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야기]내친구 K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8-11-23 09:38:24, 조회: 216, 추천:0 

1. 그러니까 그 K를 만난 것은 대학 새내기 OT때였을 것이다. '저희 집은 에버랜드 근처니까 에버랜드 갈 때엔 꼭 불러주세요'라고 자기소개를 했었지만 '저희 집은 롯데월드 근처에요'와 '저희집은 서울랜드 근처입니다'라는 시리즈를 낳고는 내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을 나눈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있었던 선후배 대면식 때였다. 우리 과는 대면식이라고 하면 졸업생 고학번들까지 모이는 나름 큰 행사이기에 남, 여 대면식이 따로 있었고 그 후에 함께 모여서 자연스럽게 2차를 시작하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날따라 남자 대면식이 너무나도 재미있던 나머지 '천천히 가자'분위기가 잡혔고, 결국 정해진 시간보다 2시간 늦게 합석장소에 갔을 때는 기다리다 못한 여아들은 대부분 집에 간 후였다.(나중에 들어보니 여자 대면식은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끼리만 5시간을 앉혀놨으니 가버릴 수밖에.) 하지만 이 친구는 기숙사생이었기에 집에 간다고 해도 선배들이 놓아줄 리가 없었고, 결국 지루함과 싸우며 남자들이 와서 분위기가 좀 살아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남자들은 '88학번 밑으로 다 머리박아'라거나 '88학번 밑으로 다 재롱부려'라거나 '88학번 밑으로 다 생마늘 먹어'같은 재밌고도 재미있는 놀이를 하다가 왔기에 분위기가 매우 고조된 상태였고, 분위기는 바로 살아났다. 그리고 분위기가 살아난 선배들은, 우리같은 새내기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술을 잘 마셨다. 결국 중앙 테이블에서 벗어나 좀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도망온 내 앞에 앉아있던 아이가 K였다. 선배들은 어쨌건 모든 테이블에 안주가 올라와있도록 챙겨줬기에 술과 안주는 걱정없었고, 나와 K와 몇몇 술을 잘 못하는 선배들과 다른 동기들은 따로 모여 술을 마셨다. 언젠가부터 K는 자연스럽게 술을 따르는 역할을 맡았고, 이 녀석은 자신의 역할에 지나치게 충실해서 잔이 비는 꼴을 못봤다. 결국 정신이 혼미해 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이녀석이 정말 놀라운 기술로 자신의 잔에만 물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고(손이 눈보다 빠르다는 것을 난 이때 알았다.) 순간적인 눈빛 교환 속에 내 잔에도 물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술자리에서 물을 마시며 친해지게 되었다.

2. K는 놀랍게도 나와 죽이 잘 맞았다. 미친아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대학 1년간 내가 했던 재미있는 일에 대부분에는 이 녀석도 끼어있었다. 학생회 멤버였고, 같은 학회였으며, 과방에 쳐박혀서 밤까지 시간을 죽이고는 했다. 기숙사에 사는 P가 더해져 작은 소모임을 만들고 나서는 정말 열심히 놀았던 걸로 기억한다. 과방에서 소주를 한병씩 들고 빨대를 꽂아서 쪽쪽거리며 수다를 떨고,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 기어들어가 공부를-나는 맛의달인을 보았다.-하였고 MT에는 빠지지않고 참여했다. 이 녀석은 고기를 맛있게 굽는 재능이 있었기에 학교 앞에 있는 싸구려 고기집에 가면 꼭 내 테이블에 앉혀놓고 고기를 구워달라 부탁했으며 심심할 땐 널찍한 자연대 앞 벤치에서 맥주를 한캔씩 마시기도 했다. 때에 따라서 멤버는 4명이었고, 5명일 때도 있었고, 그보다 많을 때도, 적을 때도 있었지만, K가 빠졌던 때는 거의 없었다. 언젠가부터 성별이 바뀌어 '오라버니와 여동생'(내가 여동생이다.)사이가 되었고, 난 주말에도 학교에 '놀러'갔으며, 내 무릎에 앉겠다는 녀석과 서로 자기가 무릎에 앉겠다고 티격거리기도 했고(주변에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과방에서 놀다가 피곤하면 무릎베개로 쓰기도, 베개가 되어주기도 했다. '척 하면 척'까지는 아니었어도 슬쩍 보고는 무슨 일이 있는 지 없는 지 정도는 알 수 있었고, 서로 엉엉 울 때 다독여 주기도 했다. 이런 오만가지 일이 있었음에도 여자로 안 보이는 걸 보면, 이 녀석은 진짜 친구다.

3. 그리고 시간을 흘렀다. 하루는 길지만 일주일은 짧았던 이상한 1년이 지나갔고, 이 녀석과 내가 마신 술로만 몇 짝은 채웠을 것이고, 그동안 이녀석은 남자가 두 번 바뀌었고, 난 한 명을 그대로 이어나갔고, 나이도 한 살을 더 먹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일거다. 마지막으로 밥 한 번 사준다는 사랑스러운 동기들의 제안으로 맛있게 밥을 먹고 다음 술약속장소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의정부에 있는 그 곳으로 가기 전 날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여동생 한 번 안아보자며 K는 포옹을 제안했다. 뭐 처음도 아니었고 어쩐지 마지막일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P로부터 가식적이라느니 정이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가득 들어왔던 나지만 그동안 쌓아 둔 정이 있었나보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의정부로 향했고, 다시 5주간의 교육을 위해 학교로 옮겨갔고, 그리고 이제 이곳으로 왔다. 남은 생활이 까마득한 건 처음 왔을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지만, 그나마 이제는 적응이 좀 됐나보다. '누가누가 더 글씨 못쓰나'로 나와 쌍벽을 이루는 K의 편지에는 잘 지내냐는 첫인사가 사라진 지 오래고, 무조건 자신이 보낸 편지의 장수보다 2배 많은 장수의 답장을 원하고 있고, 가끔 전화걸었을 때 안받아놓고는 왜 전화 한번밖에 안했냐며 한국사람은 삼세번인거 모르냐고 따지기도 한다. 같이 술먹고 깽판 칠 사람 없다며 보고싶다고 보고싶다고 노래를 하다가 나보고도 보고싶다고 말하라고 명령을 하질 않나, 지나가다가 들렀다며 16시 30분에 면회를 온 적도 있다. K가 가끔 보내는 진지한 내용의 편지에는 짤막하게 답변해준다. 짧지만 대충 생각하고 쓴 게 아니라는 걸 알아줄 거라는 믿음에서다. 그렇다, 난 언젠가부터 이 녀석을 상당히 믿고있었다. 가식적이고 정없는 송기화로써는 장족의 발전이다.

4. 지난 주말 네捐恙쩔【 K를 만났다. K는 뭐 필요한 것 없냐며 물어본다. 마침 오늘 쇼핑을 나가는 데 혹시 돌다가 있으면 사다가 보내준다는 말이다. K는 가끔, 상당히 자주 이런 말을 한다. 물론 난 늘 갖고싶은 것이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갖고싶은 건 잊지만 비밀이라고 대답한다. K녀석은 툴툴거린다. 내가 갖고싶은 걸 말하면 그것이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14권 일본어판'따위가 아닌 이상 찾아서라도 사다가 줄 것이다. 알고있다. 하지만 난 갖고싶은 물품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갖고싶어하는 물품은 늘 실용성이 의심되는 물건들이고, 게다가 찾기도 번거롭다. 괜히 시험해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쇼핑하다가 혹시나 나에게 어울린다 싶은 물건이 있으면 알아서 사다가 보내줄 것이고, 없으면 그냥 편지만 보내줄 것이다. 이 녀석은 나를 지탱해주는 기둥 중에 하나다. 이 기둥이 튼튼하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이 얼마나 튼튼한 지 시험해 볼 필요는 없다. 땅이 꺼질까봐,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고 사는 건 너무 불안하지않은가.


덧. 주말동안 재미있는 글이 많이 올라왔네요. 전 내일부터 수요일까지 너무나도 바쁘답니다. 야영나가거든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53:50 

 

일병 신민재 
  저에게도 그런 친구(J)가 한명 있습니다.(웃음) 

중학교때부터 알았지만 친해진건 재수때였고, 

이제는 제 삶에 없어서는 않될 그런 친구가 되었습니다. 

2,3년 만에 봐도 하루밖에 못본것 같은 그런 자연스러움을, 

어떤 상황에서는 같은 단어를 같은 타이밍에 내지를 그런 친구(J)인거 같습니다. 

k 라는 친구를 둔 기화님이 부럽기도 하고 

J 라는 친구를 둔 제가 자랑스럽기도 합니다.(웃음) 2008-11-23
09:51:23
  

 

병장 이동석 
  역시 기화님 뭔가 든든하다 싶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었군요. 
그리고 학과 문화가 뭐랄까 상당히 클래식-하군요. 부럽습니다. 

기화님 글을 읽으면 항상 웃음이 씨익- 기분도 활짝- 
이건 뭔가 사랑에 빠지는건가. 크크크크크- 2008-11-24
08:10:07
 

 

병장 김우열 
  와우 좋은 친구로군요. 

저도 그런 이성 친구가 한명쯤 있었으면 좋겠어요- 2008-11-24
10: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