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인사] 전역인사입니까? 얼개입니다. 얼개입니까? 내글내생각입니다. 내글내생각입니까? 전역인사입니다.  
병장 윤영돈  [Homepage]  2009-01-08 12:16:57, 조회: 246, 추천:1 

- 얼개스런 전역인사를 쓰려다 전혀 전역인사스럽지 않게 되어버린 전역인사




1. 산에 가고 싶다ㅡ 하릴 없이 쇼파에 걸터앉아 있을 때 든 생각이었다.


2. 변덕스런 마음이었지만 때때로 이런 마음엔 나름대로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담겨 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아무런 정보도, 준비도 하지 않은채 입고 있던 트레이닝바지에 후드를 눌러쓰고 인터넷에 가장 가까운 산이 어딘지 검색하곤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타며 찾아갔다. 다 낡아빠진 스니커즈에 한겨울에 얇은 후드티하나 걸친 어딜봐도 등산과 어울리지 않는 멍청한 옷차림이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구나. 라고, 처음엔.

산 중턱도 못가 헉헉대기 시작했다. 담배를 끊어야 겠어. 아니, 그전에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이 버릇부터 고쳐야지.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몸을 기어오르는 추위를 느끼며 구석에 쭈구리고 앉았다. 담배를 문다.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버릇부터 고치는거니 즉흥적으로 생각한 금연생각도 나중에 차차 생각해보자. 거지같은 핑계거리를 내세우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치이익- 그러고보니 난 산을 싫어했구나.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때. 그래, 이렇게 추운 날이었어. 동네 친구들과, 동네 약수터를 올라가서, 동네방네 뛰어다니고 있다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얼어붙은 연못. 몇번 건들어보고 적당히 얼었다싶어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얼음이 무너지면서 내가 있던 자리가 물속으로 빠져버렸지. 이렇게 띄엄띄엄 말하는건 사실 기억이 잘 안나거든. 미끄러지다가 물에 빠져서 눈떠보니 동네어른들에 의해 구해져서 '몇번 세면 집에가요?'라는 천진난만한 대사를 친 것밖에 기억이 안나니까. 하지만 그건 기억해. 형- 물에 빠진 동생을 구하기위한 잡으라고 내민 고드름. 응? 고드름? 미친. 나와 나이차도 많이나신 분이 왜 그러셨는지. 그랬거나 말거나 아름다웠던 산에 관한 에피소드.

오기. 오기. 오기. 오기. 이것밖에 남은게 없었다. 18세 가량에 산을 올랐을 때의 기억은- 체육관에서 체력단련을 목적으로 정상까지 일직선으로 뛰어올라갔을 때.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올라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뒤도 안보고 무작정 전속력으로 뛰는 사람을 보고 안 쫓아갈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낙오자는 신경쓰지 않겠다. 정상에서 보자'라는 3류 전쟁영화스런 대사만 안쳤을 뿐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었다. 체력에 한계가 오면 먼저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폐엔 거슬리는 올가미가 걸리는 것 같고, 목은 쓰라려 온다. 사람이 몸이 주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달리면 그 뒤엔 다리가 풀려온다. 땅바닥에서 무언가가 잡아 끈다는 표현도 간혹 나오긴 하지만 그건 달리고 나서 다시 움직일 때 이야기고 이럴 땐 다리에 스파크가 난다. 다리에서 일어난 스파크는 전혀 상관없는듯한 어깨로 옮겨가고 스파크가 어깨에 걸리면 허리 뒤쪽에 강한 철사로 엮어놓은 듯한 쇠고랑이 매달리고 머리안에선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란 생기지 않는다. 헛발질을 계속한다. 통제의 범위를 넘어섰다. 이를 악문다.
벌써 4명이 탈락했다. 8명이서 시작한 체력단련은 반밖에 남지않았다. 아니, 반이나 남았다고? 저 관장이란 분은 오로지 앞만보고 달린다. 18년간 외길인생을 고집하신 달인분을 따라잡기엔 내 체력이 너무 저질이구나. 저질인데. 빠득- 통제를 잃은 발을 다시 굴린다. 오기. 오기. 오기. 오기. 정상까지 따라올라가 주마. 달인분이 짓는 허탈한듯한 쓴웃음은 너무 자존심 상하잖아. 얼래. 엎어졌네. 일어난다. 나도 앞만보고 달린다. 이를 악물고 달린다. 내가 다신 산에 오나보자. 그랬거나 말거나 아름다웠던 산에 관한 에피소드.


3. 새록새록 떠오르는 아름다웠던 일들이 내 몸을 떨게 했다. 젠장. 산에 왜 왔지.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는 이제 세가치가 된다. 일어나자. 여기서 다시 돌아가기엔 아깝잖아. 다시 발을 옮긴다. 얼어버린건지, 비가 오지 않아서 그런건지 건조한 소나무 낙엽들이 신발을 신고 있음에도 거칠다는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가자. 이건 겨우 등산로에 불가하잖아. 컨츄리로드라고해도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고. 날씨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이제 사람들이 산을 찾지 않는건지 등산로는 사람하나 없이 적적했다. 당신도 많이 외로운 것 같군요. 산은 불쌍해, 언제나 기다리기만 해야하잖아. 푸핫- 뭐야, 이 마에노,이자와같은 3류 시상은. 혼자 어설픈 개그를 하며 산에 오른지 1시간여 쯤에 됐을 때 정상에 올랐다.

올랐다. 올랐는데, 딱히 할게 없네. 한눈에 보이는 도시의 정경과 그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다른 산들. 산 특유의 폐부를 정갈하게 해주는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보는 정상의 풍경은 분명히 멋진 일이었다. 하지만 느껴지는게 없었다. 분명한데도. 정상의 장관을 만끽하기엔 내가 너무 산을 싫어해서일까. 아니면, 영상과 사진을 통해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익숙해져 버린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빛이 바래서 였을것이다. 그것이 내 이유이든 산의 이유이든. 세상은 너무 많은 걸 보여주고 나라는 개인은 너무 많은 걸 봐왔다. 익숙해짐에 따라 새로운 것은 없다. 실제로 경험하는 즐거움? 씨익- 이젠 심적으로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이상 왠만한 것에 놀라기에는 지루하니까. 이건 내가 성장하고 강해진게 아니다. 메마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까닭이다.


4. 굳어버렸다. 이래서야 오기와 지루함으로 충만한 불길하디 불길한 내 예전시절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 세상엔 분에 넘칠 정도로 아름다운게 많다. 또, 분에 넘칠 정도로 슬픈 것도, 우울한 것도, 즐거운 것도 많고. 이런 것들이 익숙해질리 없다. 너무 많으니까. 누군가가 그랬다.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살건 자신의 행복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선택할 것도 선택받을 것도 없는 아프리카 난민은? 하하. 이래서 안된다니까. 이제 꼬투리잡는 것도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 사람이 그걸보고 말한게 아니잖아. 받아들이자.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살건 자신의 행복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했다. 자신의 눈앞에 어떤 행복과 즐거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눈을 감아버리고 마음을 닫아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내 눈앞에 있는건 닫힌 상태로 침식해버린다. 꼬르륵-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저 깊은 곳으로. 눈을 떴을 땐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외로운 심연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거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구도 듣지 않는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메아리치는 슬픈 목소리.

생각해보면 꽤나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인생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내 자신의 미성숙에 의해 잘못된 길도 여러번 오갔었고, 톱니바퀴처럼 째깍째깍 맞쳐가며 만들어진 빌어먹을 일들도 그렇고, 여유를 사랑하네 어쩌네 하지만 결국 찌든네 나는 세상의 이면에 굴복하고 동화해감에 따라 현실을 회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지루하다고 말했고, 나는 시크하다고 들었다. 이런게 시크인가? 하-

이래나 저래나 결국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누구나 스크린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고, 각자가 자신의 싸움을 하느라 바쁘다. 그 바쁜 와중에 눈을 뜨고 자신을 오픈시키는 것과 눈을 감고 자신을 단절시키는 것은 자신의 의지니까. 

군 화장실에 이런 글귀가 써있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라. 세상은 그대를 차갑게 만들 것이니.' 작가 미상이라고 써있는게 내가 모르는 미상이라는 작가인지 말그대로 미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대로 하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혼자 센티한 기분에 빠져 쓴 글귀라면. 난 지금 이 글귀대로 차가워졌다. 아니, 차갑다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메말랐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테니. 누구나 반할만한 광경을 익숙함에 무시하고, 누구나 웃음지을 소소한 재미를 지루함에 내던지고, 누구나 눈물지을 이야기를 무심함에 난도질하고 있으니.

근데, 그런거 재미없잖아. 좀 더 세상을 느끼자. 세상이 날 차갑게, 메마르게 만들었다면 나는 다시 따뜻해지자. 세상이 날 차갑게 해보라지. 그 때마다 나는 계속해서 촉촉해지고 포근해져 눈을 뜨고 내 앞의 것을 마주하겠다. 그 어떤거라도 심연속에 가라앉게 내버려두지 않겠어. 그것이 설령 세상이 날 차갑게 만들기위한 아프고 우울한 것일지라도 솔직담백하게 받아들이고 마음껏 눈물짓고 웃어보이겠다. 그게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버리면 더이상 느끼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좀 더 울고 웃을래. 행복에 웃고, 슬픔에 울고. 이게 내 라이프워크. 앞으로 다가올 나의 인생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


덧1. 어쨌거나 전역인사랍니다. 다들 잘있어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09:14 

 

병장 문두환 
  아아니, 이 분 가끔 얼굴만 내비치더니 이렇게 툭하니 전역인사만 놓고 가면 어쩌겠다는 심산인가요? 아래 2월 초 정모 협의부터 하고 가시구려. 

어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같이 있던 minkiw라는 후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이죠.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호감을 갖거나 좋아하는 것은 쉬운데 사랑하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2009-01-08
12:35:59
  

 

병장 문두환 
  저도 어릴 땐 등산을 좋아했는데 입궁하고 나서 산을 무서워 하게 됐답니다. 이곳의 산은 높거나 험하거나 춥거든요. 

아 이런 잡소릴 하려는건 아닌데, 여어튼 영돈님!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전재산 22000의 버스터버니'라는 글 때문에 영돈님의 글을 정말 자주 보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네요. 앞으로에 대한 기약-은 있으신거라 믿을게요. 흐흐. 2009-01-08
12:39:08
  

 

병장 이동석 
  영돈씨 새우깡에 깡소주 먹어야죠. 2009-01-08
12:50:00
 

 

병장 박찬걸 
  산에서 막걸리 한잔 해야죠. 나도 해야지. 2009-01-08
12:58:36
  

 

병장 윤영돈 
  두환/ 2월 초에 정모가 또 있나요. 얼마전에 있었던 걸로 알고있는데. 앞으로에 대한 기약은- 밖에서 한번 뵈야죠. 히히- 

동석/ 당연히 먹어야죠. 언제 주실건가요 기대하고 있답니다. 2009-01-08
13:01:26
  

 

병장 이동석 
  2월 초에 뵈요. 꼭꼭. 2009-01-08
14:40:57
 

 

병장 이동석 
  그리고 전역인사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겁니까? 시즌 2에서도 꼭 봅시다. 꼭꼭. 2009-01-08
14:41:37
 

 

병장 윤영돈 
  야호, 2월 초 정모회비는 동슥님이 대는겁니까. 

근데 이게 뭐가 웃기다는거에요(울컥) 2009-01-08
15:18:18
  

 

병장 정영목 
  저도 이제 슬슬 전역인사를 써야겠네요 크크. 
영돈님 정모때 꼭 만나뵈용~~ 2009-01-08
15:23:21
  

 

상병 이동열 
  허허 가시는겐가요- 너무 이른것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 일까요? 

아쉬움이겠지요- 시즌2에서 뵙지요... 2009-01-08
16:21:16
  

 

병장 이동석 
  오기만 하세요. 오면 어떻게 되겠죠. (흐흐) 
웃기다는게 아니라 재밌다는거여요. 이를테면, 새로운 표현과 지평을 발견하는 재미- 2009-01-08
16:33:10
 

 

병장 이우중 
  이제 혀, 아니 영돈님의 히- 는 시즌 2에서만 볼 수 있겠군요. 
수고 많으셨어요. 허허허. 2009-01-08
18:17:08
  

 

병장 김민규 
  이것참, 한분 한분 떠나가시는군요. 얼개이자 내글내생각이고 전역인사라니, 일타 삼피를 노리는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 

뭐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지극히 상투적인 이 소리나 한번 할래요. 가지로 2009-01-09
01:47:23
  

 

병장 정병훈 
  이사람도 가는군요. 헴. 2009-01-09
03:51:48
  

 

병장 김동욱 
  크크크크 제가 이제까지 본 제목중에 제일 상큼합니다. 

"정답은 결국 내 안에 있다"라고 말하던 루시드 폴의 누군가가 생각납니다. 
글로만 봤을때! 영돈님의 저녁 후 생활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축하드려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2009-01-11
01:20:22
  

 

병장 이동석 
  음, 그게 이 제목은 저한테 로얄티를 지불하고 써야합니다. 낄낄. 물론 저는 박민규한테 로얄티를. 2009-01-11
16:3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