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요즘
상병 김무준 2008-11-29 23:17:35, 조회: 90, 추천:0
견딜 수 없는 나날들
정철호
한 마음이 한 마음으로부터
지워지고 있네
해도 달도 저만치 멀어져 가네.
알고 있던 모든 것이
희미해지네
살았던 사람들이
뿌옇게 흐려지고
지난밤 울며 꾸었던 꿈이
기억나지 않네
흘러간 날들이 바다 속에 가라앉고
폭풍에 으깨진 하얀 거품만
미친 듯 떠도네
내가 나로부터 잊혀지고 있네
살아갈 날들이 우두둑
부러지고 있네.
애인은 며칠 째 공익광고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선배와 의견이 맞지 않아 속상하다며 투덜거린다. 기분을 풀어달라기에 자기 힘내. 뽀뽀해줄까? 나가면 안마해줄게. 알라뷰.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해줬다. 화는 조금 풀린 것 같았다.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몇 년이 넘게 남매처럼 가깝게 지내왔다. 서울에 올라가면 그녀의 자취방에서 크루져 한 병을 나눠 마신다. 나는 하이네켄을 좋아한다. 샤워를 하고, 수건을 함께 썼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있고 나는 머리를 말려주곤 한다. 좁은 일인용 침대에서 잠을 잔다. 항상 잠들기 전에는 손끝부터 안마를 해준다.
처음에는 손끝부터. 손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지고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너무 힘이 들어가서도 안 된다. 천천히. 팔과 어깨의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 다시 발끝부터. 발가락과 발을 주무르다, 피곤에 지친 다리를 달랜다. 등과 허리를 천천히 서너 번 풀어주고 나면 마사지는 끝난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는다. 내 몸은 땀에 젖어 흔들린다.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귓불을 매만지고 어깨를 감싼다. 몇 번 키스를 한다. 입술이 작고 붉은 입술에 닿는다. 언저리를 맴돌다 조심스럽게 우리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는 그녀의 옆에 있고, 그녀의 옆에 내가 있다. 그렇게 서로를 확인한 후 잠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걸을 때 손을 잡지 않는다. 항상 내가 인도의 밖에 서고 그녀를 안쪽에 걷게 한다. 하지만 나란히 걷지는 않는다. 나는 그녀의 조금 뒤에서 걸어간다. 우리는 연애하기 전에도 그랬고, 연애하는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 외로웠다. 떨어져 있었지만 새롭게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우리사이에 애정 따위는 없다. 너무 편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그리워한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우리 연애하기 전에 나 가끔 너희 집에서 잤잖아. 근데 뭘 믿고 여자혼자 사는 집에 나를 재워 준거야? 그녀는 웃으며 짧게 답했다. 믿었으니까. 그 믿음이 무언지 아직도 모른다. 그래? 그녀는 수줍게 말한다. 네가 날 길들였잖아.
나는 나쁜 남자다. 네가 날 길들였잖아.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나의 사랑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옛 사랑을 떠올렸다.
일월 쯤 헤어진 당신도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당신을 길들였다고. 사랑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나는 당신의 첫사랑이었지만 나는 항상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무언지 고민했었다. 내가 처음으로 당신에게 사랑이 되었듯 나는 당신에게 아름다운 이별을 선물하려했다.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이별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당신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모자란 나는 넘치는 당신의 사랑을 담지 못했다. 슬프게도, 나는 아름다운 이별이 아닌 슬픈 이별을 주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그리워하지만, 나처럼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외로움에 연애를 시작했고 아직도 조금은 외롭다. 우리는 즐거운 연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가 끝나고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 즐겁고, 낯간지러운 말들이 새롭다.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라 비밀이랄 것도 없다. 서로를 알아갈 만한 것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연애라는 것은 새롭다. 우리는 연애하고 있다.
슬프지만 나는 그녀가 보고 싶지 않다. 아직은.
그래서 담배를 못 끊는 모양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09:39
병장 정병훈
그녀가 보고싶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 같아 보이는군요.
사랑이 없는 연애라니,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외로움을 죽이는 연애는 더욱 그렇습니다. 2008-11-29
23:49:59
상병 김지웅
저는 여자친구님이 지금 해외에 있거든요.
이제곧 4년차 연인으로 접어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슬프지만 저는 그녀가 보고 싶네요. 매일매일.
그래서 어쩐지 이 독한 담배를 못 끊는 모양입니다. 2008-11-29
23:53:53
병장 변창범
부럽군요.. 전 이 한마디가 제 모든 마음을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2008-11-30
00:10:47
병장 이동석
사랑-은 경작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사랑해서 연애하는게 아니라 연애해서 사랑하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2008-11-30
03:42:33
상병 김무준
세상에는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듯, 다양한 연애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08-11-30
07:22:13
병장 김민규
곧 있으면 8년차가 되는, 저와 그의 장거리 연애도, 이제는 끝날 때가 됐나 봅니다. 저만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비밀의 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저 혼자만의 집착이었을지도 모르고 상상의 나래속 이미지로 가공된 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일명 유망주가 자꾸만 떠오른다는 것이고, 그마저 저를 그저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차차 풀어나갈 문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방을 간직한다는건, 왠지 그에 대한 모독인 것 같아서.
연락 안 하려구요. 그동안 그 번호만은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잊지 않았는데, 이제는 까먹어야죠. 손이 기억하려나요. 조금은 두렵기도 합니다. 또 늦은 시간 홀짝이다 보면 손은 어느새 그 번호를 누르고 있을까봐.
지웅님, 힘 내셔요. 겪어봤기에 더욱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