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착각  
상병 김무준   2008-12-08 20:44:53, 조회: 201, 추천:2 

첫사랑은 대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다행스럽게도 인연의 끈이 길었기 때문일까.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그녀는 우리 관계를 친구이상, 연인이하라고 말했다. 해가 바뀌고 바뀌어 팔년이란 시간을 함께해왔다. 어제도 늘 그렇듯 그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관광공사 마케팅팀의 팀장이 다른 부서로 발령됐다. 연말회식 겸 환송회에서 나는 술을 끊겠다는 다짐을 저버렸다. 분위기에 취하고 사람에 취해 술을 마셨다. 폭탄주를 만들어 소주 세병가까이 술을 퍼마셨다. 회식이 끝나고 숙취에 시달리는 머리를 질질 끌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맹세코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술기운을 빌어 못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대화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전화를 걸었다.

족히 세달 만에 전화를 걸었다. 뭐하냐는 말로 안부를 물었다. 어쩐 일로 전화를 했냐는 말에 ‘밖에 눈 오니까 생각났어.’라는 어이없는 핑계를 늘어놓았다. 약간의 침묵 끝에 사실을 말했다. 술에 취하지는 않았으니까. 감기와 숙취로 머리가 깨질듯 아파왔다. 걱정스런 말투로 취한 게 아니냐고 묻기에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답했다.

나 술주정 없는 거 알잖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술을 얼마를 마셨든 술에 취해 전화하지는 않으니까.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꿈꾸고 남자는 첫사랑을 추억한다던가. 나는 첫사랑을 아직도 추억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그러나 팔년 동안 단 한 번도 술에 취해 그녀를 찾았던 적은 없었다. 추억은 아름답기에 추억이었고, 나는 추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술 같이 마셔본 적 없잖아. 어떻게 알겠어.

아주 잠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짧은 시간에 공허가 밀려왔다. 아니다. 머리와 가슴이 텅 비어버렸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의 단 한마디에 지난 몇 년간 쌓아온 내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것도 아니다. 무너질 새도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게 사라졌으니까. 전원이 나가버린 로봇처럼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빈 공간으로 생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터져버린 잡념은 쉴 새 없이 공허를 집어 삼켰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내가 그녀에게 칵테일을 만들어준 적은 있어도, 함께 술을 마셨던 적은 없었다. 그녀의 한마디는 지나온 우리의 시간과 인연을 송두리째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한마디는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수화기 너머로 연기처럼 사그라졌다. 우리는 팔년의 시간동안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었고, 이제는 서로를 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나는 왜 그녀와 나의 관계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어째서 나는 서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단정했을까. 

우리는 서로 자존심만한 벽을 가슴에 세워두고 팔년을 지내왔다. 우리는 친구이상 연인이하인 아리송한 관계가 아니라, 친구도 연인도 아닌 관계로 시간을 보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슬픔이 눈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겠지만, 아마도 내 가슴에 쌓인 벽 때문에 내게 손 내밀지 못했으리라.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언제부터 착각에 살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이제. 매일아침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처럼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마, 생일과 나이.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 정도만을 알고 있겠지. 긴 침묵 끝에 우리는 세월의 길이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노라 말했다. 나는 깨달았다. 내 모든 것들이 그녀와 나의 관계처럼 무의미한 확신으로 포장되어 있었음을. 나는 가진 것들이 하나 둘 손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이십대로 두 해를 보내고 스물 둘의 문턱에 서서야 내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들려진 것이 없었다. 가슴도 텅 비어있었고, 머리도 텅 비어있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로 공간을 말했다.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지만, 정신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주장대로라면 정신은 질량이 없는 것이다. 박승배씨의 해석에 따르자면 정신은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라 육체를 움직일 에너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헉슬리는 정신이 아닌 뇌에 의해 신체가 움직인다는 부수현상론을 주장했고 라이베트는 정신사건이 생성되기 전에 신체사건이 발생함을 발견했다. 정신이 육신을 지배할까? 라이베트의 말이 맞는 것이라면 우리는 뇌의 명령을 받고서 움직일 뿐이다. 내가 느끼는 이 모든 감정은 뇌에서 전해지는 일종의 신호전달에 지나지 않겠지.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저 뇌의 신호에 불과한 육체적 현상을 정신이라 착각하고 감정이란 뜻을 부여한 채 글을 쓰고 있는지도. 어떠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내 착각일 뿐이라면, 나는 지금 왜 육체의 움직임에 목숨을 걸고 있을까. 아마. 아무 의미 없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미친 듯이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내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그 무의미한 행동에 의미를 걸고 싶어 발버둥치고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물 둘의 문턱에 서서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나는 살아있음을 타인에게 이야기하고픈 걸까. 그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누가 증명해줄 수 있을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무너진 것들보다 더 단단하게 나를 쌓아올려야 한다. 다시. 나는 텅 비어버렸지만 껍데기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손가락이 굴러간다.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창밖에는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눈은 쌓이고 다시 쌓였다. 문 틈새로 시린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발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슬픔이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슬픔이 눈처럼 쌓이고 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10:05 

 

병장 이동석 
  이런. 2008-12-08
21:02:06
 

 

병장 양 현 
  미안해요, 전 이미 스물넷에 근접해지고 있네요. 
이미 스물셋에서 벗어나 스물넷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그렇네요. 그런거군요. 그런거였네요. 맙소사. 2008-12-08
21:12:06
  

 

일병 김태경 
  지난 일주일간 무준님글을 더 이상 못 읽을까봐 걱정했었습니다. 

기다린 보람이란 이런것인가요?(웃음) 2008-12-08
21:16:53
  

 

병장 김민규 
  담배 한대로 이 애석한 공감을 달랩니다. 2008-12-09
01:38:37
  

 

병장 김태준 
  잘 읽었습니다 2008-12-09
09:02:39
  

 

병장 고은호 
  '이 곳'은 과거의 '이 곳'이 아니고, 
'지금'은 과거의 '지금'이 아니며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고, 

'너' 역시 과거의 '너'가 아니건만... 

그걸 모르는 것은 저 혼자 뿐인 것 같네요.. 휴우.. 2008-12-10
17:4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