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다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섬세함 만큼이나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의 장남이었던 프루스트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탓에 어머니의 과도한 애정을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랐습니다. 19세기 부르주아들 특유의 억압적인 성 생활의 영향으로 양성애자가 되었던 그는 평생 제대로 된 연애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을 향한 그의 로맨스는 실패로 끝나기 일 수였고, 이 사랑이 여성들을 향했을 때도 그다지 좋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평판에 대해 큰 신경을 쓰던 프루스트였지만, 일상적인 친교 관계 역시 썩 좋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는 평생 동안 천식, 편식, 소화불량, 변비, 피부민감증 등 각종 잔병치레에 시달리면서 매일 매일을 바깥 바람을 쐬지 않고 조용한 방의 침대 속에 웅크려있기를 택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그에게 공포로 작용했고, 프루스트는 청년기 이후 계속해서 마치 자신이 곧 죽을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러한 걱정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오죽했으면 그와 십 수 년 동안이나 좋은 관계를 맺어왔던 그의 친구도 이를 견디지 못해 쉰 살의 프루스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비록 50살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처음에 만났던 상태 그대로입니다. 바로 응석받이 아이지요. 오, 당신이 응석받이이기는커녕 언제나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병약한 아이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 탓보다는 당신 탓이지요."

1차 대전 이후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어지러웠던 유럽 사회의 분위기를 상기시키면서, 그 친구는 프루스트에게 이러한 말까지 남겼습니다. "당신의 건강이 여전히 극히 불안정할지라도 유럽의 건강보다는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친우의 이러한 말에 충격을 받았을까요? 마치 자신이 정말로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이  프루스트는 바로 다음 해, 우습지도 않게 감기에 대한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다가 결국 폐렴으로 죽게 됩니다. 평생 커피와 크로와상, 과일 따위로 연명하고 파리의 자기 집 밖으로는 잘 나가지도 않던 프루스트는 14년 동안 쓴 자전적 소설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연작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약하고 신경질적인 삶을 살면서 평생을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며 살았던 이 소설가- 그리고 더 슬프게도 소설가로서의 그의 유명세는 많은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수 비평가들의 높은 평가와 이에 따른 명성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과연 프랑스 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독자가 프루스트의 일곱 권짜리 책을 다 읽어냈겠습니까? -의 인생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평가는 세간의 평처럼 박하지는 않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개인적 불행을 겪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간 프루스트를 스스로의 '인생을 바꿀 수 있도록'(이 책의 원제는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입니다.) 만들어준 저자로 치켜세우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증언을 많이 남긴 사람들은 만족하거나 열정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식은 대체로 지독히도 비참한 사람들만의 특권적 영역이자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축복이었던 것 같다." 
  
프루스트 역시 잔병치레에 시달렸던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변명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병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주목하고 배우게 되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을 과정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매일 밤 침대 위에 눕자마자 즉시 잠이 들어서 깨어 일어나는 순간까지 죽은 듯이 자는 사람은, 반드시 위대한 발견일 것까지는 없지만, 분명히 수면에 관한 작은 관찰조차도 꿈꿔보자 못할 것이다. 약간의 불면증은 우리가 잠에 대해 감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던진다는 점에서 가치가 없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우한 인생을 살아간 또 다른 천재였던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평생을 극심한 편두통과 발작증상으로 고통 받아온 니체는 마치 프루스트의 어머니처럼 과도한 애정과 보살핌 때문에 때로는 그를 괴롭히기도 했던 여동생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니체는 한 때 자신의 정신적인 스승이자 학문의 원천이기도 했던 음악가 바그너와 결별하고, 또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꽃같은 사랑을 느꼈던 여성인 루 살로메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애정과 증오, 인간 불신을 느끼며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죠.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개인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사태를 있는 그대로 시인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살아가야만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인간은 초월적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인생의 괴로움과 장애물들을 '극복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니체의 철학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고통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없는 고백으로 보입니다. 
    
가끔 책을 읽는 사람은 결국 마음이 병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책 한 권을 읽든 말든, 세상은 결국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지식은 병통이 되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건강히 살아갈 수 있을 나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겨줄 뿐입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아갈 수록 나는 다른 이들에게 까다롭고 예민한, 쓸데없는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한 만큼 지행일치를 실천하고, 부끄럽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도 설파할 수 있을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점점 스스로에게 배신당해갈 뿐입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 고민과 고독을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지 막막해지고, 이러한 고민마저도 자기합리화를 위한 다 거짓된 것이며, 배고프지 않은 자의 사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답답해질 때, 저는 고독과 괴로움이 다른 이들에게 단순히 과도한 예민함으로 비추어지던 삶을 살았던 그들을 떠올립니다.  
  
이는 프루스트와 니체의 삶에 감명을 받고 그들을 본받자는 단순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들의 개인사에서 나타나는 결점을 우리가 일상의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성취한 예술과 사상은 단순히 그들을 닮고자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김예찬 이지 프루스트가 아니고 니체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프루스트와 니체에 의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과 고통, 괴로움을 자신의 방법에 의하여 극복하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도 계속해서 사유를 그치지 않았던 자세겠지요. 그리고 나의 삶을 나 스스로 '해석'할 수 있을 때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고난과 병통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길을 나아갈 수 있을 때가 아닐까요? 범속한 일상에 스스로가 지쳐가고 있음을 느낄 때, 그때야말로 자신의 삶이 가진 형태나 무게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일상을 고민해 나가야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무런 보잘 것 없는 비루한 일상, 그러나 오히려 그런 초라함과 고통을 통해 끊임없이 사유해나가면서 스스로를 바꿔나간다는 것. 이 말이 단순한 잠언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저를 자극하는 말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