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
나는 어째서 나가사와에게 끌리는가.
2번째로 맞는 설날이지만 여전히 무료한 아침입니다. 아침에 떡만두국을 먹고 나서 내무실에 돌아와보면 TV에서는 따분한 방송뿐. 책이라도 읽어볼까 해서 자리에 앉아보았습니다만 이상하게도 저는 아침에는 얌전히 앉아있지를 못하겠더군요.
적어도 17:00 는 지나야 책이 조금 눈에 들어오는 요상한 체질이라서요 (웃음)
그래서 책마을이라도 할까 해서 이렇게 내려왔습니다. 다들 설이라서 슈가, 옹박 등으로 바쁘신지 항상 부산하던 책마을도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러고 보니 20일에 정모도 있군요. 저는 나가지 못하지만 참 부럽습니다. 또 천문학 이야기라도 끄적여볼까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너무 천문학 글로 도배를 하는 것 같아서 다음기회로 하기로 하고 그저 잡설이나 할랍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입니다. 어줍잖은 실력이지만 원서 ‘ノルウェ-の森’ 로도 굳이 찾아 읽을 만큼 좋아하는 책입니다.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 전부 제 마음에 쏙 드는 캐릭터들입니다만, 이상하게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쌩뚱맞게도 주인공의 선배인 ‘나가사와’입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당당하게 자신과 와타나베를 제외한 기숙사생을 전부 도매금으로 촌놈, 속물이라 평가하죠.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 –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책 – 을 읽는 것은 시간의 낭비라 평가하죠. 피츠제럴드는 죽은 지 28년 밖에 안됬다는 주인공의 반론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상관없어. 피츠제럴드 정도의 훌륭한 작가는 언더파로 충분해”
그의 태도는 당당을 넘어서서 ‘오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과감합니다. 자신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긍정과 부정, 가치있음과 없음을 칼 같이 그어버리죠. 저 같은 범인이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 나를 뒤에서 험담이라도 하면 어쩌지’라며 마음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동안, 나가사와는 그대로 밀고 저 멀리 나아가버리고 맙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무한한 정열과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인간적인 부분에서 묘하게 굴절되어 있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천재들에게 흔히 보이는 기벽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탁월한 지도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거침없이 나가면서도, 마음은 진흙구덩이에서 음울하게 몸부림치고 있는것이죠. 그런 면은 나가사와의 연인 ‘하츠미’와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나가사와가 끝없는 열정과 재능으로 끝없이 달려가는 태양과 같은 인물이라면 하츠미는 조용하고 은근한 달과 같은 관용의 소유자이죠. 얼굴
이 특별히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이지적이고 유머가 있고 동정심이 있고 언제나 멋지고 우아한 옷을 입는 그녀는 누구에게도 호감을 주는 그런 인물입니다. 나가사와가 자주 밤마다 여자사냥을 나서서 아무 여자하고나 몸을 섞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나가사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가사와는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여자, 좋은 사람이에요"
하고 나는 된장국을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알고 있어"
하고 나가사와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내게는 좀 과분하다 싶게 좋은 여자야."
나가사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외무성 시험에 합격하고, 새로이 ‘스페인어’를 시작합니다. 그런 것은 그에게 너무나 쉽고 또 간단한 일입니다.
“상당히 치밀한 생활방식이군요.”하고 나는 빈정거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과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냐. 너보다
열 배는 노력하고 있을거야”
“그래서 말이야.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한심해져.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을 안할까, 왜 노력을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 나가사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제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것 같은데요”
“내가 말하는 건 그런게 아니야. 노력이란 보다 주체적이고 목적적으로 하는 거지”
“이를 테면 모두가 취직이 결정되어 쉬고 있을 때, ‘스페인어’를 시작하는 그런거요?”
“그래.”
그래서일까요. 내가 이 나가사와란 인물의 비정함 – 하츠미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자는, 너와 결혼한 생각 따위는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츠미에게 말하는, 최후에 하츠미를 버리고 무심히 유학을 가버리는 – 에 치를 떨면서도 못내 끌리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선천적인 자질 – 어학능력, 리더쉽, 지식 습득력 – 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다른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난 봄까진 스페인 어를 완전히 마스터할거야. 영어, 독일어, 불어는 이미 되어있어.
이런게 노력없이 – 재능만으로- 되는 줄 알아?”
재능이 있어 노력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상의 것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저 같은 사람입장에서 그보다 얄미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능이 있어 그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 멋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불쌍한 사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범인들을 제치고 달려나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경쟁해서 심지어 그 사람들 마저 제쳐버린 초인의 삶이란 도대체 어디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까요.
나가사와가 대답했다.
"성실한 인간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만일 네가 나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
각하면 말이야. 하지만, 내 시스템은 다른 인간이 살아가는 시스템과는 매우 다
른 거야."
"하지만, 날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 거죠?"
"그러니까 너는 내 시스템을..."
"시스템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하쓰미가 큰소리로 외쳤다.
하쓰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가사와라면 그런 여자
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쓰미라는 여성 속에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녀 스스로
가 강한 힘을 내어 상대를 뒤흔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산하는 힘은 작았지
만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나가사와 본인은 자각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에게 있어 ‘하쓰미’는 구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성실한 인간이 아닐 뿐더러 와타나베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색다른 사람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을 시스템적으로 이해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아무 대가없이 – 그것도 그것이 앞으로 계속 지속될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 사랑해주는 ‘하쓰미’는 진흙구덩이에서 몸부림치는 그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구원의 손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렴풋한 손길을 나가사와는 눈치채지 못한 채 독일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녀의 죽음을 나에게 전해 준 사람은 물론 나가사와였다.
그는 서독의 수도 본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 왔다.
"하쓰미의 죽음으로 인해서 무언가가 꺼져 버렸고, 그것은 못 견디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나는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두 번 다시 그에게는 편지를 쓰지 않았
다.
그가 정말로 비정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하쓰미’와 그렇게 길게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그녀의 죽음에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독 그리고 고통을 느꼈을 까요. 그는 단순히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자신 또한 피와 살이 붙어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삶의 시스템을 설명하며 분석하던 그의 마음속에 시스템도 무엇도 아닌 ‘무언가’가 꺼져버립니다. 그것이 그 동안 그가 놓쳐 왔던 부분. 그의 인간적인 부분이겠죠. 그러나 결국 그는 늦어버렸고, 앞으로 그가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란 힘든 일일것입니다.
나가사와는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무시하고 오만할 정도로 자신의 잣대로만 세상을 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정직했고,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못하는 가치가 존재한 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가진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그 이상으로 노력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못 견딜 상실의 슬픔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저는 초인도 아니고, 하쓰미처럼 미드나잇블루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애인도 없고, 칼과 같은 비정함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가사와를 보면서 어딘가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초인이던, 범인이던, 누구던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실의 아픔에 눈물을 흘린다는 숙명적 사실 때문 일련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잡생각이었습니다. 즐거운 설되세요.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