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93
병장 홍성기 [Homepage] 2008-12-19 16:53:09, 조회: 168, 추천:0
-일 남았습니다. 이곳은 아직까지도 저를 쥐고 흔듭니다. 이것은 끝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날카로운 초침은 기요틴처럼 제 오금을 썰며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지요. 곤죽 같은 감정이 쏟아져 엉덩이에 질퍽댑니다. 그렇게 비명처럼 앉아 있습니다.
최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수능을 쳤고, 여자 친구를 사귀었고, 견장을 달았습니다. 물론 누더기 같은 코드도 짜고 싸구려 같은 디자인까지 열심히 찍어냈지요. 성과는 있었습니다. 재미도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이 훑고 지난 뒤 잔해처럼 남아 발에 채는 것은 무력한 회귀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시 쫓기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쉬기 위해 군에 들어왔습니다. 군에 들어오기 일주일 전까지 밤을 새며 일했지요. 물론 제 의지에 의해서였지만, 저는 뭔가에 매일 쫓기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뭔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었습니다. 그것도 대단히 열성적으로. 그래야 만족할 수 있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야동을 볼 때마저도 듀얼모니터 한쪽에 컴파일러를 띄워놓고 코드를 짰습니다. 정말 지치는 일이었죠. 그래서 입대를 하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나라만 지키면 되니까. 순진했지요. 운명처럼 저는 바깥에서 하던 일을 군대에서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생활도 군대답지 않게 편했어요. 10월부터 4월까지 눈 치우는 철원의 장병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축복받은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무심코 이것저것 할 일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공부, 연애, 개발, 창작, 인간관계, 행사, 직책. 2년을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2008년 12월. 폭풍처럼 흐르던 시간은 비로소 돌아와 내 앞에 섰습니다.
어제 있었던 군내 행사를 마지막으로 제가 만들어낸 일련의 사건들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시금 왔습니다. 이제 선택해야만 합니다. 문득 자신을 정의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홍성기는, 쫓기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커서는 반짝이며 제 생각을 종용합니다. 이 순간에도 쫓기며 글을 씁니다. 이제는 정의함에 주저가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은 쫓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소통과 창작에 쫓길 시간이 되었습니다. 93일 남았습니다.
얼개를 쓰겠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43:58
병장 김태환
혹시 07년 4월16일 군번 입니까?. 2008-12-19
16:55:24
병장 홍성기
1월 15일 군번이고, 호국이 친구입니다. 그런데 정확한 날짜를 언급해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2008-12-19
16:56:31
병장 양 현
전 +35를 해야 합니다. 전 이제 35를 답글로 쓰겠습니다. 2008-12-19
16:56:36
상병 정근영
후훗, 제목을 보고 대략 짐작했습니다만 적중했군요!
저는 오늘부로 297일이네요, 흑흑 2008-12-19
17:05:17
병장 양 현
-일 남았네, 뭐네보다는. 그 안의 내용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흐흐. 고생이에요, 성기씨. 2008-12-19
17:50:45
병장 김민규
깊숙히 공감되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도 쫓기며 살았고,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달고 살아왔습니다. 5월 입궁을 앞두고 1월에 중국에 들어가 이것저것 참 많이 건드렸습니다. 딱 보름을 남겨놓고 돌아와 입궁한 후에, 전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도 안 했으나, 어쩌다 보니 하던대로 코드를 짜고 DB를 설계하고 있더군요. 딱 한 가지 차이라면 눈 치우는 '그것도 하필' 진짜 철원의 장병이었다는 정도.
그래서 더 많이 기대하고, 더 많이 종용하렵니다. 얼개를 진심으로 기다릴게요. 그대이기에 줄 수 있을 보석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기념비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가지로 보내고 싶습니다.
가지로. 가지로 2008-12-19
19:11:32
일병 구진근
저는... 곱하기를 해야하는건가요?(울음) 2008-12-19
21:50:02
병장 이동석
사랑해요. 성기씨. 가지로- 2008-12-20
00:59:22
일병 윤병철
저도 쉬기 위해 왔지요.
집안일도 있고 그래도 미친듯이 공부도 하고...
여기와서까지 안하리라 했는데 그래도 관련해서 일하는거보면..
안할려고 통신으로 들어왔는데.. 2008-12-20
01:06:30
병장 홍석기
'얼개를 쓰겠습니다.' 한마디에 기대감 충만.
저는 사무실 근무가 정말 싫었는데, 그래서 사무실 근무를 하지 않을 것 같은 분야를 지원 했는데, 결국 사무실 근무를 하고 있네요.....확실히 겨울에도 따뜻하고 기타 근무조건은 좋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이 답답한 공기는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군요. 2008-12-20
15:58:23
병장 홍성기
헉 하필이면 철원- 왠지 숙연해지는데요. 민규씨와는 웹스에서 세션 이야기 하면서 잠시 뵌 적 있었죠. 앞으로 틈날 때마다 큼퓨러 이야기도 살짝 풀어 보겠습니다. 2008-12-20
16:5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