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나는 왜 늦잠을 자야 하는가- 말도 안되는 일상 찬가  
상병 홍석기   2008-10-06 14:12:58, 조회: 289, 추천:2 

그야말로 청명한 가을날. 게다가 연휴다. 어디 도시락이라도 싸들고 피크닉 가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오후 2시에-해는 중천에 걸린 지 오래고- 블라인드를 뚫고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맞은 후에야 깨어났다. 그래, 휴일이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실 근무 일수’의 영향 밖에 존재하는 주말인데 왜 난 항상 잠으로 그 반을 소비하는 것일까. 그럼 진상 규명을 위해 잠시 시간을 돌려보자.

전날, 7:00pm.
일과도 끝났겠다, 밥도 먹었겠다 싸지방 가기엔 내 통장 잔고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운동하기엔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 남은 옵션을 행하기로 한다. 잤다.

9:00pm.
깨어났다. 제기랄, 너무 오래 잤는지 속이 거북하다. 이빨도 안 닦고 잤더니 입 안이 찝찝하고, 입냄새는 기본이다. 담배 한 대로 기분전환을 모색하기로 했다.

11:00pm.
잠도 잘 만큼 잤고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TV는 지루하고, 공부를 하기엔 내 신념이 가로막는다. 오후 내내 앨런 무어의 <Watchmen>만 장장 3시간에 걸쳐 탐독했더니 더 이상 책도 읽고 싶지 않고, 결국 후임과 담소를 나누며 녀석의 잠을 방해하기로 했다. 현 금융위기 사태에서부터 고등학교 시절 비밀장소에 대한 추억담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방대한 스펙트럼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2:00am
그래도 휴일인데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하고 싶었다. 성과물이 필요했다. 테라스에 모인 사람들은 제대 후 먹고 살 걱정을 하고 있었고, 내무실 에선 여자 경험담-주로 허리하학적인 측면에서-을 논하기에 바빴다. 나는 저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는 생각에 일단 독서실로 향했다.

12:05am
독서실에서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선임이 수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선임은 펜을 내려놓더니 CDP 전원 스위치를 껐다.
이런, 뭔가 긴 대화가 이루어 지겠군
그렇게 우리는 제대 후 진로와 외박 때 있었던 길거리 헌팅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어느 덧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나의 주말은 반복된다. 무의미한 행위와 무의미한 행동으로 점철된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 유일한 ‘이벤트’ 인 토요일 밤의 프리미어리그 관람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없는 말에 웃고, 떠들고, 3,000KM 밖 공 하나의 움직임에 환호하고 (또는 환호하는 ‘척’ 하고), 좌절하며 (또는 좌절하는 ‘척’ 하며), 또 즐거워하고, 과연 나는 즐거운 것인가- 따위의 의문이 뇌리를 스치면 그것을 애써 무시하기 바쁘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며, 부대찌게집이라는 특수환경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주말이면 ‘심심하다’는 불평을 숨쉬듯 늘어놓고, 그 ‘심심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담배 한 개피를 들고 무작정 복도를 배회하거나(비흡연자의 경우는 무작정 편의점에 간다든가), 누구든 말을 걸어 보거나, 축구 사역을 계획하기도 하고, 이도저도 안되면 TV 앞으로 모이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목격되며, 그 결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스스로가 무의미한 일상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부대찌개보다 저렴하고 맛있는(물론 부대찌개 보다는) 김x천국, 김x나라가 존재하는 사회는 또 어떤가. ‘하늘아래 조선팔도가 모두 내 땅이로다‘ 란 말을 실감나게 해준 대학친구든, 야구동영상을 공유하며 교내 일본어 공부 열풍을 주도하던 고등학교 친구든, 파이어에그 친구든 간에(여자친구는 조금 얘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나는 솔로이므로 이 케이스는 사뿐히 무시하겠다) 같이 술 마시며 스포츠신문이나 <월간조선>에나 나올법한 가십거리를 논하고, 위닝이나 당구같은 시시한 행위에서 승패를 가르기 바쁜 상황에서 도무지 어떠한 깨달음도, 즐거움도 얻을 수 없다. 단지 스팀팩을 맞은 마린처럼, 일시적인 쾌락에 뿌듯해 할 뿐.

이런 식으로 무의미한 말과 거짓 웃음만이 만연한 사회에서 인간관계란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 글 <리오 퍼디난드의 명예로운 은퇴를 위하여>에서 나는 사람들과 추억의 한 조각이라도 더 남길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 무의미함, 이 허무함만이 남는 인간 관계 따위 보다는 차라리 혼자 독서실에 박혀 책 한권, 아니 심지어 영단어 하나라도 외우는 건데, 라는 후회감에 젖어 모든 것은 나의 철없는 생각이었다고-유치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꿈이었다고- 패배를 선언하는 나 자신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언어의 미끄러짐’ 같은 문제는 일단 제끼자- 정작 문제는 나 자신의 편협한 사고일 수 있다. 패배주의에 젖어 자기비하로 이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무의미한 일상’ 이라고 정의내린 구도 속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깨달음을 얻은 자들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굳이 몇몇 저명한 인사들-내지는 초인들- 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김강록은 당구를 통하여 인류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 역시 대단한 위선자고, 그의 글 자체가 원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이루어진 거짓일지도 모르고, 따라서 다시 허무주의로 환원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직 일상에서 가능성을 찾고 싶다. 어차피 우리 중 대다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다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다면, 어떠한 이론도 의미있는 것이 도리 수 없으니까. 

그래,어쩌면, 무의미해 보이기만 하는 대화는, 미끄러지는 언어에는 나타나지 않는 어떤 교감을 이루어내고 있을 수도 있고, 무의미한 행동들은, 노자가 얘기했던 ‘빈 찻잔’ 과 같이 사실은 최적의 쓰임새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가정이지만. 하지만 내가 이 가정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어설프지만 인간 내부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의 진실된 노력을- 그 끝이 허무하든 말든 간에 -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노력이 무의미 했기에, 진실함은 더 돋보였다고 할까. 병장이든 이병이든, 한 가닥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말을 할까 말까, TV를 볼까 말까, 이 이야기의 다음엔 어떤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까 망설이고, 기대하는 그들의 표정은 나를 웃음짓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마도 나는 주말 늦잠을 한동안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게으름이 아니라, 일상의 위대함이다.
제기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39:53 

 

병장 이동석 
  마무리가 좋은데요. (웃음) 

홍석기님이 등판하지 않으셨더라면, 저라도 나서려고 했습니다. 
어쩜 이리 조용할수 있단말인가요! 

심지어는 댓글도 안달리는군요.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아아, 장장 삼일간의 휴일동안 뭐했는지 돌이켜보면, 기억도 안나는군요. 뭐한거지? 2008-10-06
14:24:32
 

 

상병 이동열 
  모든것을 떠나서... 늦잠을 주무실수있다는게 부럽습니다... 2008-10-06
14:43:23
  

 

이병 장봉수 
  아.... 
저는 소설 삼매경에 빠져있어서... 
글 쓰는 것이 무리군요 하하 2008-10-06
14:48:17
  

 

병장 고동기 
  동석님이 안계신동안 줄곧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하하 
전 이번 개천절에 궁방일보 마라톤을 뛰고 왔습니다. (사실을 걷고 왔다는게 맞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대회였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는걸 뼈져리게 느끼게 해주는. 2008-10-06
14:57:01
  

 

병장 황인준 
  흐음. 3일 연휴라. 
저도 잠을 제외하고는 그닥 생각이 나질 않는 군요.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고(땀땀). 

석기씨가 등판했어도, 
동슥씨가 연달아 등판한다면 열렬히 환호를 하겠습니다만?? 2008-10-06
15:14:06
  

 

상병 김호균 
  미끄러지는 그 찰나에도 역사는 이루어지는 법이죠, 
뭐든지 case by case. 
그래도 어디를 향하는가에대한 자각은 항상 필요하겠죠... 

간만의 글 정말 반갑습니다(웃음) 2008-10-06
15:19:12
  

 

상병 홍석기 
  동석// 흐흐. 그래도 3회 초에 강판당했으니, 빨리 구원에 나서셔야 할걸요. 분명 글은 많이 올라온 것 같은데, 분위기는 여전히 다운되어 있군요. 
그건 그렇고, 돌이켜보면 아무 기억도 나지않는 주말을 돌이켜보며, 어떻게든 자기 합리화를 만들어 보았는데, 쓰고 나니 어째 시간이 갈수록 궁색한 변명과 자기 합리화만 늘어가는 느낌이 들어 좀 씁슬하네요. 다음 주말엔 당구장이라도 가 볼까나. 

동열//댓글에 원통함이 배어 있군요....헛 

동기//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라니, 뭔가 참담한 기분이 드는데요. 흑. 2008-10-06
15:26:48
  

 

상병 김세현 
  저도 경악한답니다..한창 팔팔한 사내놈들이 비슷한 또래들이 모여있는 내무반이 그토록 심심할 수 있다니...(웃음) 놀이의 상실입니다 2008-10-06
15:37:32
  

 

병장 전승원 
  격식을 털어낸다면야 어린 소년들 마냥 말뚝박기를 하든, 얼음땡을 하든 동네 꼬마들 마냥 놀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긴 중고등학교때 오던 수련장이 아니라서 쉽지 않군요. 2008-10-06
15:44:40
  

 

병장 어영조 
  저도 뭔지 모를 보상심리때문에 3일 내리 잔 기억 말고는 없네요.(이런..) 2008-10-06
15:53:14
  

 

병장 고은호 
  에고고공~ 
솔직히 병장이 되어가면서, 점점 일상이 지루해져가는 것 같습니다. 

끝 없이 보이는 일상의 반복이랄까... 
뭔가 특별한 이벤트도 없고, 
새로운 것인가 싶으면 다 해봤던 것이고, 
그 와중에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연히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니 정말 막연하고. 

하하... 
뭐,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도 나름 '아무 것도 안한다'는 것을 하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있습니다. 

밖에서 언제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이런 저런 사색의 시간(?!)을 갖겠는가.. 
싶기도 하고 말이죠. 

뭐, 자기 합리화라면 자기 합리화이겠지만, 
에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는 현대에서, 
그저 나 스스로 만족하며 즐길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지 않겠습니까? 낄낄- 2008-10-07
02:16:19
  

 

병장 김선익 
  혈액형에 대해 믿지는 않지만 
A형이실 것 같은 강한 느낌이 옵니다(웃음) 2008-10-07
05:42:56
  

 

병장 박상욱 
  글 되게 좋네요. 
저도 근래 들어, 내가 절박하게 싸우고 고민해서 쟁취할 유일한 가치는 
(적어도 여기서는) 
즐거운 일상/ 순간의 행복 
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론 '무슨 말을 하느냐' 보다 '그냥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기도 해요. 그 와중에 가끔 예상치 못했던 대어가 낚여오기도 하고 말이죠. 2008-10-07
08:37:27
  

 

상병 홍석기 
  호균// 이게 다 당신이 빌려준 <Watchmen> 때문이잖아!! 그거 다 읽느라 나중엔 심심이 지칠 지경이니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구만. 그리고 꾸준히 일기를 쓰는 로르샤흐를 보면서, 갑자기 글쓰기 욕구가 다 들더군. 명작에는 뭔가 특수한 에너지라도 있는 건가. 

승원// 격식이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근래에 '격식 없는' 내무실 최선임자의 노력으로 '마피아' 란 게임을- 나중엔 사역성이 짙었지만- 하며 원초적 유희를 즐겼던 기억이 나는군요. 근데 말뚝박기는 이거, 가혹행위로 변질될 위험이... 

영조// 저도 그래요. 보상심리도 한몫 하죠. 주말에 늦잠 안 자면 왠지 손해보는 느낌이랄까...그래서 굳이 밤늦게 안 자도 자는 시간엔 별 차이가 없다 보니, 이거 늦게 자게 되고, 그런 만큼 또 더 자게 되고, 이런 사이클이 이어지더군요. 게다가 이러면 시간도 잘 가고. 

선익// 후훗. 여태껏 한번에 맞춘 사람이 없는 '홍석기의 혈액형은 무엇일까' 란 명제에 도전하셨군요. 아쉽게도 탈락하셨습니다. 제 성격은, 음, 혈액형적 편견과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2008-10-07
09:42:26
  

 

병장 이태형 
  이 얼마만에 보는 석기님의 글이란 말입니까! 
정말 반갑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잘 읽었어요(웃음) 
24시 넘어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니, 굉장한데요. 
더군다나 19:00~21:00까지 잘 수 있나요? 2008-10-07
15:18:33
  

 

병장 김태형 
  아! 

일상의 위대함 그리고 늦잠의 유용성.. 
사실 지금 저는 일상이 위대한지 안한지도 잘 모르겠구요, 
자꾸 비관적이 되는 것 같군요. 

위아래가 힘들게 하는 한사람이었습니다. 2008-10-07
17:22:39
  

 

상병 김동욱 
  결국 늦잠에 대한 변명이신건가요! 동감합니다. 이 곳에서 잠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크크크. 

역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는 옳은 것일까요, 궁생활 중에는 다들 비슷한 고민에 빠져 비슷한 단계를 걸어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궁이라는 곳에서의,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기에 그런 걸까요. 

저도 어제 에덴의 동쪽을, 한 반쯤 보다가 참을 수 없이 밀려드는 회의감 때문에 내무실을 뛰쳐나와!!! 갈 곳을 찾아봤지만..... 결국에는 조용히 독서실로 들어갔습니다. 공부는 하기 싫고 책도 읽기 싫고 해서 그냥 편지지를 잡아뜯어서, 수취인 불명인 편지를 자정이 넘도록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이 또, <죄와 벌>인지라 결국에 편지는 생뚱맞게도 쏘냐! 를 거듭 외치며 끝을 맺었더랬습니다. 

그 편지를 쓰며 제가 요즘 나누는 대화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씁쓸하게도 말이지요. 

1. 근무장에서 광부님들의, 무한 오버액션을 통한 말상대 (~님, 그거 정말입니까!!) 
2. 내무실에서의 선-후임들과의 시덥지 않은 말들(대개의 경우 어의없는 농담과 시비) 
3. 혼잣말 (로쟈를 닮아가는 걸까요, 흑흑) 

머릿속에서만 홀로 연대를 꿈꾸고, 소통을 생각하면 뭘합니까. 실생활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귀찮아하고, 언젠가부터는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조차 버거워지는 순간을 이따금씩 경험하는데 말이지요. 이거이거 이러다 결국엔 홀로 절뚝거리게 되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도 잠을 좀... 2008-10-07
23:15:17
  

 

병장 이동석 
  푸하하, 동욱님 마구마구 혼잣말을 되네이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이 상상되는군요. 2008-10-08
08:1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