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나는 왜 사역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가  
상병 김예찬   2009-01-10 11:49:54, 조회: 155, 추천:0 


2주 정도 걸린 도서관 리모델링이 끝났다. 무질서하게 쌓여있던 책들을 갖다버리고, 새로운 책을 들여놓고, 책들을 수기로 목록화하고, 듀이의 10진분류법을 토대로 분류된 책들에 라벨을 붙였다. 도서관 책은 총 2,300권. 문화관광부에서 매년 제공한 '올 해의 우수 학술 서적'들이 대폭 추가되어있어, 순수 학술 서적만 1,000권이다. 아무튼, 앞으로 남은 1년 가량 동안 읽을 책이 없어 투정 부릴 일은 사라졌다. 

얼마전 상병을 달았고, 슬슬 사역에 열외할듯 말듯한 짬이 되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었으면 후임프들만 보내도 그리 문제는 없었으리라. 특히 이번 주의 3일 연속 야근=사역(물론 당근 섭취로 하루는 빠지긴 했지만-)은 사역 인원 선발에 관련한 권한이 나에게 있었으니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부득이한 사정이 없다면 계속 후임프들과 함께 일하러 가는 편을 선택했는데, 이건 계급과 짬에 따라 차등된 과제가 주어지는 궁 문화에 대한 평등주의적 시각에서의 반감- 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그냥 여럿과 함께 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탈출하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는 하루 하루 좀 더 바쁘게 살아야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어지간한 사역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평소 다른 사무실이나 생활관에 떨어져 지내는 후임프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나름 즐거움이기도 하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지는 업무나 과제, 사역을 통해 무언가 완성해나간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다. 나는 천성적으로 덤벙거리고 실수가 잦은 편이라 무언가 작업을 할 때는 두번, 세번 확인해야 하는데,(그럼에도 실수는 항상 나온다. 윽.) 재차 점검을 거쳐 무언가 완전한 결과물이 나타나게 되면 괜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조직의 특성상 일을 열심히 하고, 잘 한다고 해서 무언가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거의 없겠지만.

그렇게 일이 많지 않은 보직의 특성상(역시 주 업무는 복사와 커피 타기?), 내가 무언가 뿌듯함- 을 느낄 만한 업무가 주어지는 날은 많지 않다. 정기적으로 하는 일들이야 이제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이번의 도서관 사역은 내가 참 좋아하는 책에 관련된 일이라는 점만 해도 뿌듯 포인트를 일단 1점 먹고 들어갔고, 특히 이번에 신규로 들어온 책들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뿌듯 포인트 1점 더, 그 신규 서적들이 매우 알참에 1점 더하고, 나의 사역 참여로 인하여 도서관 재개장이 더 빨라졌다는 것에 1점 플러스. 총 네번 뿌듯해 할만한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한때 이처럼 궁 내에서의 업무를 통해 뿌듯함을 느끼는 나 스스로에 대해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이 것은 한국에서 궁이라는 조직이 참으로 불필요한 조직이고, 나는 궁 생활을 통해서 어떠한 보람이나 성취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입궁을 피하거나 최대한 빨리 퇴궁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물론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가끔 내가 왜 나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작업들에 참여하고, 끝마치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끼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읽다가 이러한 부분을 발견하였다. 내가 왜 무익한 사역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어느 정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는 글인 것 같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말년의 저작 중 하나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 관한 짧은 책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열정적인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이 단편 소설은 소련 문학사에서 굴락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리고 콩사탕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직접 출판 허가를 받아야만 했던) 첫번째 작품이다. 루카치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긴 노역의 하루가 끝나갈 무렵 이반 데니소비치가 자기가 세우고 있던 장벽의 일부를 마저 완성하기 위해 달려가는 대목이다. "모든 수감자들은 집합하라, 이제 수용소로 행군해 돌아간다"는 감시원의 외침을 들었을 때 이반은 장벽에 마지막 벽돌 한 쌍을 재빠르게 끼워넣어 일을 완성하고픈 유혹을 견딜 수가 없었다. 비록 그 때문에 감시원의 분노를 살 위험이 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루카치는 일을 끝마치고자 하는 이 충동을, 물질적 생산을 창조적 충만감의 처소라고 보는 ㅅㅎ주의 특유의 사고방식이 굴락이라는 혹독한 조건 속에서조차 살아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읽었다. 밤이 이슥해졌을 때 이반 데니소비치는 마음속으로 지난 하루를 되돌아보았고,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오늘 벽 하나를 세웠는데 그 일을 하며 즐거웠노라고 일기에 적는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이 반체제의 씨앗과도 같은 서적이 가장 엄격한 ㅅㅎ주의 리얼리즘의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루카치의 역설적인 주장은 옳은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동의하지 못하던 이야기 중에 하나는 '모두가 스스로의 적성에 맞는 노동을 통해 창조적 작업을 하고 그로 인해 얻는 수확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과연 실질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였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에게 무익한 노동을 통하여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인가? 머리로는 가깝게 인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막상 몸으로는 가깝지 않았던 '노동'이라는 개념은 수없이 많은 텍스트의 나열에도 내겐 막상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무익한 삽질, 이해할 수 없는 제설, 힘겨운 쓰레기봉투와의 사투를 거친지 1년.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노동'이 무엇인지. 물론 나의 '노동'은 그 자체가 먹고 사는 문제와 연관되는, 사회의 처절한 '노동'은 아닐테다. 그러나 '마지막 벽돌 한 쌍을 재빠르게 끼워넣어 일을 완성하고픈 유혹'에 빠지고, '밤이 이슥해졌을 때' '오늘 벽 하나를 세웠는데 그 일을 하며 즐거웠노라'고 말 할 수 있는, 그 '노동'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노동'은 '창조적 충만감'의 원천인 것이다. 내 뿌듯함과 사역의 기쁨은, 바로 '창조적 충만감'(!)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무언가였다!


그러니 사역 때 마다 "김 상병님, 오늘은 좀 빠지면 안됩니까? 솔직히 이걸 저희가 왜 해야됩니까? 그냥 밑에 애들 몇명 보내면 안됩니까?" 라고 말하는 후임님, 우리의 '창조적 충만감'을 위해 다음에는 그냥 군말없이 야근하자. 과자 사줄게. 오케이?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36:34 

 

병장 정병훈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말하면 반감을 사겠습니까? 이유없는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선 어쩔 수 없이 받아 드리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은 크게 필요 하지도 않는 노동이고 비효율적인걸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걸 하면서도 못마땅하지만 나의 행위를 감싸줄 뭔가를 찾고 결국 미화시켜 그것을 부르죠. '지금 힘들어도 이거 다 하고 나면 얼마나 깨끗하고 시원한지 몰라.'같은 어구도 알고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되는 그것들에 대한 약간의 반항과 받아드림이 있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예찬씨의 경우는 그런 노동을 피할 수 있지만 애써 나간다는 건 그것 보다 뜻깊은 무언가 있는게 확실할겝니다. 그걸 '창조적 충만감'이라고 부르고 있듯 말이죠. 

개인적으론 '무익한 노동을 통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물음엔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인지라. 이기적 유전자의 론을 따 오자면, 결국 우린 어떤 이득이 없는 행위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큼 이타적이지 않습니다. 제 몸은 절 위해 존재하는 듯 하지만 결국 세포하나가 존재하기 위해 몸을 살게 하니까요. 그와 같이 과연 어떠한 이득 없는 노동을 과연 우리몸이 기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무익한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이익 되는 어떠한 존재도 없는 상황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합니다. 삽질을 하고 다시 그 자리를 덮는 행위마저도 근육단련을 할 수 있다는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으니까요.) 2009-01-10
12:07:30
  

 

병장 문두환 
  하하. 여태까지 보았던 글들과는 달리 조금은 예찬님의 일상이 녹아들어가 있는 듯 해 반갑습니다. 

어제도 한 마이너님과 이야기를 했던 것이지만, 궁은 하나의 규정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각 가게의 지점장마다 다른 지침을 하달하기에, 그래서 가장 예하에 있는 체인점은 서로가 충돌되는 몇개의 지침에 허덕여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작업 소요가 많아지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기보다는, 그네들의 심미적인 취향에 의거한 문제들이 되다보니 자연스레 생기는 반감은 감출 수가 없더군요. 그렇게 해서 파생되는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몇 가지의 일화를 들춰내지 않더라도 반복과 반복 또 반복이 되어 피로도를 높이던 사례는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곳에서 말하는 작업이나 '노동'이라는 것이 굉장히 의미가 없거나 비효율적이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한명입니다만 예로 따오신 말을 듣고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사바세계에 있을 적에도 사실 이와 별다를 것 없는 작업이나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있는데 그때는 그 비효율성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거든요.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같이 있는 이들이 끝없이 웃음을 주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머릿속에 들어앉어주어서였기 때문이겠죠.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걸까요? 허허. 

언젠가 한번은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만, 저에게는 나름대로의 조직론과 대표자론이 있습니다. 궁에서 특히나 많이 느꼈던 것은 조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저에게 있어 조직과 집단은 조금 특별한 의미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곳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나와 함께 하는 이들과의 시간은 소중하고 그들과의 관계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곳에서 개혁을 부르짖을 수 있는 정당한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죠. 차라리 손쉽게 인정해버리고 해야 할 것들을 얼른 마친 다음에 우리들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합니다. 짧은 댓글이라 생각이 적절히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흐흐. 2009-01-10
12:33:59
  

 

병장 이동석 
  저는 맨 관념적인 일, 그러니까 서류정리나 커피타기나, 이것 저것 소소한 감정노동에 시달릴바에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일을, 그러니까 사역을 하는게 더 후련할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뭔가 페인트칠을 하거나 일정량의 땅을 파거나 해야할때 그만하고 쉬라-는 말이 반갑다기 보단, 그냥 내 일을 내가 마무리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댈때가 많습니다. 대답하고 그냥 하고 있으면 또 불호령이 떨어지지만은, 그렇더라도. 



김강록씨의 나는 삽질의 왕이다-랍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읽어봐도 좋을것 같아요. 

http://26.1.1.40:2007/bbs/zboard.php?id=02191&page=1&sn1=&divpage=1&category=3&sn=on&ss=on&sc=off&keyword=김강록&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2 2009-01-10
16:28:38
 

 

병장 김동욱 
  병훈님의 댓글을 무수히 많은 떡밥(?)을 던져줌에도 다음 타자분에게 넘기겠습니다. 


'창조적 충만감'. 비록 그게 굴락의 비참한 환경 속의 강요된 노동으로 인한 벽쌓기라도.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초를 하면서 가끔씩 느끼는 데 청소하다가 남겨진 풀 몇포기와 낙엽 몇 부스러기가 왜 그리 눈에 밟히는지. 저것만 치우면 '오늘 텃밭의 풀들의 키들을 모두 다 똑같게 했는데 그 일을 하며 즐거웠노라고' 신송노트에 뿌듯하게 쓸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지요. 물론 제초가 '창조'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가 시킨거라하더라도, 비록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새 그 일에 집중해서 신경쓰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충만'하진 않을지 몰라도 뿌듯함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크크크. 

그건 그렇고 문광부에서 오는 권장도서 같은 거, 그 목록 자체는 둘째치더라도 그렇게 구입해서 이런 궁으로 보내고, 벽지 도서관으로 보내고 하는 것 정말 좋지 않나요? 밖에 있을 때는 그냥 그려러니 했는데 여기오니까 그런 책 한권한권이 정말 사람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거고. 부족하나마 양서들도 읽을 수 있고. 여튼! 이런 건 더 확대되서 시행되도 좋을텐데. 2009-01-11
01:44:02
  

 

병장 이동석 
  전 진중권도서도 안들어와서, 순전히 제가 책을 들여오거나, 아니면 안 읽습니다. 요새는 주로 안 읽습니다. (헛) 2009-01-11
02:44:26
 

 

병장 정병훈 
  아아앗. 덩윽씨 그러지마요. 흐흐흐 경제학에 입각한 반격은 절 산산조각 낼 듯 무섭습니다. 와우- 제 글이 그렇게 거슬렸나요.(울음) 

휴. 

저는 나중에 부자가 되거나, 넉넉해 지거나, 여유가 있거나, 조금씩 돈을 모으면 책 기증하는 운동을 해볼 참입니다. 2009-01-11
09:23:07
  

 

상병 김예찬 
  전 문광부의 학술 도서 뿌리기에 호감과 비감을 함께 느끼곤 합니다. 물론 궁에서도 그런 저도 스스로의 생각이 자기합리화의 한 종류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적어도 사역이 '현실과의 대면'이라는 측면에서 저에게 묘한 생의 감각을 주는건 사실인 것 같아요. 스무 해 넘는 인생 동안 잊혀져 있던 스스로의 육체라는 것이 깨어나는 느낌이랄까.. 제가 위에서 적은 이야기들은 그런 것 보다는 스스로 설정한 '작업의 완성'에 대한 쾌감에 가깝겠습니다만.. 이를테면 시간과 학점에 대한 부담에 쫓겨 레포트를 쓰는 글 쓰기와 다른, 블로그에 철저히 자기 스스로 글의 범주를 정하고 만족할만한 글을 썼을 때의 쾌감? 


문광부의 저런 정책 때문에 서적들을 읽을 수 있다는게 참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만, 그 책중 대다수가 한번도 대출 되지 못하고 서가만 차지하고 있으리라는게 슬프죠. 이번에 도서관 정리하면서 많은 학술 도서들이 창고 속으로 사라졌는데, 저 '비싼' 책들이 그저 폐휴지로 묻혀있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저거 나나 주지.. 

'무익한 노동을 통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은 제가 ㄱㅅ 주의에 결정적으로 찬동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젝이 저렇게 썼듯이 '물질적 생산을 창조적 충만감의 처소'라고 보는 것은 '사회주의 특유의 사고방식'이죠. 2009-01-11
14:03:34
  

 

병장 김민규 
  써재끼기 바빠서 놓치고 있었네요. 뒤늦게 따라와 보자면 

저는 한 지붕 아래에 있다는 동질감에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어떤 일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공통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두환님 의견에 거의 일치하는 것 같아요. 일 그 자체에 대한 동기부여가 어지간하면 잘 되지 않아서 말이지요. 

사역에 기쁨을 느끼고자 하면,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슬픔이 공존해요. 말하자면, 기껏 새벽부터 깨서 눈을 다 쓸어 놓았더니 해뜨면서 삼십 분 만에 다 녹아버렸다든가, 삼사일 밤새서 뭘 만들어 놨는데 '이 산이 아닌가벼' 한 마디에 리셋이라든가, 뭐 이런? 

아무리 불합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지만, 참 그럴때마다 인생이 서글퍼지는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흑 2009-01-11
14:0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