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병장 이승일 06-03 12:32 | HIT : 205 




On Liberty,
John Stuart Mill, Penguin Classics, 198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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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순전히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읽은 책이었다. 이왕이면 재미있을법한 책 읽자, 해서 읽었을 뿐이다. 영어공부에는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기억나는 부분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첨부해서 독서후기를 적어볼까 한다. 그다지 성실한 후기가 아니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은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별로 두껍지 않다. 영어 판의 두께는 150쪽이 채 안된다. 
 참고사항 : 우리나라에는 <자유론>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있지만, 이 글에서는 원제의 느낌을 살려 그냥 <자유에 관하여> 라고 표기하겠다. 


[ 존 스튜어트 밀의 삶] (이 부분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를 주로 참조했다.)

 심리학자 콕스는 역사상 유명한 서구 위인들의 IQ 를 접근 가능한 자료들에 근거해서 측정한 적이 있다. 웃길려고 만든 것 같은 뉘앙스가 풍기긴 하지만, 하여간 그가 주장하는 IQ top 10 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1) 존 스튜어트 밀
2) 괴테
3) 라이프니츠
4) 그로티우스
5) 매콜리
6) 밴담
7) 파스칼
8) 셸링
9) 할러
10) 콜리지 
(< 교양> 에서 인용) 

 물론 거의 개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콕스에겐 죄송하지만.) 그러나 어쨌건 서구 문화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거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밀이 이렇게 '초천재' 로 간주된 것은 순전히 그의 아버지 덕이다.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주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교육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밀은 공교육을 사실상 전혀 받지 않았고, 오직 그의 아버지로부터만 과외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그 자신이 이미 저명한 경제사상가였다. 그는 밴덤이나 리카도와 절친한 사이눗?이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또한 오늘날로 따지자면 <맨큐의 경제학>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경제학 원론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 자신의 학문적 영향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 것인지, 그는 자식들에게 가혹할 정도의 영재교육을 시켰다. 총명했던 존 밀에게는 특히 그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공교육을 불신했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가르치고 함께 토론하면서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이 엄청난 조기교육의 결실이 바로 서구 역사상 IQ 1위라고 평가된 존 스튜어트 밀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보다 조금 전, 또 다른 조기 영재교육의 결과로 베토벤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조기교육이 꼭 부정적이진 않은 것 같다. 물론 밀과 베토벤이 되지 못한 수많은 희생양들을 잠시 잊어둔다면 말이다.)
 그는 세살 때 그리스어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과 서사시들을 읽었다. 호메로스 따위 같은 것들을 이미 세살 때 원문으로 다 읽었다는 것이다. (맙소사!) 8살 때까지는 라틴어로 된 수많은 역사책과 고전을 읽었으며, 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쳐줄 정도로 우수한 실력을 갖게 되었다. 13살 때는 미적분, 그리고 당시 신흥학문인 경제학을 마스터했다. 15살 때부터는 <웨스트민스터 리뷰> 등과 같은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대중적인 신문이라기보다는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읽힌 준 학술지에 더 가깝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존 밀은 20살 때 이미 공리주의자 서클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있었다. 당시 캠브리지에 있었던 Lord Balfour 라는 학자는 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가 영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졌던 권위는 헤겔이 독일에서 가졌던 권위, 혹은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졌던 권위와 비견될만한 것이었다." 심지어 옥스포드 대학에서는 모든 토론이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Read Mill." (밀 책좀 읽어봐)

20 대 초반에 이미 밴담의 뒤를 잇는 사상적 지도자가 된 밀은, 너무나 조숙했던 탓인지, 25세가 되던 해에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는다. 이 위기는 외부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부적인 것이었다. 그는 공리주의 사상 자체에, 나아가서는 지성적 활동 자체에 회복하기 힘든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함인지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인류 사회가 나로 인해 개선되고 더 나아진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인가? 사회에 관한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적용하여 좀 더 개선된 사회가 된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정말로 행복과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이 회의는 치명적인 것이었고, 그는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변화에 대해 그의 아버지와는 논의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 지적인 폭군 - 는 이와 같은 회의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철저한 공리주의자 제임스 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지 않았을까 장난삼아 추측해본다. "그렇게 회의하는 것이 너와 이 사회에 도대체 무슨 이익이 되지?" 
 존은 이 기간동안에도 거의 타의에 의해 공리주의자 서클의 지도자 역할을 계속 했지만, 이는 말 그대로 거의 습관적이고 관성적인 것에 불과했다. 밀이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은 새로운 사상적 조류나 교우관계가 아니라 엘리자베스라는 여인과의 교제를 통해서였다.(이름이 엘리자베스가 맞는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슬프게도 이 여인은 테일러Taylor 라는 돈 많고 바보 같은 남자와 이미 혼인한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과 엘리자베스는 서로의 우정을 쌓아나갔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친구들로부터 멀어졌다. 밀은 엘리자베스를 통해서 자신이 그 때까지 보지 못했던 감성적인 것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영향 탓에, 그는 대체로 감성적인 것들에 관해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저급하고, 무책임하며 희망 없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이런 그에게 엘리자베스의 열정과 풍부한 감성적 힘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자극이었으며, 밀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을 통해 감성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자베스의 남편 테일러는 일찍 죽었고, 밀은 거의 곧바로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이 역시 세간의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결혼을 주저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와의 교제 이후 밀은 다시 정신적 기력을 회복하였으며,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밀의 주저로 간주되는 <논리학 체계>, <정치경제학 원리>, <자유에 관하여(혹은 자유론)> 등은 모두 엘리자베스의 영향력 아래에 집필된 것이었다. 밀 자신도 "한 글자 한 글자 그녀와 함께 검토하면서" 그것을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자유에 관하여> 는 그 어느 책보다도 엘리자베스로부터 받은 자극이 녹아들어있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엘리자베스는 <자유에 관하여>의 출판을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 책은 (당연하게도) 엘리자베스에게 헌정되었는데, 그 헌정사가 상당히 감동적이어서 여기에 옮겨보기로 하겠다. 내 나름대로 번역은 했지만 번역이 어려워서 원문과 함께 옮긴다. 이 헌정사는 거의 시에 가깝다. 다시 말해 매끄럽게 번역하기가 좀 그렇다는 말이다. 나의 번역이 아주 절망적일 뿐더러 영어 자체로 매우 명문이므로 꼭 원문을 참조하길 권유한다. 


[ 이 책의 가장 좋은 부분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으며 부분적으로 그 저자인 그녀에게, 진리와 정의에 대한 고귀한 감각을 통해 나에게 가장 강력한 자극을 주었던 나의 친구이자 부인인 그녀에게, 그 인정이 나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되었던 그녀에게, 그녀에 대한 애증의 추억에 이 책을 바친다. 수년 동안 내가 집필한 다른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나의 것인 만큼 또한 그녀의 것이다. 물론 현재상태로의 이 작품은 그녀의 검토가 제공하는 측량할 수 없는 이점을 매우 불충분하게만 갖고 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그녀의 보다 심도 있는 재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지만, 이젠 더 이상 그것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그 지혜의 도움과 자극을 받지 못하는 지금, 그녀와 함께 무덤에 묻힌 고귀한 감정과 위대한 사상을 내가 반절만이라도 세상에 전해줄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저술한 그 어떤 것에서 보다도 세상에 더 큰 유익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To the beloved and deplored memory of her who was the inspirer, and in part the author, of all that is best in my writings - the friend and wife whose exalted sense of truth and right was my strongest incitement, and whose approbation was my chief reward - I dedicate this volume. Like all that I have written for many years, it belongs as much to her as to me ; but the work as it stands has had, in a very insufficient degree, the inestimable advantage of her revision; some of the most important portions having been reserved for a more carful re-examination, which they are now never destined to receive. Were I but capable of interpreting to the world one half the great thoughts and noble feelings which are buried in her grave, I should be the medium of a greater benefit to it, than is ever likely to arise from anything that I can write, unprompted and unassisted by her all but unrivaled wisdom. ]


[ 자유에 관하여]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 한다 : "서구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더 법률, 정치제도 등의 면에서 개인에게 가해졌던 불합리한 제약을 슬기롭게 극복해왔다. 이제 더 이상 사회는 법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서구 사회는 전제 군주의 폭정으로부터 벗어났다. 이것은 분명 괄목할만한 발전이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이제(1800년대 중반)는 새로운 폭군이 등장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중' 이라고 부르는 대상이다. 우리 사회는 여론에 의해 개인의 사상, 그것의 표현과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의 폭군들보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제 군주는 가시적이며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뚜렷한 실체이지만, 다중은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식이 말해주는 대로 이 책은 자유와 권력 간의 갈등을 성찰하는 책이며, 특히 다중의 권력에 의한 개인적 자유 침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지자적인 경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영국 사회는 전제 권력을 제거했다는 정치적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었고, 그러한 성취감 속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공동체의 폭력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위험성을 자각하거나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경고는 푸코의 그것보다 거의 한 세기 가까이 앞선 것이었으며, 사회에 대한 분석도 그의 후배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중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그가 원론적으로 제시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 "모든 남성과 여성은, 그들의 행동이 타인에게 해악을 야기하지 않는 한,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행할 자유를 누려야하며 이 자유는 공동체와 국가에 의해 간섭받지 않아야한다."  이 원리는 오늘날에는 중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올 법한 가장 초보적인 명제이디.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것에 그만큼 익숙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이 원리가 당연하거나 무의미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밀이 살던 시대에 대중의 여론이 개인의 의견을 강제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사회가 원하지 않는 의견을 피력하거나, 출판하거나,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엄청난 제약을 받았다. 그것이 고작 150여년 전의 영국이었고, 오늘날에는 이 명제가 서구 사회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상식임을 감안할 때, 존 스튜어트 밀이 서구 사회의 지적 흐름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는 후속하는 논의들을 통해 이 추상적인 원리를 정당화하거나 일정한 제한을 둠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 가다듬어 나간다. 이 부분들을 살펴보아야지만 밀이 이야기하는 '자유' 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밀이 어린아이들과 야만족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 의 개념을 적용시키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 점은 오늘날 그가 비판받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이 주장 속에 담긴 함의를 살펴보는 것은 충분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어린아이들은 보호받아야하기 때문에 자유에 관한 논의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보호' 란 신체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 모두를 함축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란 대체로 주변 환경이 가하는 외력으로부터 스스로의 신체를 보호할만한 판단력을 갖추지 않고 있으며,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기 위해 무엇을 배우고 경험해야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 따라서 부모 혹은 사회는 좀 더 나은 판단력을 이용하여 어린아이의 신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에게 교육을 시켜야한다는 것이다. 부모와 사회의 판단력에도 분명히 한계는 있지만, 어린아이의 그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이 밀의 주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밀이 역시 공리주의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자유에 관하여> 에서는 그가 사실상 공리주의자가 아니라는 의견들이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 관해서는 잠시 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자유를 제한하는 부분에서 그는 분명히 공리주의 적이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란 최상의 '이익' 을 보장해주는 방법이지 결코 궁극적인 목표는 아닌 것이다. 야만인들에게 자유의 논의가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논의에 있어서도 그의 태도는 동일하다. 그는 역사에 일정한 발전 단계가 있다고 간주하고 있다. 서구사회를 비롯한 모든 인류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서구사회는 현재로써는 가장 발전된 형태의 문명을 구현하고 있으며 '자발적 발전' 이 가능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유라는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발적 발전이 가능하지 않은 야만 사회의 경우, 그 단계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일종의 임시방편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허용될 수 있다. 심지어 전제주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 사회의 수준이 어느 정도에 이르고 나면, 현재(1850년)의 유럽처럼 자유의 가치를 선두에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자유란 결코 방종이 아니며 매우 엄격한 한계 내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가치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소중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평등한 토론이 보장된, 성숙한 사회일 것이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밀의 역사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정치적 자유가 궁극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주장,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최우선적인 도구조차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자유는 우리가 행복과 기쁨을 얻기 위해 보장되어야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목적성을 지닐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자유는 우리를 행복과 기쁨으로 이끌기는커녕 무질서와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자유란 오히려 결과적인 것으로서, 정말로 기쁘고 행복하다면 우리는 또한 자유롭다고 고백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그는 자유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이익추구의 한 도구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이익이 경제적이거나 물질적인 이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인 공리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진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이익이라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이익"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최대한 추상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그는 이익이라는 말을 통해 물질적 이익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정신적 발전과 같은 잠재적이고 불명확한 이익을 함께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정된 물질문명 속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문화를 향유하는 것 -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공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리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보장 없이는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서 밀은 중국의 사례를 거론하고 있다. 그는 중국 사회가 과거에 찬란한 발전을 이룩하고서도 오늘날(1850년대) 유럽에 뒤쳐진 이유가 바로 개인의 자유에 관한 무관심에 있다고 평가한다. "그들도 처음에는 독창성을 가지고 출발했을 것이며,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가장 크고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 중국은 훌륭한 현자들의 나라였지만 이제는 정체되고 말았다. ...... 개별성이 관습의 무게를 극복하고 그 자체로서 주장되지 않는 한, 영국은 또 하나의 중국이 될 지도 모른다."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사회적 발전이 계속될 수 없으며, 화석화된 관습에 의해 퇴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 사회가 과거의 중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발전의 정상부에 도달해 있고, 동시에 그 한계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유럽 사회가 이 성취 속에서 자만하고 그것을 절대시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개인의 다양한 의견과 창조성을 생산성으로 연결시키지 못하여 중국과 같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Honboldt 를 인용하여 인류 발전의 필요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유와 상황의 다양성이 그것이다. 밀은 자유뿐만 아니라 상황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서도 영국의 상황은 점점 나빠져 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영국인들은 이제(1850년대) 전보다 더 똑같은 생활을 영위한다. 정치 변화, 교육, 커뮤니케이션, 상업, 산업의 발전이 삶의 동질화를 유도한다. 때문에 개별성과 자유에 대한 적극적인 - 어쩌면 과도한 - 주장이 결여된다면, 영국 사회는 결국 쇠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안타깝게도 밀의 예견은 거의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영국 사회, 나아가 유럽 사회는 과거에 누렸던 지위에 있지 않으며, 밀이 예견한대로 상당히 화석화되어있다. 오늘날 유럽은 전통이 유지되는 곳으로 간주되지 세계를 선도해가는 곳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는 아마도 밀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유럽사회의 필연적인 결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밀이 뿌린 자유주의의 씨앗은 정작 유럽이 아닌 다른 정원에서 꽃을 활짝 피웠는데, 그곳은 바로 미국이다. 밀의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초기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밀 개인의 영향력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전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러한 필요에 부응하고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준 것은 밀과 그의 후배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밀이 제창한 자유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것과 같은 "민주적 자유주의" 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봐야한다. 밀이 강조한 자유는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위한 자유였음을 다시 상기하자. 우수한 의견이나 경험이 우중의 힘에 밀려 배척되고 사라지는 것이야 말로 가장 반-공리주의적인 일이며, 밀의 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측면이 많다. 그가 "고대와 중세보다 현재의 자유가 더 위험한 상태에 있다" 고 말할 때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논의된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 민중들의 자유는 아마도 현재(1850년대) 보다 못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상과 이론, 탁월함 등에 대한 존중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았다는 것이 밀의 견해이다. 다시 말해 고대와 중세는 천재를 존중할 줄 아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럽의 사상과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전반적인 경향은 갈수록 '평범함'에 가장 커다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독창적인 천재들은 사장되고 있으며, 사회는 그들이 제공할 수 있었을 결실을 얻지 못한 채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천재가 이론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어떤 것도 최초의 시작 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다. 모든 좋은 것은 시작이 있으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독창성이었다. .....  독창성이 보존되지 않는 사회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무너진다. (이를테면 중국이나 비잔틴 왕국처럼) ... 천재는 소수이다. 사회는 그들을 위한 토양, 자유로운 분위기를 제공해야한다. 천재가 사회의 틀을 깰 때, 그 사회는 발전을 이룩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천재들을 위한 토양, 자유로운 분위기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적으로 사상의 자유와 그것에 대한 표현의 자유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의견은 오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확신을 갖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반박될 수 있다. 흔히 자신의 경험에 있어서 항상 들어맞았다며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말하는 경험이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개인사에 불과한 것이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편협하며, 따라서 완전한 확실성을 보장할만한 경험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검증으로부터 살아남았기 때문에 참으로 간주되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론을 금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따라서 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장된 반론 가능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설사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참인 것으로 간주되더라도, 그에 대한 반론은 언제나 허용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밀이 '반론 가능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논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어떤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이 틀렸을 경우 뿐 아니라 설사 그것이 참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반박을 허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사회의 의견이 틀렸을 경우, 당연히 더 옳은 의견을 갖기 위해 반박을 허용해야한다. 만약 사회의 지배적 의견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박을 통해 자극받지 않는다면 최초의 생동감을 상실하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읊조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리는 더 이상 진리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깊숙한 구석에 침투해 들어가지 못하며, 단지 '말 뿐인' 진리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 때문에 그것이 정말 진리인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전혀 확인할 수 없고 아무런 생명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혹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이 진리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비판은 너그럽게 허용되어야하며 그 때에만 그 진리는 계속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반대 세력이 완전히 사라져서 사회적 토론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다면, 어떤 정교한 메커니즘을 통해 가상의 반대자를 상정한 뒤 비판적 사고를 계속 해 나아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교한 메커니즘' 의 예로 소크라테스가 즐겨 사용하였던 변증술 (Socratic Dialectics) 을 들고 있다. 
 반론 가능성과 의견의 다양성이 갖는 유용성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관찰을 통해 확인된다. 우리는 역사상 상충하는 것으로 보였던 의견들이 사실은 각기 다른 진실의 일부분을 담지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따라서 상충은 단지 현상적인 것이며, 더 심도 있는 탐구에 의해 그 모두를 포함하는 더 큰 진실의 부분이 발견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다. 우리는 한 의견의 선택이 다른 의견의 배제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진보라는 것조차 완전한 물갈이가 아니다. 조금씩 부분들을 교체 해 나가는 것이다. 하나의 유명한 의견은, 그 안에 그 시대가 가장 원하는 진실을 품고 있을 따름이지 진실의 온전한 부분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밀이 이처럼 진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한 의견의 진실성은 그 유용성의 일부" 라고 전제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공리주의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정당한 것이고, 궁극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의견의 다양성과 자유, 그리고 그 어느 것도 온전한 진실성을 담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의견은 진실의 각기 다른 부분을 소유하고 있다는 밀의 통찰을 높이 사고 싶다. 두 개의 대립되는 의견은 경쟁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일 확률이 매우 크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견을 완전히 배척해 버리는 것은 결코 진실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진실성이 유용성의 일부" 라는 밀의 전제이다. 나는 반대로 "유용성이 진실의 일부" 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또한 유용하다. 그러나 어떤 것이 유용하다고 해서 진실인 것은 아니다. 물론 밀은 공리주의적인 자신의 의견 체계를 감안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썼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공리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분명 이익을 원한다. 우리는 기쁨을 원하고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단지 기쁨과 행복만을 추구해서는 그것을 온전히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기쁨, 행복이란 대체로 눈앞에 보이는 기쁨이나 행복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눈앞의 기쁨이나 행복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 혹은 누려야하는 - 기쁨이나 행복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당장은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면 전혀 원할만한 것이 아니었던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이처럼 정말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의 문제는 결코 가시적인 영역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기쁨과 행복을 우리는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오직 진실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만 획득가능 한 것이다. 나는 공리주의를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끝까지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리주의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으리라고 믿는다. (밀 자신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정말로 유용성을 추구한다면, 유용성의 추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궁극적인 유용성은 진실과 일치하겠지만,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가시적인 유용성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실은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개념이며, 따라서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수 있다. 그곳이 설사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산만하게 논의했지만, 그리고 책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지만, 결국 밀이 추구하는 자유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 자유는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익이고, 이 이익이란 풍족한 물질문명을 기반으로 한 인간 정신의 계발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위한 도구로서의 자유는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취해야 한다. 사회의 몰락은 다수의 평범함에 의해 소수의 독창성이 희생당할 때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목적 처럼 간주된 자유' 가 필요하며, 어떠한 상황 - 심지어 다수의 의견이 너무나도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 개별적인 반론과 다양성이 존중되어야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이 책의 아마도 반절 정도에 해당하리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부분은 자유에 대한 제한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져야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적용되어야하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까지 다루기에는 나의 기억력과 체력이 부족한 것 같으므로, 부족하지만 이 정도로 책 내용에 대한 소개를 마칠까 한다. 

[ 첨언]

 나는 밀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우리가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야할 주장 중 하나임은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개인의 개성과 독창성을 혐오하기로 유명하다. 물론 이것이 비단 부정적인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전체적인 화합을 잘 이끌어내고, 인간적 유대관계가 끈끈하다는 긍정적인 면도 분명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획일성은 너무나도 심각한 수준이 아닌가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획일성은 기득권만이 갖고 있는 성향이 아니라 심지어 그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력들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속성이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는, 그 어느 쪽이건 간에 칭찬받을만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만약 어떤 의견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비판에 대해 정당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변호를 해낼 수 없다면, 아마도 그 사회의 지혜와 이성은 아직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고, 좀 돌아가더라도 그러한 지혜와 이성을 갖출 때까지 다양성을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 할 것이다. 
 한편 나는 공리주의자들이 밀을 통해 오히려 반성하기를 기대한다. 정말로 공리주의를 극한의 지점까지 사유해본다면, 진정한 '이익' 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사람들이 지금 당장 원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진정한 이익이 사탕과 초코렛을 무한정 먹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진실의 존재를 신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미 최소한 한가지 의미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 혹은 '미래'가 그 예이다. 
 이와 함께 나는 밀의 논의가 자유에 관한 부분적인 논의에 불과함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을 허용하는 자유' 는 자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자유의 충분조건은 선택을 통해 보충된다. 우리가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더 나은 것, 가장 나은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선택하려고 노력해야하며, 그 때에만 충분한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서 있을 때 자유로운 것이지 허공에 있을 때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허공에 있는 사람은 결국 '자유'낙하 하여 가장 낮은 곳으로 곤두박질치기 마련이다. 



 병장 배진호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자유에 관하여라..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 

 자유는 제한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쩌면 밀의 말에 몇가지 부분 동조한다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제한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어쩌면 자유가 무엇인지 조차 모를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가장 먼저 제한을 학습합니다.. 
 그 다음 학습하는 것이 자유이지요.. 

 간혹 자유라는 말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범위까지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사실상... 
 몇가지 제한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 자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이 이야기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다라고 생각이 되는군요.. 
 밀이 썼다시피.. 
 하지만 모든 것에는 반박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즉 이해는 하지만 제 생각과 동일하지는 않다라는 것이겠지요.. 

 조금더 논의를 연장시키기 위해 주제를 쪼개어 이야기 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공리주의와 자유, 그리고 유용성과 진실성, 마지막으로 그와 연관된 
 현재 세계와의 이해 정도로 말이죠.. 06-03   

 상병 구본성 
 밀씨도 놀랍지만 늘 그렇듯 승일씨도 놀랍네요. 오란씨는 시원하고, 비타민씨는 유익하지요.... 
 잘 읽었습니다. 06-03   

 상병 구본성 
 아, 그리고 저는 마지막 문단에서 진화론의 다양성-변이, 선택-자연선택 이 연상되네요. 흠흠. 06-03   

 상병 김현진 
Read 승일. 

 농담입니다. 아하하... 

' 대중의 지배'에 대한 위험을 경고한 건 플라톤이 먼저였지요. 물론 플라톤이 정치적인 결론-철인정치를 하자-을 내린 반면(나중에 <법>에서는 그마저 회의하고 법치로 돌아섰..던가. 잘 기억이 안나는군요...) 밀은 개인적인 '자유'에서 뭔가를 찾은 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원서로 읽으셨다니 부럽습니다... 06-04   

 병장 김지민 
 영어 공부 하려고 읽었다니... 
 재밌는 거 읽을려고 읽었다니.... 

... 06-04   

 병장 박요한 
 저도 책세상문고 '자유론'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당시 열심히 줄쳐가면서 읽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이 글을 읽고 다시한번 '자유론'의 내용들을 되새겨 봅니다. '자유론' 보면서 저 자신을 먼저 되돌아본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다중과 군중에 묻혀 너무나 편협한 사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책세상문고에 밀의 '공리주의'가 새로 나온거 같은데, 이번에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06-04   

 병장 이건룡 
 한주 동안 갑갑하게 보내었는데 몇몇 글을 읽다보니 새삼 한가로움이 이리 좋을 줄 몰랐습니다. "가지로" 외칩니다. 

 극한 지점의 공리주의를 믿지는 않으며 공리주의가 어느정도 반지성주의를 기여한 바엔 한표를 던집니다.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관해 아직 읽어 보지 않았기에 딱히 본격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오늘날 팽배해진 반지성주의의 사고에 지성주의사고의 귀환을 바라는 시도는 무척이나 긍정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진경씨의 글과 연관해서 읽었습니다. (웃음) 잘읽고 갑니다. 06-05   

 병장 진규언 
 이 글이 왜 아직도 여기있죠. 제 게으름을 탓합니다. 얼른 <가지로> 외칩니다. 저처럼 지각생 독자가 계시면 한분만 더 추천해주시지요. 얼른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