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귀차니즘의 신봉자인 주제에 한 주에 한 번은 글을 남기겠다는 폭탄선언을 해버려 살짝 곤란한 김현진입니다. 글을 하나씩 쓸 때마다 여기에 뿌리를 하나씩 내리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얼마나 봐 주실지는 미지수이지만, 어디 잡초가 다른 사람들 보라고 자라겠습니까. 그저, 먹고 살려다 보니 하필 도로 틈새에 뿌리를 내린 거지요. 그런 겁니다.

읽고 있던 책이 좀 까다로워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서 였을까요, 갑자기 추리소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추리소설을 자주 보던 선임에게 "13계단"이라는 책을 추천받고 읽었는데 읽을만 하더군요. 그 다음에는 "모방범"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모방범"ㅡ 세 권 합쳐 총 1500여 페이지를 여덟 시간만에 '읽어치웠'는데, (이 정도면 그냥 '읽었다'는 말보다 적절한 묘사가 아닐런지..) 순수하게 책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남의 소설을 읽었으면 독후감을 써라"고 아는 사람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백 번 옳은 말씀입니다만 ,전 지금껏 소설을 읽고 제대로 된 독후감을 써본 적은 없습니다. 소설도 잘 읽지 않을 뿐더러, 뭔가를 읽고 괜찮은 글을 쓰려면 어떤 생각할 부분(이하 화두..라고 표현하겠습니다)을 추출해서 확장시켜야 하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일종의 '대리 체험'이고 그렇다면 화두라는, 소설의 한 부분을 추출해서 제 맘대로 생각을 확장시켜 나간다면 결국 소설에 대해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을 읽은 자기 자신에 대해 쓰게 될 겁니다.  그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쓸 수 있지요. 소설은 화두를 찾기보다는 어떤 전인격적인 감상을 요구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감상을 글로 남기려니 참...어려웠습니다.

 제 표현력이 떨어져서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추리소설은 가장 가볍게 읽게 되는 장르 중 하나니까, 그냥 재미있었어요 한마디로도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500페이지나 읽었는데 남길 게 하나도 없는 것도 아깝게 느껴지더군요. 

결국, 저는 다시 '화두'로 되돌아 왔습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감상은 당연히 적을 수 없지만 충분히 음미했으니까 넘어가고, 기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선 적을 수 있으니까요.

영역을 넓혀가는 분야의 창작물일수록 좀 더 많은 화두를 담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모방범"은 일반적인 추리소설로서 보여주면 되는 것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걸 담고 있고, 이는 추리소설이 일본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려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한국의 무협/환타지소설과 일본의 추리소설이 인기가 있는 건 해당 사회의 현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여부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두가 꽤 많아요. 쓸려면 쓸게 수두룩하다는 말씀.

이 소설이 다른 추리소설과 정말 다른 점은 '2권'에 나타납니다. 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주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2권에서는 범인들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심리상태, 지향하는 것들을 그들의 시점에서 잘 묘사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화두를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살인은 '유희'에 끼어들 수 있는가. 아니, "'구경거리로서의 죽음'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물론 23년간 쌓여온 제 윤리의식은 그걸 부정하라고 합니다만, 역사를 바라보면 꼭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만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포로들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아수라장과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검투사의 모습은 고대 로마 최고의 축제였고 마녀사냥과 프랑스 혁명기의 처형장 또한 상당한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살인을 구경하는' 광경은 오늘날 TV 뉴스 보도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보고 자극을 받은 뒤, 곧 잊어버립니다. 생명은 존엄한 존재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하며, 콜로세움과 화형대와 단두대는 TV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 주변 사람이 죽음을 당한다면, 우리에게는 슬픔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적어도 이 경우는 잊혀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엄청난 정신적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위 경우는 '타인의 죽음'으로 한정되어야 되겠지요. 타인의 죽음은 자신의 살아있음과 대비되며, 그 순간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이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스릴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사회는 '살인 금기 윤리'에 의해 유지될 수 있으며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현대 사회는 살인 금기 윤리의 결정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법 뿐만이 아니라 교육까지도 적극적으로 이용해 사회는 살인을 금기시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사회와 유리되는 현상이 증가하는 오늘날 그 윤리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으며, 이를 막는 건 현대 사회의 큰 숙제 중 하나일 겁니다.

쓰고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 윤리의식은 당연히 살인을 금기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우리는 자기 목숨만큼 남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느낄 수는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결국 남은 내가 아니니까.


아. 이것 때문에 윤동주의 시는 읽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