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 '인권의 윤리의 토대들' 타이핑 
 병장 이건룡 06-01 15:59 | HIT : 79 



 잡담 - '인권의 윤리의 토대들' 타이핑

 이제 막 날씨가 더워지고 있는 시작인 때에 맥을 못 추고 있으니 올해 여름은 정말 힘들 것 같다. 여지 것 해온 유일한 사업인 독서는 개업할 때랑 소득이 별반 다를 바가 없어 올해 여름이 꽤나 길어지려나 보다. 

 나들이가 아닌 방랑을 하고 왔는데 깊어진 것 걱정의 '수심'이다. 밤마다 피곤에 지쳐 쓰러져 다리를 쭉 뻗어 피가 통할 때 되야 이 세상이 아니라는 편안함에 만족한다. 낙이 게으름이고 책임의 회피이다. 응당 아내에게 보답해야할 봉사를 팽개치고 누워 자버린 것처럼?

 방안으로 꺼낸 책은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이다(최근 들고 온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읽는데 도움 될 기대를 안고). 예전 광철님이 번역이 형편없다는 소문을 들려 주셨는데. 역시나 몇 구절에 해매다 보니 나긋이 생활반(내무대)에서 읽기에는 문제가 많을 것 같다. 문장 재구성까지 손을 댈 수 없으니 원서가 있었으면 더 쉽게 읽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구문이 많다(영어 실력을 고려하면 그것도 희망사항이지만). 나름 재미 삼아 <윤리학>의 소개로써 '인권의 윤리의 토대들'이라는 가지를 타이핑 한다. 

"악이 존재한다면 악은 선으로부터 사고되어야 한다. 선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즉 진리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삶의 잔혹한 결백성만이 존재 할 뿐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이야기가 야릇하더라도 악은 절대적으로 진리들의 가능한 차원이어야 한다. 우리는 악을 진리의 단순한 부재로, 선에 대한 무지로 간주하는 플라톤의 너무 나 손쉬운 해결책에 결코 만족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지라는 생각 자체가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 뒤 커버에 있는 이 대목은 여간 성가시다.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처럼. 능숙히 읽을 분들은 문제가 없겠지만 <윤리학>이라는 얇고 작은 책을 읽는데도 해맬 사람 같은 경우에는 그리 달갑지 않은 소개이다. '삶의 잔혹한 결백성' 앞에 놓인 진리의 설명이 불변의 이해라는 것 보다는 생산 가능한(보다 강세를 둔 '해야'하는) 영역을 산정해 놔야 이해가 될 법하니. 

< 윤리학>을 읽기 전에 마음에 드는 바를 끄집어 적어 보았다. 이 책의 기대로써 가장 큰 것은 '자본주의의 범역화'에 놓인 윤리를, 이해의 길라잡이로 삼는 독서의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뒤의 가지 ('인권의 윤리의 토대들')에나 이해의 방향으로. 이런 의혹적인 대목을 좋아하는 본인 취향이 크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테마 체계가 반란,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불만족, 상황들의 현실 속으로의 완전한 개입과 부합하는 반면, 윤리와 인권이라는 테마는 서양 부자들의 만족에 찬 이기주의, 위력의 행사, 광고에 부합한다는 것이 입증 되었다. 사실이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해명은 '윤리적' 정향의 토대들에 대한 검토를 거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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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권의 윤리의 토대들

 고전철학의 체계 속에서 이 정향에 대한 명시적 준거는 칸트이다. 현시점은 폭넓은 '칸트로의 회귀'이다. 사실상 이 '칸트로의 회귀'의 세부들과 다양성은 미로 적이다. 나는 여기서 단지 그 '평균적인' 교리만을 고려할 것이다


 칸트(또는 칸트의 한 이미지, 더 낫게는 '자연법'의 이론가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핵심적인 사실은 명확하게 표명될 수 있는 정언명령적 요구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요구들은 경험적인 고려나 상황에 대한 검토에 종속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정언명령들은 공격ㆍ범죄ㆍ악의 경우들에 관여한다는 것, 그리고 덧붙여서 국가적이건 국제적이건 간에 법은 이러한 경우들을 입법화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정언명령들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인도주의적 개입의 권리, 또는 법적 개입의 권리) 등이다


 이때 윤리란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 능력(왜냐하면 윤리의 현대적 용법에 있어서 악-또는 부정적인 것-이 우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야만적인 것에 대한 합의를 전제한다)이자 동시에 판단의 궁극적 원리, 특히 정치적 판단의 궁극적 원리로 간주된다. 이때 판단의 궁극적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이다. 권리 그 자체는 우선 악에 '대립하는' 권리이다. '법치국가'(권리의 국가)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직 법치 국가만이 악에 대한 식별의 공간을 허가하고(윤리적 관점에서 '의견의 자유'란 무엇보다도 악을 지명하는 자유이다). 사태 가 명확하지 않을 때 중재의 수단(법적 대비 기구)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핵심적 확신들의 전제는 명백하다. 

1) 보편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비록 이 보편성은 종종 '여론'이라는 완전히 역설적인 명칭으로 불리지만) 악이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러한 일반적인 인간 주체가 가정된다. 따라서 이 주체는 수동적이거나 열정적 또는 성찰적 주체, 즉 고통 받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이거나 결정하는 판단의 주체, 즉 고통을 식별하는 하면서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고통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주체이다. 

2) 정치는 윤리에 종속된다. 사물을 이처럼 바라보는 시각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유일 한 것은, 정황들에 대한 구경꾼의 동정적이며 분노에 찬 판단이기 때문이다. 

3) 악으로부터 출발해 선이 자리 잡는다. 그 반대가 아니다. 

4) 인권이란 악이 아닌 것에의 권리들이다. 즉 생명과 관련하여(살해와 처형의 공포), 몸과 관련하여(고문ㆍ가혹 행위ㆍ기아의 공포),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하여(여자들과 소수자들에 대한 모욕의 공포) 공격받지 않고 학대 받지 않을 권리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교리의 힘은 우선 첫째로 그 자명성에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고통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미 18세기의 이론가들은 생명체의 고통에 대한 정체화로서의 연민을 타인에 대한 관계의 주된 동력으로 간주했다. 또한 이미 전제 정치에 대해서 그리스의 이론가들은, 정치 지도자들이 불신을 받는 주된 이유가 그들의 부패ㆍ무관심ㆍ잔인성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교회들은 무엇이 선인가에 대해서보다는 무엇이 악인지에 대해서 합의를 보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이미 체험했다. 교회들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를 지적하고, 그러한 금지에 만족하는 것이 언제나 훨씬 쉬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명칭에 값을 하는 모든 정치가 자신의 출발점을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권리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표상 속에서 찾는 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지구적 함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을 부과할 힘을 갖춘 자명성의 체계가 여기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러한 '윤리'는 비 정합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명백히 보여지는 현실은 이기주의와 광란과 해방적 정치의 소멸, 또는 극단적 불안정성, '민족적' 폭력의 증가, 그리고 야만적인 경제의 보편성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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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다시 옮기면 "인권의 <윤리의 토대>"이라는 이해를 사용하면 제목을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예전부터 표명하는 인권에 대해서 막연한 거부감을 명확한 입장도 없이 접하였고  단편적인 이해에 목매고 있었다. 그때 자크 라캉과 레비나스의 인권에 관한 두 문장에 관한 것이다. 공교롭게 이 책은 푸코ㆍ알튀세ㆍ라캉 등의 선구적인  1965 ~ 1980의 노력을 높이 사고 있으며(책은 1993년에 출간되었다), 더불어 레비나스에 대한 전유를 곁들이고 있다. 이후 <윤리학>에선 레비나스의 급진적 윤리주의를 새록새록 떠올리는 읽어 볼 수 있었고, 앞으로 읽어 볼 것이다. 여기저기 찾지는 못했지만 시제가 적절치 않는 것이 보인다. 읽을 당시 몰랐지만 '보여지는'에 지금 보니 빨간 밑줄이 그어진 것 보니 적절치 못한 표현의 낌새가 보인다. '보이고 있는' 둥의 표현이 이해에 도움이 될 법한데. 그리고 글자 포인트도 조절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들쑥날쑥 해서 눈에 피로감이 더 드는 것 같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해맬 터. 오히려 전화위복 삼아 더 자세히 읽어 볼 기회로 읽는 데 만족하여 본다. 물론 그밖에 다른 바디우의 책 또한 번역하였다니 빈틈없는 이해를 미뤄 짐작 해 볼수 있다 생각한다. 완벽한 틀이 있으니 언어의 미로에 해맬 가치가 있음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듯 싳다. 더구나 내수준에 무슨. 

 이후에 기대되는 읽을거리.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은 '서양부자'들, '주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바로 자본주의의 범역화 문제에 밀접하게 다가서고 싶음을 밝히는 바에 있다. 그 서문과 목차를 보니 다양한 입장(헤겔주의자, 하이데거, 알튀세르, 하버마스, 페미니스트 등등)의 데카르트적 주체 이해(비판)를(을) 견지하며, 칸트적 입장 등으로 다양한 입장으로 맞서 읽어 보고 있는 것 같고, 한발 나아가 데카르트적인 주체에 대한 재정립을 통해 이들의 비난 방향이 잘못 겨냥됨을 지적하는 것 같다. 이에 비켜 나갈 수 없는 목표란 자본주의 범역화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디우를 그가 얼마간 다루고 있다하니 독서에 특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고, 실제로 바디우는 지젝이 지지하는 철학자중 하나이기도 하니(메인 디시에 관해서는 가혹하게 읽을 수밖에 없지만). 

(*< 까다로운 주체>는 지젝의 3가지인가 4가지인가 하는 그의 이론서 중 하나이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과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는 이미 구비해 놓고 있다. 전자의 책을 통해 혹독한 신고식을 했던 기억이.)  



 병장 배진호 
 자본을 가진 사람은.. 윤리적일까요? 비윤리적일까요? 이 질문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지만 질문하고 싶네요.. 꽤나 고무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06-01   

 상병 김현진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은 지젝의 책을 하나 보고 있어서 그런지 이건룡님의 <까다로운 주체> 서평도 기대해 봅니다. 히히. 06-01   

 병장 이건룡 
 현진//제가 감히 서평을 내 놓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지젝책을 읽고 서평을 날림이라도 적어 볼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네요. 더구나 <까다로운 주체>는 그의 난해한 이론서이니. 

 진호//다시 묻는 다면 결벽성의 윤리에 대해 묻고 싶군요. 정말 그런게 있을지? 아무튼 바디우는 코페르니쿠스적 윤리학 전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