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대하여 - 일백푸로 군생활에서 나온 엑기스로 쓴 인연론
누구나 훈련용수첩 맨 뒷장에 빼곡히 적힌 훈련소 동기들의 연락처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친구 전화번호를 찾다 우연히 펼쳤든, 적어놓은 메모를 뒤적이다 보았든, 훈련소 동기들의 제각각인 글씨로 쓰여진 그 마지막 유물을 마주대하면 추억에 젖는 것이 당연한 듯하다. 조건반사와도 같은 이 반응이 무덤덤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5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동거동락해온, 군대에 입대하여 훈련의 첫 시작을 같이하고 서로 뿔뿔이 흩어져 나와 같은 날에 사회의 햇빛을 받으며 제대할 그 얼굴들을 떠올리면 비록 연락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아련한 감상에 빠질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모나미 볼펜과 함께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훈련병수첩을 꺼낼 때마다 모든 훈련을 마친 '말년 훈련병'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추억해보곤 한다. 그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을 회고하며 사회에 대한 꿈에 부풀어있을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떠오르는 건 훈련소 조교, 훈육분대장들이다. 나는 훈련소에서 3명의 훈육분대장과 훈련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아직도 나의 기억에 가장 강하게 박힌 것은 훈련소 마지막날 쥐꼬리만한 물호봉일병 봉급을 쪼개 과자와 음료수를 사주며 선한 웃음을 짓던 우리 분대 분대장도 아니고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며 내 잘못을 눈물 쏙 빼놓도록 지적하던 나이 든 분대장도 아닌, 훈련기간 중간에 다른 분대에서 건너온 닳고닳은 상병의 훈육분대장이 남겼던 말이다.
성격은 매우 개(같은)성(격)적이나 훈련시범에서는 타 분대장을 압도하며 몸도 좋고 얼굴도 잘 생겼던 그 4二코 분대장은 훈련병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좋았다. 기분이 좋을 때마다 던지는 유머나 재미있는 군생활 에피소드 같은 것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가 웃는 얼굴을 할 때는 다른 사람도 박장대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훈련소 생활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훈육분대장들과 어느 정도 농담따먹기가 가능해졌을 즈음 동기들은 그의 미니홈피 주소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어쩌면 흰머리가 생길 때까지, 적어도 군생활이 끝날 때까지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웃으면서, 자신이 처음 훈육분대장을 맡았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의 내 동기들보다 훨씬 친하게 지내며 6주간을 동네 형-친구처럼 지냈던 그 훈련병들은 훈련소 마지막날 모두 모여서 그를 붙잡고 밤새 울었다고 했다. 그도 같이 울면서 우리 꼭 전역하고도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었다고 했다. 각각의 고향에서 모여든, 자기 또래의, 어쩌면 밖에서 만났다면 절친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 훈련병들, 논산에서 만난 그 순박한 사람들과 한달 보름동안 동거동락하며 나누었던 우정에 사나이라면 가슴이 뜨거워져야 마땅할 것만 같았다. 미니홈피 주소를 알려주고서 100일 휴가가 되면 꼭 일촌신청을 하겠다고 했던 그 열댓명의 훈련병들은, 그러나 석달이 지났지만 아무도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의 씁쓸한 웃음은 군생활에 대한 아무런 희망과 기대도 없던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흔히들 훈련소에서는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난다고 한다. 나이트 삐끼에서부터 조폭까지, 생전 만날 기회가 흔치 않은 듣도 보도 못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군대에 오고 훈련소 생활을 하고 같이 밥먹고 똥 싸고 전우조 단위로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그들에게서 진심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이 엄청난 인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연락처를 주고받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말년 훈련병이 된 같은 전우조 친구들과 별별 장난을 치면서 10년지기 친구 부럽잖은 우애를 과시하던 그 친구들은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훈육분대장과 같은 동네에 사는 데다가 나이도 동갑이라 훈육분대장의 놀림감이 되었던 서글서글한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 나는 미니홈피도 없고, 전화해서 "훈련소때 같이 있었잖아, 나 기억나?"라고 물어볼 정도로 친한 동기도 없었다.
훈련소를 뒤로 하고 나는 후반기교육을 받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나와 같은 내무실을 썼던 훈련소 동기가 둘에 훈련소에서 얼굴 봤던 사람이 둘이었다. 그중 나와 같은 내무실을 쓰던 뿔테안경의 친구는 내 옆자리인데다 나랑 통하는 부분도 있어서 후반기교육이 끝나고 내무실로 들어오면 꽤나 원초적으로 신나게 놀아제끼기도 했었다. 아직도 그와 내가 TV를 보며 까불던 추억들을 떠올리면 미소를 짓게 된다.
후반기교육을 받았던 곳의 인트라넷 홈페이지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후반기교육 동기들을 몇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와 그렇게나 죽이 잘 맞던 그 친구는 통 연락이 되질 않는다. 그에게 받은 연락처라고는 그의 옛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뿐인데, 이메일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역하고 전화 한 번 해보는게 낫지 싶어서 아직 이메일을 보내지는 않았다. 사실 이메일 주소란 것은, 그리고 이메일이라는 것은 미니홈피와는 달리 자주 바꾸기도 하는, 너무나 쉽게 생각되는 가벼운 것 아니던가.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일이 있어 행정보급관님과 함께 후반기교육을 받던 장소를 가게 되었다. 교육을 받던 건물 안을 들어서면 늘 전투화와 바닥이 뽀드득 소리를 내며 기이한 마찰음을 냈던 것도 똑같고,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을 뿐 여전히 나에게 인트라넷 프로그램을 가르치던 교관님의 염세적인 모습도 똑같았다. 물론 그가 나를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시간 수업받은 수많은 교육생 중의 하나인데다가 얼굴 본지 거의 2년 가까이 지나버린 나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기괴한 일일 게다. 하지만 내가 씩씩하게 각을 세우며 학과백을 메고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기간과 똑같이 교육을 받았던, 오히려 훈련소보다 훨씬 즐거웠던 '이등병의 천국'에 난 길을, 마지막 주에 공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던 그 길을 나는 추억에 잠긴 채 자동차를 타고 지나쳤다.
그리고 바로 그날 나는 '국군방송 위문열차'에서, 군생활 딱 1년 한 내 후임과 같은 내무실을 쓰며 같이 후반기 교육을 받은 '연예병사 지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 후임을 기억하는지 '낯이 익네요'라고 말하며 위문열차 도중 인터뷰를 해주었고, 내 후임은 예의 그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나처럼 '그곳'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연예병사 지성'을 새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위문열차가 끝나고 나서, 그의 입대 1주년을 축하하며 또한 나의 과거와 추억을 회상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물론 그가 나를 기억할 수야 없다. 그와 나눈 악수는, 그저 나의 추억과 악수하는 것이었다.
훈육분대장이 던진 충격때문인지 나는 군대의 인연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같은 내무실을 쓰는 전우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 별로 잘해주지 못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군대 인트라넷에서 만난 인연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더불어 그동안 밖에서조차 한 번도 참여한 적 없던 문집까지 내는 일까지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 훈육분대장의 말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군생활을 했을까. 이곳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군생활을 했을까.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인 것 같다. 인연이란 그 길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두께가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다만 인연이 닿았을 때 느꼈던 나의 감정들이 나를 바꾸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인연인 것이라고. 그 개성적인 훈육분대장과 옛 훈련병들도 비록 인연이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그들을 만난 6주간이 훌륭한 인연을 쌓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어지지 않았다고 아쉬워하고 그 인연을 가벼운 것이라고만 생각할텐가. 그건 바보같은 일이다.
내 훈련소 동기이자 후반기교육 동기인 그 친구와의 인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그와의 인연이 후반기교육을 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와의 인연은 내게 참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여전히 훈련소와 후반기교육을 떠올리면 그를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인연이란 모름지기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이야기가 그저 말년 병장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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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에 대한 잡상 - 유승준과, 원빈과, 국가유공자와, 이라크에서 돌아온 녀석의 귀환을 바라보며.]를 잇는 저의 잡담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앞으로 [잡담주의자]로 활동할 생각입니다. 핫핫.
* 병장 노지훈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6-11 11:15)
병장 박준응 (2006/06/09 11:11:08)
이런 잡담이라면, 대환영.
병장 김동석 (2006/06/09 11:11:28)
그런데, 이거 말머리를 일상이야기로 해야 할지 내글내생각으로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군요. 하지연님이 "나에게는 칼럼과 일상이야기와 내 글 내생각의 차이점이 없다. 어느 곳에다 데려다 놓더라도 똑 같은 글인데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네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그 말씀이 어렴풋이 이해가 가는 듯 싶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09 11:12:26)
<가지로>.
'인연이 닿았을때 느꼈던 나의 감정들이 나를 바꾸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인연인 것이라고.'
일기장에 적어놔야지. 동석씨. copyleft죠?(웃음)
병장 김동석 (2006/06/09 11:26:46)
물론 카피레프트입니다.(웃음) 저야 뭐 제 글 읽어주시면 좋죠.
병장 고계영 (2006/06/09 12:54:08)
정말 가슴이 훈훈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는 인연이 계속되면 운명이되고 필연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인연이다라고까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나의 사람'이나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잡답. 사랑합니다. 이런 넋두리 강력하게 원합니다.
<가.지.로.> - 매일 느끼는 것이지만 어색한 이 말.
병장 양영후 (2006/06/09 14:57:00)
역시 인간관계는 얄팍해져 가고 있다니까.. 하지만 인연의 깊이는 본인이 느끼는 것...
<가을 하늘> 추천~!
병장 이종환 (2006/06/09 15:13:43)
움..좋네요..예전생각나네요....
상병 윤성원 (2006/06/09 20:27:32)
<가지로.>
좋은 글 입니다. 인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네요...
제 훈련소 전우조였던 친구가 보고싶습니다.
병장 노지훈 (2006/06/11 11:17:52)
일상이야기긴 하지만 이런 좋은 글은 <가지로>~
상병 성기종 (2006/06/12 09:44:44)
야호.
부끄럽게.
병장 이은호 (2006/06/15 21:30:12)
아주 좋습니다.
병장 신수용 (2006/06/16 20:50:45)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