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차에 올라탄 나방 
 병장 임정우 01-10 19:08 | HIT : 73 



 스탄게츠와 질베르트 그리고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연주를-그들이 여유로운 방랑의 이미지를 청각화 하여 전달하는- 무덤한 표정으로 감동받을 수 있는 지금으로 오기까지는 그리 녹록치 않는 시간과 노력의 희생이 요구 되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집과 보금자리,  나의 소중한 물질과 비물질들, 생명을 부여받은 무생물들과 소중한 사람들에로부터 떠나서 완벽하게 새로운 직위를 부여받았으며 새로운 상황과 낯설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난 이런 상황을 견뎌낼수 없는 참담함이라고 인식하였으며, 적응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떠올려본 다른 어떤 생각으로도 애초의 만들어진 부정적인 인식을 극복할 도리가 없었다. 내 실제적인 삶들, 나를 이루었던 구체적이고 의미부여적인 모든 것들을 잠시 떠날지라도, 그것들에게 나를 이루는데 간섭했던 추억의 성채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임 없는 단호함으로 나의 사고속의 자리잡을 뿐이었다. 나는 확실히 너무나도 여리고 부족하였으나, 오히려 그 반동으로 인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굳건한 신념을 만들게 되었고, 그 신념은 불합리함, 추상적임, 직관적이고 궤론적인 색채로 불규칙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깐, 나는 과거를 떠나선 살수가 없었으며, 여기서의 살수 없음을 산다는 것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거짓으로 살아야만 한다 라는 표현, 즉 하루 하루를 재껴 보낸다고 밖에는 이야기 할수가 없을 것이다. 그토록 나는 지나간 것에 지배당하는 것에만 쾌락을 느낄 수가 있었고, 내가 이렇게나 어린아이같은 어리석음에 휘둘리고 있는 동안에, 세상은 앞으로만 나아갔으며 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풍경들은 좀 더 멀어지고 희미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옅어지는 풍경들은 밤 고양이들처럼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나의 챙얼거리는 신념속으로 들어와선 앙상한 뼈만 남기곤 나머진 모조리 먹어 치우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신념들이 무가치함으로 변하는 것을, 세상은 수천개의 눈으로 그저 지켜 볼 뿐이었고, 그 수천가지 눈들 중에는 두개의 눈, 즉 나의 눈도 포함되었으리라. 눅눅하고 불편한 자리를 제공하는 기차의 창가가 이야기 하듯, 세상이 손쌀같이 작아져 버리고 있었다.

 옅어지는 과거를 과거로 받아드리는 것은 나에게 절박한 패배감과 수치심으로 살그머니 다가왔다. 그 걸음은 숭고한 잔인성을 내포하고 있는데다가 느리고 처량하여 내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걸음은 전동차의 이동과도 비슷하다. 처음 한 두정거장까지는 역의 이름을 기억할 수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치는 역의 이름따위는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리고, 때때론 졸음이 들날날락 거리게 되고, 종착역이 가까워 올 수록 마지막 역의 이름만 계속해서 씨불거리게 되는 것이다. 초반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사람의 생김새라던가 인상착의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결국 모든 숨쉬는 자들을 동일시하거나, 공통의 산소를 경쟁하는 일종의 적대의식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생의 지나감은 전동차의 이름을 빌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누군가는 목적지의 종착역을 죽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종착역은 도처에 자갈처럼 널려있으며, 그 종착역이 죽음보다 끔찍하지 않을거라는 보장은 어느 누구도 해줄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생의 전동차를 올라 탔으며 우리의 선택에 의해 몇 번이고 갈아탈 수는 있으나, 그 종착지를 결코 알수가 없고 오로지 원하는 바를 씨불거리는 것만이 가능한 뿐이다. 탑승객들에게는 각기 다른 역할이 부여되었고, 여기에서 가장 불쌍한 역할은 졸거나 딴 생각을 하다가 갈아탈 역을 지나쳐 버리거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 모두가 내리는 역을 묵묵히 지나쳐 버리는 것인데, 이런 용감무쌍한 고지식함에게 세상은 냉소적인 비웃음을 던지거나 더욱 심한 경우에는 얼음장같은 무관심으로 무성의 대꾸를 하는 법이었다. 이런 반응은 모두에게 너무나 두려운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나'로서 존재하길 원하지만 결국엔 '모두 속의 나'로서 존재할 수 밖에는 없다. 그것이 나는 두려웠다. 그래서 모두가 밀물처럼 쏟아져 방출되는 곳에서 모르는 척하며 -실제로는 스스로의 인식하에서 였음이 분명하지만- 그 흐름에 몸을 맞긴채 떠밀려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몇 번이나 부정하였고, 그 부정의 뗏목 위에 몸을 맞겼다. 스스로를 부정하기에 앞서 수도없이 증오하기 마지않던 그 '모두'에게 나를 구성하는 진액을 헌납하였고 그 대가로 뗏목을 구입하였고, 덕분에 고작 종착역에 도달하기 전까지 조금의 시간만을 벌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과 개인과의 독자적인 끈이 결국 너덜거리게 되었고 내가 '우리'속에 풍덩 빠지게 된 사연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태어나게 된걸까. 분명한건 갑작스러운 절망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절망은 거리에 어둠이 깔리면 때마침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처럼, 때를 맞춰서 찾아오는 번쩍거리는 인식과도 같은 것이다. 어둠이 내려오고 불이 켜지지만, 우리는 애초에 어두워질것을 그리고 이후에 불이 켜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깐 내가 개인이라고 명했던, 타인을 초월한 누군가들이 더이상 나의 그늘을 공유할수 없는 -완벽히 독자적인 개인이 되고자 함을- 동시에 그것이 완벽히 '우리'화 함과 동일시 됨을 느끼게 됨에서, 애초에 결정되어진 뚜렷한 절망의 불빛을 마주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이제 그들에게서 예전의 친밀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 마주보고 과거를 짓걸이는 도중에도 '우리'는 저 앞을 내다 보고만 있다. 그것이 우리의 의지가 아닐지라도 나의 의지가 아닐지라도, 그 슬픔을 감내해야하는 것은 우리의 심장속에서 팔딱이며 기생하는 '추억'의 몫인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건내는 모든 문장속에는 날카로운 가식만이 춤을 추고, 설령 그 안에 진실이 있더라도 더이상 그걸 판단할 기력이 남아있질 못하다. '너와 나' 우리 안에서 일치되었던 과거의 공유물들은 사치의 감정으로 추락하였고, 그야말로 서로간의 '수단'으로 마주함만이 살아 남아 꿈틀 거린다. 

 시간은 우리를 어른으로 길러냈다. 그것을 나의 세계에게로 한참이나(어찌보면 정말 짧은) 떨어져 있는 지금에 깨달았다. 나는 가로등 불이 켜질거라는 예측은 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 불이 켜지자 그 은은한 노란 빛에 어쩔줄 몰라하는 나방같은 존재이다. 형식적으로 몇 번이고 등에 머리를 부딪치다가 언젠간 볼품없이 추락하고 마는. 애초에 가로등 근처를 벗어나 살면 되질 않느냐? 라며 누군가는 채근할지 모른다. 허나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내가 번데기에서 벗어나기 전부터 모든 존재들은 가로등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내가 날개를 갖추자 그들 근처로 날아간 것은 당연한 섭리였다. 

 그 가로등 아래에서 퍼덕이다가 나는 남들과 다르지 않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너와 나도 더이상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것을. 더 이상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인식하자 세계에는 얄팍한 금이 갔다. 그들과의 사이에서 균열을 느끼는 순간에 나는 가로등을 향해 돌진하였고 언젠간 불꽃처럼 추락할 지라도 그 부딪힘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나는 전동차에 올라탄 나방에 불과하다. 세계라고 불리우는 전동차에도 어느 덧 어둠이 찾아 오고 가로등이 켜졌다. 나는 힘껏 날개를 퍼덕여 본다. 그리고 뜨겁게 달구어진 붉고 노란 등을 향해 돌진 했다. 하지만 내 옆에서 날파리라던가 다른 종류의 나방들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걸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저 모두들 제각기 달려들 뿐이다. 그렇게 다들 미쳐가고 있다. 왜냐면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정말로, 죽기위해 퍼덕거리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자연스러움이 아닌가.  


 병장 권영욱 
 다르게 봐서 요즘 세상은 사회가 피워놓은 불빛에 자신을 불태워 생을 허무하게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것 같아 안타깝군요. 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