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세계에서 소통하기 (상병 한상원/050824) 
 
 
 
 
※ 칼럼은 필진들이 책을 읽는 활동 이외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여러분들에게 선보이는 란입니다.

첫 칼럼이니만큼 많은 관심을 가져줍시다.

참고로 배너의 필진 이름을 누르면 해당 인물의 얼개를 볼 수 있습니다.

                                        -촌장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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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올렸던 글인데, 요즘 왕년의 책가지가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바.

기념으로 올려봅니다.흐흐.

언제가 될지 몰라도 곧 올리게 될 다음글을 위한 포석이라 해두죠.

치열하게 이야기 해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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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첫 번째 이야기, <인터넷 세계에서 소통하기>


소통을 정의해보자

사람들은 지난 세월동안 사회 속에서 늘 무언가를 말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해온 역사는 곧 사람들의 실제로 발화의 형식을 빌려 소리로 ‘말’했을 수도 있으며, 문자로 남겨놓았거나 그림이나 영상 등으로 그려놓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표현’의 역사다. 그렇다. 사람들은 늘 표현한다. 원시시대의 동굴 벽화도 기복이나 원시 신앙, 단순하게는 자연현상에 대한 신비감이나 두려움의 표현이다. 표현하지 않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말하고 쓰고, 영상으로 나타내고 몸짓으로 만들어내고, 노래하고, 그리고, 부수고, 파괴하고 등등.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인간‘이라는 학명을 만들어 붙여주고 싶을 정도다. 때때로 표현은 곧 삶이다. 

한편, 사회적 관계 속에 얽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정체성이나 사상, 신념, 그 외의 각종 정서적 교감에 이르기까지 각종 신호들을 상호적으로 주고 받는다. 우리는 이 행위를 소통이라 부른다. 이는 단순 커뮤니케이션과 다소 차이를 두는 개념이다.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은 둘 다 ‘상호적’이라는 요소를 공유하고 있지만, 소통의 경우 커뮤니케이션과는 달리 정보를 단순 주고 받는 과정이 아니라, 그 사이에 적극적인 해석과 수용, 그리고 발전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커뮤니케이션이 정보를 주고 받는 행위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면, 소통은 커뮤니케이션 중에서도 소통하는 주체들의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의 가능성을 늘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소통이 얕아지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소통 하며 살아가는지 돌이켜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사는가. 그리고 사람들 간의 교류에서 공적인 업무에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 소통하는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 자기 옆자리에서 일하는 동료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단순히 매일 만나 어제 보았던 TV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나 가벼운 농담 등을 주고 받으며 우리는 친밀한 관계다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싸이월드의 친구들 미니홈피를 파도타면서 방명록을 남기고, 디카로 찍은 사진을 올려 생활을 공개하고 다이어리를 적으면서 소통하고 있음을 애써 확인한다. 

물론 늘 진지한 이야기만 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 진지함의 무게에 일상이 우울해질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대화나 가벼운 농담, 유쾌한 유희나 말장난은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돌아다니는 정체불명의 묵직함에 대해서 꺼내보이는 일이란 쉽지가 않다. 자신이 동료라고 부르는 사람의 삶의 흐름이나 맥락을 전혀 모른 채, 그 사람이 단지 나와의 ‘친밀함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닌가.

사는게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사춘기 소년만의 방황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솔직해지는데 인색하다. 술 한잔에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서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것은 때론 낯 뜨겁게 생각된다. 자신의 진심 어린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일까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어색해지거나 불편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한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삶이 너무도 바쁘다. 나의 존재나 왜 내 삶이 각박할 수 밖에 없는가를 생각할 여지조차 없다. 세상은 나를 밀어붙인다. 사회에 즐비한 세상을 잘 살아내는 메뉴얼에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나 주변의 사람들과의 소통이라는 항목은 없다. 단지 높은 학점과 자격증, 멋들어진 참말 같은 거짓말인 자기 소개서, 능통한 영어, 높은 토익점수 등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가능한 수단은 많아졌으나 그에 반비례한 듯 소통의 정도는 줄어들고, 깊이는 얕아졌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자신을 보다 더 잘 알고 싶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말하고 싶은 욕구는 그대로지만 정작 기회가 없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늘 외롭고 고독하다. 많은 유희가 있고 향락이 거기에 있지만 삶은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지루하고 따분하다. 늘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가슴속에는 무언가 말하고픈 응어리가 가득하다. 늘 말은 많이 하고 많이 웃고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몸을 뉘이면 공허한 천장만이 멍하니 보인다. 무언가 여전히 답답하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게 우리가 살아내는 오늘의 현실이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가능성-인터넷

오늘의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 인터넷이다. 하긴 지금에 새롭게 떠오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스운 일이 되어버렸다. 모피어스가 본 매트릭스처럼 인터넷은 모든 곳에 있다. 내가 새삼스럽게 인터넷을 말하고자 함은 인터넷이 단순한 편의나 기술이 아닌, 문화이자 또 다른 삶을 살아내는 세계, 이제 우리의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를 대변하는 곳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일상성을 논함에 있어 인터넷을 제외시킨다면 우리의 삶 전부를 반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넷은 가상공간을 설정하고 그곳에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모음으로써 그들 간의 물리적 공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편지나 전신, 전화가 송신자와 수신자가 설정되어 수신자에게 일련의 정보가 향해가는 흐름이었다면, 인터넷은 송신자나 수신자의 구분 없이 교류에 응하는 사람이 가상공간이라는 정해진 장소로 모이게 한다. 그리고 그 가상공간의 상존은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사람간의 물리적 시간의 차이까지 좁혀준다. 이 장점은 특히 오늘날 각박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든 여유로운 시간에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야말로 무한대로 제공해주고 있다. 바빠서 이야기 못하고, 만나지 못한다는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메신저, 미니홈피, 블로그, 이메일, 쪽지, 화상채팅 등등 무수한 교류수단이 우리에게 새로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누군가와 절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각종 까페나 커뮤니티를 통해 동일한 관심사 아래 서로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세상을 향해 자신을 표현하고, 선호를 분명히 하며, 여느때보다 자유롭게 필요로 하는 소통의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사연을 라디오 프로그램에 적어보내고 자신의 견해를 굳이 신문사에 보내지 않아도 언제든 발언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 이제 모두가 정보의 생산자이며, 표현의 주체이다. 인터넷은 모든 곳에 있고, 그와 함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최신의 정보를 교환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여 상호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소통의 가능성 또한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오히려 더 얕아진

1. 문자언어의 도구화

인터넷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표현의 욕구는 충족의 단계를 지나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교류의 기회가 증대한다고 하는 것이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터넷은 소통이 이루어지기에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인터넷에서의 교류방식은 대개 텍스트와 동영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어도 소통방식을 선택함에 있어 자신의 생각을 대개 문자 언어를 사용해 표현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경우, 한 사회 내에서의 언어는 공용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사람 간에 나타나는 차이는 좁혀지기 어렵다. 따라서 수많은 오해와 오독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송곳이라는 도구가 있고 도구의 기능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지만, 그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은 정작 사용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문자 언어는 본래의 기능을 해체 당했다. 각종 통신어와 이모티콘이 편의의 이름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고 사용자의 쓰임대로 자유자재로 기능한다. 특정 기호나 어투에 공감이 이루어진 집단에서는 그것이 즐거움이지만 새로이 그 집단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유로운 기호들은 배타성의 신호로 다가간다.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설정된 한줄 답변은 답을 준비하는 사람의 의도를 담기에는 협소해서 의미는 반강제적으로 압축된다. 게다가 원문과 댓글로 오가는 대화는 누구나 자신의 언어가 어떤 쓰임으로 쓰이는지 부연하거나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는 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렵고, 동시에 인터넷에 접속하는 상황이 아닌 경우 글과 글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차이는 의견이나 논의의 일관성을 해친다.  

표현의 일방성도 문제다. 표현 방식이 늘어나고 다양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삶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폭발적으로 표현한다. 최근의 개똥녀 사건이라든지, 국가대표 감독 교체에 관한 문제, 촛불 시위 등등에 관해 각종 게시판은 그야말로 뜨겁게 달구어진다. 하지만 그뿐이다. 내뱉어냄이 사그라지면 그걸로 끝이다. 의견의 발전이나 종합, 토론의 연장은 사실 기대하기 어렵다. 언제든 표현할 수 있으니, 제한이 없는 표현의 과잉은 타인의 또 다른 표현을 수용하는 과정을 과감히 괄호로 묶어 생략해버린다. 의견의 오고 감의 완곡한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전진만이 난무한다. 인터넷에서의 표현은 무료 시식코너가 준비되어 있으니 굳이 배가 고프지 않거나 구미가 당기지 않더라도 한번 먹어보는 식이다.   

2. 환경적인 영향

모니터를 통한 텍스트의 수용은 오독을 낳기 일쑤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출력해서 다시 읽는 것은 어쩌면 그 글에 대한 집중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실시간으로 창을 통해 텍스트를 수용하는 일이 어려움을 반증하는 예가 된다. 게다가 창 위에 번쩍 거리는 배너들과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티저 광고들은 도무지 내용에 집중할 수 없게 한다. 그 뿐 아니다. 인터넷 상의 텍스트를 읽어 내리는 데 있어 사용자의 습관은 어느새 텍스트조차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향해가고 있다. 인터넷이 사용자에게 강요하는 속도에 대한 강박과 무수한 정보에 우리의 머리는 따라가기 버겁다. 여유를 갖고 책장을 넘기는 오프라인의 종이책과는 다르다. 모니터 위에 점멸하는 무수한 화소 앞에서 우리의 손가락은 마우스 휠을 사정없이 돌려버린다. 그리고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f어 내린다. 마우스 휠의 미끄러짐 속에서 글쓴이의 의도나 감정은 수용자에게 닿지 않는다. 소통은 그런 식으로 곧잘 실패한다. 

3. 가상의 인간, 실제의 인간

게다가 소통의 측면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신호로 다가가는 과정은 오프라인에서의 만남보다 가볍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의 눈빛이나 몸짓, 분위기 등으로 그 사람의 진심이나 의중을 읽는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우리는 익명의 아이디를 사용하는 아바타가 전하는 텍스트로 대화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텍스트는 눈앞의 모니터 앞에서 쉬지 않고 점멸하다, 마우스 휠 한 번에 저 언저리로 사라지는 단명의 숙명을 지닌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우리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이라는 도구는 시공을 뛰어넘는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했지만, 두 사람의 진실한 소통은 만남에 수반되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눈앞에 실제의 인간이 아니라 가상의 누군가가 익명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동등한 대화에 필수적으로 전제되는 상호간의 예의와 배려, 존중은 부서지기 쉽다. 익명성아래에 자행되는 각종 사이버 폭력들에 대해서는 다들 한번 쯤은 경험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화려한 옷에 방긋방긋 웃고 있는 아바타는 그 겉모습과는 달리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적 지위, 성별, 학력, 재산, 연령 등에 기인하는 온갖 선입견과 편견들을 버릴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날리 없는, 혹은 만날 가능성이 거의 드문 나와는 먼 존재로 격하된다. 서로의 존엄과 인격이 보장되지 않는 한 우리가 바라는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은 희망

인터넷 세계의 발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희망은 소통의 가능성이 확연하게 증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인터넷이 등장한 후, 십여년간 인터넷 세상은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매번 또 다른 문화를 창조해낸다. 인터넷을 가능케 한 기술에서 각종 문화들이 빚어지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능성에 근거한다. 다만, 그 문화를 갈고 닦고, 계속 발전하는 기술에 걸맞게 내용을 채워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인터넷 세계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소통을 수월케하는 요소들을 생각해본다. 시대가 급변하고 빠르게 흘러갈 수록 우리는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상들이나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하면서 과거의 지혜의 보고인 고전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증가한 것처럼 새롭게 등장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도 그와 같이 예전부터 이어져오던 소통의 모습들을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말과 온고지신이라는 경구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존중

소통은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입장으로 여기며 자신과 같이 그도 소중히 여기는 존중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시작이다. 생각이 다르고, 표현이 생소하여 받아들이는 내게 다가오는 낯설음이 두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소통은 다름을 받아들여 새로운 발전을 잉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출산의 고통처럼 우리가 겪는 소통의 과정은 힘겹고 길고 불편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오랜 기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의 삶 속에 만들어져온 맥락을 이해하는 일이란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산고의 고통을 거쳐 소중한 생명이 태어나듯 소통의 과정을 거친 후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안아갈 수 있는 건강한 삶과 관계 맺음을 이루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삶은 불편할 수도 있는 길고 지리한 과정을 생략하도록 이끄어간다. 만남의 지속이 보장되지 않기에 소통은 익명이고 일회적인 우연한 만남으로 퇴색된다. 사실, 인터넷 세계에서의 꾸준한 만남이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만남의 소중한 기회를 잡았다는 것을 깨닫고 언제 어디서라도 상대를 존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했다. 셋이 가는 길에 그 중 나의 스승이 있기 마련인데, 무수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인터넷에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던져줄 잠재적인 스승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교육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교육에 관한 우리의 계획이다. 최근의 취업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자. 과거의 서류와 입사 시험을 가지고 치르던 전투는 이제 구시대의 것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시대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소통하는 능력을 테스트한다. 면접은 물론이고 특정 과제를 수행하는 법이라든지, 인성에 대해 고려하는 점이라든지 이 시대의 기업들은 발빠르게 이 시대의 사람들이 결핍하고 있는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리더쉽이라고 부르는 것도 소통하는 능력의 일환이다. 상대방의 견해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에 맞추어 수렴, 발전시키는 리더쉽은 서로 상호작용하여 발전을 꾀하는 소통에 다름 아니다. 비단 취업과 관련되어서가 아니라 소통하는 능력에 대한 교육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영리하다.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고 분석하고 있으며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전문가 못지 않은 지식과 식견을 자랑한다. 조기교육은 많은 아이들을 만능으로 만든다. 하지만 소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 전 프랑스의 대입시험 문제를 본적이 있다. 그 시험문제는 이공계든 인문계든 모두 학생의 세계관과 지식, 가치를 함께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을 집어내고 있다. 우리의 교육에도 이러한 것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지식 뿐 아니라 삶의 지혜와 생각하는 법, 그리고 친구들,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모습은 내신이니 수능이니 학교는 선생님과 학생이 대치하는 입시의 전장과 같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나름대로 성장과정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구성해나간다. 하지만 그 구성과정에서 건강한 소통을 이루어내며 개입하는 존재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청소년기에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다보니 타인의 세계를 함께 바라보기 힘들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존중하고 존중받는 법, 소통하는 방식과 사람과 사람이 사람사이에서 어우러지는 방식, 사람이 살면서 체득되는 경우도 있지만 성장기의 좋은 만남과 좋은 가르침이 우리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보다 나은 관계와 사회를 만들어가는 힘이 된다.

마치며

소통의 가능성의 문은 이미 열어 젖혀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문으로 다다르는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이다. 여전히 길은 거칠기 그지없고 가능성의 문을 지나는 것만으로 소통이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은 사람과 사람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고 홀로 고독하지 않은 세계의 시작점이다. 소통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으로 보다 건강한 가운데 활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단순한 기능에 근거해 바라보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소통에서 비롯된다. 그렇다. 소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일병 박민수 (2005-08-25 12:40:13)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순진무구한 관심과 집념에 의해 더 많은 소통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위에서 상원님이 말한 가질 수 있는 많은 기회에서 지키고 있어야 할 존중. 그것을 잊지 않고 다가선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기분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여하튼 인터넷은 여러모로 정말 감사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호호.  

상병 김강록 (2005-08-27 09:18:45)  
서로 다른 랑그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만인 대 만인의 소통'은 마치 인도와 아시아의 부딛침으로 히말라야가 솟아나는 듯한 상승 작용을 불러올 수 있을 겝니다. 하지만, 본문에도 나온 '개똥녀' 사건이라든지, 아이돌그룹 출신의 모 가수에 대한 마녀사냥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풍경은 사람들의 일이라기보단 마치 베르세르크 류의 만화에서 나오는 아프리카 메뚜기떼를 습격과 같은 일이라고 말하는 게 차라리 나을 듯 합니다. 그곳엔 다양성이 아니라 그저 거대한, '통계적인 대중'만이 존재합니다. 

겸손과 상호간의 존중만큼이나, 온데간데없는 개개인의 자의식을 되찾을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병장 주재형 (2006-01-03 10:48:31)  
저는 인터넷은 일종의 가면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면놀이가 소통의 대안은 될 수 있어도 해결책은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