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인사] 다시 사랑입니다. ㅡ또 하나의 고리를 손에 쥐며  
병장 이현승   2008-11-20 20:57:43, 조회: 337, 추천:0 

[전역인사] 다시 사랑입니다. ㅡ또 하나의 고리를 손에 쥐며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알기에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고,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 과정에 불과 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든 일에 초보자 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초기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합일, 조화가 아닙니다.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해지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 라이나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사실 저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아니, 극히 평범하기까지 한 책벌레일 뿐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공부하고, 공부하다 지치면 게임이나 하고, 너무도 비겁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되면, 아무런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아니었지만, 지극히도 혼자였습니다. 어쩌면 소통을 꺼리기 위해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씨알이 먹히지 않는 내 얘기를 주절주절해 남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모르는 척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그 누구도 굳이 나를 방해하지 않았기에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읽는 것 일뿐, 대단한 변화는 제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순서에 따라 대학에 갔습니다. 간판보고 들어간 대학이라 그럭저럭 선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히 떠밀어져 다다른 대학생활은 당연히도, 제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잔금을 치루지 않은 상태로 독촉장이 날아오듯, 꽉 막혔던 생활에 대한 대가는 그 응분을 풀지 못해 버둥거렸습니다. 모든 경험해보지 않은 날것들이 언제나 숨 막히게 제 자신을 조여 왔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것들은 모조리 다 풀지 못한 숙제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족쇄의 시험은 서슬 퍼런 날을 세우고, 마침내 폐부에 칼을 디밀었습니다. 

그렇게, 누가 시킨 것 마냥 서툴게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누군가 ‘요이땅’을 외쳐주었으면, 하고 생각했을 만큼 저는 그것이 시작인지 몰랐고 나중에서야 그것이 곁으로 지나갔음을 알았습니다. 어설펐던 사랑의 귀결은 간단하고도, 비참했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기어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혼자였다면 외롭게 청산하고 말았을 빚을, 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줘버렸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은 시간은 지체된 후였고 ‘펑’하고 터져버린 퓨즈의 유리조각 같은 후회만이 발끝에서 찔끔거렸습니다. 저는 아마도 소통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인용된 릴케의 말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세계를 형성해야 하는 데 조그만 내 공간하나 장만하기에도 급급했다는 것을 그렇게 알았습니다. 
  
저는 지금 자기인식→깨달음→극복의 뻔한 레파토리를 이야기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 후에도 저는 비단 소통의 실패뿐만 아니라 계획의 실패, 노력의 실패 등의 수많은 실패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가 아는 한 이 지루한 과정은 생이 다할 때 까지 그렇게 이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오늘 하루의 끝을 위해 죽고, 아침에 잠에서 깰 때 마다 환생하는 지도 모릅니다. 방금 전까지는 손톱으로 무쇠라도 그을 듯 한 신념에 치밀어 오르지만, 그 손톱에 나무가시라도 박히는 순간에는 그 작은 쓰라림에 안절부절 합니다. 자기개발 서적을 읽고, 복학생 선배들의 일갈을 듣고 나서 굳게 다짐을 하여도 어제와는 또다른 시련이, 각성이, 뉘우침이 찾아와 번민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그 누구도 100%의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진 돈키호테를 꿈꾸지만, 현실은 겨우 슬며시 돌아가는 풍차 따위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흔한 순환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허무와 맹종은 그 순환을 멈추게 한다는 것에서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반복되는 쳇바퀴에 지쳐, 허무에 빠지거나 그저 돌고 있다는 사실에만 맹종하여 포기하기에는 우리에게 남겨진 생의 과제들이 많습니다. 비록 그 고리 안에서 아프고, 외롭고, 부서질지라도 그렇게 순환의 고리가 쌓이고 나이를 먹어 가면, 언젠가는 그것들을 엮어 쥘 수 있는 태연함이 찾아 올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태연함을 사랑할 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또다시 나의 삶을 성숙하게 만들어줄 줄로 압니다. 

한때 저는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정치적인 것들에 대해 쉽게 분노하곤 하였습니다. 어설픈 독자투고를 한겨레에 보내고, 딴지일보를 찾고, 서프라이즈와 오마이 뉴스를 전전했습니다. 하지만 정의는 어느 한편의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어차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같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비행한계선> 이라는 고전영화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핵을 발사하고 나서는 날아오는 소련의 보복성 핵을 일부러 막지 않습니다. 그것이 더 큰 전쟁을 막고, 공평이라는 이름의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완벽하게 구현된 사회는 어쩌면 섬뜩하리만치 무서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ㅡ군색하지만ㅡ 다시, 사랑입니다. 디지털시대 통신기구가 나를 잡아먹어도, 미천한 컴퓨터 따위가 허리를 옭아매도,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개가 발을 물고 늘어져도, 우리는 어렵디 어려운 사랑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뜬구름 같은 부질없는 허상이 아닙니다. 마음을 바꿔먹은 다면 그것부터 시작입니다. 북쪽에 앉은 동료에게도, 에티오피아 난민에게도, 곁에 앉은 친구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선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쁜 선물은 나를 변화시키고, 그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우리를 바꿀 것입니다. 

이제 궁생활이라는 또 하나의 고리를 꿰려합니다. 이 속에서 책마을을 만난 것은 저에게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책마을 때문에 이곳을 떠나기가 2%정도는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가슴떨림을 경험하게 해준 분들에게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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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3편을 못 올리고 가는 군요. 게으른 제 성정을 탓하며, 마지막 전역인사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그동안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답글을 달아주신 이름을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들 건필하시길.

저녁식사후 블로그를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싸이를 하지 않지만, 예의로 주소라도 올립니다. 
사이좋은세상.com/kerony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00:06 

 

병장 정병훈 
  일단 도장찍고, 글을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고생했어요.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2008-11-20
21:04:11
  

 

병장 이동석 
  삼편은 시즌 2에서 보면 되죠. (웃음) 

수고하셨어요. 어디서든, 안녕합시다. 
조만간에 또 볼테니, 긴 인사는 안하렵니다. 흐흐. 2008-11-20
21:06:50
 

 

상병 이우중 
  또 한 분 가시는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많이 사랑하시고, 또 사랑받으시길. 

덧. 미셸 공드리에 대한 글 정말 잘 읽었었다고 이 자리를 빌어서 늦게나마.. 흐흐 2008-11-20
21:09:35
  

 

병장 오영석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2008-11-20
21:14:46
  

 

병장 김선익 
  뜻밖의 가슴떨림. 
아,정말 전역 축하드립니다 2008-11-21
07:08:26
  

 

병장 정병훈 
  참... 한분 한분 보낼때 마다 씁쓸합니다. 진청의 물이 빠지는 느낌? 
그래요 사랑입니다. 새로운 고리를 들고 승리합시다. 으헤헤헤 2008-11-21
08:25:34
  

 

병장 이동석 
  옷, 현승님 다녀가셨군요. 다시 공지로- 2008-11-21
08:33:20
 

 

병장 정영목 
  2%라면 꽤 높은 수치로군요. 하핫. 

시즌2에서 보면 되니까 아쉬움을 잠시 접어두셔도 될 듯합니다. 

전역 축하드려요~! 2008-11-21
09:02:07
  

 

병장 윤영돈 
  요이땅. 오랜만에 듣네요. 

요즘들어 떠나시는 분들이 많네요. 
세대교체라도 하는듯 막 떠나버리시니 참-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2008-11-21
11:04:01
  

 

병장 고동기 
  그러게요. 3편도 못보고 보내드리게 되다니. 아쉬워요. 

여담이지만, 여기서는 오마이뉴스를 못보게 하더군요. 

마성은님이 쓴 기사 좀 읽어보려고 했더니 유해사이트라며 차단을. 2008-11-21
11:07:12
  

 

상병 이동열 
  아아 오랜만에 들어온 책마을엔 아쉬움의 인사들이 가득하네요... 

그래요,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에서 한글자만 바꾸면 사람이 되지요. 

그래요, 사람입니다. 현승님 같은 사람,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시즌2에서 뵙지요(웃음) 2008-11-21
12:19:32
  

 

병장 박찬걸 
  수고하셨어요. 
시즌2에서 뵙겠습니다. 2008-11-21
12:28:43
  

 

병장 문두환 
  벌써 가셨나요? 손이 불편해서 이거 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좋은 분 한명 또 보냈군요. 
현승님 글 그리울 거에요. 2008-11-21
18:08:17
  

 

병장 이현승 
  우중// 우중님! 먼저 감사 드립니다. 댓글은 미처 달지 못했지만 언제나 우중님의 글 재밌게 읽고 있었습니다. 우중님의 좋은 글에 언제나 좋다고 말하지 못한 저를 용서하세요. 하하. 사실 제가 미쉘공드리에 대해 쓴 글은 책가지에 간 모든 글보다 더 전력을 다해 열심히 썼거든요.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예요. 

동석// 저랑 통하는 바가 많으신 동석님! 언제나 뒤치닥거리에 수고 많으셨어요. 
이렇게 책마을이 다시 부흥기를 가진 것은 거진 다 활기차고, 부지런한 부촌장을 만났기 때문일 거예요. 

영석// <요구하는 20대를 위하여?> 라는 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와는 약간 노선은 달랐지만, 너무나도 좋은 충고이자 발언이었습니다. 

병훈// 병훈님이 있어서 책마을이 다시금 부흥기를 맞을 것 같아요. 병훈님의 글..비록 
일천한 제 지식 탓에 댓글을 달지 못했지만 정말 잘 보았어요. 

영목// 영목님의 탁월한 식견에는 언제나 감탄했습니다. 어쩜 그리 제가 무지한 주제에 대해 멋지게 설명 하실 수 있는지요. 특히 사회적 기업에 관한 글은 저에게 다른 시야를 트여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영돈// 영돈씨 같은 분들이 얼마든지 전역하신 분들의 뒷자리를 잘 메워 주시겠죠. 참 그리도 저도 씬시티의 광팬이랍니다. 

선익// 감사합니다. 선익님도 그 가슴떨림 느끼고 계시죠? 책가지에 올라간 깔끔하게 떨어지는 솔직한 이야기에 반했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동열// 예 아쉬워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참, 인터미션(Intermission)! 저를 다시금 채찍질 하게 만든 글입니다. 다른 글도 더 보고 싶은데 어떡하죠. 어서 전역하시길.. 흐흐. 

동기// 주옥같은 독서후기에 올라 올 때마다 즐거웠습니다. 늦었지만 저는 동기님을 필진으로 강력추천하는 바입니다. 

두환// 두환님!! 내일 간답니다. 저에게 쪽지를 보내주시고, 격려를 아끼시지 않았던.. 언제 어디서나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때 제 이름 발견하시면 아는 척 하세요. 꼭. 


1보급창 부터 하스, 그리고 근지대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분들을 스쳐 보냈네요. 
시즌2에서 뵈요- 다들. 2008-11-22
13:57:01
  

 

병장 이동석 
  정말 내일 가시는군요. 흐흐. 나가서 봅시다. 2008-11-22
14:32:50
 

 

상병 강수식 
  어어, 벌써 나가셨을까요. 
제가 요새 조금 정신이 없어서. 
아, 어쩌면 이 댓글을 못보실 수 도 있겠군요(울음울음) 

솨이월드로 찾아뵙겠습니다.(웃음) 

수고 많으셨구요, 보고 싶을꺼에요 2008-11-22
21:2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