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진보의 장(발터벤야민)(3) 
 병장 이건룡 04-23 14:01 | HIT : 45 



"과거는 문학텍스트 속에 빛에 의해 감광건판 위에 새겨지는 상에 비유될 수 있는 자체의 이미지를 남겨놓는다. 미래만이 그러한 음화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효력을 가진 현상액을 갖고 있다." 마리보나 루소의 많은 글에는 최초의 독자들로서는 완전히 해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의미가 들어 있듯. 



3. 사고에는 사유의 운동뿐만 아니라 정지도 필요하다. 사고가 긴장들로 가득한 성좌에서 정지할 때 변증법적 이미지가 나타난다. 사고의 운동의 고비인 것이다. 그러한 고비는 결코 임의 적인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변증법적으로 대립하는 것들 간의 긴장이 가장 팽팽한 곳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유물론적 기술에서 구성되는 대상 그 자체가 변증접적 이미지가 된다. 그것은 '역사적' 대상과 동일하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의 연속성으로부터 그러한 대상을 떼어내는 것을 정당화 한다. 

 역사의 대상을 역사적 흐름의 연속성으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은 그것의 단자론적 구조가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떼어내진 대상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그리고 역사적 대결이라는 형태도 그렇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대결이 역사적 대상의 내부(말하자면 내장)을 구성하며 역사의 모든 힘과 관심사가 새롭게 되살아난 규모로 이러한 대결에 합류한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역사적 내부에 이 자체에 고유한 전사와 후사가 재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즉, 사선을 전사와 후사로 분 극하는 것은 현재이다. 

 분명 과거의 한 단편이 현재의 현실성과 관계되려면 양자 간 어떠한 연속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과거로 하여금 현재를 위기상태로 처하게 만든다. 과거에 현재가 충돌하면서 과거가 현재를 삼켜버린다. 

 유물론적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역사적 사례의 구성을 통해 통상 '재구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가능하면 최대한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이라는 재구성을 취하는 '재구성'은 단층 적이다. '구성'은 '파괴'를 견제한다. 유물론적 역사기술이 파괴적 또는 비판적 계기는 역사적 대상이 비로소 구성될 수 있도록 해주는 역사성을 분쇄하는데서 진가를 발휘한다. 이에 반해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대상을 무작위 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대상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서 때어낸다. 준비작업도 폭넓게 이루어지고, 사건은 훨씬 더  본질적이다. 

 유물론적 역사 기술의 파괴적 계기는 전승되는 것뿐만 아니라 전승의 계승자 까지 위협하는 위기의 성좌에 대한 반응으로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역사기술도 이러한 성좌에 맞선다. 거기에는 그것의 '현재성'이 있으며, 그러한 위기에 맞서 유물론적 역사 기술의 침착함을 증명하여만 한다. 이러한 역사 기술은 대상을 무작위 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대살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면 '서로의 영역을 벗어나는'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인용이라는 개념 속에는 그때그때의 역사적 대상을 그것의 관련성으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p.s 최근에 들고 올 책을 기다리며, 예비 전으로 라캉에 과한 슬로베니아 학파의 논문을 모아 논 <성 관계는 없다>를 읽고 있다. 라캉에 대해서 예전에 품지 못했던 좌절에 마주하느라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에테르들이 채워진 공간을 헤엄치고 있다. 최근에는 자만심이 들었는지 이를 감당하기 버겁다. 문제가 이것밖에 없다면 다행이지만 마치 심해 속으로 아득히 빨려 들어 갈 것 만 같아 더 이상 책이 두려워질 줄 모른다는 노파심이 든다. 단지 봄 탓으로만 돌렸는데. 

 뜨거운 열정을 기억하기 위해서, 또는 가냘픈 정신이 건강해지길 바라며 바흐친의 <말의 미학>에 수록된 <예술과 책임>을 옮겨 본다. 바흐친이 24살 때 적은 글이라 하니. 내 나이 24살이 부끄럽기만 하다. 세계적인 석학의 청춘과 비교는 버겁겠지만 이 짐은 앞으로도 감내해야하는 바이기도 하다. 

< 예술과 책임>


 나의 전체를 이루는 개개 요소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단지 외적인 연결로만 결합되어 있을 분 의미의 내적 통일로 충만 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 전체를 기계적이라 부른다. 그러한 전체의 부분들은 비록 나란히 놓여 있고, 또 서로 접촉하고 있다 하더라도 서로 이질적이다.   

 인간의 문화의 세 영역인 학문과 예술과 삶은 그것들을 자신의 통일성으로 결합하는 개성 속에서 통일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기계적이고 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은 실제로 대단히 자주 일어난다. 예술가와 인간은 순진하게 또 대개는 기계적으로 하나의 개성 속에서 결합한다. 인간은 '일상사의 소동'에서 마치 '영감과 감미로운 음향의 기도'의 다른 세계로 들어서듯 창조 행위 속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예술은 너무 뻔뻔스럽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너무나 감상적이고, 당연히 그러한 삶에 대해 눈 꼼만큼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래, 우리에게 예술이 무슨 소용이야 하고 삶은 말한다. '그건 예술이라는 것' 이고, 우리에게 있는 건 일상사의 산문이라고."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에는 삶속에 있지 않고, 삶속에 있을 때에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통일성도 없으며, 개성의 통일성 속에서 내적으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개성을 이루는 요소들의 내적 결합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책임의 통일이다. 내가 예술에서 체험화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죄괴도 떠맡아야 한다. 시인은 삶의 비속한 산문성이 자신의 시 탓임을 기억해야 하며, 생활인은 예술의 불모성이 엄격한 요구를 제시할 중 모르는 자신의 어설픔과 삶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진지하지 못함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격은 전적인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개성의 모든 요소들은 그저 삶의 시간적 연속 속에서 나란히 배열되는 것을 넘어서, 죄과와 책임의 통일성 속에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어야 한다.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사하고, 그자신의 삶에게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예술과 삶의 상호관계, 순수예술······ 등등에 대한 모든 오래된 문제들의 거짓이 아닌 진짜의미, 그 물음들의 진정한 파토스는, 그저 삶과 예술이 서로의 과제를 가볍게 해주고, 서로의 책임을 벗겨주려는데 있을 뿐이다. 삶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예술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