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진보의 장(발터벤야민)(4) 
 병장 이건룡 04-23 16:37 | HIT : 46 



 이것으로 지루했을 법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종합하려 했지만 재탕에 불과할 것 같아 조각조각으로 나누어진 채 내버려 둡니다(주울 사람은 줍겠지만 워낙 개인적인 시도로 끝나 버린 것 같습니다).

4. 반면 현재는 과거의 대상 중 어디서 그러한 대상의 전사와 후사가 나뉘어져 그러한 대상의 핵심을 둘러쌀지를 결심한다. 튀르고에게서 진보 개념은 아직 비판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역사의 퇴행적 운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튀르고는 독특하게도 진보는 무엇보다 수학영역에서 보장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튀르고의 말 속에는 침착함이 정치적 범주로 멋지게 표현되었다. "어떤 것들은 그것들이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기 전에 이미 몇 차례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너무 늦게 감지하게 된다. 정치는 소위 현재를 예측할 필요가 있다."대해서도 명료하게 윤곽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진보 개념은 특정한 역사적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척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전설적인 시작과 끝 사이의 긴장을 측정하게 된 순간부터 비판적 역사 이론과 상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진보라고 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 전체를 나타내는 표식이 되자마자 진보개념은 비판적 문제 설정보다는 무비판적 실패화한 이루어지게 된다. 구체적으로 역사를 고찰하는 경우 그것이 적어도 진보라고 하는 것-어떠한 것이라도 좋다-을 시야에 넣으려고 하는 만큼은 퇴보에 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윤곽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문화의 본능을 형성하는 쪽으로 나가는데, 이것은 관습이나 도덕의 요소를 계속 취해 그것들이 생기를 잃게 만들고, 자발성을 빼앗아 버린다. 문화개념과 고전관념론에서 말하는 자율적 영역사이에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본질적인 것은 미적ㆍ과학적ㆍ도덕적······심지어 종교적 성취가 저마다 갖고 있는 자율적 가치가 문화이념에 의해 지양 된다······" 진보는 시대의 경과의 연속성이 아니다. 그러한 연속성에 대한 간섭 속에 있다. 바로 여기서 진정 새로운 것이 여명의 차갑고 상쾌한 바람과 함께 비로소 감지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말을 통해. "인간의 심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의 하나는······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 까지 자아에 대한 욕구가 강한데 반해 어떠한 현재도 도대체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 질투심도 느끼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행복의 상념의 깊은 곳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행복의 상념 속에는 구원의 관념이 공명하고 있다. -바로 이점을 앞의 기묘한 사태는 가르쳐준다. 이러한 행복은 우리자신이 과거에 처해 있었던 암담함과 고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우리의 삶은 역사적 시간 전체를 응축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근육이다." 또다시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적 시간에 대한 진정한 개명은 철저하게 구원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 '구원'개념에 대해. 개념이라는 돛에 불어오는 절대적인 것의 바람(바람의 원리는 순환적이다). 돛의 각도는 상대적이다. 또한 구원에는 단단하게 겉으로는 거칠게 보일 정도로 움켜잡는 것이 필요하다.)

( 튀르고의) 침착함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사이의 관계를 확정할 것, 사실에 입각한 행동의 형식 중의 하나인 침착함 속에서는 항상 변증법적 과정이 들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점은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를 위기의 성좌로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성좌의 전개를 사유 속에 추적하면서 항상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비약을 준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과정 속의 모든 단계는(역사과정 자체의 모든 단계와 마찬가지로) 설령 선행하는 단계에 조건 지어진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취급을 요구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전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의 방법의 특징은 새로운 대상으로 인도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발전시키는데 있다.

 코르쉬는 헤겔의 정반합의 세단계의 움직임을 마르크스의 용어로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 한다. "헤겔의 '모순'은 사회 계급들 간의 투쟁으로 대체되며, 또 변증법적 '부정'은 프롤레타리아로, 변증접적 '종합'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대체한다."  

( 코르쉬가 보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한계. "물질적 생산방식이 변하면 물질적 토대와 정치적ㆍ법률적 상부구조 그리고 그와 정치, 혹은 경제와 이데올로기에 상응하는 사회적 의식 형태의 매개체계로 바뀐다. 따라서 경제와 정치, 혹은 경제와 이데올로기와 같은 관계들, 계급과 계급투쟁 같은 일반적 개념에 관한 유물론적 사회 이론의 일반적인 언명은 각각시대에 다른 각기 다른 의미를 갖게 되며 현재 부르주아 사회에 관해 마르크스가 표명한 언명의 형태들로서만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 오직 이 사회에서만 타당하다. 오직 경제와 정치 영역이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노동자가 국민의 공민으로서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는 현재의 부르주아 사회에서만 경제영역에서 노동자들이 지속적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학문적 증명은 이론적 발전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엥겔스가 획득한 성과의 중요한 점은 새로운 원칙을 이론화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실천적인 면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극히 난감한 일련의 문제들에 그러한 원칙을 구체적으로 적용한데 있다. 새로운 교조적 속박으로서 의도 된 것이 아니었다(그러한 표현을 단순히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유물론적인 탐구가 특정한 순서에 따라 반드시 충족시켜야하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교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연구와 행동의 안내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학과 경제학을 일반적인 사회철학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연이나 사회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유물론으로 보강하는 것이 오늘날 다시 한 번, 바로 지금 필요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정통파의 이러한 역사적 운명은 거의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수정주의자들의 공격을 물리치다가 결국 모든 중요한 점에서는 적의 관점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경향의 지도적 대변인인 플레니한프는 마르크스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철학'을 열심히 찾던 끝에 마침내 마르크스주의를 '일종의(포이에르바흐에 의해 신학적 첨가물이 제거된) 스피노자주의'로 제시하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물질에 관한 유물론자들의 허튼소리'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엄밀한 사회과학은 부르주아 사회의 실제의 역사적 특징을 추상하거나 아니면 이와 다른 몇 가지 특징을 자의적으로 선택해 고수라는 방식으로 일반개념을 만들 수 없다. 엄밀한 사회관학이 부르주아 사회라고 하는 특수한 사회형태에 포함되어 있는 일반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부르주아 사회와는 전혀 다른 체계에서 등장한 역사적 조건,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를 엄밀하게 설정하는 특정한 조건아래서 현재의 형태에 이르도록 실질적으로 변경시켜 이 사회를 출현시킨 역사적 조건들 모든 정밀하게 탐구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사회과학에서 유일하게 정밀한 법칙은 발전의 법칙 이외에는 없다. 





p.s "인식론, 진보"의 장은 '학문의 방법의 특징은 새로운 대상으로 인도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발전시키는데 있다.'에 모든 총력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더불어 이장에 안착되어 있는 이질적인 노력의 글을 인용한다(마취시킨 체 장기라도 때어 오듯이!).  

 지향해야하는 문체에 대해. "친숙한말을 통해 문체는 독자의 마음에 새겨지고 침투한다. 이 덕분에 위대한 사상은 관인을 찍은 금이나 마찬가지로 널리 통용되며, 진짜로 수용될 수 있다. 그것은 자기사색을 가장 느끼기 쉬운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에 대해 신뢰를 고무시켜 준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식으로 공통의 언어를 사용할 때에만 어떤 사람이 인생이나 사물을 이해하며, 사물에 정통해 있는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말은 문체를 솔직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한 말은 표현된 사고나 저작을 오랫동안 저작해 왔으며,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일종의 습관이 될 정도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며, 극히 통상적인 표현들로 만으로도 오랜 구상 끝에 이제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 된 관념을 표현하기에 충분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만큼 더 말하는 것에 믿음이 가게 된다. 왜냐하면 말과 관련해 친근감 있는 말보라 더 명확한 것은 없으며, 명확함이야말로 진리에 더 전형적인 특징, 종종 진리와 혼동될 정도로 전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라도 명료해야 한다는 충고처럼 교묘한 것은 없다. 평이하게 써야한다는 충고는 통상 원한의 그늘을 깊게 드리우고 있지만 이러한 식으로 표현하면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된다. 

 주베르는 한편으로는 친숙한 말을 사용하도록 권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현재의 우리풍습에 관한 사람밖에 표현하지 않는 특수한 언어는 피하라고 말하고 있다." / "모든 아름다운 표현은 한 가지 이상의 의미작용을 할 수 있다. 어떤 아름다운 의미를 가진 경우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