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인문학과 악의惡意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06 061804, 조회 161, 추천1 

  '외로움'이나 조금 더 고상하게 말해서, '고독'이 인문학에 입문하는 주요한 동기라는 어떤 생각들은   저에게 기묘한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도 실존적 고독함 때문에 수학 기초론을 연구하거나 분자 생물학에 입문하지 않습니다. 물론 혹자들은 인문학은 '언어'와 '소통'에 보다 내밀하게 잇닿아 있는 학문 혹은 담론의 영역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지적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과학문이든 언어를 이용한 소통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끔 인문학쟁이들이 절감하는 어떤 타고난 공허함과, 이에 대한 심적 공감들을 보면 저는 매우 당혹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인문학을, 혹은 철학이나 오늘날 이에 대한 등가가 되다시피 되어버린 문학이나 비평담론들을 어떤 헤겔 식 '인정투쟁'으로 번역해 버리려는 저 바깥의 '인문학의 적'들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스스로를 내 주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저 인문학의 적들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우선은 메이저 언론에 기고문을 올리는 사회심리학자, 그리고 우리들의 곤궁에 대해 항우울제와 간단한 심리극 처방을 권유하는 심리치료사, 중도 실용주의 정치가들, 에세이스트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요즘 이들에 대해 '인문학'을 옹호해야만 한다는 서투른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인문학'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우선 막막해지고 맙니다. 그것은 단순히 철학이라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문학이나, 예술전반까지 포함해야 할까요, 혹은 인간의 영혼의 본질 전반을 포괄해야하는 범주일까요. 그렇다면 기공수련이나 명상 역시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함정에 빠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콤플렉스'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인문학'이라는 어떤 규정을 버리고서 '학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해 묻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 운운할 때 우리는 다른 학문은 안녕한지에 대해 거의 묻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문제에 쫓기는 우울증자가 이웃이 안녕한지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 같은 이치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다시 말한 '외로움'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말하자면,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다른 분과학문의 틈바구니 속에서 소통이 막혀 있고, 단절되고, 외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수치스러운 조건을 재확인하게 된 계기는, 다시 제가 황석영 씨의 최근 문제된 발언이었습니다. 저는 저들이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있구나라는 점을 새삼 재확인하게 되었달까요. 그리고 저 자신도 저들의 모습과 오십보백보라는 사실이 괴롭게 느껴진 것입니다. 저들은 사람들에게 왜 자신의 진심을 모르냐고 항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비판한 대상들과 매우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저 자신도 외로웠기 때문에 철학 공부를 시작했고, 다른 분야에 이것 저것 손 대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기본적으로 이를 '억압'하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가 라캉 입문서를 읽기 시작할 때, 인간이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거세'당했다든지, 결핍감에 시달린 채 답이 없는 물음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는 식의 굴욕적인 구절들에 많은 위안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악의적인 동일시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수 많은 노상 전도사들이 우리는 지치고 고독한 존재이며, 따라서 '지져스'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논증하는 것과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인문학의 존재이유를 증명해야 한다면, 우리는 저런 노상전도와 인문학이(혹은 학문적-비평적 담론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인문학은 점점 더 심리치료사라든지, TV목회자라든지, 전문 상담가와 같이 말하고 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문학의 굴욕입니다.

  다시 콤플렉스의 문제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정신분석을 굳이 원용하고 싶지 않지만, 이러한 용어를 쓸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학적 논의를 외삽하지 않고 최대한 간명하게 말하자면, 콤플렉스란 우리 자신이 느끼는 심적 어려움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가령 높은 부대장이 순시를 와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나 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게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러나 동물적인 본능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콤플렉스는 말하자면 문화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정말로 허신탄회하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위선이나 비일관성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뭔가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어려움, 자신이 이러한 불편한 자리를 감수해야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곤궁을 억압해야만 합니다. 가령 당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실존적 부조리를 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기본적인 생산적인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콤플렉스의 기본 좌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뭔가 유의미하게 '소통'하고, 담론 속에서 어떤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 기본적으로 취해야만 하는 어떤 자세인 것입니다  상징적 우주 속에서 성별화된 주체로 입장하기 위해, 우리는 모종의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이러한 대가는 자신에 대한 어떤 '압력'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문명 내지는 학문이라는 것조차도, 그 내부에 이러한 '부대장'을 혹은 정신분석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러한 '초자아'(억압기제)를 내면화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화 가능성이야말로 콤플렉스입니다. 

  문제는 인문학이란 담론적 영역이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사회 속에서 점점 더 이러한 '콤플렉스'의 답 없는 탈출구로서 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금 전에 황석영의 실례를 들었지만 이는 문단에서 점점 더 농후한 경향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금 전 홍명교 님께서 김연수 소설을 일례로 들었지만, 사실 이런 회고적인 소설들은 지난 시절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정리해버리곤 합니다. 이것은 점점 더 생산적인 억압기제, '초자아'를 상실해 가고 있는 인문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문학적 실천들은, 부대장(초자아)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가장 내밀한 소소한 정시사적 갈등들까지 화장실 벽에 적어 내려가는 쾌락에 의해 지탱됩니다. 물론 과거에도 그리고 외국에도 회고적인 소설이나 실존적 방황을 담은 소설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경우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어떤 긍정적 억압기제가 있었고, 톨스토이에게는 '신'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억압기제 없이 어떤 시대를 정리하고 무엇이든 '말하고자' 하는 결단은, 그것이 아무리 위로와 공감의 제스처로 수행된 것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어떤 '악의惡意'로 귀결되고 맙니다. 제가 라캉 입문서를 읽으면서, 프로이트라면 항문기적 퇴행이라고 불렀을만한, 일종의 악의어린 즐거움을 느꼈듯 말입니다. 이것은 제가 일전에 '절대 패배하지 않는 자의식'이라고 부르고자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콤플렉스'의 또 다른 기능을 드러냅니다. 사실 소통에 관해서라면 누구나 서로 통하지 않는 부분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콤플렉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모르는 체' 하면서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고 공동체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할 때, 이것은 모호한 공격성으로 흔히 전도되곤 합니다. 이것은 후기-자본주의의 우주 속에서 초자아가 억압적인 기능을 상실하는 대신, '즐겨라!'라는 외설적인 명령으로 변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자신의 개성을(사실은 일종의 공격성을) 어디서나 표출하고 증명할 것을 은밀하게 요구받곤 합니다. 이러한 외설적 요구는 심지어 궁 안에도 만연해 있는 것이지요. '콤플렉스'의 기본 기능은 바로 이러한 공격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궁의 추억을 풍성하게 만들었듯이, 인문학을 그토록 풍성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앞서 말했듯, 저는 후-콤플렉스의 문학 지평에서는 일종의 악의를 은폐한 회고담이 만연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또 다른, 그리고 이보다 더 승화된 '악의'가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프로이트는 어디선가 '문명'은 바로 이러한 (초자아의 의지로 실행되는) 악의를 통해서만 유지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학문에 관해서도 참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사실 인문학이든 혹은 다른 영역이든, 학문적 천재들은 바로 이러한 '콤플렉스'(악의)의 화신으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이라든지 '괴델'과 같은 분명히 '외로운' 천재 유형들에게 있어, 그들의 삶의 문제는 결코 '외로움'이나 삶의 비루한 단절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행적을 본다면, 흔히 통속화된 정신분석에서 말하듯이, 이들에게 수학이론의 정합성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좌절된 성욕의 만회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설사 그들이 필사적으로 천착했던 학문적 문제들이 거의 병적 '자기처벌'로까지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학문적 문제의식 자체는 그들의 리비도적 근거와 무관했던 것입니다. 사실 정신분석이 범성욕주의라는 비판은 부당한 것인데, 그것이 말하는 '콤플렉스(억압)'는 바로 어떤 행동의 기반이 되는 리비도(성욕)과 그것이 실행하는 실제 행동 사이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분명 어떤 삶의 문제가 존재했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단연코 '학문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독립성'이 존재했을 때, 그들의 삶은 비로소 풍요롭고 생산적인 것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 때나마 '인문학' 혹은 보다 협소하게 말해서, 철학, 역사학, 정치경제학, 등속에 이러한 생산성과 풍요가 확실히 존재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문학은 바로 그러한 생산성과 무관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는 콤플렉스의 상실이라고 간단히 진단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콤플렉스의 가능성이 오늘날 상실되었다는 매우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프로이트의 생전과 다른,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후기-자본주의적 소비사회 속에서 비로소 '참'인 것입니다. 만약 정신분석이 정치경제학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조건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나르시즘적 공격성과 악의를 승화시킬 수 있는 어떤 집단적 기제를 상실했다면, 혹은 더 이상 '콤플렉스'를 통해서, 문명의 결속을 혹은 학문적 연합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면, 앞으로 이러한 '결속'은 가능한지, 혹은 다른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가 앞으로의 저의 '탐구' 방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탐구는 두 가지 방향의 갈림길로 나아갑니다. 첫째는, 또 다른 '콤플렉스' 혹은 프로이트가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발견한 것과 다른 방향의 콤플렉스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애초에 콤플렉스를 매개하지 않은, 학문적-비평적 연합의 원리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바디우주의'라고 부르는 방향이기도 합니다. 가령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어떤 주체가 그의 운명을 결단 내려야만 하는 거대하고 피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심적 외상이나 콤플렉스 자체가 '무의미' 해지는 상황을 주목합니다. 가령 이것은 어떤 과거사나 내밀한 상처와 추억을 간직한 개인을 구성하는 모든 실체적 내용들이 쓸모 없어지며, 단순히 '예스'냐 '노'냐를 결정 내려야만 하는 순수한 주체성으로 환원되어버리는 굴욕적 경험을 내포합니다. 그는 이를 진리-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제 내기는 과연 '우리'들이 어떤 콤플렉스나 궁극적으로 어떤 세대 담론에도 의지하지 않고서도, 어떤 상황에 보편적인 '진리'를 분절해내는 수고로운 작업이 가능할 수 있느냐에 걸려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사도 바울을 언급했던 것 역시도, 그가 제시했던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순수 긍정적인 원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콤플렉스' 없는 공동체를 향한 기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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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양동훈 
  어렵네요. 사실 정확히 말하면 글이 어려운게 아니고 그걸 받아들이는 제 머리가 어렵게 느끼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죠. 다만 궁금한 것은, 

과연 '우리'들이 어떤 콤플렉스나 궁극적으로 어떤 세대 담론에도 의지하지 않고서도, 어떤 상황에 보편적인 '진리'를 분절해내는 수고로운 작업이 가능할 수 있느냐에 걸려 있습니다 

라는 문구를 바라보는 원익님의 시선은 그것이 '가능하다,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나아가려 한다' 라는 시선인지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솔직히 말해서 반쯤은 멍하고 반쯤은 끄덕끄덕... 낄낄낄낄 2009-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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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박원익 
  글쎄요, 저희들이 경험하는 시간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레밍의 시간이고 둘째는 헤겔의 시간입니다. 알다시피 레밍이 모종의 사건에 개입하기 전에 그가 헤겔을 독해해야만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아이러니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책마을에서 사유하고 쓸 수 있는, 저희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헤겔의 시간 뿐이지 않은가 싶네요. 사유를 공유하고 동지들을 규합하고 세미나를 조직하고 궁극적으로 자신들만의 담론들을 만들어내고 출판하는 길고 지루한 시간 말입니다. 200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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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진수유 
  음, 컴플렉스의 상정으로써 다소간의 암묵적 합의를 허용한 후 그 '억압' 가운데 행해지던 기존의 인문학이 최근에는 컴플렉스를 상실함으로써 다른 방식의 '악의'를 방출하고 있다.. 원익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저도 원익님이 가진 언어적 도구들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그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다른 분과학문들과 분절되어 보이는 인문학만의 문제는 어쩌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학문하는 태도 전반에 대한 본질적인 사유까지 포함하는 것이 크게 봐서 인문학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 같아요. 

일단 쉽게는 근대적인 모든 시도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아쉬움'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자본주의 소비사회라는 오늘날의 거대한 특징이 우리 모두를 압도적이리만큼 지배하고 있다는 점도 물론 한 몫 하겠습니다. 혹시 컴플렉스의 상실은 현재의 물질주의적 세태(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가 우리의 정신이나 내면, 영혼을 몽땅 교살시켰기 때문에 컴플렉스를 걸어두고 자시고 할 여유조차 없어진 우리의 현실 그 자체가 아닐까요. 그러한 여유를 동일하게 잃어버린 소위 우리의 인문학적 선생들(언급하신) 또한 일종의 패배감 속에서 기존에 자신들이 자라고 성장해 온 인문학을 창조적으로 확대재생산할 의지를 상실한 건 아닐지. 이러한 상황속에서 원익님의 '탐구'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익님이 제시하신 두 가지의 방향성 중에서 후자 쪽에 좀 더 관심이 가는군요. 아무래도 현재의 상황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만한 다른 방향의 컴플렉스의 가능성은 많이 힘든 작업일 것 같습니다. 알랭 바디우에 대해 예찬님이 올려주신 글만 읽어봤었는데, 이번 기회로 좀 더 관심이 가는 군요. 문제는 제 자신과 저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이겠죠. 히히.