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김경욱의 <나가사키 내 사랑>을 읽다가.
<2008년 올해의 문제 소설>이라는 단편집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매 해의 '문제소설'들을 뽑아놓은 목록이라기 보다는,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과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뽑아놓는 소설집이라고 알고 있는데, 뭐 들은 그대로의 작품집인 것 같긴 하군요. '한국 (제도)문학의 종언'이 이야기되고 있는 가운데 요 몇년 '젊은 작가'들의 약진 덕분에 (제도)문학계 쪽에서도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대해 논박할 만한 근거가 마련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년 이처럼 '문제소설'을 뽑는 것도 그 일환의 작업이 아닌가 싶구요.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젊은' 작가들을 대하는 최근 문단의 태도에요. 조영일이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 문학문학>이라는 비평집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했듯이 대형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대형 서점들을 중심으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할인과 끼워주기 판매로 인한 '문학의 상품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사실 그리 많지도 않은 한국 문학 '팬'('독자'가 아닌 fan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에 유의해주시길 바래요.)과 문단 일각에서는 젊은 유망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한국 문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려는 것 같아요. 책마을에도 자주 등장했던 '좌민규/우애란'이라는 표현이나, 김영하나 성석제 같은 작가들 앞에 이제는 '젊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해질 정도로 새로운 젊은 작가들이 속속 튀어나오고, 또 그들의 작품이 비평적 지지와 함께 대중적으로도 많이 팔리는 모습을 보면 '젊은' 작가들에 대한 문학계의 기대가 매우 큰 것을 느끼게 됩니다.
김경욱도 그런 작가 중 하나죠. 저도 그의 단편집 <위험한 독서>는 재밌게 읽었구요. 다만 작품에 대한 호오와 비평적 가치를 떠나서 제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젊은' 작가들에 대한 문단과 독자/문학소비자 들의 기대와 반응에 대해서입니다. 제도화된 문단과 방향성을 잃은 한국 문학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젊은' 작가군은 물론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신선하고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나쁘지 않은 작품들을 쓰고 있습니다. 김경욱의 예를 들자면 '장국영','레이먼드 챈들러','미야베 미유키' 등 90년대 이후 세대들에게 익숙한 문화적 아이콘 - 그러나 결코 '가볍다'는 평을 듣지는 않을 정도로 - 들을 차용하면서 동시대의 독자들과 호흡하는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구요. 그러면서도 이들은 젊은 세대를 향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도 게으르지 않죠. 박민규는 끊임 없이 사회의 '루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죠. 김경욱도 '비정규직 노동자', '맥도날드 알바', '재수 기숙학원' 등의 소재를 통해 단순히 그의 작품이 재밌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정말 이들의 작품이 '발언하는 문학'인지에 대한 판단은 다른 글에 맡기도록 하고 일단 저는 이러한 다재다능한 젊은 작가들이 유독 주목 받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대안'이라는 단어에는 독립, 비주류, 실험, 소수성, 새로움, 젊음 과 같은 단어들이 따라 붙습니다. 따라서 '한국 문학의 대안적 작가들'이라고 할 때 젊은 작가군에게 기대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겠죠.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이러한 기대에 충족할만한 작품을 쓰고 있구요. 그러나 이런 '대안'이 과연 한국 문학의 진정한 혁신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품화 되어 가는 문학의 또 다른 참신하고 새로운 '상품'들에 지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 저는 좀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타일', '문화적 향유', '쿨' 등을 강조하는 이미지 위주의 새로운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상품들로 '한국 문학의 대안'이 등장한게 아닐까요.
90년대를 거치면서 '실천 문학'이 독자들에게 낯선 것으로 변해갔고, 문학을 좀 읽는다는 독자들 사이에서도 문학에 있어서 진영과 노선이라는 것은 의미를 잃은지 오래입니다. 창비와 문지라는 한국 문학계의 전설적인 대립은 이제 정말 '전설'로만 의미를 가질 뿐, 두 진영 모두 이제는 차이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 '기존 문학'으로 굳어지게 되었죠. (물론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끊임 없이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내세우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에게 익숙해진 것은 '어떤 문학을 하는 작가'가 아닌, '어떤 작가의 문학'이 되었습니다. '문학' 보다는 '작가'가 우선시되는 시대가 온 것이죠. 그리고 어떤 작가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학적 입장이 아닌, 단순한 '취향'을 드러내는 국면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문학을 즐겨 읽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김훈'과 '미야베 미유키'와 '박민규'와 '보르헤스'와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한다는 문학소년소녀들을 만나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맞닿드리게 되었죠.
이와 같은 '작가' 중심의 문학 읽기가 가져온 것은 작가 스스로 '상품'이 되는 상황입니다. 문단에서 '한국 문학의 종언'을 말하는 입장에 반하여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한국 문학의 대안/문제적 작가들은 이와 같은 상품화의 경향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젊은 작가들이 이러한 '히트 상품'이 되면서, 이들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오히려 이들이 '젊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작품이 가진 가치로 작용하게 된 것이죠. 이와 같은 논지에서 신진, 혹은 젊은 작가란 작가의 육체적인 나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닌, 끊임없이 새롭고 참신한(그리고 그런 것을 소비하는 독자의 구미에 맞는) 작가들이 가진 브랜드의 성격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단에서는 끊임 없이 문학상과 의례화된 비평을 통해 새로운 작가들을 홍보하기 여념이 없구요. 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신상'을 예찬하는 서인영을 겹쳐서 보게 됩니다.
김경욱의 단편을 그가 묘사하는 문화의 동세대로서 즐겁게 읽으면서도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김경욱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 속에 흥미로운 소재들을 배치해놓으며, 사회적 구조에 대한 비판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젊은 작가'의 '문제 소설'이라는 선정적인 타이틀을 달고 팔려나가겠죠. 그리고 단편 뒤에는 마치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학>이 그랬던 것처럼, '포스트모던 사회 심리학' 따위의 인문사회과학작 냄새가 풍기는 '유'의미한 해설이 붙습니다. 그리고 그걸 읽는 독자들은 심리적 만족감과 함께 - 그러나 전혀 '문학'을 읽고 난 후의 긴장과 번뜩이는 충격 없는 - 그의 다른 작품을 기다리겠죠. <위험한 독서>가 읽히는 시대에 정말 '위험한 독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 '위험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