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 섬 
 병장 이승현 05-30 10:55 | HIT : 118 



 이름 없는 섬
- 그녀에게

 나는 오늘 그리움만으로 글을 쓴다. 그리움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하나의 섬이 다른 하나의 섬에게 보내는 글을 쓴다. 오늘 비로소 <섬>을 위한 글을 쓴다. 삶은 외롭고 아름다웠고 고통스러웠으며, 나는 그 삶에 매혹되고 말았다는 고백이 이 글로 온전히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이 당신에게 "발견"되기를 바라며. 언젠가 당신이 나를 발견했던 것처럼. 언젠가 내가 그르니에의 <섬>을 발견했던 것처럼.

 진실로 나는 발견했다. 현실의 격랑에 부딪혀 침몰해가는 순수한 젊음들과 그저 흘러가는 조류에 몸을 내맡긴 채 적응에 안도하고 마는 불안한 영혼들 사이에서 헤매던 그때, 정해진 방향도 없이 도피하듯 배에 올라 반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그 하루하루의 노동과 안식에 체념하듯 만족했던 그때, 나는 너무나 높은 하늘과 망망하고 깊은 바다밖에는 어느 것도 볼 수 없었고 그처럼 세상을 이상과 현실로만 나누어 그 끝없는 간극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던 내 눈앞에 그르니에의 <섬>이 나타난 것이다. 그 섬을 발견하고서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모든 것 이전에, 어떤 목적 이전에, 현실과 이상의 분별 이전에 삶이 있고 그곳이 우리가 잠시나마 머물 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섬에서 다른 섬으로, 어느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옮겨갈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우리의 삶,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냥 하나의 꽃에서 또다른 꽃으로 달려갔을 뿐이다.
- 여행 그 자체밖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이 없는 여행들."

 혹은, 삶 그 자체밖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이 없는 삶.   

 나에게 닿지 못하는 말들, 나를 스치고 통과해버릴 뿐인 말들을 구태여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단지 여전히 내 안에 남은 채 나지막이 내 마음을 울리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해가 기우는 오후에 그가 사랑하는 알제와 나폴리와 같은 지중해의 해변가를 함께 거닐면서, 하얀 목책으로 둘러싸인 오솔길을 따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들의 비문을 하나하나 함께 바라보면서, 그는 나의 곁에서 한두 걸음 앞서거나 뒤서면서 천천히 말을 걸어온다. 그는 어릴 적 자신에게 각인되었던 어떤 기억과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의 이야기를, 병을 앓던 이웃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젠가 허물어지고 말 우리 삶의 존재와 無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에 대해서  그는 확신보다는 예감을, 어떤 사상 대신에 자신만의 의혹을 갖고 이야기한다. 그를 따라 걸으며 나는 그의 말을 하나씩 곰곰이 되짚어볼 뿐, 혹은 그의 말과 나 자신의 경험을 일치시켜 본다. 때론 침묵이 우리를 가득 메우고, 그저 문득 마음이 이끄는 대로 책을 펼치면, 그곳에 내 걸음을 인도하는 한 문장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우리 영혼의 여행에 대해, 그 충만한 가난함에 대해, 자유로움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암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비밀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숨겨진 것을 찾을 따름이다. 나만의 삶, 나만이 살 수 있는 삶. 나만이 찾을 수 있는 어떤 것. 그 발견의 기쁨.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것 이상의 어떤 기품을 더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더욱 우리답게 만드는 그 비밀이 아닐까. 나와 당신 사이에 어떤 비밀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우리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이제 내가 말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또 살 수 있을까?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뿐이다....그러나 내게는 이미 획득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희망을 하나의 섬으로 생각한다면, 뜻없이 쌓여온 것만 같은 우리의 시간 속에서 때때로 마주칠 수 있었던 인상적인 순간들을 우리가 지나온 하나하나의 섬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을 결정지어 왔던 그 순간들에는 어김없이 삶을 가득 메우는 충만함이 있음을, 그리고 우리는 또 어딘가의 섬에, 또 어느 순간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르니에의 말대로 모든 것은 다만 그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뿐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에 대한 명상은 우리가 닿지 못한 어느 곳에 대한 인식을 일깨운다. 그르니에의 이 작은 책은 그 자체로 당신이 아직 가본 적 없는, 아직 보지 못한 그러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어떤 세계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그저 그때 나와 당신 사이에 <섬>이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하게 되어도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르니에의 이 단정한 글은 어떤 목적 이전에 그저 존재하고 있는 우리를 위해 쓰여진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 섬에 가고 싶어 했다는 것을.
 섬이 있고, 어떤 순간이 있고, 우리 삶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다면, 나와 당신만이 찾을 수 있는 섬, 나와 당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순간, 나와 당신만이 간직할 수 있는 비밀 또한 우리 눈앞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섬>을 위하여 단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딘가에 있을 그 이름 없는 섬, 그곳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상병 박수영 
 표현이 참으로 좋은것 같습니다. 잘 읽었어요. 05-30   

 상병 양호경 
 이 책을 읽으신 분이 있군요..사르트르 책인가, 하루키 책인가를 보다가 장 그르니에 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읽어봤습니다만, 당시 저의 상황 때문인지 번역투의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추상적이고 이쁘면서 약간은 허무한 내용 때문인지.. 

 크게 와닿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또 쓰신글 보니까 또 다른 맛이 있네요.. 

 정현종님의 시도 오랫만에 접하니, 반갑고요.. 

 잘 읽었습니다.. 05-30   

 병장 이건룡 
 황홀하게 읽은 것도 오래 간만이군요. 하나하나 이런 글을 읽으며 잃었던 감각들을 다시 상기 시키는 것 같아 뜻이 깊게나 퍼집니다. 물론 내밀한 심상까지는 접근하지 못하겠지만(역시 인스턴트식 미뤄 짐작이라). 

 섬마다를 잊는 다리가 자기랑 공유한 비밀이라는 발상은 생각해 볼 거리가 남는군요. 제가 생각하는 섬은 에로티즘이 숨겨진 섬 이미지가 전부인데. 언제 읽어 볼 기회 가 있으면 몇마디 붙이고 싶네요. 05-30   

 병장 이승현 
 부족한 글로나마 그르니에의 섬세한 글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저는 <섬>과 더불어 <지중해의 영감>이라는 그의 에세이집도 참 좋더군요.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속을 산책하는 글, 명상하는 듯한 어조와 우리의 허무를 
 감싸 안는 사려깊은 시선. 언젠가 한번 만나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