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이러지 말고 잘 살아야 되는데  
상병 이동석  [Homepage]  2008-06-07 04:58:31, 조회: 275, 추천:0 

이러지 말고 잘 살아보자

현충일입니다. 전 간만에 낮잠을 늘어지게 잤고, 군종법사님이 사주신 김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일지매 재방송을 봤습니다. 안타깝게 1화와 2화 전반은 못봤습니다만, 미드와 영화의 영향덕인지 한국 드라마도 많이 진보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슷한 소재의 퓨전사극인 쾌도 홍길동을 기대하고 봤었습니다. 홍자매의 캐릭터를 주조하는 능력은 여전했습니다만, 어쩔수 없는 성유리의 연기력만큼이나 어느정도의 성취와 상당한 한계도 드러났지요. 주성치 영화를 연상시키는 중반부까지는 세트나 규모의 아쉬운점들을 B급정서로 무마시키던 힘이 중반부를 넘어서며 거대하게 깔아두었던 복선들을 다루는데에선 힘이 빠진듯하여 비극적이어야 할부분에선 막상 실소를 짓게 만드는 안타까움이 있었지요. 아무래도 쪽대본 뽑아내서 방송 주, 심지어는 방송 날까지 찍어서 급하게 편집해서 트는 한국 드라마의 제작풍토상 벗어나기 어려운 점이겠지요. 물론 모든 거창하고 싶어하는 서사들의 슬픈 한계이기도 합니다. –제 이야기이도 하지요.

어쨌거나 일지매는 확실히 여유가 있어보입니다. 드라마보다는 영화에서 자주 보던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에스비에스 특유의 깔끔하고 화사한 화면에 잘 매치되는 세트와 미술하며 시점을 넘나들면서도 속도감있는 전개까지, 어쩌면 미드와 헐리우드 영화에 밀리는 한국 영화는 드라마에도 자리를 뺏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한국 영화의 불황과 주연작의 연달은 상업적, 작품적 실패로 영화계에서 입지가 좁아지던 이문식이 모처럼 잘 맞은 옷을 입은것도 좋아보입니다.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이어 자기는 단순한 아이돌로 끝날께 아니라 배우로 오래갈꺼라는 선언같기도 하구요. 연극과 영화를 거쳐 브라운관까지 본격 진출한 김뢰하와 안길강도 반갑습니다.

밤에는 무심코 <달콤한 나의 도시>를 보게 됐습니다. 정이현 원작소설이 드라마화 된다는건 오래전부터 이야기가 있어왔는데 김정은이 주연이라더니 <온에어>에나 나올법한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연은 최강희이고 편성도 보통 주부대상의 드라마가 방영되던 금요드라마로 됐습니다. 금요일 밤의 최강자, <사랑과 전쟁>을 이기기 위해 에스비에스에선 맞불작전으로 더 자극적인 소재를 매치시키곤 했습니다. 물론 얼마간은 성과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역시나 <사랑과 전쟁>의 아성은 넘기 어려웠지요. 얼마 전부터는 틈새시장 공략을 노리더니 이번엔 아예 트렌디 드라마로 나아간 모양입니다. 

(주5일제 시행이후로는 금요일 저녁부터 밤에는 20대 층이나 남성들을 위한 프로그램 보단 주부시청자를 공략하는게 방송계 나름의 정석이었다고 합니다. 하기는, 요새 군인말고 주5일제 다 챙길수 있는 사람 드무니 그 정석도 깨질때가 됐습니다.) 

<뉴하트>나 뭐 그런 트렌디하려고 용쓰는 요즘 미니시리즈들 느낌과는 다르게 좀 옛스러워 보이는, 90년대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연상시키는 타이틀 화면은 다소 의외였습니다. 에스비에스와 <달콤한 나의 도시>의 매치라면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 컨셉 정도로 갈 줄 알았더니 조금 의외였지요. 아무래도 삼순이를 완전히 벗어던지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삼순이보단 훨씬 페미난하고 미시적인 것에 초점을 둔 듯도 합니다. 비슷한 소재로 수애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했던 <9회말 투아웃>이 도로 삼순이 됐던것처럼은 안되길 바랍니다.

말은 이렇게 했습니다만 전 최강희의 참을수 없는 귀여움에 빠져들어 최강희의 웃음을 따라웃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카메라가 어쩌면 그리 섬세한지 약간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얼핏 공감도 가서 웃어버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2편 연속 방영되는걸 한장면이라도 놓칠까봐 광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끝내 봐버렸습니다. 벌써부터 다음주가 기대되는걸 보니 빠져버린 모양입니다.

그 쿨하려고 하지만 결코 쿨해질수 없는 정서가 더 없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옛 애인이 결혼하는날 술이라도 한잔하려 친구들을 만났지만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선본지 2주만에 결혼한다고 폭탄선언을 한 친구 덕에 아무말도 못하고 일하러 들어가는 친구에게야 겨우 이야기를 털어놓고, 홀로 남아 전화번호를 뒤지지만 연락할만한 곳은 마땅찮고.

제가 감성이 여성적인건지 인간이라면 흔히들 그러는건지 모르겠지만 이 대목에선 16년째 드라마만 보셨다는 주부 아줌마 선생도 울고갈만큼 극에 대한 엄청난 싱크로율을 보이며 술도 없고 담배도 못 피니까 물이라도 벌컥벌컥 마셨더랬습니다. 

혼자 집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다가 아까 혹시나 해서 연락했던 아는 남자에게서 문자가 오고 술을 다시 내려놓고 그 남자에게 가는 장면과 다행히 지현우라도 만나서 다른 자리로 옮길 때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친구에게 온 문자를 살짝 씹었다가 그 남자와 잘 되가니 그제야 슬쩍 친구에게 내일 연락하겠다고 답장을 하는 장면에선 성별은 바뀌었지만 제 일상을 들키기라도 한것처럼 화끈거리다가도 다른 누군가도 저러고 산다는것에 위안을 받기도 했지요.

하기는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이나 시나 그러려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그걸 잊기위해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친구도 만나지만 결국 외롭다는걸 깨닫고 우연히 집어든 시집이나 소설책, 라면먹으려고 틀어놓은 티비 드라마나 영화에서 위로받을때면 제가 써오던 한문장으로 존재를 규정해버리겠다는 야심찬, 한편으로는 가소로운 시도가 생각나 그 문장에 찍힌 무수한 쉼표만큼이나 한숨을 내쉬기도 하지요. 다음 휴가때는 정이현이 쓴 책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는 그런 감성적인 저작을 즐기는 편이 못됩니다만, 심지어는 ‘자의식 과잉으로 우아떠는 년의 배부른 넋두리’ 정도로 폄하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정이현에게 사죄하는 의미로다가 그의 책을 사서 봐야겠습니다. 드라마 하나 보고 과한 것 같기도 하지마는 정이현의 저작이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를 평가한건 제 잘못이니까요.

극히 개인적인 호감요소 몇가지를 더 들자면, 빠른 85년생의 ‘연봉 500’의 영화인 지현우 캐릭터. 뭐 그 자체는 상투적인 연하남일수도 있겠지만, 제가 입대하기전 영화판 기웃거리며 ‘얼라’취급 받을때가 떠오르는데다 지금은 우리가 학교 언저리에서 노인네 취급을 받지만, 제대하면 얼라 취급받으며 누나들 사랑도 받을수 있겠다는 그런 로망을 대리충족 시켜줘 그렇겠지요. 주인공 친구 중 뮤지컬 배우를 꿈꿨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회사원 생활을 하다 결국 그만두고 다시 뮤지컬을 배우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으로 눈물을 흘리거나 <거위의 꿈>부르면서 울거나 하는 청승을 떨어봐서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늦기전에 영화는 꼭 해야겠습니다.

그리고는 잘려는데 엠비씨에서 나비효과를 합니다. 나참, 아예 끝장을 보자고 끝내 봤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인생에는 크건 작건 돌이키고 싶은 순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 경우엔 주위 사람들까지도 입을 모아서 그때 네가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때면 웃으며 넘기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돌이켜버리고 싶은건 저이지요. 제 그 멀쩡한 척이 지치거나 그 선택의 결과가 너무 가혹하다고 여겨지면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지껄이거나 사고를 치거나 했습니다. 그럴때마다 제 옛 여자친구는 저를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면 전 더욱 광분해서 떠들었지요. 어린 아이가 떼쓰는 걸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더 떼를 쓰는것처럼. 결국 여자친구는 지쳐버렸지요. 네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날 만나지도 못했을텐데, 그걸로는 부족하지? 그는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울며 제게 말했습니다. 맙소사, 정신나간 저는 그 눈물에도 화를 냈지요. 그 선택이 옳았는지 그른지는 사실 알수 없는일인데, 오히려 그녀 같은 사람을 만나려고 그런것인지도 모르는 일인데 어쩌면 이게 더 나은 선택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녀라는 말을 안쓰려고 했는데 결국 써버렸군요.)

아마 제게 나비효과의 주인공 같은 능력이 있었더라면 제 옛 여자친구를 아주 심하게도 괴롭혔을겁니다. 제 인생과 다른 소중한 사람들도 겉잡을수 없이 망가져갔겠지요. 

지나가버린 버스든 똥차든 리무진이든 그 선택에 연연해서 지금 오는 버스마저 놓쳐버리는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버스는 왜 이리 더디 오는지 우리는 결국 담배에 불을 당기고 버스는 꼭 그럴때에 옵니다. 담배를 버리고 버스를 탈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차를 기다릴지는 정말로 자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러지 말고 잘 살아야 되는데…

짬짜면을 먹거나 담배를 끊으면 될텐데 왜 알면서도 결국 선택의 순간엔 그 지식이고 경험이고 시행착오의 기억이고 다 휘발되버리고 순간성의 정상참작에 기댄 비겁함만 비죽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잘살기 어렵습니다.

(예전 눈팅만 했던 책마을 임시방공호에서 봤던 김연수 <청춘의 한문장>중 한편을 누가 올려주신걸 읽고 졸렬하게 제목만 따왔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17:12 

 

상병 이태형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2008-06-07
14:09:35
  

 

상병 이동석 
  주성치 영화를 연상시키는 중반부까지는 세트나 규모의 아쉬운점들을 B급정서로 무마시키던 힘이 중반부를 넘어서며 거대하게 깔아두었던 복선들을 다루는데에선 힘이 빠진듯하여 비극적이어야 할부분에선 막상 실소를 짓게 만드는 안타까움이 있었지요 

의 변용인가요? (웃음) 2008-06-08
03:40:05
 

 

병장 김별 
  드라마로 시작해서 영화로 끝낸 현충일이셨군요. 
전 말출 옷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2008-06-09
09:56:59
 

 

병장 어영조 
  달콤한 나의 도시를 책으로 너무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그래서 기대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기대만큼 재밌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최강희, 이선균, 지현우 캐스팅이 정말 딱이던데요.(웃음) 2008-06-09
11:13:11
  

 

일병 김휘겸 
  TV에 저렇게 볼게 많았는지 몰랐습니다. 2008-06-09
12:21:21
  

 

상병 이동석 
  음, 티비보는거 밖에 할일이 없을땐 티비가 선생님이고 친구이자... 애인이 됩니다. 
이건 뭐 오대수 수준이긴 합니다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별 다른 일 없이 밤새 앉아있어야 하는 제 직무의 특성상 
올드보이가 될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저러나 군만두가 먹고 싶네요. 2008-06-09
21:5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