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두 개 
병장 이승일 02-12 19:32 | HIT : 173 
 

 

#1 작아지기 와 멀어지기

어떤 균일한 공간안에 (관찰자 이외에) 단지 하나의 축구공만 존재하고, 다른 모든 것을 제거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는 축구공을 오직 시각을 통해서만 관찰하기로 결정했다고 상상해보자. 지금 우리의 시야에서 축구공이 점점 작아져가고 있다. 우리는 이 축구공이 우리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 크기가 실제로 작아지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크기 요소'와 '거리 요소' 는 시각장 안에서 하나의 등가관계를 이룬다. 이 등가관계를 다른 감각들과도 호환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이 축구공에 빛이나 초음파를 쏴서 그것이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함으로써 축구공이 작아지고 있는지 멀어지고 있는지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축구공 주위의 시공간이 변화함으로써 빛이나 초음파가 돌아오는데에 걸리는 시간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멀리 있는 물체' 란 단지 '그 물체 주위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물체' 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모든 물체가 같은 크기임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작은 물체란 단지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며 그 주위의 시간이 빨리 감으로써 빛이나 초음파를 쏘면 가까이 있는 것처럼 관측된다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촉각을 통해 '가까이 있는 물체' 와 '커다란 물체' 를 구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직접 가서 만져보면 그것이 가까이있어서 크게 보이는지, 아니면 정말로 큰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체 주위의 공간을 이리 저리 왜곡시킴으로써 이러한 구분이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 물체에 다가갈 때 공간의 왜곡 때문에 손이 늘어나서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만져진다거나 등등 ... 이러한 방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같은 거리에 있다거나, 혹은 같은 크기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괴상한 물리학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세 가지 동일성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것과,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동일한 일인가?" 
  우리가 새로운 대상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떤 지식을 얻게 된다. 이미 발견된 대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때에도 우리는 어떤 지식을 얻게 된다. 우리가 무언가 새롭게 배웠다는 점에서, 두 상황은 동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것이 구분되어야하는 상황임을 안다.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변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돈은 우리가 '실재'라는 개념을 '관점과 대상의 순서쌍'으로 표현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임의의 관점을 Φ, 관측되기 이전의 임의의 대상을  Ο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 드러나는 실재는  (Φ, Ο) 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대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 두 관점에 의해 드러난 실재는 각각 (Φ₁, Ο) ,  (Φ₂, Ο) 로 쓸 수 있다.( Φ₁≠ Φ₂)따라서 이제 "하나의 대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 두 관점에 의해 드러난 실재는 동일한 것인가?" 와 같은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Φ₁, Ο₁) 과 (Φ₂, Ο₂) 가 동일할 조건은   Φ₁ = Φ₂이고, Ο₁= Ο₂일 때 뿐이며 따라서  Φ₁ ≠  Φ₂라고 가정하면 명백히 (Φ₁, Ο)  ≠  (Φ₂, Ο)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대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 와 '같은 대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 역시 서로 구분될 수 있다. (Φ, Ο₁) 과 (Φ, Ο₂)가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Φ₁, Ο) 과 (Φ₂, Ο) 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드려질 수 있어야한다. 이는 새로운 동치관계 " =Φ= " 와 "=Ο=" 를 도입함으로써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의 부정은 각각 "≠Φ≠", "≠Ο≠" 라고 쓰도록 하자.)

그래서 (Φ, Ο₁) ≠Ο≠  (Φ, Ο₂), (Φ₁, Ο) ≠Φ≠ (Φ₂, Ο) 라고 표현할 수 있다. 기존의 동치관계 "=" 와 새로운 동치관계와의 관계는 (Φ, Ο) ≠Ο≠  (Φ', Ο') &  (Φ, Ο) ≠Φ≠ (Φ', Ο') ⇔ (Φ, Ο)≠(Φ', Ο')
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기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다. 
"사랑하고 있다는 1인칭적 느낌과 뇌에서 일어나는 도파민 분비는 동일한(=) 것인가?
즉 '사랑' = '도파민 분비'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당신은 단지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 ≠ '도파민 분비' 이며, 그 대신 
'사랑' =Ο= '도파민 분비'  이다." 

  이렇게 표현들을 정리함으로써, 우리는 불필요한 질문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사실이다. 
 
IP Address : 54.2.9.70   
 
병장 배진호 
54.10.10.221   음 재미있는 글이네요.. 

이런 것이 생각나네요 

예를 들어 

나무 = i 라고 하고 

가지 = j 라고 하고 

열매 = k라고 하면 

(i,j) != (i,k) !=(j,k) 이렇게 다른것이겠죠? 

그런데 다른 정보들을 각각 

(i,j)=ij (i,k)=ik (j,k)=jk라고 한다면 

(ij,ik)라는 새로운 정보가 창출될수 있음에.. 

물론 그 정보가 유용하다고 말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엮어나가다보면 지식이라는 것이 무한대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로 들립니다 

어쨋건 지식을 한번 두번 머리에서 맴돌게 하는 좋은 글이네요 

잘지내셨나요? 02-12 * 
 
병장 이영준 
48.2.151.48   아우. 어려워요. 02-13 * 
 
상병 김지민 
18.16.13.19   근본적으로 나는 이승일씨의 뇌구조가 제일 궁금함. (히히) 02-13 * 
 
일병 권당우 
32.2.1.194   어떠한 관점에서 어떠한 대상을 본다 라고 표기하는 방법은 

어떠한 관점을 설명시키는 것 자체에서 또다시 어떠한 관점의 대립이 필요하지 않을지? 

언어란게 완벽하지 않은이상 말이죠. 02-13 * 
 
병장 성태식 
54.7.5.226   아악... 리플 날아갔다.. ( ... ) 

흥미롭군요. 맨 마지막 기호를 일상어에 가깝게 바꾸면.. 
사랑과 도파민분비 모두에 관련되는 대상 K가 있다고 가정할 때, 
사랑은 1인칭관점에서 본 K이고, 도파민분비는 3인칭관점에서 본 K이다. 
(음. 원래 기호보다 좀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군요.;) 
제 독해가 맞다면, 아마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사실'에 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과연 저 전제가 맞는지는 아직도 의문이군요. (웃음) 

특히나 첫번째에 제시한 '작아지기와 멀어지기'가 이 문제를 다루는듯 하네요. 
승일씨의 지적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리적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물리적 사실이라는게 존재하는걸까요? 02-13 * 
 
병장 이승일 
54.2.9.70   진호 / 에초에 그런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지식의 조합이란 흥미로운 게 틀림없겠지요. 
진호님도 잘 지내셨나요 
지민 / @ <-- 이렇게 생겼음 
당우 / 음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뭐라 답변해야할지 잘 모르겠군요. 언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태식/ 우리는 관찰을 하고, 결과를 얻어냅니다. 그것을 토대로 모델을 만들지요. 이 모델이 우리가 관찰하는 현상들을 일관되고 빠짐없이 기술해 준다면 아마도 우리는 성공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기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우리는 사실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저는 그 사람이 단지 '사실' 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02-13 * 
 
일병 권당우 
32.2.1.194   음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타인에게 관점을 이해시킬려고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X라는 관점을 가지고 Z라는 사물을 설명했지만, 

X라는 관점을 이해시키기 위한 필요가 있지 않을까? 

X라는 관점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Y라는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전두엽에 스친 어퍼컷처럼 지나가서 말이죠. 02-13 * 
 
병장 이승일 
54.2.9.70   당우 / 제 생각에 관점이라는 것은 어떤 설명 속에서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기에 빨간 사과가 있다." 라고 말 할 때, 그는 스스로가 어떤 관점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의 발화를 통해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3인칭적인 관점에서 그 사과를 보고 있거나, 혹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관점을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관점이란 언어의 내용이라기보다는 형식이기 때문이지요. 유사한 예를 들자면, 제가 한국말이라는 형식 속에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한, 지금 쓰고 있는 말이 한국말이라는 것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말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이제부터 한국어로 말을 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하지 않지요. 만약 그래야한다면,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선언이 필요할텐데 이런 과정은 끝없이 계속 요구될테고 결국 우리는 말하고자하는 바를 영원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02-13 * 
 
병장 성태식 
54.7.5.228   승일 // 
간략하게 줄이면, 기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야기할 수 없지 않나요.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현상일 뿐이니까요. 
만약에 우리가 현상들만을 기술할 뿐이라면, 현상의 근원이 되는 사실은 당연히 기술할 수 없지요. 

결국 또 돌고 도는 논쟁 시작?(웃음) 
에헤라 디야~ 02-13 * 
 
일병 권당우 
32.2.1.194   '사랑' ≠ '도파민 분비' 이며, 그 대신 
'사랑' =Ο= '도파민 분비' 이다." 
이렇게 표현들을 정리함으로써 

모두다 묵인하고 넘어가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사항들을 표기함으로서 언어의 곡해를 줄인다. 

관점이 형식에서 내용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가 `저기에 빨간 사과가 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그 빨간사과의 라는 대상이, 우리가 보는 대상과 같은 관점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죠. 

그 빨간 사과라는게 어떤 비유나 대상 혹은 상징일수도 있는거니까요. 

그것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한 관점의 제시가 아니었던가요? 02-13 * 
 
병장 이승일 
54.2.9.70   당우 / 음 .. 그것이 왜 형식에서 내용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어쨌건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시한 관점은 비유나 상징을 그렇지 않은 발화로부터 구분하기 위한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명확히 집어내지는 못하겠지만, 서로간에 무언가 큰 오해가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태식 / (웃음) 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