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소소한 변화
상병 김무준 2008-12-24 03:04:57, 조회: 183, 추천:0
-2002 한일 월드컵 한국 대 미국 전에서 최용수 선수가 절호의 찬스에서 대기권 돌파 슛을 날리자 당황한 신문선 해설위원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칩니다.
이게 뭔가요~
약 삼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난독증에 걸린 적이 있다. 심리적인 부분에서 출발한 병이라던데 난독증도 후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어쨌거나, 학교를 다니고 있는 고등학생에게 난독증이란 심각한 장애였다. 무엇보다도 문제를 풀 수 없었으니까. 똑같은 문장을 말로 들으면 알 수 있는데 읽을 수는 없다. 이건 그냥 장애였다.
처음에는 영어에서 출발했다. 지독히도 싫어하던 선생이 수업시간에 지문을 읽고 해석하라 말했다. 항상 잠을 자도 우수한 성적을 뽑아내는 이상한 인간이니 독해도 곧잘 하리라. 이게 선생의 생각이었나 보다. 한참을 쳐다봤다. 슨샘요. 이기 머리에서는 해석이 되는데 말로 표현하려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그 선생에게 약간의 배려심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당황하던 학생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래. 간혹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말로 풀이하지는 못하는 학생들이 있죠. 어쩌구…
난독증은 영어에서 수학으로. 이내 언어까지 옮겨갔다. 돌이켜보면 취미생활의 특성상 난독증 따위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고, 뜯어서, 구조적 부분과 의미적 부분을 조목조목 풀어놓는 해작질을 매일같이 했는데. 병원에서는 심리적 요인이 다분히 존재한다 말했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요. 고칠 수 있냐고요 없냐고요.
십-팔 년을 살아온 대한민국 청년에게 모국어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장애판정’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못 읽으면 못 읽는 거지. 뭐 어쩔 수 있나. 눈뜬장님이라. 이 장애인은 휴대폰 문자가 날아와도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문자 보냈냐고 생뚱맞게 물어보는 인간이 돼버렸다. 줴인장.
철수가 밥을 먹었다. 이 짧은 문장이 무얼 말하는지 왜 해석할 수 없었을까. 당최 단어와 조사부터가 해석이 되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읽을 수는 있었다. 열네 번 열다섯 번 쯤 읽다보면 문장의 의미가 눈에 들어오기는 했으니까. 그렇다고, 아빠 엄마 스무 번 쯤 읽으면 이해는 할 수 있어요 라고 보고하는 건 확인사살일 수밖에.
시간이 흐르고, 더디기는 해도 이제 글을 읽을 수는 있다. 예전만큼 빨리 읽지는 못한다. 그런데 요즘 이 난독증이 재발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웁스. 텍스트를 해체하려면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문장을 읽는다. 이게 뭔 말인지. 이거야 원.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랑 틀린 게 뭐야.
당혹스럽고도 갑작스런 이 증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느긋하게 그러려니 하고 보내기에는 타격이 너무나 크다. 연말이라 일은 쌓여만 가는데, 읽을 수가 없다. 오호. 지독한 아이러니는. 쓸 수는 있다는 사실이랄까. 문제는 써 놓고서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는 거겠지. 슬프다. 날아온 편지 한 통도 읽을 수가 없다. 다시금 장애인이 되어버린 걸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치밀어 오르는 매스꺼움을 참고 손가락을 놀려야 하지만. 활자는 너무도 징그럽게 꿈틀댄다. 당혹스럽기 서울역에 그지없구나.
이건 뭐 내가 글자가 돼버린 건지 글자가 내가 돼버린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어우 약간 놀라…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11:40
병장 남동진
아. 소소한 변화라고 말씀하시니까 저도 당혹스러워지는걸요.(점점) 2008-12-24
05:07:32
일병 이석현
정말 작은 변화군요- 단지 글하나 읽지 못하게 됬을 뿐이니-
기본적으로 '사는데' 필요한 먹고 마시고 숨쉬는 등의 일에는 타격이 없겠네요.
하지만 '생활하는데' 는 많은 장애가 있겠네요.
놀라워요 2008-12-24
06:50:54
상병 김신흥
흐하핫, 끝마무리가 멋져요. 공연 꼭 보러 갔어야 하는건데. 2008-12-24
07:14:37
일병 구진근
왠지 이 증상은 무준님의 성격에 영향을 받은것 같아요. 자신도 인지 하지 못한 사이에
[완벽한] 문장력을 구사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그 문장을 이리저리 해부하기는 하지만 그 해부한 문자를 [완벽하게] 이어 언어로 내뱉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출발했다고 생각이 드네요. 저도 텍스트를 읽고 쓰고 하다가 일시적인 언어마비가 온 적도 있답니다. 한 한달가랑 되었을까요? 아무런 말도 안하고 한달여 동안 집안에 박혀서 글이나 읽고 게임이나 하다가 다시 글이나 읽고 밥먹고 다시 책일다가 누워자고 이런 생활을 한적 있답니다. 그리고 한달 후 내가 한마디도 안했었구나 하고 머리로 깨닫고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열었어요. 처음엔 단순한 욕설이었죠.. 자신을 향한.. 그런데 그냥 입이 안떨어졌어요. 입을 열어도 혀가 꼬여 이상한 발음으로 말이 튀어나왔죠. 그렇게 살짝 충격받고 이틀이 지났을까요? 부정확하던 발음과 언어는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손이 떨려 오더군요.. 수전증? 전 한달가량 술을 마시지도 담배를 피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결론은 단순히 책을 읽지않아서라는 건데 믿을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냥 몇일간 아무런 생각없이 밖을 싸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를 귀로 듣고 가끔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으며 친구를 불러 그냥 주제없는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얼마지나지 않아서 고쳐지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무준님의 같은 경우에는 너무 아는것이 많아서 어떠한 문장을 보던지 그 문장을 해석하기위해 무준님 머릿속의 지식들이 서로 끼워달라고 아우성쳐서 그 문장을 해석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어버린것 같아요.
그냥 한번 밖에 나가서 산을 보고 여유를 느껴봅시다. 그리고 고민일랑 훌훌 털어버려요.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그냥 한번 자연을 바라보는겁니다. 2008-12-24
07:47:21
병장 장지훈
무준// 이거 무준님을 붙잡고 '니꽐라'를 외쳐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것 같군요. 2008-12-24
08:09:14
병장 이동석
어익후, 이런. 2008-12-24
08:26:02
병장 홍석기
요즘 책마을의 대세는 장기하 인가... 2008-12-24
09:28:08
병장 양 현
푸하하하하!!!!! 마지막거 보고서 박장대소했다는건 정상적인거죠?! 으하하하!? 2008-12-26
18: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