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특집] 무라카미 하루키 (병장 허원영/051231) 
 
 
 
 

내가 말할 수 있는 것

  나처럼 보잘것 없는, 애인도 없는(고로 보잘것 없는), 대학을 휴학한(그래서 보잘것 없는), 군에 입대한(정말로 보잘것 없는), 프랜차이즈 체인점의(아아, 참으로 보잘것 없는!), 어느 청년(휴우, 아직은 희망이 있다)이 한 작가에 대해 '특집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 의미의 유무나 대소를 따지기 전에, 그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아주 적당한 실례(實例)를 하나 들어 보겠다. 장정일은 김수영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그에게 있어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30분을 요하는 작업이다.

  10분 동안 담배를 피우며 창 밖을 바라본다.
   5분 동안 손을 씻는다.
  15분 만에 김수영에 대한 글을 써 낸다.

  '어떤 작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장정일식 사고방식은 이런 것이다. 알면 저렇게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전집을 훑어보고 평론을 조사하는 것은 '알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알기 위해'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건 사기다.
  너무 편협한 사고방식이겠지만, 나로서는 일정부분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어떤 작가에 대해 '특집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도단이고 어불성설이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자료를 뒤적여가며 글을 '만들어 내려' 해도, 나는 군에 있는 몸이고 대부분의 책은 내 고향집에 고이 모셔져 있다. 브라질까지 망명 온 츠바이크와 같은 꼴이다. 기억을 대조·확인해 볼 원본이 없다. 훔쳐 볼 책도 없다. 결국 사기꾼 노릇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궁지로 모는 까닭은, 이 글이 '작가특집'의 이름을 달기에는 함량미달의 글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30분만에 글을 써 낼 정도로 대상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 '작가'는 물 건너갔고, 기억에 의존해서 부정확한 면이 있을지도 모르니 '특집'은 글러먹었다. 결국 이 글은 한 작가에 대한 내 기억의 집합이며, 이미지 조각의 퀼트(Quilt)이며, 나름의 꼬챙이로 찔러 만든 어설픈 분석이다. 따라서 이 글에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작가의 일생과 전 작품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날카로운 평론을 기대하는 것은, 물론 읽는 이의 자유지만, 별 쓸모 없는 일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작가

  겨우 숨통이 틔였으니('작가특집'의 부담은 덜었다), 이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작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어떤 작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굳이 까다로운 기준을 설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그 작가의 책이라고는 한 권 밖에 읽지 않은 마르께스에 대해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몇 권의 책을 읽어 본 김영하에 대해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어떤 작가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다. 비록 그 작가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경우라도.
  그러나 내 편집증은 쉽게 멈추지 않아, 나에게 일정한 기준을 요구한다. 그건 말하자면 '대강의' 기준일 테지만, 아무튼 분명히 존재하는 기준이다. 그걸 명확하게 수치로 구체화시켜 말하기는 좀 곤란하다. 비유하자면, 어떤 친구에게 나름의 의견을 제시했을 때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하지 마"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제멋대로의 기준에 합당한 작가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워낙 독서의 절대량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떠올리는 작가들마다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하지 마"라고 차가운 얼굴로 내뱉듯이 말하는 것이다. 까뮈는 고독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문 채 외면하고, 괴테는 젊은 애인을 데리고 도망간다. 박민규는 카스테라가 담긴 냉장고 속에 머리를 파묻는다. 도무지 상대해 주는 작가가 없다.
  이럴 때 내가 그나마 다가가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는 작가는 하루키 뿐이다. 에세이/단편/장편을 막론하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또 내가 그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작가도 별로 없다. 하루키도 그다지 반가운 표정은 아니지만 손을 잡아 준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걸로 거래는 성사되었다.

  사실 이것만이 내가 하루키를 선택한 이유는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어쩌면 나만의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키는 하나의 상징이다. 톨스토이가 광활한 러시아의 대지를 떠올리게 하고, 디킨스가 영국의 빈민가를 떠올리게 하듯이 하루키도 우리시대의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 점이 중요시되는 것을 굉장히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며, 그런 이미지가 작품과 작가의 독해를 방해한다고 믿는다. 하루키만큼 쉽게 읽히고 또 널리 읽히는 작가도 드물지만, 또 그만큼 노력없이 읽히고 근거없이 비난받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사정들이 내가 하루키를 택하도록 만든다.


잊혀진 혁명의 시대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작가의 삶을 조금도 개입시켜서는 안된다는 비평방식이 있다. 작품 내적인 구조와 내용에 충실하자는 자세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비평만으로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전부 설명할 수가 없다.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고, 작가는 어느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지 불멸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교과서적일 수도 있겠지만 하루키의 삶을 조금 훑어보고 시작하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일본 효고현(兵庫縣)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태어난 전후(戰後) 세대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단카이(團塊) 세대라고 말하는데, 전전(戰前)의 세대와는 뚝 떨어져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이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안보(安保) 투쟁과 전공투(全共鬪)다(주1).
  우리나라에서 386세대를 논할 때 80년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일본의 단카이 세대, 즉 전공투 세대를 논할 때 60년대를 건너 뛰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일본의 1960년대 젊은이들은 우리나라의 1980년대 젊은이들처럼 온갖 투쟁과 이념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물론 일본에는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장갑차를 몰아대는 독재자가 없었기에 그 성격이 1980년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차라리 당시 전세계의 젊은이들을 해일처럼 휩쓸던 반전/반핵 운동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마루야마 겐지가 대학생들의 장난 같다고 치부하기도 한 투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피를 더 많이 흘렸다고 해서 반드시 더 치열한 것은 아니다. 196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고 파리의 대학생들도, 미국의 대학생들도 각자의 전쟁터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싸웠다. 그들은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군인의 총에 꽃을 꽂았다. 도쿄의 대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모든 젊은이들이 경전처럼 여기던 맑스를 껴안고 그들도 싸웠다.『자본』을 읽고, 바리케이트를 쌓고, 경찰과 대치했다.
  그 뒤의 흐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다.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의 불길은 말 그대로 불꽃이 사그라들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젊은이들은 투쟁에 뛰어들었던 그 속도 그대로 사회와 체제 속에 뛰어들었다. 모두가 등을 돌렸고, 잊어버렸으며, 말하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의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문학, 시작되다

  하루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을 알아보다가 카페를 열고 일한다. 그러다가 스물 아홉 살에 야구장에서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주2). 이것이 바로 그의 첫 작품『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다. 하루키는 가게 문을 닫은 뒤 주방의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글을 썼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키친 테이블 노블이다. 이 소설로 그는 군조(群像)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다. 이때가 1979년이다.
  이후 하루키는『1973년의 핀볼』,『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이어지는 일명 '쥐 삼부작', 또는 '청춘 삼부작'을 쓴다. 작가 스스로도 에세이에서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지만, 이 '삼부작'은 여러모로 전공투 시대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마무리짓는 작업의 성격이 강하다. 첫 두 작품이 당시를 회상하는 성격의 것이라면, 세 번째 작품인『양을 둘러싼 모험』에서 하루키는 '양'으로 과거의 투쟁대상을 상징하면서 오랜 친구 '쥐'의 희생으로 자신의 과거를 완결짓는다.

  네 번째 장편 소설인『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는 90년대 이전의 하루키 문학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두 개의 세계를 번갈아가며 써 가는데, 하나는 근미래(近未來)의 세계(=A)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자와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판타지적 세계(=B)다. A 세계에는 계산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이건 일종의 비유이며 바로 여기가 현실 세계다. B 세계는 A 세계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또한 A 세계에 영향을 주고 받는 무의식의 장이다. B 세계의 주인공은 그림자(의식)만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숲 속으로 들어가 그림자 없이 살아가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과거보다는 구성의 치밀함과 깊어진 의미구조에 더 치중했다. 이 작품은 하루키의 지향점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으며, 이후『해변의 카프카』에서 연관성을 드러내게 된다.

  1987년에 하루키는『노르웨이의 숲』을 출판한다. 우리나라에는『상실의 시대』로 잘 알려져 있고 그래서 청춘의 상실과 방황을 그린 작품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게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혁명에 무연한 듯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그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데, 이런 부분을 주의깊게 보면 소설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바리케이트를 쌓고 투쟁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그래, 마음껏 투쟁하라'고 지지하다가도 그들이 대학 분쇄에 실패하자 '대학이 바리케이트 따위에 분쇄될 리 없다'고 자조적인 말을 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또한 혁명이니 맑스니 열을 올리던 이들이 동맹휴학이 해체되자 가장 먼저 출석하고 수업받는 모습에 실망하는 것도 그렇다. 주인공은 출석하되 대답하지 않는 소극적인 반항을 시도하지만 곧 그만둬 버린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전공투 세대에 대한 냉소이기도 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노르웨이의 숲』까지의 하루키 문학은 일종의 자기청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회고나 눈물어린 추억담이 아니라, 뼈저린 반성으로까지 읽힐 수 있다. 어느 에세이에서 하루키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 세대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자가용과 맞바꿨다'. 60년대에 청춘을 보낸 작가들 중에는 비슷한 인식을 가진 작가들이 꽤 있는데, 스티븐 킹도 그 중 하나다. 그 역시 하루키와 비슷한 의미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즉 그들의 알리바이랄까, 세대의 존립근거는 1960년대에 있는데, 정작 그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정리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386세대들이 90년대 이후 일제히 '우향우'하여 달려가 버린 뒤 김규항 같은 몇몇 좌파가 '양심적으로' 사회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물론 사회적 의미는 크게 다르지만).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으로 자신의 과거, 즉 그들의 과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긴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했고 무엇을 잃었는가. 이것이 포인트다. 연애도 좋고 사랑도 좋지만, 하루키 초기작품의 상실감은 애인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보다는 목적의 상실, 정체성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 더 크다.
  세계를 자가용과 맞바꾼 그들을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세대는 과연 자가용과 맞바꿀 수라도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하면 한숨이 날 뿐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파시스트 독재자도 없고, 공동의 적도 없다. 자본지상주의는 우리의 목을 짓누른다. 알리바이가 없다. 까짓것 싸워서 얻으면 그만이지만, 아무래도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르웨이의 숲』출간 1년 뒤인 1988년 출간된『댄스 댄스 댄스』는 하루키 문학의 첫번째 전환점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생을 춤추는 것에 비유하며 '음악에 몸을 싣고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옮기라'고 말한다. 이전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은 듯 경쾌한 어조로 말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요약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지만, 아무튼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후 하루키의 문학은 청춘 시대의 회상을 접고, (혁명의) 상실을 넘어서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역사와 현실의 경계에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1992)에서 하루키는 색다른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 뒤에 출간된『태엽감는 새 연대기』(1994)는 말 그대로 하루키 최초의 기념비적 대작(大作)이었다. 이 소설은 일본의 중국침략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져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데 있어서도 그렇지만, 작품의 스케일이라든가 사건 사이에 연관/상징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굉장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삼십 대의 남자인 '나'이며, 아내 구미코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나'는 아내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하고, 아내가 스스로 집을 나간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끌려가게 된 것임을 알게 된다. 아내를 찾던 도중 '나'는 '노몬한 사건'(주3)에서 살아남은 마미야 씨를 만나게 된다. 마미야 씨는 국경지대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혀 끔찍한 일을 경험하고 우물에 갇혀 있다 기적적으로 구출된다. 마미야 씨와의 대화를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은 '나'는 가사하라 메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는 빈집의 우물에 자발적으로 들어간다.
  우물에서 나온 뒤 '나'는 그 우물이 있는 집에 얽힌 일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노 구레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도움으로 아내의 행방에 조금씩 접근하게 된 그는 아내가 누군가에게 (미묘한 의미에서) 억류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와타야 노보루다.
  이 와타야 노보루라는 사내는 아내 구미코의 오빠다. 노보루(昇)라는 이름이 뜻하는 대로 출세지향적이며 세상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다 이용하는 사나이다. 소설에서 와타야 노보루는 세상을 뒤에서 움직이는 어떤 세력을 의미하는데, 음모론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존재다. 어떻게 보면 세계=체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거기에는 오컬트적인 요소가 포함된다), 결국 무의식의 차원에서 와타야 노보루를 (상징적인) 야구 방망이로 때려 눕힌다. 

  이 소설은 그 안에 뒤섞인 온갖 상징들과 생생하게 묘사된 기이한 사건들로 인해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로 읽히기가 쉽다. 그러나 잘 뜯어보면 계속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묘사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하루키의 에세이 중 일부이다. '이제 조직적인 운동이 통하는 시기는 지나지 않았을까. 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싸워 나가는 것이,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혁명 그 후, 라고 하면 좀 거창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루키는 이런 식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 자가용과 맞바꾼 60년대를 과연 어떤 식으로 회복할 것인가. 이 시대도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떤 식으로 싸워 나가야 할 것인가.

  '나'를 '태엽감는 새님'이라고 부르는 가사하라 메이는 '나'가 들어가 있는 우물의 줄사다리를 치우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뭐랄까, 아저씨를 보고 있으면 마치 아저씨가 나를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와 싸워 주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될 때가 자주 있어요. 이상한 얘기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있죠, 나까지 뻘뻘 땀을 흘리게 돼요. 이해되세요? 아저씨는 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엇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행동해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아저씨는 아저씨 나름대로 열심히 싸우고 있는 거에요. 타인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렇지 않다면 일부러 그런 우물 안에 들어가지는 않겠죠? 그렇죠? 하지만 물론 태엽 감는 새님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미코 씨를 찾기 위해 허둥지둥 볼썽사납게 무엇인가를 상대로 맞붙어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일부러 땀 흘릴 필요는 없어요. 그건 알지만 그래도 역시 태엽 감는 새님은 나를 위해서도 싸운다는 느낌이 들어요. 태엽 감는 새님은 아마도 구미코 씨를 위해 싸워 나가면서 동시에 결과적으로 다른 여러 사람을 위해서도 싸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저씨가 때로는 바보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태엽 감는 새님, 나는 그런 아저씨를 보고 있으면 때로는 힘들어요. 정말로 힘들다고요. 그도 그럴 것이 아저씨는 전혀 승산이 없어 보이거든요. 만약 내가 어느 편인가에 돈을 걸어야 한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아마 태엽 감는 새님이 지는 쪽에다 돈을 걸 거 같아요. 나는 분명 태엽 감는 새님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산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좀 길지만, 이렇게 인용하지 않으면 별로 느낌이 오지 않는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개인의 입장에서 자기의 목표를 위해 싸우지만 결국 그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우는 셈이 된다는 걸, 하루키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가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자금을 모으고 폭탄을 사서 와타야 노보루와 맞서 싸우고 아내 구미코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꿈의 세계에서 자기 손에 쥐어진 야구 방망이로 노보루에게 일격을 가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비록 그것이 승산 없고 돈을 걸 수 없는 쪽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체체(=노보루)에 맞서서 사랑하는 것(=아내 구미코)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정면승부가 아니라 나의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방법을 하루키는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1995년 1월, 일본에는 고베 대지진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며 엄청난 재산 손실이 있었다. 바로 이 고베(神戶)가 하루키의 고향인 효고현의 현청 소재지이다. 하루키는 에세이든 어디서든 부모의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았는데, 이 고베 대지진 이후 그 거리를 다시 걷는 여행 에세이에서는 이 고베에 자신의 부모님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사건이 작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하루키의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이후 그 유명한 옴진리교 사건(주4)이 발생한다. 하루키는 이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언더그라운드』(1997)와 옴진리교측 인물들을 인터뷰한『언더그라운드 2』(1998)를 펴낸다. 수많은 피해자들과 관계자들을 일일이 인터뷰하고 서로 비슷한 내용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추적하여 책으로 정리해 낸 것을 보면 이 사건이 하루키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1999)은 이런 인식 변화의 증거라 할 만하다. 그가 써 온 작품의 흐름 속에서 말하자면 이 책은 과도기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무언가가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과도기'는 아니다. 이 책에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좁은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면 '저쪽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도 좋다. 아무튼 이 책에는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어떠한 것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이후의 작품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하루키는 여기에서 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말을 주인공의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한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만났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오랫동안 혼자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결국 한 명분의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외톨이로 지낸다는 것은 굉장히 외로운 생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거야.[……]

『노르웨이의 숲』에서 '고독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다만 사람에 대해서 실망하는 일이 귀찮아져서 고독하게 되는 거야'라고 말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어조다. 하루키에게 있어서는 거의 혁명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르다. 하루키는 이 작품을 통해 2000년대에 써 나갈 문학적 지향점을 미리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에는『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단편집을 내는데, 이전의 단편집과는 판이하게 다른, 일종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두꺼비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구하거나 한다. 이전의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대부분이 세계나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해 왔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리하여『해변의 카프카』(2002)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도 이야기했듯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만큼 복잡한 구조와 사건/상징들로 얽혀 있는 작품이다. 나로서도 입대 전에 한 번 읽어봤을 뿐이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몇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있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문지기가 지키고 도서관이 있는 숲이 등장하는데, 이 숲은 분명『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등장하는 세계( B )와 연관이 깊다는 것이다. 그림자 없이 살아가는 그 남자가 있는 숲, 과연 그곳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기서 어린 카프카는 무엇을 얻는가. 이 점은『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연관지어 주의깊게 읽어야 할 부분이다.
  또 이 작품에서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는 이런 말을 한다. '상상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하다. 내가 어떤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다시 한 번 개인을 세계와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개인은 세계와 연관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하루키의 개인(초기 작품들에서 등장하는)이 세계와 연결되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한 맑스의 개인이 세계와 연관되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하루키의 개인은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나' 외에는 별 관심없이 생활하는 '쿨한' 개인이다. 뭐가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생활방식을 가진 개인이다. 이 '양식있는 현대인'의 표준 같은 개인은, 연대나 투쟁 같은 것으로 세계와 연결되지 않고 전혀 다른 차원의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개인이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잃지 않고 세계와 연결되는 것, 이것은 하루키가 선택한 탈출구이자, 이 시대에 그가 줄곧 추구해 온 것에 대한 잠정적 해답이기도 하다.


아직 못다한 이야기들

  지루한 글을 너무 오래 끌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는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평가였다. 그 평가는 초기작에서 '청춘의 상실감을 훌륭하게 묘사했다'로 시작하여 중기에는 '신기한 사건을 묘사한 소설'로 치부되다가 나중에 이르러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실망이다'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요즘의 작품에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재미있고, 주제는 잘 모르겠지만 감동적이다' 식으로 말하곤 했다. 내가 허술한 비판들만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하루키의 평가는 대부분 저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읽은 하루키'로 글을 써보고자 했다. 이전부터 이런 식으로 하루키에 대해 써보자는 생각은 오랫동안 했었고, 그랬기에 리장님이 '작가특집'을 부탁했을 때 쉽게 승낙할 수 있었다. 이전에 쓴 칼럼 '하루키를 위한 변명'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약간은 핀트가 달랐다. 그 글이 방패라면 이 글은 창이다.
  물론 이 글은 전적으로 '내가 읽은 하루키'에 국한되는 해석이다. 하루키는 그렇게 좁은 폭으로 해석되는 작가가 아니며, 그런 식으로만 해석해서는 전혀 재미가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감수성 넘치는 문체는 한국의 독자들은 물론 작가들에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단편들이 주는 독특한 재미도 빠뜨릴 수 없다. 또한 아기자기하고 유머가 넘치는 에세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하루키의 다른 면들은 이 글에서 거의 언급하지 못했다. 그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다음에 또 쓸 기회가 있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덧붙여서, 이 글에 [……]로 인용된 문장은 내가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구절이고 각 작품들의 발표시기와 사건의 발생시기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영외에 있는 사람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그 밖의 모든 글과 인용은 내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약간의 오차가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양해해 주기 바란다(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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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안보(安保)는 일미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條約)의 약자로, 1951년 조인되었다. 1960년대의 일본 대학생들은 주로 이것에 반대하여 전공투, 즉 전국학생공동투쟁(全國學生共同鬪爭)을 내세우며 학교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투쟁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투쟁이 열풍처럼 불어와 중고생까지도 그 대열에 참여했는데, 고등학생들의 투쟁모습은 무라카미 류의『69』에 잘 나타나 있다.

주2) 하루키는 처녀작 이전에 단 한 번의 습작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믿을 수 없기는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거듭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다. 마루야마 겐지도 그렇다고 하니,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싶다.

주3) 1939년에 만주와 몽골 국경인 노몬한에서 일어난 소련과 일본의 국경 분쟁. 일본군이 대패하여 같은 해 9월에 정전 협정이 성립되면서 국경선은 대략 소련의 주장대로 확정되었다.

주4) 일본의 신흥종교집단인 옴진리교에서 교주의 명령을 받고 일본 지하철에 독극물인 사린 가스를 살포한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주5) 참고로, 나는 이 글에서『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와 『언더그라운드』,『언더그라운드 2』를 제외하고는 모두 장편만을 대상으로 이야기했다. 저 세 작품은 글의 흐름상 꼭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언급했을 뿐이다. 하루키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루키는 에세이가 제일 낫고, 그 다음이 단편이고, 장편이 제일 나쁘다'라는 게 있는데, 이 말에 대한 반발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 그렇다면 장편만으로 하루키를 해석하고 그 가치를 보여주자, 라는 것이 나의 의도중 하나였다.





병장 이준환 (2005-12-31 07:55:33)  
세상과 자신을 이어보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아름다운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병 노지훈 (2006-01-01 07:14:54)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한상원 (2006-01-01 12:44:55)  
저는 <노르웨이의 숲>이랑 <해변의 카프카>를 얼마 안되는 간격을 두고 읽었었는데, 두 작품을 보면서 이게 같은 사람이 쓴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느낌이 달랐었어요. 분명, 하루키 작품에 존재한다고 했던 분명한 몰입감은 뚜렷했지만요. 오히려 <어둠의 저편>이 <해변의 카프카>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면에서 세계-개인간의 연계 혹은 유대를 하루키가 찾은 해답이라고 보시는데 완전 공감할 수 밖에 없군요. 그런데 하루키의 경우 소위 '쿨'하다는 면을 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연계와 소통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어렵다, 힘이 떨어졌다는 식의 소리를 쉬이 듣는 것 같아요. 본인으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책 이야기도 많이 써주세요. 호호.  

병장 한상천 (2006-01-01 13:25:35)  
노르웨이 숲과 카프카와의 간격은 20년에 가까운 공백이 존재하니 그 사이에 작가도 많이 변한거 겠죠
초기의 작품과 근래의 작품간에는 확실히 차이가 나죠..

네이버에 만들어진 하루키싸이트를 우연치 않게 들린적이 있었는데 나가게 되면 자세하게 한번 둘러봐야겠어요  

병장 강우람 (2006-01-01 21:07:57)  
하루키 하루키, 정말 지겨울 정도로 거듭 들어왔던 이름인데 이상하게도 그 이름에는 왠지 모를 반감이 들어서 한 작품도 읽어보질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반감없이 그 사람의 글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상병 김여환 (2006-01-02 10:36:20)  
어둠의 저편...세번째 시도 이번엔 성공해야지  

병장 김동환 (2006-01-02 10:59:20)  
이런 뒷사정이 있었군요. 프린트해서 하루키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에게
보여줘야겠어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아-.(웃음)  

이우영 (2006-01-12 14:55:54)  
무라카미 하루키,. 꽤 좋아하긴 하지만 저는 뭐랄까요. 그 큰틀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하루키의 문체와 인물들의 신비스러움 이랄까요. 그런게 꽤 매력으로 다가오더군요. 정체모를 동감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대사에도 항상 감탄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