐끔 초소 안을 바라 보았다. 초소에 팔을 괴고 나를 바라보는 정상혁 상병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시선을 급히 탄약고로 돌렸다.
“괘..괜찮습니다!”
“숨길 거 없어. 누가 봐도 힘든 상황이니까. 솔직하게 말해.
유봉남 그 자식한테는 말 안할 테니까.“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온화한 정상혁 상병이 이렇게 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처음 보았다. 나는 어떻게 대응할지를 몰라 우물거리고 있었다.
◇
힘들지? 라는 내 말에 선우는 어지간히도 놀란 듯 했다. 세뇌 당하다시피 교육받았을 “예?”가 튀어나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자대에 오기 전 부터 선우는 모두의 동정을 사고 있었다. ‘하필이면 유봉남 그 놈의 부사수라니 나라면 탈영하지.’ , ‘자살해도 시원찮아’ 이런 우스갯소리가 돌곤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유봉남의 부사수로 온 선우는 힘들어 했다. 그나마 있던 짬이 되던 병장들도 전부 전역해 버리고 내무실은 유봉남의 완전히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병장들도 유봉남의 눈치를 슬슬보며 피해버리고, 상병들은 이등병처럼 유봉남에게 얻어 맞았다. 그런데 숙면시간을 제외하곤 달라붙다시피 있어야 하는 선우의 고충은 이루 말 할 수 없으리라. 올 당시 만해도 적당히 살집이 있어 보였던 선우는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눈에 띄게 말라가고 있었다. 눈 밑의 시꺼먼 다크서클에도 개의치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유봉남의 쫄따구 노릇을 하는 것에 다들 안쓰러워했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유봉남은 유난히도 이등병들을 싫어했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존나 어리버리까는 이등병들 다 죽여버리고 싶다”
그들도 적응이 안 되었을 뿐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님에도 유봉남은 이등병에 대해서라면 유독 잔인할 정도로 군기를 잡곤 했다.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어가며 계급이 높아짐에 따라 정도는 더욱 심해졌고, 지금에는 상병들과 일병들을 동원해서 이등병들을 반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부사수인 선우는 제 일 타겟이었다. 조금이라도 봐주는 모습이 보였다간 상병들을 불러다 조졌다. 도리가 없었다. 상병들도 살기 위해 일병을 갈궜고, 일병들도 살기위해 이등병을 갈궜다. 내무실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에 같은 분대장인 나에게 그 따위 태도라니 -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선우가 내 반응에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유봉남 그 새끼 때문에 그런거니까.
아아. 생각만 해도 열받네. 하하 그렇지?“
“예...예에.. 그..그렇습니다.”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는 선우를 보며 나는 감정을 추슬렀다. 내가 감정적으로 나가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는다. 함께 군 생활도 오래한 처지이고 3개월 후면 집에 갈 사람을 두고 무슨 실랑이를 벌이나 하며 못 본채 지나갔지만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걸 천천히 꺼내놓았다.
◇
“유봉남 없으면 좋겠지?”
“아...예..예.. 아니.. ”
“나는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새낀 공공의 적이야”
나는 긴장감으로 침을 삼켰다. 귀를 쫑긋 세우고 정상혁 상병의 말에 집중했다.
“솔직히 요즘 이런 군대가 어디 있나. 병영문화혁신이다 뭐다 해서
다들 잘 갈구지도 않고 서로서로 잘 지내는데.”
“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친구는 나와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그 친구는 같은 이등병인데도 병장의 침구류를 개지도 않고, 슬리퍼를 대령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관등성명을 대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등병간에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사제 샴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심한 괴리감에 더욱 괴로워했다. 나도 저런 곳에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를 지배했다.
“선우야.”
“예!. 이병. 김.선.우!”
“우리 한번 한 걸음 앞으로 가 볼까?”
“아.. 잘못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그러니까 한번 바꿔볼까? 숨 좀 쉴 수 있는 그런 내무실로.”
“그... 어떻게..”
나는 놀라움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정상혁 상병의 얼굴을 보았다. 정상혁 상병은 빙긋 웃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봉남과는 다르게 곧고 강한 의지가 담긴 시선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면 돼. 그걸로 충분해.”
정상혁 상병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나는 뭔가 중요한 변화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몇 일이 지나지 않아, 중대장님 앞으로 익명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부대는 뒤집혔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건들은 모두 생애에 하나 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아주 낯설고 생소한 것들이라 당사자들이 그것들을 미리 대비하거나 준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렴풋이 변화의 예감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나 역시 처음으로 느낀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중대장님에게 도착하는 익명의 편지는 발신인을 알 수 없도록 타이핑 되어있었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유봉남 병장의 악행과 폭행에 대해 하나하나 고발한 그 편지는 유봉남 병장에 대한 강력한 처벌 및 부대 전출을 건의하고 있었다. 즉시 중대에서는 진상규명단이 구성되었고, 피해자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 자세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유봉남 병장 역시 제 일 순위로 불려갔음은 물론 다른 내무실에 격리조치 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대처는 놀라울 정도로 수동적이었다. 모두들 두려워 하고 있었다. 자신이 ‘총대’를 매는 것 -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한보 전진하는 것을. 가끔씩 식당에서 유봉남 병장의 차갑게 쏘아보는 시선에 내무실 사람들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었다.
피해자는 분명 우리들 일 것인데, 마치 우리는 피의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만약 유봉남 병장이 이대로 내무실에 복귀하게 된다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할 것인가? 네가 할 건가? 내가 할 건가? 모두들 책임지기 싫어했다. 누군가 전진하지 않으면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나 역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소대장님이 의미 있음직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나는 억지로 눈길을 피했다. 되도록이면 누군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나서주었으면 했다. 나는 제 일 피해자이고 이등병인데, 이런 순간에 까지 그 책임과 위험부담을 다 내가 뒤집어쓰기는 싫었다.
조사는 지지부진해졌다. 편지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렇다 할 피해자도 나타나지 않아 이번 사건은 유봉남 병장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보내진 ‘허위고발’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진상규명단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유봉남 병장은 여전히 격리되어 있었음에도 내무실에서는 벌써부터 그의 복귀를 조심스럽게 점쳐보고 있었다. 3개월만 참으면 돼. 본인도 이 정도 당했으니 전처럼 심하게 지랄하진 않을 거야. 누군가 말했다. 나는 내심 고개를 내 저었다. 나보다 훨씬 더 그 사람과 오래해 왔음에도 그렇게 유봉남을 모르다니. 내 사회경험이 그리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잔혹함과 압도적인 위압감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향해 위협을 가했던 내무실을 그는 반드시 어떤 방법으로든 보복하고 말 것이다. 얼마 전 식당에서 우연히 조우했을 때 그걸 더욱 확신했다. 바로 옆에 간부님이 붙어 있어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흉흉한 눈빛이 나를 짧게 응시했다. 거기에는 가벼운 비웃음마저 담겨 있었다. ‘너희가 그럼 그렇지 별 수 있나. 돌아가서 보자.’ 라는 그런 눈빛. 불과 1초도 안 되는 짧은 마주침이었지만 그 시선은 오래도록 뇌리에 박혔다.
여기서 무언가 해야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무서웠고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 후 중대 행정반 앞 게시판에 공고문이 붙었다. 앞으로 5일 간의 기간 동안 피해자가 나서지 않을 경우, 증거 불충분으로 유봉남은 내무실로 복귀한다고 했다.
나는 깊이 고민했지만 결국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갈팡질팡했다. 5일의 유예가 다가오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날 정상혁 상병이 나를 따로 불러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분명 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정직함’과 ‘용기’를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비겁했고 도망치고 말았다. 나는 입술을 지끈 깨물었다. 정상혁 상병을 볼 낯이 없었다. 중대 앞 휴게실로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움직였다. 군대에 와서 내 발걸음은 좀처럼 당당해지지 않았다. 언제라도 주춤주춤, 의지가 없는 발걸음. 나도 내 자신이 싫었다. 휴게실 벤치에는 정상혁 상병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 유봉남이 없으니까 좀 살만해?”
정상혁 상병은 차가운 탄산 음료를 건네며 그렇게 말을 걸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봉남이 격리된지 1주일 몸은 이전보다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편했다. 당장 그가 옆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육체에 걸리는 부담은 현격히 줄어들었고, 밥도 훨씬 잘 넘어갔다. 하지만 정신적인 부담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커졌다. 누군가 대신 나서서 유봉남을 쫓아내주길 바랬지만 결국 아무도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고 나도 도망치고 말았다. 다시금 간부님들을 만나 모든 걸 털어놓을 까 수도 없이 생각해보았지만, 행정반 문을 두들기려고 할 때마다 유봉남의 그 차가운 눈길과, 사나운 눈매와 흉흉한 인상. 난폭한 발길질 따위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좀 불편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나도 이렇게 까지 다들 겁쟁이 일 줄은 몰랐다.“
딸깍- 하고 캔따게를 열어 젖히며 정상혁 상병은 씁쓸하게 말했다.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정상혁 상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이렇게 이등병이 상병에게 말을 거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그것도 분대장이라면 더욱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이런 식으로 다 털어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기. 정상혁 상병님”
“음?”
“그. 역시. 그 편지는 정상혁 상병님께서 보내신 겁니까?”
“아아? 그거야 당연하지.”
정상혁 상병은 피식 짧은 웃음을 날리며 음료를 들이켰다. 나 역시 왠지 목이 타서 음료를 들이켰다. 들이킨 탄산이 목젖을 따갑게 달궜다. 탄산 음료마저 나를 책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선우야.”
“예! 이병 김.선.우”
정상혁 상병은 캔을 내려놓은 뒤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 때의 그 눈빛이다. 함께 탄약고 근무를 설 때의 강인한 의지가 깃든 두 눈. 그 검은 눈동자에 내가 투영된다. 어쩐지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전에 이야기 했던 거 기억하지?”
“....예..”
“이건 한 걸음의 문제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정상혁 상병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정상혁 상병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라도 좋아. 공포를 이겨내고 한 걸음 전진하면 그걸로 끝이 난다.”
“그...그렇다면 정상혁 상병님이..해..해주시면..”
내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굴한 발언이었다. 이등병의 생활이 몸에 밴 것일까. 유봉남과 함께하면서 나는 패배의식에 젖은 것일까. 하지만 무서웠다. 아무라도 나서기만 하면 끝난다면 정상혁 상병처럼 강인하고 의지가 있는 사람 - 리더가 나서주면 안되는 것일까. 하지만 정상혁 상병님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나도 할 수 있는 선까지는 말을 해놓았지.
하지만 나는 피해자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제 일 피해자는 이등병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얻어맞았고 유봉남에게 괴롭힘을 당한 건 선우. 너다“
“예.”
“내가 유봉남에게 맞았다고 해도 그건 속칭 계급 좀 되고 짬밥 좀 되는 사람들 간의
사소한 다툼정도로 끝나고 말아. 그래서야 유봉남은 다시 내무실로 복귀하고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겠지. 그건 싫지?“
“예!”
나도 모르게 강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정상혁 상병은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툭쳤다.
“네가 얼마나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는 지 잘 안다.
군대라는 계급사회에서 최하계급으로써 얼마나 큰 압박감을 느끼고 심리적인 고통에 시달리는지.
하지만, 그 걸 이겨내고 전진하지 않는 한
우리 내무실은 이보다 더 뒤로 후퇴하고 말거야.
이 이상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부디 네가 현명하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그리곤 정상혁 상병은 미련 없이 일어났다. 나도 정상혁 상병을 따라 벌떡 일어났다. 정상혁 상병은
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는 이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군대에 와서 이 정도로 나 같은 후임에게 예우를 갖춰주는 선임은 없었다. 심지어 나 때문에 뺨을 얻어맞는 모욕적인 상황에 처했는데도 나에게 싫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나를 믿고 스스로의 군 생활을 걸고 중대장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그리고 그 신뢰를 저버린 지금에 와서도 그는 의연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정상혁 상병님!!!”
저 멀리에서 정상혁 상병이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상당히 먼 거리를 있는 힘을 다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갸우뚱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정상혁 상병을 앞에 두고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듯 하다. 달리기 때문인지 감정이 고조 돼서 그런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전에. 하아.하아. 저 때문에. 유봉남 병장한테. 뺨 얻어 맞으신거. 하아.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하아”
힘들어서 그런지 너무 가슴이 벅차서 그런지 왠지 눈 앞이 뿌옇다.
“뭐야. 그 말 하려고 이렇게 뛰어 온거냐? 어? 근데 너 울어?”
“아. 아닙니다. 안 웁니다.”
놀라서 전투복으로 눈물을 훔치는 나에게 정상혁 상병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유봉남 병장에 대한 것 전부.”
◆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중대장님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유봉남 병장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상습적인 폭행과 폭언이 도를 지나치고 있어, 이등병 뿐만 아니라 일병, 상병 들에게도 이르고 있다. 내 말을 전부 들으신 중대장님은 그 동안 수고 많았다며 등을 두들겨 주셨다. 그리곤 최대한 빠른 조치와 어떠한 보복도 없을 것임을 약속해 주셨다. 그리곤 곧 유봉남 병장에 대한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언제 중대에 소문이 퍼졌는지 그동안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피해자가 하나 둘씩 행정반의 문을 두들겼다. 이등병 뿐만 아니라, 일병, 심지어는 상병까지 있었다. 간부님과의 상담 후에 진술서를 적었다. 유봉남의 진술서는 한 장뿐이었지만, 피해자 장병들의 진술서는 책상에 수북히 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헌병대에서 수사과장님과 헌병들이 찾아왔고 나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유봉남 병장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것은 매우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고 나를 오한에 떨게 했던 유봉남 병장이었건만 불과 수 일 만에 유봉남 병장은 놀랍도록 초췌해져 있었다. 여전히 나를 보는 눈빛은 차갑고 날이 서 있었지만 거기에는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박력과 공포감이 사라져있었다. 처음으로 ‘아.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악마나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 까지 신격화 되었던 유봉남의 무거운 존재감이 점차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짧은 대질 심문을 마치고 나는 유봉남 병장과 단 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유봉남 병장은 나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새끼. 겁도 없이....”
“아직도 그런 태도입니까? 영창 가서 정신 좀 차리고 오는 게 좋을 겁니다.”
내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당당한 말이었다. 내 말에 유봉남 병장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를 갈아 붙였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여전히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기세를 타고 나도 눈에 잔뜩 힘을 모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유봉남 병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어딘가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포기한 듯 한 그런 사람의 얼굴이었다.
“너 내가 전역하면 나중에 찾아서 조져버릴 테니까 각오해라.”
“그러시던지요. 하지만 바깥에서는 영창으로만 끝나진 않을 겁니다.”
거침없는 내 말에 다시금 유봉남 병장은 어금니를 갈아 붙였지만 그 이상 나에게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내 건장한 헌병들이 들어왔고, 유봉남 병장은 그들에게 어깨를 붙들려 부대를 떠났다. 부대를 뒤로하는 유봉남 병장의 등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리고 이 후로 그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일은 없었다. 군 생활 동안에는 물론 전역한 후 까지도 말이다.
유봉남이 사라진 이후로 내무실은 정상혁 분대장의 주도로 많은 것을 바꾸었다. 폭행이나 폭언을 뿌리 뽑는 것은 물론 상존하던 내무 부조리의 대부분을 버리거나 개선했다. 기존 기득권층인 상, 병장들의 반대로 인해 모든 것이 평등해지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부분에 한해서는 용서가 없었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내무실의 모습은 몰라 볼 정도가 되었다. 모두가 100% 만족하지는 않았으되 모두가 동의했다. 유봉남이 있던 시절에 비해서 훨씬 살기 좋아졌다고.
전진한다는 것은 가슴속 어딘가에 새겨 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문을 열어 자욱한 안개 속을 헤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내딛으며 마주치게 될 미지의 것에 대한 각오가 말이다. 비록 나는 군대에서 자그마한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것들은 정상혁 상병의 주도로 되었고 나는 몇 마디 말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그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40명 남짓한 인원이 사는 자그마한 조직이지만 하나의 ‘공동체’의 커다란 진보에 나의 한 보 전진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 가슴에 깊게 새겨 넣을 것이다.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