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다마고치
병장 김무준   2009-03-05 15:31:30, 조회: 266, 추천:0 

그 날은 주말이었다. 깔깔이를 입고 침낭에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싸이도 확인했겠다, 주변 친구들과 전화도 몇 통 했다. 후배와 두던 장기는 질려버렸고 무료함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이 황금 같은 휴일 오후 무엇을 하느냐. 결국 리모컨을 잡고 티비를 켜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쩌업. 프리미어리그 재방송도 안 하고, 태연도 나오질 않으니 무얼 볼까.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멈췄다. <록키 발보아>라. 어렸을 적 록키를 본 기억이 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질 않지만 실베스타 스텔론 하면 언제나 록키 발보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록키 시리즈의 최근작인 <록키 발보아>는 개봉 된지가 꽤 지났다. 개봉당시만 해도 어떻게든 극장에서 보려고 쏘다녔지만 시간이 나지 않았다- 는 말은 핑계고, 이렇게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한 영화가 어디 한 둘이던가. 말이야 바로 해야 하니 못 본 게 아니라, 게으른 탓에 안 본 거겠지만. 

빠밤 빰. 빠밤 빰. 빠바바바 바밤. 빠바바바 바바바 빰빰. 록키의 오에스티를 들어보지 못 한 이가 있을까. 기억의 향수라는 게 으레 그렇듯 아련한 것이고 무료함을 달래보자는 생각에 영화를 시청했다. 혼자 누워 불을 끄고 침낭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보는 영화. 으으 슬프도다.

영화와 현실이 미묘하게 겹쳐졌다. 아직 이십대 꽃다운 청춘이기에 퇴물 복서의 심정을 이해하겠냐마는 뭐 그랬다는 거다. 공사에 입사한 후 많은 것을 잃었다. 날로 썩어가는 피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오른쪽 무릎, 굳어가는 대가리는 물론이요 육체적 공간적 자유, 사람과 사람의 관계 같은 것들. 록키의 경우는 그게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레 사라진 것들이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십대에서 이십대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아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건 아니었다. 타협이 나쁜 것만은 아닐 테니 기왕 잃을 거 마음 편하게 잃자. 현실의 한계를 수용함이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살아왔다. 요즘 들어서야 벽이고 나발이고 일단 부딪혀보자는 자세로 마음을 바꾸었어도,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한 순간에 바뀌던가. 바뀌는 부분도 있고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까, 침상에 누워서 뒹굴 거리는 게지. 쩝.

록키는 은퇴했었다. 그리고 불패의 챔피언과 경기를 준비한다.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록키를 말리고, 심지어 그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록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록키는 현실에 분노한다. 그리고 싸운다. 하고픈 일을 하라는 영화의 주제야 개소리로 흘려듣고, 실베스타 스텔론의 늙지 않는 몸매를 엎어둔 채 머릿속에 맴도는 건 록키 발보아의 한마디였다.

내 안에 야수가 살고 있어.

두 시간 넘게 영화를 보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이 대사밖에 기억나질 않는다.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져 침낭과 한 몸이 되어버린 슬픈 벌레를 발견했다. 에잇 젠장. 기분 좋은 영화를 봤지만 괜히 울적해졌다. 이건 슬픈 것도 아니고 화나는 것도 아녀. 우울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녀. 그저 입맛이 더럽게 써서 담배를 피러 나갔다.

가슴 속에 짐승을 키웠던 적이 있다. 가슴에 살던 늑대는 옆집 누렁이가 되어버렸다. 고독을 즐기며 우수에 찬 눈빛으로 외로움을 울부짖는 재수 없는 늑대는 아니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곰이나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는 멋진 늑대도 아니었지만, 현실이라는 사냥꾼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늑대였다. 그런 녀석이 옆집 누렁이가 되어있었다.

에잇. 이건 절대로 슬픈 게 아녀.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9:08 

 

병장 손정훈 
  제 후배와 똑같은 TV관념을 갖고 계시네요. 

태연 아니면 프리미어리그. 그는 지금 티비황제라 불리고 있습니다. 모르는 채널이 없어요. 그가 설탕을 나가면 우린 무슨채널을 틀어야 할지 모르겠답니다. 2009-03-05
15:34:40
  

 

병장 김무준 
  라리가나 세리아도 챙겨 봅니다. 나는 펫도 챙겨보고요. 태연을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가끔 따라나오는 제시카를 보려… 

아. 아저씨 냄새난다. 2009-03-05
15:40:15
  

 

상병 김예찬 
  크, 귓 속에 록키 테마곡이 울려퍼지는 것 같습니다. 록키 발보아는 시대와 싸웠던 영웅의 귀환이었죠. 젊고, 위대했던 아메리카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던 상황에 대한 영화적 반영이라고 느꼈어요. 정치적 공정함을 떠나서, 그냥 아름답더군요. 2009-03-05
16:10:17
  

 

병장 최동준 
  오락프로그램은 본방사수를 목표로 해서 다 보고 음악프로그램도 주워듣는데 안나오면 영화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재미없다고 넘기는 이들은 뭔가 문제있다니깐요. 

것보다, 오늘 KBS2에서 누들로드 한거보신분?? 이거 재밌던데. 2009-03-06
01:10:39
  

 

상병 차종기 
  저 제목에 다마고치는 그 다마고치가 아닌가요, 2009-03-06
09:52:52
  

 

일병 배광언 
  다마고치는 비유인가요? 밥먹이고 똥치워주고 하는 그 다마고치요. 아뭏튼 여기 또 한마리 백구 추가합니다. 얘는 자기가 시베리아 늑대개였었지요 2009-03-06
20:23:30
  

 

병장 정해룡 
  저희 궁은 프리미어밖에 나오질 않네요 ..주말에는 티비와 함께 하는 신나는 ...(?)궁생활! 2009-03-06
23:04:32
  

 

상병 장형순 
  Eyes of Tiger" 테마곡 제목이 이거 아니었나요. 

록키와 람보.라는 영화는 스텔론.의 연기를 넘어서 미국 그 자체의 상징이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 마치 스텔론 스스로 찬란했지만 이제는 저물어버린 배우 인생을 마무리하는 듯한, 두 영화의 연이은 개봉은 추억속의 영광과 승리의 방식은 저물었으며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다. 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주름살의 스텔론이 여전히 머리띠를 두르고, 복싱 글러브를 끼고 피와 땀에 절어 촛점없는 눈으로 승리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네요. 2009-03-07
01:54:30
  

 

일병 배광언 
  아뭏튼->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