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어느공지  
병장 조현식   2008-11-03 10:15:12, 조회: 229, 추천:4 

이번 주말에 있었던 이야기. 아주 짧고 간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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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사이버지식정보방에 들러 자주 접속하는 사진 사이트에 들렀다.
사실은 잘 보지 못하게 하려고 띄워놓은 것이 아닌지 의심되는 채도가 매우 낮은 공지사항 게시판에 들어가서, 새로운 공지사항을 확인해 보는데, 매우 흥미로운 공지가 게재되어 있었다.

“앞으로 메인화면이나 갤러리에서 글을 올린 사람들의 닉네임이 나오지 않게 조치하였습니다. 글을 클릭한 후에 나오는 화면에는 글쓴이의 이름이 뜨게 됩니다.”

어째서 이런 공지를 올린 것일까? 그 글 아래 달린 리플들에는 신선하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진 이유는, 그 동안 너무 한 쪽으로 편중되었던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여느 사이트와 마찬가지로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사람이 올리는 새로운 시도의 사진이 커뮤니티의 회원들에게 흔히 ‘무시되는 경향’ 이 있었기에 운영자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실제로 이 커뮤니티는 매우 양질의 사진이 올라오고는 있지만, 속칭 ‘패밀리’를 결성하여 자기들끼리 댓글을 달고 일부 유저의 사진에 보지도 않고 추천을 올리는 등 그 폐해가 커뮤니티의 존속에 매우 위협이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사진 사이트의 경우 커뮤니티가 그 중심이 아니라 사진의 양과 질이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커뮤니티의 중요성이 다른 커뮤니티보다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이 커뮤니티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해 본다면 그 커뮤니티의 성격이야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흐름이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글을 찬찬히 읽으며 나는 불현듯 나의 작았던 시기가 생각났다.

중학생 때, 한 사이트의 운영자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 곳은 누적 방문자가 100만이 넘는 꽤나 큰 사이트였고 -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었었다. 그것은 중학생 특유의 유리세상이라고 볼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 사이트 안에서 나는 꽤나 유명한 ‘운영자’ 였고 사이트 권력의 정점이었다. 중, 고등학생들이 당시 빠져있던 장르문학 사이트였는데 꾸준히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그러다보니 다른 닉네임의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제보다 더 좋은 디자인의 홈페이지로 바꾸어도, 멋있는 글을 올려도, 이벤트를 해도 더 이상 사이트에 찾아오는 신규 회원이 늘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계속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대화를 하며 웃으며 지냈다. 그 사이 열려있는 자유의 바다 인터넷은, 바다는커녕 썰물로 빠져나간 갯벌의 물웅덩이만큼이나 좁아졌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사람들은 친절하고, 어느 사이트보다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때까지도 나는 깨닫지 못했었거다. 나와 친한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만 친절하다는 사실을. 친한 닉네임과 친한 이야기에 둘러싸인 채 새로운 사람들의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고, 불만을 터뜨리는 그들에게 접근거부 명령을 내리고 웃어댔던 것은 나였다. 

쓸모 없는 이름표를 나는 너무 많이 원했다. 중요한 것은 이름표 뒤의 깜냥을 감당하는 것이었는데, 이름에 취해 나는 그저 비틀댔을 뿐이었다. 지금도, 계급장에 기대어 비틀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옛 생각과 현재의 나를 몇 번이나 비교해보았다. 채도가 낮은 공지사항 게시판에서 나는 한참이나 벗어나지 못했다. 그 때의 내가, 이러한 방법을 썼다면 나의 유리세상은 조금 더 오래 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오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인터넷 속 작은 세상은 무너져야 할 이유를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온전히 나로부터 시작된 집단이기주의와 배타주의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자격 미달로 인한 서비스 중지. 그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 나의 작은 세상의 붕괴와 함께 철이 들었다는 소리를 솔찬히 듣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03:33 

 

병장 고은호 
  열린마음이랄까요. 

제가 단체사진을 볼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나'지요. 
내가 어떤 얼굴로 나왔는지, 웃고 있는지, 잘 생기게 나왔는지, 
잘 안나오면 나쁜 사진이고, 잘 나오면 좋은 사진이죠. 

그리고 다음 찾아보는 것은 나와 친한 사람들. 
웃기게 나오지는 않았는지, 나와는 잘 어울리게 나왔는지, 
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웃고 떠들게 되더군요. 

그리고 그 다음에 찾아보는 것은... 없네요. 
단체 사진이라고 해도 저와 제 친한 친구들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배경이에요. 
조금 얼굴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 없죠. 
그냥- 뒤에있는 나무나 바위와 별 다를게 없는... 

그리고 사실 그런 점은 여기서도 별로 달라지지가 않네요. 
진지하게 자아 비판 좀 해봐야 겠습니다. 

변화를 두려워, 아니 귀찮아 하고 있는 것인가... 휴우~ 
좋은 글 감사합니다.(웃음) 2008-11-03
10:27:38
  

 

병장 김낙현 
  비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닌 것 같군요. 

소속감도, 연대의식도 좋지만 그게 스스로의 눈을 어둡게 해서는 안되겠지요. 

좋은 글... 2008-11-03
10:35:32
  

 

병장 이동석 
  음- 할수만 있다면, 이곳 책마을에서도 하고 싶은 좋은 방법이로군요. 
이런 시사적이고 따끔한 일상이야기라니, 허허. 2008-11-03
10:50:48
 

 

상병 홍석기 
  추천할수밖에 없군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일화. 어떻게 보면 이것도 아이러니한 것일까요. 2008-11-03
10:59:00
  

 

병장 조현식 
  아래 글을 읽고 생각나서 쓴 글이니 아이러니한 것은 아닙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일상이야기입니다. 2008-11-03
11:05:31
  

 

병장 전승원 
  지금의 우리에게는 큰 교훈이 되는군요. 2008-11-03
11:06:28
  

 

상병 손정우 
  의도적일지언정 매우 적합하군요. 뼈도 들어 있고. 
앞선 댓글들의 반복이지만 크게 공감가기에 한마디 해봅니다. 2008-11-03
15:16:44
  

 

병장 정병훈 
  캬! 2008-11-03
17:09:54
  

 

병장 정영목 
  동감하는 글입니다. 추천 꾹. 2008-11-04
14:2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