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도의 책임이 하나 있다. 자신이 있는 모든 지점을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이 서있는 모든 욕망을 분석하고 현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그러지 못하기에, 사회과학도는 원죄를 저지르고 있다. 사회과학도는 원천적으로 죄인이고 학문의 반역자다. 최소한 사회과학을 외치는 저자는 그렇게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아래의 글은, 이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쓰여진 글이다.
오늘도 대학의 거리에는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플래카드가 휘날리고 있을 테고, 게시판에는 여성주의 사유가 담긴 양성 평등의 구호가 가득히 담긴 자보가 붙어 있을 것이다. 신문에는 대법원장이 법조계를 질타하는 말이 쏟아지고, 대통령이 생각을 바꾸라고 외치는 일갈이 담겨 있을 지도 모른다. 이병과 병장이 화목하게 지내라는 지침도 자주 받아봤을 테고 자기계발서에서는 생각을 바꾸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문구가 오늘도 쏟아질지 모른다. 의식을 바꿔라, 관념을 개혁하라는 외침은 주변에 지독히도 넘쳐나서 차라리 진부하다. 개혁의 외침이 진부한 까닭은, 그러나 시민 대중 대다수가 의식을 개혁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의식을 개혁하라는 외침 상당수는 전적으로 옳은 사유에 근거하고 있다. 왜 우리는 사유를 변화시키지 않는가. 왜 아직도 사회는 구태한 사유에 젖어 서로를 억압하는가. 왜, 의식은, 개혁되지 않는가.
간단하고도 보다 친근한 모델을 도입해 생각해 보자. 왜 군대에서는 가혹행위나, 위계 관계에 의한 인권 침해가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는가. 단순히, ‘이병은 책을 봐선 안된다’는 인권 박탈이 왜 나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군인들은 아직도 매우 많으며, 같이 놀면서 때리는 정도는 구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많다. 군에서는 오늘도 가혹행위 근절을 위해 캠페인을 실시하고 간부들에 의한 순찰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을 시행하는데 왜 군에서 가혹행위는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병장, 상병들도 이병 시절을 겪어봤으면서도 왜 의식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인가?
가혹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원인을, 군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설명한다. 이병 생활을 거친 병사들의 보상심리에, 간부들에 의한 순찰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2년의 간격을 두고 계속 병사가 완전 교체되어 정신 교육이 힘들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일선에서는 또한 조금 다른 이야기도 들린다. 사회에서부터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 병으로 들어와 군에서 사고를 친다던가, 혹은 억압된 욕망을 군에서 권력 구도 안에서 분출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지휘 책임을 져야하는 간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특수한 개인’에 의한 문제 역시 계층적 권위 체계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다른 문제로 취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일과 후 사실상 병사끼리 생활하는 체계, 계급제가 병사들 사이에서도 엄격히 적용되기 때문에 권력이 상위 계급 병사에게 주어지는 것에서 권력 남용이 발생하는 것에 보다 큰 문제가 있다고 군은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병사 상호간 호칭 통일 및 병사간 경례 금지, 내무 생활 내용을 영외자가 짜는 등의 대책을 내세우고 계속적으로 보상심리를 부도덕한 것으로 교육하는 등의 행위는 이같은 맥락에서 도출된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병사 생활을 해본 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듯이 병영 문화는 외적으로는 계속 개선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의식의 근간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아직도 이병은 병장들의 열위에 위치한 권위와 권리만을 가진 존재이고, 병장은 사역이나 일과에서 열외로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의 근간은 변화하지 않는다. 신병이 오면 아직도 각종 신상명세를 읊는 인권 침해를 당해야만 하고 누구도 그것이 심각한 인권의 침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정을 자신의 의지로 조정할 수도 없으며, 계급 사회 내에 적확히 포섭되지 않으면 병사들 내적인 제재에 시달려야만 한다. 군 간부들 뿐 아니라 병영 내에서 의식과 제도를 개혁하려는 사병들이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쉽사리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의식은 개혁되지 않았고 단지 ‘사고율’만이 낮아졌을 뿐이다. 왜 그럴까.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의식이 개혁되지 않는다면 문제의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애초에 군대 병사들 간에 권력 관계를 재분석 해보자. 갓 전입한 신병의 입장에서, 무서운 것은 병장이 아니다. 물을 떠오라거나 설거지를 하는 등의 사소한 일을 병장이 시키건, 바로 윗 고참인 이병이 시키건 신병의 입장에서는 똑같이 두렵고 걱정스럽다. 즉, 부대 내의 권력은 선임병 일부에게 한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다. 후임병의 입장에서는 일병이건 상병이건 병장이건 똑같이 높은 권력을 지닌 존재라고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군이 병장들의 의식을 개혁하고, 각종 사역 등의 차출에 선임병 위주로 차출하며, 상위 계급 병사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해도 전체 문화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여기 있다. 억압 구조는 병장 - 이병 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인 매 계급 마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계급의 층위는 흔히 생각하는 병장/ 상병/ 일병/ 이병의 네 단계가 아니라 기수나 군번이라는 형태로 거의 20여개에 달하는 단계로 인식하는 것이 보다 옳다. 20여개에 달하는 계급 구조는, 하위 계급에서 보기에는 단일한 형태의 상부 집단 - 고참 - 의 존재로만 인식되며 최상위 계층의 지시라 할지라도 다른 계급 집단에서 거부하는 듯해 보일 경우 그 지시를 따르지 않는 행위를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즉, 군이나 일부 고참병이 의식을 일제히 개혁하려 할지라도 중간 계층의 병사들이 이에 따르지 않는다면 개혁은 이뤄질 수 없다.
이는 군 자체가 지향하는 기본 가치와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군에 입대하면 처음부터 명령체계에 대한 복종과 규율에 대한 충성을 가르치지, 그 규율이 뜻하는 바를 가르치지 않는다. 지켜야할 규율이 어떤 것이며, 어떤 행위에는 저항해야한다고 말로는 가르치지만 일선의 조교와 교관들부터 그 가르침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신병들은 일단 복종해야한다는 동기 부여만을 받고서 자대로 배치된다. 군 내 의식이 개혁되지 않는 현상에 있어서 이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임은 확실하다. 편의상 조교와 교관은 신병들이 자신의 지시를 무조건 이행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선임병과 간부들의 지시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신념은 더욱 굳어진다. 문제는, 훈련소에서의 학습이 단지 강화라는 것에 있다. 사회에서부터 우리는 군 내의 폭력적 권력 상황에 대한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접해 듣게 되며, 따라서 입대한 후 직접 접하는 군대 내의 분위기를 도리어 인정해 버린다.
따라서 의식의 개혁을 시도하는 상당수의 병사들은 항상 불완전한 상태, 즉 드러난 가혹행위를 없애는 선에서 단념하는 경우가 많다. 병사 사회 내에 내포된 의식의 문제는 군 외에서부터 시작된 개념, 그리고 군 내에서 다시 강조되는 개념들의 연쇄로 강화되는 구조로 이뤄져 있고, 이미 제도 내에 포섭된 한 개인이 변혁하기 사실상 불가능한 체제로 이뤄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병장이나 최선임이 되어서 바꾼다는 것은 굉장히 다층적인 권력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에 다름 아니다. 동기 부여는 선순환보다는 악순환이 강화가 이뤄지기 쉬우며 중간에 단 한 계층의 권력 단계(예를 들면, 편해지기 시작한 일병이라거나)가 후임들의 편해진 생활을 나태한 것으로 인식한 순간 악순환 구조는 깨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선임병의 권력은 실은 후임병들이 준 것이나 다름없으면서도 후임들은 그와 같은 악순환이 자기 탓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설혹 인지하더라도 혁신적인 변혁을 꿈꾸는 이들은 그다지 없다. 그 이유도 제시되었다. 조직 내에서만 온전히 형성된 권력이 아니기 때문에, 선임병의 권위와 권력은 쉽사리 깨어질 수 없다. 역설적으로 군의 억압 구조에 대해 민간에서 자주 노출하는 것은 그만큼 입영하는 신병들에게 군 내의 억압 구조를 학습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단위 사회 내에서 권력을 잡은 집단인 선임병들의 집단조차도 단일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를 심화시킨다. 동기, 그리고 맞기수들 역시 단위 사회 내에서 비슷한 수준의 권력을 자연히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이 함께 통합적으로 일관된 의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식 개혁은 애초에 단위 사회 내에서 주된 담론으로 제기될 수조차 없다. 보통 병영 사병 집단 내 상위 20에서 30% 가량의 집단이 선임으로 치부되며, 10명이 넘어서는 순간 선임 집단 모두가 일관된 의지를 지향한다는 것은 일종의 환타지에 가깝게 된다. 내가 최선임이 되어 개혁한다, 내지는 사회 안에서의 개혁이 줄곧 실패를 반복하는 가장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영의 의식이 그 숱한 노력과 많은 이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가에 대한 분석은,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모순적인 의식이 왜 개혁되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모식도이다. 지독하게 다층적인 실제 사회의 구조는 지극히 분산된 권력을 의미하여 개혁을 곳곳에서 저해한다. 편견과는 달리 전혀 단일화되어 있지 못한 수권집단은 의식 개혁 단계를 위한 초기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자체를 난항에 부딪치게 만든다. 게다가 모순적이고 편협한 사회 전반의 의식은, 사회 내의 산물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 사회 내의 개혁만으로는 사실상 개혁을 성취해낼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폭력적인 의식 구조는 도리어 그 사회의 윤리를 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당해 사회의 윤리(군이라면 ‘군에서는 상하 관계를 철저히 지켜야 해’ 라는 믿음)부터 개혁의 대상으로서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윤리, 그리고 규범론이 이미 지나치게 진부한 세상을 살면서도 새로운 윤리, 규범론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 내에서의 개혁을 외치는 경우도 군대의 경우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사회에 포섭되어 변화를 담보할 능력을 상실한다는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격언은 비단 자신이 ‘변질’된다는 것에 의미를 한정하는 말이 아니다. 사회의 다층적이고도 모호한 권력 구조 속에서 갈 길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근본적 원인에는 닿지도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창끝을 휘돌리는 동키호테로 스스로가 전락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언제나 일상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을 때조차 항상, 주변 사람부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적인 의식의 개혁과 설명의 방법과 의지를 갖고 해설하는 것 외엔 개혁을 담보할 수 없다. 유일무이한 절대 권력은 꿈일 뿐이며 당신이 그 위치에 올라 개혁한다는 것 역시 망상에 가깝다. 부조리를 깨달았다면 당신이 택할 방법은 다음의 한 가지뿐이다. 지금부터 당장 개혁하고, 규범과 윤리의 단계에서부터 차근차근 개혁의 당위와 전략을 도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